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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실체

대체로 보통 사람들이 처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일루미나티와 같은 조직이 아니다. 프랑스혁명과 같은 사건이다. 가령 근래 태국사태가 일어났다. 이때 사람들은 태국사태만 알 따름이지, 태국사태에서 대립하는 두 정치조직에 대해서는 모른다. 이때 만일 태국사태의 배후에 국제유태자본이 있다, 라고 하면 음모론이 성립이 되면서 사람들 관심을 끌게 되는 게다.


그처럼 일루미나티 음모론은 프랑스혁명의 원인 탐구에서 등장한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프랑스혁명과 같은 사안을 단순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으니 인기가 있는 게다. 해서, 프랑스혁명과 일루미나티에 주목한 최초의 인물들 중 하나로 보통 아베 바루엘이 등장한다. 이유는 그가 만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코뱅주의의 역사에 대한 회고록>에서 프랑스 혁명에는 음모가 있으며, 음모의 배후로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유태인 등을 지목했다. 헌데, 이는 1806년 시모니니라는 이름의 한 군대 장교가 예수회 수사 아베 바루엘(Abbe Baruel)에게 쓴 추측 편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예서, 조제프 푸세(Fouche)를 의심하는 것은 정말로 정당한 추리법인 게다. 푸세는 나폴레옹 시대의 국가정보원장으로서 바뵈프와 같은 순수한 봉기주의자까지 이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물론 봐뵈프는 자신이 푸세에게 이용당한 줄 몰랐다고 한다. 오늘날 국제유태자본이 봉기주의자들을 꼬드기는 수법은 폴란드 연대노조의 실질 주모자였던 브레진스키에 의해 많이 폭로된 바 있다. 사실 음모론을 접하는 이들 상당수는 프랑스혁명에 대해 잘 모른다. 해서, 음모론이 먹히는 게다.


하면, 왜 푸세 국가정보원장은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유태인에게 혐의를 전가했던 것일까. 역사란 빛과 어둠이 있는 법이다. 프랑스혁명이 왕정타도라는 세계사적 변화를 가져왔다면, 프랑스혁명의 이면에는 반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이들이 희생당하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 게다. 아무튼 엄혹했던 프랑스혁명 때에도 살아남은 푸세이기에 푸세의 능수능란한 정책에 쟈코뱅이든, 일루미나티이든, 프리메이슨이든, 그 무엇이든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푸세, 그 자신이 수도원에서 공부한 신학생 출신임에도 프랑스 혁명 때 누구보다 앞장섰던 쟈코뱅이었다. 또한 카톨릭 교회 파괴와 양민 학살에 나섰던 리옹의 학살자였던 게다. 프랑스혁명은 푸세를 중심으로 다시 써야 하는지 모르는 게다. 푸세는 머리가 비상한 자이다. 동료들이 연이어 반혁명 혐의로 길로틴으로 끌려갈 때 머리를 써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해서, 역시 쟈코뱅이라고 사형당할 뻔했다가 살아난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자 역시 전직 쟈코뱅이었던 푸세와 찰떡궁합이 된다. 쟈코뱅이었던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자 국가정보원장으로 푸세가 임명된다. 당대 쟈코뱅은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이 되었다. 말하자면, 80년대 누구나 운동권이었듯이 보였지만, 소련이 망하는 90년대가 되자 너, 아직도 운동권이니? 하며 화석 취급을 하던 것과 유사한 게다. 대세가 아니었던 게다. 헌데, 그나마 간신히 존립하던 쟈코뱅이 나폴레옹의 적이 되었다. 씨가 말랐다. 누구보다 쟈코뱅을 잘 알았던 푸세가 있었기에. 푸세는 오히려 자코뱅과 같은 비밀조직을 권력유지의 방편으로 이용하는 천재적인 능력을 보여준 게다. 이름만 남아 있는 유명무실한 조직에 자신의 정적을 몽땅 우겨넣어 한 번에 처리하는 것. 해서, 이러면 일루미나티 음모론은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끝인가. 아니다.


만만치 않은 인물이 있다. 자연과학자 존 로비슨(John Robison)이다. 에딘버그 대학의 교수이며, 1783년에 에딘버그 상류사회의 총서기관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로비슨이 1805년 죽었을 때,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는 로비슨을 "가장 명석한 두뇌와 내가 알고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과학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허나, 그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존 로비슨은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이 된다.


