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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6 하얼빈의거 ⑴

대모달 |2011.04.21 21:10
조회 188 |추천 0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내가 처단한다!”



〈형가(荊訶)의 노래〉



‘연국(燕國) 태자 단(丹)은 인재를 아껴 강한 진국(秦國)을 쳐 보복하고자 했다

뛰어난 장사(壯士)들을 모으던 그는 마침내 형가(荊訶)라는 영웅을 얻었다

군자(君子)는 자기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형가는 칼을 차고 연국을 떠났노라

흰 말은 큰 길에서 울부짖고 사람들은 비장하게 전송을 했다

곤두선 머리칼은 관(冠)을 치켜 받쳤고 사나운 기상은 갓끈을 풀어 날렸다

역수(易水) 강가에서 송별연을 여니 사방에 영웅들 떼지어 앉았고

고점리(高漸離)는 비참하게 축(筑)을 튕기고 송의(宋意)는 높은 소리로 노래를 하며

맑은 강에 출렁이는 파도가 차다

격한 상조(商調)에 더욱 눈물 흘리고 웅장한 우조(羽調)에 장사들 격동하여라

한 번 가면 다시 못 돌아오리

오직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저 수레에 오른 그는 돌아볼 틈도 없이

진국의 대궐을 향해 날듯이 달렸노라 만리 길을 막바로 모두 지났노라

지도 속에 칼을 숨겨 일을 벌이니 진왕(秦王)이 기겁하여 놀라 도망쳐

칼 솜씨 생소하여 아까웁게도 기발한 공(功)을 세우지 못하였노라

비록 형가는 이미 가고 없으나 쳔년 지난 오늘에도 뜻이 전하네’



도연명(陶淵明ː365년~427년)은 흔히 전원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귀거래사(歸去來辭)〉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주자(朱子)는「영형가(詠荊訶)」를 “도연명의 본색을 나타난 시(詩)”라 하고, 양계초(梁啓超)는 “도연명은 자못 열혈에 타는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그를 오직 싸늘한 염세자로 보아서는 잘못이다”라고 평가하였다. 협객(俠客) 형가를 찬양하는 시「영형가」를 두고 한 말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협객 영가는 연나라의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고 나중에 진(秦) 시황제(始皇帝)가 된 진왕(秦王) 영정(贏政)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도리어 진나라의 대궐 안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도연명은 이를 두고 장엄한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이것이「영형가」이다. 협객 형가의 의거(義擧)가 성공했더라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폭군 시황제의 폭정은 일찍이 그 싹이 제거되었을 것이다.



안중근(安重根)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더이상 대규모 의병모집과 항일전(抗日戰)을 벌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의 한계성을 인식하면서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으로 선회하려는 찰나에 국적 이토 의 만주 방문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자신이 소싯적부터 연마한 사격술은 ‘늙은 도적’ 하나쯤 처단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안중근이 의열투쟁(義烈鬪爭)으로 전술을 바꾸게 된 것은 러시아 당국의 변화된 태도에도 기인한다. 일본의 압력을 두려워한 러시아가 한국인의 의병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 점차 이들을 억제하고 탄압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중근은 러시아 당국과 러시아인들에게 한인국의 독립열망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럴 즈음에 이토의 만주 방문은 안중근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안중근이 남의 돈을 빼앗은 적이 있다. 그것도 의병장의 돈을 빼앗았다. 1909년 9월 엔치야에 머물고 있던 안중근은 허송세월에 대한 자책으로 울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의병재기도 쉽지 않았고,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어 의열동지를 규합했지만 당장 기의할 처지도 못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지들에게 선뜻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겠다고 말했다. 너무 갑작스런 발언이라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 그러시오? 갑자기 아무런 기약도 없이 왜 떠나려는 것이오?”



“나도 그 까닭을 모르겠소. 공연히 마음에 번민이 생겨 도저히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소. 그래서 떠나려는 것이오.”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오겠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안중근은 무의식중에 이런 대답을 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대답에 동지들은 당연히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고, 안중근 역시 그 자신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졌다.



안중근에게 어떤 영감(Inspiration)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는 동지들과 작별하고 보로실로프 항에서 일주일에 한두번씩 오가는 블라디보스토크행 기선에 올랐다. 안중근이 항구에 도착했을때 마침 기선이 출항 직전이었던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니 을사늑약(乙巳勒約)·정미7늑약(丁未七勒約)의 주역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곧 이곳에 올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이토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언제 온다는 것인지, 그 일정을 자세히 알 수가 없어 하얼빈으로 가고자 했다. 하지만 여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안중근은 궁리를 거듭한 끝에 마침 한국 황해도 출신 의병장 이석산(李錫山)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갔다.



