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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12 안중근 의사의 정치사상 (1)

대모달 |2011.05.25 09:50
조회 221 |추천 0

 

○ 공화주의자인가, 근왕주의자인가?



안중근의 정치사상에 관해서는 공화주의자라는 주장과 근왕주의자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안중근은 이론가형이 아니라 행동가형에 속하기 때문인지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항일독립운동사에서 큰 역할을 한 안중근의 정치사상이나 철학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안중근은 소싯적부터 호걸풍 내지 협객풍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많은 독서나 문적을 섭렵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초기에는《천자문》·《동몽선습》·《논어》·《통감절요》등 유학의 기초적인 책을 읽었고 천주교에 입문하고 나서는《주교요지》·《칠극》등 조선에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을 주로 읽었다. 사회운동에 눈뜨면서는 대한제국 학부에서 번역한《조선역사》·《만국역사》·《태서신사》등과《대한자강회월보》·《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공립신보》등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안중근은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국민계몽과 반일투쟁의 논조를 띤《제국신문》·《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등에서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미국에서 발행되어 국내에 들어온《공립신보》는 공화제에 대한 각종 논설이 많이 게재된 진보적인 신문이었다. 이 신문을 읽으면서 안중근은 서양의 근대정치사상에 눈을 뜨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당시 문명개화론자들이 서양 근대문명의 근본이라고 소개된 천주교를 수용하면서 공화주의적 정치체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안중근은 의거 뒤 자신의 정치사상 형성배경에 관한 심문을 받을 때 “타인으로부터 들은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발행되는《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 미국에서 발행하는《공립신보》또는 포조(浦潮)에서 발행하는《대동공보》등의 논설을 읽고 위와 같은 (진보주의 이념) 생각이 들었다”고 진술했다.



안중근은 연해주 망명시절에는《공립신보》와 접하게 되었다. 계동청년회 임시사찰직을 맡고,《대동공보》기자와 계동학교 학감을 겸하고 있으면서 한인민회(韓人民會)의 고문 등을 맡았다. 계동학교는 공립협회 해삼위 지회이면서 공립협회 기관지《공립신보》의 노령지국이었다. “안중근이 관여하고 있던 계동학교와 한인민회는 공화주의를 표방한 미국공립협회와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이들 기관을 통해《공립신보》가 블라디보스톡에 배포되어 안중근의 정치사상에 영향을 준 것이다.”



공립협회(共立協會)는 군신과 빈부귀천, 사농공상이 모두 공립하여 공동의 이익과 목표를 추구하는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샌프란시스코 이주 한국인들의 자치단체였다. 여기서 발행하는《공립신보》는 ‘국민국가수립론’을 주창하면서 한국 독립운동의 목표를 공화정 수립에 두고 있었다.



하와이 국민회 기관지《신한민보》도 해삼위지역에 배포되어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접할 수 있었던 신문이다. 이강(李剛)이《신한민보》의 블라디보스톡 통신원을 맡고 있어서 안중근은 이 신문을 쉽게 구해 읽게 되었다.《신한민보》도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진보성향의 교포 신문이었다.



그렇지만 안중근이 공화제 정치체제를 구체적으로 구상하거나 언급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의거 뒤 검찰 심문과정에서 한국 국민의 무능 때문에 통감정치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국은 금일까지 진보하고 있으며 다만 독립자위가 되지 않은 것은 군주국인 결과에 기인하며 그 책임은 위에 있는지 밑에 있는지는 의문일 것이라고 믿는다”라며, ‘군주국’ 때문에 나라의 독립이 어렵게 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이를 근거로 한 연구자는 안중근이 군주정을 비판하고 공화정을 염원했다고 주장한다.



“안중근은 민권자유사상에 바탕을 둔 국권회복운동에 근거하여 전제군주정을 비판하였다. 전제군주정 때문에 국권을 상실하였고 나라가 쇠망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사상은 군주주권의 군주정을 비판하고 국민주권의 공화정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독립국가의 정체(政體)로 공화정을 염원하였다. 안중근의 공화주의 이념은 민권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전파된 선진사상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안중근이 근왕주의자였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안중근이 대한제국의 정치체제인 군주제의 폐단을 강하게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주제를 비판한 대목 역시 군주제 자체의 문제점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군주제를 운영하는 친일파 대신들의 매국성을 질타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엄밀히 말해 그는 군주제에 대해 본격적인 비판을 가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에 대해서는 극도의 존모의 태도를 나타냈다. 그는 신민이 황실에 대해 불경한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하얼빈의거를 벌인 것은 황제를 위해서였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안중근의 정치적 지향성이 황제체제를 지지하는 단계에 머물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중근은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를 충실히 받들어 모신 충직한 근왕주의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안중근이 국내외에서 직접 만났거나 알고 있던 인물들에 대한 평가에서도 근왕주의사상을 엿볼 수 있기는 지적이 있다. 안중근은 철저한 근왕주의 독립운동가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안중근을 공화주의자나 근왕주의자로 양분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는 국난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최전선에서 투쟁한 행동인이었을 뿐이다. “나는 산하 삼천만 동포를 위해 희생이 되려는 자이며 황실을 위해 죽으려는 자가 아니다”라는 결연한 선언에서도 우리는 안중근의 지향성을 알 수 있다.