첫째, 그는 대륙 일루미나티의 초청을 받아 일루미나티와 접촉하였고, 참가를 요청받았던 프리메이슨 인물이다. 재미있는 것은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를 비판하는 글에서 로비슨 말만 인용하고, 그가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사실을 쏙 뺀다~! 아무튼 로비슨은 고심 끝에 거절했다. 그가 거절한 이유는 무엇일까.


1797년에 로비슨은 "훌륭한 전거들로부터 수집한, 프리메이슨, 일루미나이티, 그리고 독서회의 비밀 모임이 관리한, 유럽의 모든 종교와 정부들을 대항하는 음모의 증거들"을 내놓았다.


 "그들은 작가 부대를 고용하였다; 그들은 부지런히 모든 가정과 모든 오두막 안으로 그들의 저서들을 밀어 넣었다. 그런 기록물들은 사람들의 관능적인 욕구를 불 지르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판단을 왜곡시키기 위해서 평등하게 보급되었다. 그들은 학교들, 특히 저학년들을 사로잡으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순회 도서실과 독서회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그들은 경제학자들의 이름을 빌려, 상업, 공업, 농업, 재정 등 을 증진시키기 위한 계획에 전념하는 체했다. 그리고 때때로 그러한 주제들에 대해 유명한 습작들을 출판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계획은 그리스도교와 모든 종교들을 파괴하고, 정부의 완전한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부패하고 불경스런 책들을 꾸미는 작가들을 고용하였다 - 이들은 독서회에서 기안되고, 목적에 적합해질 때까지 교정되었다. 많은 책들이 보기 좋게 출판되었고, 판매용으로; 그리고 더 많은 책들은 가능한 한 싼 가격으로 찍어서, 공짜로 나눠주거나 혹은 헐값으로 행상인이나 소매상인들에게, 비밀리에 도시와 마을 전역에 배포하라는 명령과 함께 나눠주었다."


예서 보듯, 로비슨은 프리메이슨인 동시에 스코틀랜드 개신교도였다. 그가 일루미나티를 거부한 것은 종교적인 거부감 때문으로 보인다.


둘째, 로비슨이 중요한 이유는 프리메이슨이자 아편노예농장주였던 근대 파라오, 조지 워싱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798년에  스나이더(G. W. Snyder)가 로비슨의 책을 워싱톤에게 보냈고, 워싱톤의 답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루미나티가 참으로 문제가 많다고 쓴 셈인데, 이에 대해 조지 워싱턴의 답변이란? 쟈코뱅과 일루미나티에 대해 미국에서 자신보다 그들 이념에 만족하는 이가 없을 것이라면서 매우 긍정한다고 답장을 쓴 게다^^!  역시 프리메이슨이자 아편노예농장주인 토머스 제퍼슨도 일루미나티를 찬양하고 나선 게다. 헌데, 이런 토머스 제퍼슨이 중앙은행에 비판적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프리메이슨이었던 앤드류 잭슨이 중앙은행에 반대한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오히려 국제유태자본이 프리메이슨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반메이슨 운동을 지지한 것이라고 의심해야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는가^^!


잠깐 프리메이슨에 대해 검토하자. 근대 이전의 프리메이슨 운운은 상상력의 소산일 뿐, 중요하지 않다. 프리메이슨 운동은 17세기~18세기에 부르주아 계급 의 비밀결사 인터내셔널이었다. 해서, 프리메이슨 영향력이 어찌나 큰지 나폴레옹 3세도  이탈리아에서는 프리메이슨 조직을 응용한 비밀결사 카르보나리에 가입하기도 했던 것이다. 동시에 그만큼 프리메이슨이란 지역마다 제 멋대로여서 프랑스혁명만 봐도 프리메이슨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조짐이 별로 없고 극장에서 불이 나자 저마다 살려고 아귀다툼하는 수준이었던 게다. 상황이 이렇지만, 20세기에 다시 프리메이슨 운운하는 것은 움베르토 에코의‘푸코의 추’를 보면 되는 게다. 다만 일루미나티에 비해 약발이 떨어진다. 프리메이슨적 요구 수준은 이미 오늘날 세계에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일루미나티 조직을 보자. 일루미나티는 1776년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주도하여 다섯 명 회원으로 출범한 연구회 조직이었다. 헌데, 1877년 바이에른의 지도자였던 카를 테오도르가 일루미나티 등을 비롯한 모든 비밀스럽게 보이는 조직을 금지시킨다. 이러한 조치는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하나는 초기에 일루미나티와 같은 조직 성장을 어렵게 한다. 다른 하나는 온건한 성향보다 상대적으로 강경 성향의 조직들이 급신장을 하게 된다. 1780년대에 이르러 조직원은 삼사천 명으로 불어난다. 여기에 조직 확대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죽음이다.


