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격과 이성이 일치한다는 것의 의미는?
일상(현실)과 탐구적인 자세와 불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동시존재하며 일치한다는 것은?
사후상태와 탐구적인 자세와 불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동시존재하며 일치한다는 것은?
-> 인격과 이성이 일치한다는 것은
존재와 탐구적인 자세와 불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합일하여 있음을 의미한다.
* 법칙탐구(현상탐구)는 자연과 인간 사회의
모든 상대적이고 연관적인 일들의 국면들을
보편적으로 또는 일반적으로 이해하여 정리해 기억하려 합니다.
* 이성탐구(주관탐구)는
자연과 인간 사회에 깃들어서 활동을 하는 비가시적인 관점들의
구조와 독립성을 이해해 기억하려 합니다.
* 윤리탐구(객관탐구)는
자연과 인간 사회에 깃들어서 활동을 하는
독립적이고 비가시적인 모든 관점들(의식들) 간을 조율해
총체적인 의미구조를 이룩하는 윤리를 이해하여 기억합니다.
* 모든 관점들(의식들) 간을 조율해 총체적인 의미구조를
이룩하는 윤리는 객관적인 안목으로서 여겨지며
자연과 의미적인 세계를 넘어 비우주적인 존재 수준과 비존재에까지
연결돼 있습니다.
* 자연과 의미적인 세계를 넘어서는 경계가 미묘이고
독립적 관점(의식) 구조와, 모든 관점(의식)의 조율됨이
상통하는 지경입니다. 이 지경에서 특징은
인과율에 철저히 지배되지 않는단 것입니다.
모든 과거와 의도들과 조건이 무효하게 됩니다.
* 초우주적인 기적들은 반드시 여러 의식을 변화시켜 일어납니다.
의식들은, 자연과 인간 사회에 가득 차 있습니다.
* 신앙은, 불가능을 넘어서까지 모든 이상적 과정들이
정합적으로 총화되는 어떠한 존재이자 그 존재 이면을
믿고 희구합니다.
불가능을 넘어선 모든 존재는 독립적인 존재이지가 않습니다.
절대의 존재자가 함께하거나 - 성령 충만하거나
다른 우주의 의식들과 함께합니다.
다른 우주가 과연 있다면 다른 가능성들이 있으므로
우리의 불가능이 극복됩니다.
* 죽는 순간의 인격-이성 사이의 직통 고속철도는
인격과 이성 간 일치됨을 의미합니다.
각자 삶에서 이루었던 탐구와 신앙의 절정을 맞을 수 있습니다.
모든 소유와 조건들을 결여한 비가시적 존재상태인 사후 의식은
절대적인 객관을 향해 접근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그림을 그려놓고 더 읽어내는 내용은 시시때때 범주가 바뀝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내용들은 필수적으로 적어 드려야 하죠.
의식의 기압골은 의식이 우주에서 흐르는 모양새와 특징을 나타냅니다.
먼저, 의식이 무얼까요?
의식의 범주에는 한계가 없겠지오.
무엇을 의식하는 순간에 바로 의식된 그것 자체가 되어있는 경우가 있곤 하므로 말입니다.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것, 최소한은 이것이 의식이라 하겠죠.
그림에서 나타내어진 기압골의 모양을 지닌 의식의 흐름이란
사실상 우주 내에서 신의 활동범위입니다.
헌데 이 신은 순수히 신이 아니라 피조물화 되어있지오.
어쨌거나 우주의 모든것은 신에서 비롯되었으며
모든 존재는 신성함을 기초로 성립되어 있다고 보십시오.
모든 존재의 구현구조에서 내밀한 극한 수준은
완전하고 철저한 관찰자의 수준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영혼이란 게 확실하죠.
영혼은 본질적인 임재의 관찰자입니다.
그런데 항상 마음에 실려 다니고 있죠, 구원이 되지 못하였기에.
구원이라는 것은 자기근원을 되찾는단 뜻이죠.
감히 영혼이 자기 근원을 되찾는단 건
이미 영혼이 아닌 수준의 모든 우주적 부속들을 떨쳐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낱개적인 몸에서 해방되는 영혼은
위의 그림의 모든 지점을 모두 이해할 수가 있겠죠.
장차 실제로 죽어서는, 원하지 않는 곳들을 모두 회피할 것입니다.
모든 존재를 통해 휩쓸고 있단 건
우주 안에서 신의 진실입니다.
의식이란 곧 신의 작용인 것입니다.