안중근은 대단히 진보적인 사고와 선진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소년시절 동학농민군과 싸운 것을 제외하면, 당대 일반 청년들에 비해 훨씬 앞서 사고하고 행동했다. 천주교에 입교하고서도 내세중심의 영혼구원에만 충실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고, 교육사업에 이어 직접 의병항쟁에 참여하고 국적 이토 처단을 결행했다. 옥중에서 집필한 미완의《동양평화론》이나 심문 과정에서 나타난 확고한 평화정신은 안중근 사상의 본령이 어디 있는가를 말해준다. 일본 절대권력의 상징인 일본 황제를 제쳐두고 이토 처단으로 한국 독립을 기대했던 것을 ‘한계’로 지적하기도 하지만, 100년 전 30대 초반의 ‘한계’도 이해해야 할 대목이다.



○ 감옥에서 쓴 수많은 휘호(揮毫)



안중근은 여순감옥에서《안응칠역사》와《동양평화론》을 저술한 것 뿐만 아니라 많은 휘호를 썼다.



‘신이나 천사같은 모습으로 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형무소 관리들이 앞을 다투어 비단과 종이를 가져와서 글씨를 받으려고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2월 말에서 3월초의 20일 사이에 200장을 썼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자기가 서도가도 아닌데 남에게 붓으로 써 준다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죄수인 자기의 글을 간곡히 청하니 붓글씨를 통해 자기가 의거한 이유를 두고두고 되새겨 줄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매일 몇 시간씩 글을 써 주었다.’



안중근은 감옥에서 형 집행을 앞두고 태연한 모습으로 연일 글을 쓰고, 휘호를 썼다.《안응칠역사》와《동양평화론》그리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70여 점의 휘호에 나타난 글씨의 ‘문기(文氣)’를 보면 안중근 정신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게 된다. 그것은 혈기나 객기에서 오는 기운이 아닌 고도의 인격수양을 통해서 오는 정기(正氣)의 소산이다. 이것은 곧 안중근의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행동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힘인 것이다.



위(魏)의 초대 황제이자 유명한 문장가였던 문제(文帝) 조비(曹丕)는《전론(典論)》에서 ‘문이기위주(文以氣爲主)’ 즉 문기설(文氣說)을 주장했다. 같은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쓰는 데도 문장의 품격과 성숙도가 각기 다르게 되는 것은, 작가의 기(氣)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안중근의《동양평화론》에는 치밀한 논리성이 다소 부족하지만 휘호에는 ‘문기’가 흐른다. 글씨가 살아서 움직인다는 평가도 있다.



안중근의 옥중 휘호는 일본인 간수나 관헌들이 특별히 갖고자 했다. 자기네 나라 정치거물을 죽인 ‘살인범’의 글씨를 탐낼 만큼, 안중근의 재판 과정이나 옥중생활은 신비의 대상이었다. 최서면 박사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썼다.



‘스스로 항소권을 포기하고 글만 쓰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은 형무소 관리들에게 신이나 천사같이 느껴졌다. 항소를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면 때로는 흥분도 하고 때로는 울기도 할 줄 알았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나날을 보내고 식사도 보통때보다 많이 들 만큼 초연하였다. 이런 소문은 재판소와 검찰국에도 전달되어 재판중에도 보통 사람과 다르더니 끝끝내 참 놀라운 인물이라고 감탄하였다.’



여순감옥의 감옥의사 오리다 타다스가 안중근 의사의 휘호를 받게 된 과정을 사키 류조[佐木隆三]의 저서《광야의 열사 안중근》을 통해 살펴보자.



‘여순감옥의 제3동 9호 방에 수감된 안중근은 두 형제에게 붓글씨 도구를 차입받아, 방안에서 서도를 즐겼다. 그 힘찬 글씨를 보고 감옥의사 오리다 타다스가 말을 건넸다.


"통역관 소노키 스에요시 군이 멋진 휘호를 받았던데, 표구를 하고 있더구만. 야, 소노키군이 부럽군."


"선생이 원하신다면 힘이 날 때 한 점 써 드리지요."


"부탁해도 괜찮소? 참 고맙소."


"여하튼 선생은 나의 절명을 지켜 보지 않으면 안 되지요. 살아 있을 때, 있는 힘을 다해 한번 써 보도록 하지요."


빙긋이 웃으며 약속을 하고, 수일 이내에 휘호하였다.


欲保東洋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先改政略 일본의 침략을 먼저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時過失機 세월이 흘러 시기를 놓치게 되면
追悔何及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당시 안중근은 글씨 연습을 하면서 한시를 짓고 있었다. 여백에 습작으로 칠언절구와 율시를 기입하는 것이다.



‘男兒寧時斯心正 사나이는 올바른 마음을 속일 수 없다
判檢何知用誣言 판검사는 쓸 데 없는 말들을 하고 있지만
骨捕鐵戶平生誤 내가 잘못해서 철장 신세를 지고 있단 말인가
罪作審重百行先 신중하게 생각하여 죄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己矣於今無何奈 지금에 와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報讎卽地落孤魂 원수를 다 갚지도 못하고 이 생명이 다하는가’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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