모차르트를 예로 들자.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가는 당시 왕족이나 귀족의 도움이 없으면 생계유지가 힘들었다. 이런 모차르트에게 경제적 도움을 준 것이 프리메이슨 동료였다. 해서,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이 된 것이다. 하면, 모차르트뿐인가. 아니다. 상당수 귀족, 왕족도 프리메이슨이었다. 특히 몰락한 귀족들일수록 인생은 한방이란 경험칙에 의해 열성적인 프리메이슨이 되었던 게다. 왜? 그들은 교황의 권력에 맞서서 국왕 권력을 강화시키고 그 공로로 출세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교황 대 국왕 대립은 중세시대 이래 특히 이태리 주요 도시들을 장악한 귀족들 간에 교황파 대 반교황파로 갈라져서 오백년 이상 투쟁한 데에 기인한 것이다. 이것이 근대로 접어들어 헨리8세로 인해 영국에서 영국 국교회가 등장하였고, 독일로 파급되어 당대 유럽 최고 권력 중 하나였던 합스부르크왕가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영향력이 막강했던 합스부르크 왕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황제 시절에는 프리메이슨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으므로 프리메이슨을 억압했다. 반면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보듯 카리스마가 부족한 만큼 영향력이 축소된 요셉 2세에서는 프리메이슨을 동맹세력으로서 정치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프리메이슨을 국왕 편으로 만들어서 교황과의 대립에서 써먹겠다는 게다. 해서, 프리메이슨을 자선단체로 간주했다. 이러한 조치는 즉각 인근 지역인 뮌헨으로 이어지고, 일루미나티는 크게 고무된 것이다. 이처럼 당대 프리메이슨은 자산계급을 주축으로 출세에 목마른 몰락한 귀족과 지식인들의 한마당이었던 게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어용 시민단체인 게다.


일각에서는 이 조직 확장을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의 신비주의 능력으로 설명하는데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부 독일에서 큰 영향력이 있었던 합스부르크 황제께서 프리메이슨과 동맹을 맺어 심지어 황제가 프리메이슨 단원이라는 소문까지 퍼진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에른 지역에서 여전히 금기시한다면 프리메이슨 조직 중 가장 선명한 조직이 우세해지는 게다. 명분을 휘어잡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가령 지난 팔십 년대 운동권 노선 투쟁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금방 눈치를 챌 것이다. 또한 노동운동을 하는 이들이라면 5분 안에 알 것이다. 바이스하우프트의 일루미나티가 조직적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예수회 학교를 다녀 예수회에 정통했다는 점이다. 해서, 그는 예수회의 조직론만을 따로 떼어내어 활용했다. 다른 하나는 당대 교황이 예수회를 금지시킨 게다. 금지시킨다고 예수회 소속 인사가 당장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때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막강한 조직력을 보여주었던 조직이자 군대조직이 금지된다? 하면, 예수회에 소속했던 사람들은 어디로?


바이스하우프트가 주도하는 일루미나티의 강령 중 종교 비판이 주력으로 보인다. 이름도 처음에는‘완성자 추구’처럼 오늘날 ‘영성 치유’를 내세우는 정도였던 것이‘일루미나티’로 변모한 게다. 왜? 당대 예수회가 남미에서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그만큼 각종 종교재판 등으로 급진 과격 행동으로 말썽을 부려서 교황으로부터 금지 처분을 받아서 안티-히어로 신세였다.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바로 이러한 ‘피해자 중심주의’를 적극 써먹은 게다. (칼뱅도 만만치 않다는 점 말씀드린다. 로욜라나 칼뱅 모두 종교개혁 시기에서 공과를 따져볼만하다. 긍정적인 면만, 혹은 부정적인 면만 보면 곤란한 게다.) 아무튼 당대 예수회가 그만큼 잘 나가니 ‘묻어가기’인 게다.