제아무리 불순한 인간이라 하여도
본래 의식은 신적이고 순전한 관찰자이기에
관찰자인 영혼이, 살아있는 몸에서 자기 마음과 함께 있어서
어떻게든 수반해 겪어 낸 모든 마음과 몸의 일들을 철저하게 유념해
구원되지 못하는 한에서는 되풀이 다음 삶들에 대해
마음에 매우 걸맞는 몸과 환경을 절로 찾도록 해줄 수밖엔 없습니다.
영혼은 모든 존재에 있습니다, 마음에 이끌리고 있다는 약점 뿐이죠.
영혼이 완전하게 마음에 끌려 다니는 상황이란 곧 짐승들의 상황이고요
짐승들의 마음이라는 것은 자동적 본능이죠.
의사소통도 그저 자동적이고, 관심사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틀에 박힘은 '낮은 곳으로 임한 생명력' 바로 영혼의 탓입니다.
영혼이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모든 생물은 서로 동등하지오.
다만 의미의 세계에서 차이가 나는 겁니다.
자동적이고 본능적인 생물들과
의미와 가치들을 분별해가는 인간 사이의 차이이죠.
한편 이 그림에서, 의식의 어떤 흐름이라도
각 개체마다 인생을 주기로서 또 하루하루 또 모든 기간를 주기로서 순회하고는 한다 봅니다.
매 순간에도 상이한 곳에 의식이 흘러가곤 합니다.
학문하고 있거나 지옥(불수의적인 감옥) 상상을 하고 있거나
동물들을 친구로 여겨 동물적 소통들을 하거나
허나 오로지 인간 역량의 한계초과 영역이 하나 있으니
바로 그것은 오직 구원의 방향이라 하겠습니다.
인간 의식은 인간으로서의 의식만 아닌 자동적 생물들의 의식도 동시확보 할 수가 있지오.
인간 이하의 모든 의식흐름은 모두 인간의 역량내에 있다고 보십시오.
그러나 그곳으로 흘러갈 수가 있다고 하여 그곳에 눌러 앉으면
인간으로 재생이 아주 어렵게 되는 수 있으므로
인간이 가진 소유나 능력들을 모조리 사용함은
분명히 자기에게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무엇으로 부활할 것인가는 현생의 삶이 밑받침 해주므로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 및 자기이하 그 모든 수준의 의식 흐름이 가능하나
인간으로선 분명하게 탐구적 자세로써 경계를 인식해야지오.
인간 이하의 모든 수준을 탐구적이거나 공생적 수준으로 접으며 인식상에 남기고
인간 존재는 자기 구원을 위해 존재론적인 몸부림을 쳐야만 하는 겁니다.
인간존재가 향상되는 자체는 유독 신비로 가리워져 있기에 그렇지오.
인간이 의식 역량으로써 수준 이하의 존재들을 넘봄은
설마 동일시하려 함이 아니라 공생적인 관계이기에 이해해주려는 것이죠.
신이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듯 말이죠.
신은 아래를 쳐다보는 일만이 여가로서 있겠지만은
인간들은 처음엔 아래 그리곤 인문 그 다음에는
있지를 않아 보이는 무언가를 쳐다보아야 하는 겁니다.
사실상 그림에서 의식의 흐름이란 곧 신의 역량이면서
또한 제 일의 피조물 인간의식들의 역량이면서 (내려감이 가능한)
유독 오른쪽 위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성인들이 필요한 대목이죠, 책으론 납득 불가능하니.
끊임없는 질문에 끊임없는 대답을 해줄 성인이 매우 필요합니다.
영혼은 각기 마음을 따라잡아 우주에 작용중인
신의 한 조각이죠.
신은 오로지 타락밖엔 관심이 없었으며
그래야 우주 및 피조물이 존재를 하게 됩니다.
신의 타락은 바로 헌신이면서
신의 정수는 물러나게 됩니다.
신이 신 아닌 것들을 그려 냈기에
물질에다 마음과 각개적인 의식이 나타났죠.
모든 존재에 대해 신께선 항상 독대적이나
우린 서로에 엄청 붙들려 있습니다.
우주라 하는 전체의 일부들이기에 약점을 의식하는 겁니다.
구원이란, 전체를 아예 버리고 자기 자리를 포기하는 것이죠.
자리라 하는 게 몸과 마음입니다.
이제 순수한 영혼 되어서
독대만을 일삼는 신의 정수에 화하여서 사라져야만 하죠.
우주의 모든 것들이 제아무리 날고뛰어도
신은 각자가 독대만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은 조폭에 희생되지 않으며
그저 예수를 대신 보냈고
몸이 있으니 예수께선 조폭에 시달렸죠.
신의 정수는 몸을, 자리를 허용하지 않음을
유념하십시오.
신은 그려지지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