‘이석산은 그때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행장을 꾸려 문을 나서던 참이었다. 나는 급히 그를 불러 밀실로 들어가 돈 100원만 꾸어 달라고 사정을 했으나 그는 끝내 거절하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위협을 가하여 강제로 100원을 빼앗았다. 자금이 생기니 일이 반은 이루어진 것 같았다.’



의병장 이진룡(李鎭龍)으로 추정되는 이석산은 무기를 구입하고자 돈을 갖고 있다가 일부를 안중근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이때 안중근의 생각은 어땠을까? ‘성서를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치는 행위’는 정당하다고 믿었을까, 아니면 다급한 김에 특별한 고뇌없이 오로지 '늙은 도적'을 토살하기 위해 한 단순한 행동이었을까? 혹시 일제의 심문을 받을 때 의병장 이석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빼앗은’ 것으로 진술(기술)한 것은 아니었을까? 안중근은 의거 뒤 일제의 신문과 재판과정에서 단지동맹의 맹원이나 핵심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명을 대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석산은 그 이후 연해주에서 다량의 무기를 구입해 1909년 11월 하순에 한국으로 돌아와 의병항쟁을 전개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와 싸우기 위해서는 군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일제의 철통같은 감시망으로 동포들의 성금 모금이 불가능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악질 친일파나 부호들의 재산을 탈취하여 군자금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본의 관청이나 은행을 턴 사례도 있었다.



경북 풍기에서 조직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은 1916년 전 경상도 관찰사이며 악질 친일부호인 장승원(張承遠)과 충남 아산의 친일파 박용하(朴容夏)를 암살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빼앗았으며, 만주에서도 독립운동가 최봉설(崔鳳卨)·윤준희(尹俊熙)·임국정(林國楨)·한상호(韓相浩) 등이 일본 관리들을 공격하여 15만원을 탈취하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 민중혁명의 지도자 당통(Danton)은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모든 것은 조국에 속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혁명을 지휘하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혹시 안중근의 생각도 여기에 닿지 않았을까?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1928년 중국 망명지에서 반일논조의 잡지를 발간하기 위해 국제위체를 위조하다가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안중근이 처형된 여순감옥에서 옥사했다. 신채호는 위채를 위조한 것이 나쁘지 않느냐는 일본인 재판장의 질문에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답변하였다. 신채호의 생각은 안중근의 행위에 닿지 않았을까?



안중근은 국내에서 간도로 떠나기 전 이를 만류하는 빌렘 신부에게 “국가 앞에는 종교도 없다”고 선언했다. ‘국권회복’의 대의를 위해 ‘촛불’을 훔치는 행위는 종교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안중근이 포세트 항에서 기선 우수리호를 타고 9시간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909년 10월 19일이다. 우선 동포 이치권(李致權)의 집에 기숙하면서 분위기를 살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사회에는 이토의 만주방문 소식이 화제가 되고 있었다. 열혈 청년들은 모이면, 지금이야말로 이토를 죽일 절호의 기회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이토 처단은 내가 하겠다”라고 호기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안중근이 나타나자 그의 성격과 애국심을 익히 아는 사람들은 “이토가 오기 때문에 이곳으로 왔느냐?”고 물었다. 그만큼 한국인사회에서 안중근의 의협심은 널리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도 일제의 밀정이 우글거리고 있음을 알고 있는 안중근은 속마음을 숨겼다. 청년들에게 오히려 동양 최고의 미인이나 나폴레옹 부인과 같은 부자, 프랑스의 잔다르크와 같은 여성을 중매해달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10월 20일 낮에는《대동공보(大東共報)》사를 찾아가서는 친분이 있는 김만식(金萬植)을 만나 이토의 방문 소식을 확인했다. 김만식도 “이번에 이토가 온다고 하여 왔는가?”라고 의중을 떠보려고 하였다. 이에 안중근은 “이토 한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다”며 거듭 연막을 피우고, 영웅을 알아보는 여자를 찾는 신문광고를 내면 어떻겠느냐고 화제를 돌렸다. 이에《대동공보》직원들도 비싼 광고료를 받고 그 내용을 실어주자는 등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거사 의도가 일본 밀정들에게 새나가지 않도록 하려는 치밀한 계산이었다. 안중근은 이때의 행적과 심정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한결같이 정숙(定宿)인 이치권의 댁에 도착하였더니 동지(同地)에서 이토가 블라디보스톡에 온다는 평판이 높았고 동지간에 그를 살해할 방법 등에 대해 때때로 의의(凝議)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대단히 좋은 소식을 듣고 심중 기뻐 견딜 수가 없었으나 타인에게 선수를 빼앗길까 우려하여 누구에게도 입 밖에 내지 않고 곧 갔다.”