이때 바이스하우프트가 일루미나티 운운하니 예수회를 격분시키게 된 게다. 왜? 당대 예수회 측에서는 일루미나티를 짝퉁으로 취급한 게다. 말하자면, 가수 박상민이 뜨니까 박상민 필로 돈 좀 벌려고 나이트에서 박상민 흉내 내며 돈을 번 파렴치한 자가 바이스하우프트인 게다. 겉으로 자신들과 유사한 듯 보이면서 내용적으로는 정반대의 이념으로 무장한 일루미나티인데 예수회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으니 예수회가 일루미나티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게다.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죽고, 요셉 2세가 등극하자 사태는 크게 바뀐다. 일루미나티 조직이 급신장한다. 하노버 출신의 몰락한 귀족 가문이자, 매너남이자 당대 유럽의 대표 마당발, 크니게 남작이 1780년에 일루미나티에 가입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섯 명에서 시작된 일루미나티는 1780년대에 이르자 멤버들의 숫자는 삼사천 명에 이르렀다. 모두 당대 엘리트였다. 여기에 순식간에 조직력을 확장시킨 이가 있으니 크니게였다.


인간교제술 효과적인 237가지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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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마당발인 게다. 바이스하우프트처럼 책이나 들입다 파는 관념적 족속은 죽었다 깨어나도 정치를 모르는 게다. 냉정하자. 정치권에서 정책위원장 따위 자리를 맡고 있다? 무시하라. 현실이다. 보수당이건, 친일 중도이건, 진보당이건 정책위원장이란 허울 좋은 자리일 뿐이다. 트로츠키와 스탈린 중 누가 레닌의 다음 권력을 맡았는가. 조직을 책임지는 직책이라면 그 직책이 아무리 하위직일지라도 의미가 있다. 비유하자. 군대에서 똥별이라고 있다. 별이라도 같은 별이 아니라는 게다. 육군본부 같은 데서 합참의장을 보좌하는 참모진들 대체로 장군들이다. 별이다. 하지만 직속부하가 없다. 위기상황 시에 별 볼 일이 없다는 것은 한국사에서 잘 보여준 바다. 중요한 것은 라인이다. 김일성의 갑산파다. 조직이다. 고대 손자병법 이래로 내려온 철칙이 있다. 군인은 직속상관에 충성한다. 왕이 와도 불심검문에 응해야 한다는 규칙은 교묘한 법칙인 게다. 자, 오늘날 이것을 대학에 적용하자. 누가 네 놈을 겸임교수 시켜주었는가. 이것이 국제유태자본의 권능이다.


당대 영국과 유럽에서는 수많은 프리메이슨 조직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이념 성향은 지역적으로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었다. 지역 현안이 모두 다르므로. 또한 이들 조직끼리는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쟁했다. 이때, 마당발로 바이스하우프트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크니게가 대륙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 조직 통합을 성사시킨다. 이에 당근 크니게가 지분을 요구하는데 쪼잔한 바이스하우프트가 들어주겠는가. 크니게 스타일과 바이스하우프트 스타일이 있는 게다. 열 받은 크니게는 탈퇴하는 것은 물론 당국에 몽땅 분다. 마침 프랑크푸르트에서 파리로 가던 연락책이 벼락을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루미나티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서 조직은 해체된다. 이것이 끝인가. 아니다.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사형당한 것이 아니다. 그는 1830년까지 장수하고 죽었다. 그가 생전에 글을 썼는데, 일루미나티에 관련해서는 1795년까지가 전부이다. 인드라가 추론한다면, 1795년 이후로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현실에  좌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까지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미완의 혁명에 안달을 할 수도 있지만, 그 이후는 어떤 심경 변화가 온 것으로 추정된다.


