○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 석방이 화근 돼
안중근(安重根)은 의병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처음으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펼쳤다. 창의회(彰義會) 의병부대는 육로와 해로 두 방향으로 나누어 국내에 진입하기로 전략을 짰다. 해로를 택한 500여명의 의병들은 두만강 하구 녹둔(鹿屯)에서 중국 선편으로 청진과 성진 사이의 해안으로 상륙하고, 안중근이 소속된 300여명은 지신허에서 출발해 두만강을 건너 회령에서 무산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최종 집결지는 갑산과 무산이었다. 창의회의 의병들은 갑산과 무산을 차례로 치고 회령을 점령한 다음 두만강 상류 지역을 회복하여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의 거점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안중근은 의병으로 출전하면서 적은 부대로 잘 훈련된 일본군 정예부대와 대적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승패보다는 당위에서 총을 든 것이었다. 박은식(朴殷植)은 “만일 성패(成敗ː이기고 지는 것)를 가지고 의병을 평가한다면, 의병의 본질을 천박하게 이해하는 것”이라고《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역설했다. 안중근과 창의회 의병부대에 참여한 병사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안중근의 의병부대는 사명감에 불탔다. 그리고 용감했다. 안중근의 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삼리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하여 수십명의 적군을 사살하고 수비대 진지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곧 두만강 국경수비를 맡고 있던 동부수비대로부터 역습을 받아 폭우가 쏟아지는 악천후 속에서 4~5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과는 의병부대의 궤멸적인 패전(敗戰)이었다. 안중근은《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그 뒤 일본 병정들이 습격하므로 충돌하기 4, 5시간 동안 날은 저물고 폭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장졸들이 이리저리 분산하여 얼마나 죽고 살았는지 조차도 진단하기 어려웠다. 형세가 어찌할 길이 없어 수십 명과 함께 숲속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 이튿날 60~70명이 서로 만나 그 동안의 사연을 물었더니 각각 대를 나누어 흩어져 갔다는 것이다.’
사전에 첩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척후병 4명을 파견했으나 의병부대에 사로잡혀 처단되었다. 창의회 의병부대가 1개 사단이 넘는 일본군의 국경수비망을 뚫고 진격해 어느 정도의 전과를 올린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때 안중근 부대는 일본 군인과 상인 몇 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안중근은 사로잡은 일본 군인과 상인들을 이렇게 꾸짖었다.
“너희 나라인 일본은 러시아와의 싸움을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켜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너희는 그 뒤 오늘날 이렇게 조선 백성들과 싸우고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으니 이것을 어찌 평화와 독립을 위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포로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것은 우리의 본심이 아닙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감정인데, 우리가 만리타향 싸움터에서 참혹하게 주인 없는 원혼이 되어버리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천황(天皇) 폐하(陛下)의 성지(聖志)를 받들지 않고 제 마음대로 권세를 주물러 일본과 한국의 귀한 생명을 무수히 죽이고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데만 힘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중근은 부드러운 말씨로 포로들을 다독거렸다.
“내가 너희들의 말을 들으니 과연 충의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희들을 살려 보내줄 것이니 돌아가거든 그런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쓸어버리도록 하여라. 만일 또 그 같은 간사한 무리들이 까닭 없이 전쟁을 일으켜 동족을 괴롭히고,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자 하는 의견을 제시하면 그런 자를 쫓아가 제거해버려라. 그렇게만 하면 그런 자가 명멸이 되기 전에 동양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안중근은 포로들을 타이르고 만국공법(萬國公法)에 따라 이들을 석방했다. 포로들이 무기를 가져가지 않으면 처벌받는다고 애원해 그들이 지참했던 무기도 돌려주었다. 안중근의 행위는 어찌 보면 죽고 죽이는 처참한 전장(戰場)에서의 치기어린 휴머니즘이기도 했고, 달리 생각하면 지극한 인류애의 발로이기도 했다.
안중근의 포로석방 조치는 의병항쟁이 개인적인 감정이나 원한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의 인도의 법칙에 바탕을 두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또 안중근의 인도주의(人道主義)적이고 종교적인 일면이기도 했다. 그는 조국독립을 위해 의병행쟁을 하면서도 인명(人命)을 존중하는 휴머니즘을 보여주었다. 만국공법은 포로 사살을 금하고 있었다. 전투 중의 사살과 포로 사살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서로 간에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적병을 살려서 돌려보낸 안중근에 대해 의병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적군은 우리 의병을 잡기만 하면 참혹하게 죽인다. 우리도 저놈들을 죽일 목적으로 싸우고 있는데, 잡은 놈들을 모두 보내준다면 우리의 목적은 무엇이냐?” 라는 ‘이유 있는’ 항변이었다. 여기에 안중근의 답변은 차라리 철인(哲人)의 모습이다.
“그렇지 않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적들이 그렇게 폭행을 자행하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다 함께 분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마저 저들과 같은 야만적인 행동을 해야만 하겠는가? 또 그대들은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죽인 다음에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는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모두 이길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약하고 적은 강하니 악전고투 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충성된 행동과 의로운 거사로 이토의 포악한 정략을 성토하여 열강의 호응을 얻어야 우리의 한을 풀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에 대적한다는 것이다. 그대들은 더 이상 여러 말 하지 말아 주기 바란다.”
안중근의 간절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들의 불만이 분분했고, 장교 중에는 부대를 이끌고 멀리 떠나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안중근은 만국공법(萬國公法)을 이야기하며 거듭 동료들을 말리고, “천주님을 믿어 영생을 구원받도록” 하는 종교를 가지고 설득하기도 했다.