이 무렵 노령지방 한국인사회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당시 국내에서도 의병들의 첫 번째 제거대상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꼽고 있었다. 그런 그가 통감직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건너가 버리자 의병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노령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에《대동공보》의 역할은 어느 정도였을까?《해조신문(海潮新聞)》의 후신으로 최재형(崔在亨)·최봉준(崔峰俊)·김병학(金炳學) 등의 지원으로 매주 2회 수요일과 일요일에 4면씩 1천부 정도를 발행하는, 노령지역 한국인 민회의 기관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법적인 대표는 러시아인 페트로비치 미하일로프였지만 실질적인 사장은 함경북도 경흥 출신의 유진율(兪鎭律)이었다. 그는 러시아에 귀화했으면서도 한국인 민회에 빠지지 않았고,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을 주도했다. 한국인 사회에서 그의 신망은 대단히 높았다.



《대동공보》에는 이강(李剛)이라는 평안남도 평양 출신의 논설기자가 있었다. 그는 신민회(新民會)가 발족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 지회의 간부에 선임되었고,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과 연계를 맺고 있었던 인물이다. 안중근과 가장 친밀한 사이였다고 한다. 당시 이강은《대동공보》의 주필을 맡고 있었다. 이강은 해방 뒤 ‘내가 본 안중근 의사’란 글에서 그때《대동공보》를 찾아온 안중근의 인상 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으로부터 바로 55년 전 4240년에 내가 노령 해삼위에서 대동공보사 주필로 일을 보고 있을 때에 한 청년이 찾아왔는데 그 고상한 인품과 빛나는 눈으로부터 나는 그에게 비범한 첫인상을 받았다.

그 청년이야말로 그때 큰 뜻을 품고 따뜻한 고국강산을 떠나서 시베리아 눈보라치는 노령땅으로 뛰쳐 온 응칠이라고도 부르는 29세의 청년 안중근이었다. 그때 우리 두 청년은 서로 손을 맞잡고 내방으로 들어가서 그 밤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중략)

4242년 10월에 해삼위(海蔘威)에서 지방에 출장중인 선생을 내가 전보를 쳐서 긴급 귀환케 한 후 우리 민족의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동양제패(東洋制覇)의 야망을 품고 중국대륙을 잠식하기 위하여 북만(北滿)을 시찰하는 한편 '할빈'에서 노국(露國) 대장대신(大藏大臣)과 회담한다는 정보를 제공하고 이등을 말살하기 위한 모의가 극비리에 진척되어 해삼위(海蔘威)의 대동공보사 사장 유진율씨와 한국인거류민단 단장 양성춘씨가 독일·벨기에제 권총을 일정씩 제공하고 우덕순을 동행케 하여 10월 21일 해삼위역에서 내가 두 분 동지와 최후로 작별할 때에 안중근 선생은 나의 손을 굳게 잡으시고 "이번 길에 꼭 총소리를 내리다. 뒷일은 동지가 맡아주오."하고 떠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암암할 뿐이다.’



여기서는 이강이 전보를 쳐서 안중근을 블라디보스톡으로 불러온 것으로 되어있지만, 이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안중근은《대동공보》기자 정재관(鄭在寬)과도 만났다. 정재관은 일찍이 안창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벌이다가 노령으로 왔다. 안중근이 그에게 이토의 방문 사실을 묻자 정재관은 이를 확인하면서 “이곳에서도 청년배가 모여서 이등(伊藤) 공(公)이 온다니 칼을 갈아서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들 말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그런 일이 노국(露國)에 알려지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바보같은 소리 말라'고 제지하였다”라고 말했다. 안중근은 정재관의 이같은 발언에 크게 실망하면서도 그러나 내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를 미루어 볼 때《대동공보》가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에 적극 개입했다는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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