하면, 당대 국제정세는 어떠했나. 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 실각하고, 다음날 파리코뮌의 구성원들과 함께 처형된다. 1795년 나폴레옹은 죠세핀과 만났고, 파리 왕당파 반란을 무찌르고 주목받는 장군이 된다. 1792년에 프랑스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영국으로 도피해온 네덜란드왕은 동인도회사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영국왕에게 위임하는 대신 이후 왕정복고 약속과 약간의 지분을 따낸다. 1796년, 드디어 로스차일드가 영국 주식시장에 주식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부데루스의 지도를 받아야만 하는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당대 정세를 파악한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것에 대해 좌절한 듯싶다. 그의 강령에 비한다면 프랑스 혁명 강령은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존 로빈스이 어퍼컷을 날린다. 문제가 많은 조직이라고 말이다.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한 일이 별로 없는데, 그저 고타에서 글만 열심히 썼을 뿐인데, 졸지에 프랑스 혁명의 배후가 된 게다. 정말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배후인가? 아니면 국제유태자본인가? 예서, 프리메이슨이었던 존 로비슨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과연 독단으로 책을 출판한 것일까. 아니면 영국 왕, 동인도회사, 국제유태자본의 지시에 의한 것일까. 드러난 바가 없으므로 그의 독단이 현재 유력한 가설이다. 아무튼 당대 영국은 이래저래 프랑스 혁명과 유럽에서의 전쟁이 좋았다. 영국 토리당파와 젠트리, 영주들은 전쟁으로 곡물을 계속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어서 떼돈을 번다. 영국 토리당파와 금융 자본가들도 네덜란드가 함락당하는 아픔이 있었으나 그로 인해 동인도회사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양도받았다. 이제 유럽 전쟁과 프랑스 혁명에 대한 책임 전가만 하면 완전범죄인 게다?


바이스하우프트의 일루미나티가 조직적으로 완전히 와해되었을 시기로 인드라는 1814년으로 보고자 한다. 이 시기에 예수회는 교황의 허락을 받아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예서, 예수회와 일루미나티의 관련성을 짚고 넘어간다. 예수회는 카톨릭을 위한 전위부대요, 당대 혁명 정세에 조응하는 준군사조직이었다. 해서, 내건 명분도 이교도들에 대한 개종과 교권 수호다.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독일은 개신교 천국이었다. 그런데 예수회 활약 덕분에 독일에서 카톨릭이 재건되었던 게다. 17세기 초반 예수회 단과대가 100개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 예다. 이런 까닭에 교황이 예수회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이다. 또한 프랑스에서도 예수회가 활약하여 카톨릭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


헌데, 이런 예수회가 프랑스혁명의 배후다? 프랑스혁명 당시 쟈코뱅들이 카톨릭 교회를 얼마나 많이 파괴하였는가. 대부분이 카톨릭 신자였던 양민 학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현데, 그 아무리 예수회가 교황에 의해 금지되었다고 해도 자신 신앙의 근거지를 파괴할 수는 없는 게다. 가령 로욜라는 자신의 특이한 영성 훈련법으로 인해 숱하게 종교재판을 받아야했고, 고문까지 당했다. 헌데도, 신앙을 포기하기는커녕 더더욱 더 교황에게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려고 애를 썼던 게다. 그 결실이 예수회인 게다. 게다가 교황이 예수회를 금지시킨 것도, 재건시킨 것도 정치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하도 주위에서 예수회 관련 상소가 나온 데 따른 고육지책이었던 게다. 이런 간단한 이치를 예수회 인사들이 몰랐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모순인 게다. 역사적으로도 모순이다. 로욜라는 당대 세계 최강이었던 스페인을 기반으로 했다. 만일 근대사 모든 사안이 예수회를 주축으로 한 프리메이슨에 의한 것이라면 왜 1588년 근대사를 뒤바꾼 아르마다 무적함대가 패배한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유태자본이 뒷받침하여 발발한 청교도 혁명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딜레마에 빠진 예수회 음모론을 구출한 것은 개종 유태인론인 게다. 로욜라나 바이스하우프트 모두 개종 유태인인 게다. 왜 개종 유태인이어야 하는가. 무엇보다 프랑스혁명과 예수회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다. 스페인 스파라디 유태인들은 추방령을 피하기 위해 상당수가 개종했다. 이들을 인드라는 콘베르소 유태인으로 부른다. 로욜라는 카톨릭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카톨릭을 멸망시키기 위해 숨어들어간 뻐꾸기인 게다. 하면, 프랑스혁명은 물론 청교도 혁명 등이 모두 설명된다. 바이스하우프트의 경우 변호사 집안인데 당대는 유태인이 변호사 등을 할 수 없도록 직업의 제한을 두고 있었기에 개종 유태인론으로 극복 가능하다. 앞선 예수회 음모론보다 한층 세련된 음모론인 게다. 하면, 과연 그런가.


“예수회는 2가지 근본적인 이유로 탄생되었다: 1. 스페인인을 제외하고 다른 나라 국적의 사람들이 허가서 없이 신세계를 방문하는 것을 강력하게 금지시키는 알렉산더 6세 교황의 교서를 실행하기 위해서. 2. 광대한 신세계의 황금과 은을 사용하여 전 세계를 스페인 종교재판에 종속시키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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