만국공법은 한말에 지식인 사회에 널리 전해져서 정부는 물론 개화파, 위정척사파를 가리지 않고 수용되었다. 특히 정부가 러일전쟁 직전에 대외중립을 선언하면서 만국공법은 식자들 사이에서 마치 ‘구원의 손길’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안중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제가 한국을 본격적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히기 시작하면서 만국공법에 대한 식자들의 인식은 크게 바뀌었다. 신채호(申采浩)는 “20세기의 이 세계는 군사를 숭상하는 세계다. 강한 군사가 향하는 곳에 정의가 힘을 못 쓰고 대포가 이르는 곳에 공법이 쓸 데가 없어서 오직 강력만 있고 강권만 있을 뿐이다”라며 만국공법의 무용성과 강권성을 비판했다.
안중근은 일본군 포로 두명을 석방하면서 만국공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당시 의병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용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측면에서 안중근은 현실과는 부합되지 않지만, 대단히 선각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안중근은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뒤 이번에 감행한 거사가 개인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의병으로서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된 것이므로 만국공법에 따라 자신의 신병을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광무 3년 한·청 통상조약에 의해 한국인은 청나라에서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고 또 청국은 한국에서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한국인이 해외에서 죄를 범하면 아무런 명문(明文)이 없으므로 무죄라고 한 것은 매우 부당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병으로서 한 것이며, 따라서 나는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라고 믿고 있으므로 생각건대 나를 만국공법에 의해 처벌해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안중근의 일본 포로 석방은 예상 외로 의병부대 내에 심각한 파장을 몰고 왔다. 우영장 엄인섭이 이끌었던 의병부대는 러시아로 돌아가고, 안중근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중근과 그의 잔류부대는 산속에서 4~5일 동안 헤매며 밥 한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발에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야 했다. 풀뿌리를 캐먹고 담요를 찢어 발을 싸매면서 피신과 교전을 거듭했다. 풀어준 일본군이 의병의 위치를 알려주면서 기습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피해가 더 컸다.
‘이 때 안중근은 일본군과 산발적인 교전을 하면서 산간 밀림의 폭우 속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흩어진 병사를 모았으나 60~7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전투로 지쳐있었고 군기도 서지 않았다. 이때 그는 의병의 현실을 보고서 창자가 끊어지고 간담이 찢어지는 것 같이 괴로워했다. 이후 안중근은 의병을 재정비했으나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또 다시 대오는 흩어지고 말았다. 이후 그는 고생 끝에 손.김 두 부하를 만났다. 이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일본군과 더불어 한바탕 장쾌하게 싸움으로써 대한국인의 의무를 다한 다음에 죽으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며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참담한 상황이었다. 안중근은 며칠째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살아남은 병졸들에게 물었다.
‘그들과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를 의논하였으나 네 사람의 의견이 모두 달랐다. 한 사람은 목숨이 있을 때까지는 살아야 한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자살해 버리고 싶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차라리 일본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겠다고 하였다.’
이 때 안중근은 한 편의 즉흥시를 지어 동지들을 격려하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男兒有志出洋外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事不入謨難處身 큰 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望須同胞警流血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莫作世間無義神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말자.’
안중근은 한 달 반이 지난 7월 말에 우덕순, 갈화춘 등과 더불어 12일 동안 하루 두끼만 요기하면서 구사일생으로 연추 본거지로 귀환했다. 피골이 상접하여 친구들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출전할 때 입었던 옷은 넝마가 되어 있었고 이가 득실거렸다. 하지만 정작 안중근을 가슴 아프게 한 것은 동포들의 냉대였다.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해서 의병부대가 기습공격을 받게 되고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것이다. 패배의 모든 책임은 안중근에게 떠넘겨졌다. 패전지장(敗戰之將)의 운명이 된 것이다. 심지어 블라디보스토크의 거부이자 의병조직에 많은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최재형조차 지원을 끊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의 다수 한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안중근의 의병항쟁을 크게 환영했고 환영대회에 참석해 줄 것을 바랐다. 그러나 안중근은 참석하지 않았다. “패전해 돌아온 사람이 무슨 면목으로 여러분의 환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사양한 것이다. 하지만 동포들은 “지고 이기는 것은 전쟁터에서 흔히 있는 일이니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시오. 더구나 그렇게 위험한 곳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어찌 환영하지 않을 수 있겠소?” 라며 오히려 안중근을 격려했다.
이곳 동포들의 격려에 힘을 얻은 안중근은 이후 하바로프스크 방면으로 갔다.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동포들을 만나 다시 의병 조직을 준비했다. 그리고 동포들에 대한 교육사업을 벌이며 군자금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날 흉악하게 생긴 괴한 6~7명에게 붙잡혀 산속의 외딴집으로 끌려갔다. 일진회(一進會) 무리들이 본국에서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 저지른 횡포였다. 이들은 의병을 일으킨 것을 문제 삼았다. 안중근은 지략을 이용해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친구 집에서 다친 상처를 치료하면서 그 해 겨울을 하바로프스크에서 보냈다.
그렇다고 안중근이 눈 덮인 하바로프스크에서 마냥 세월이나 축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안창호(安昌浩) 등이 미주에서 조직한 공립협회(共立協會)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지회를 설치할 때 우덕순과 함께 참여했고, 1909년 1월경에는 박춘성 등 3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연추 지역으로 진격하는 등 산발적이지만, 여전히 의병항쟁을 전개했다. 또한 여기저기 사람을 풀어 동지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