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사진 있습니다.
임산부 & 노약자 & 어린이는 사진 부분은 그냥 지나치세요
아...사전에 경고를 해드리니까 욕은 안먹어서 좋내요 ^.^;;
솔직히 저도 저런 혐오 사진 보면 구역질이 나긴해요...
그래요 무섭게 하려면....구역질을 참고서라도....올리고 있습니다...저도 사람이라구요 -_-;;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람고기를 먹는 일에 광적으로 집착해왔다. 이는 인간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즐거움이다"
- 이세이 사가와
"만일 이 사람이 제정신이라면 이보다 악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악마와도 비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픈 사람입니다. 악마가 아닙니다. 식인, 구멍 뚫기, 시체 성애, 시체와 샤워하기, 살인, 대뇌엽 절단, 살 제거, 하루에 2~3번 자위하는 것... 이는 미친 사람이 하는 짓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그저 사악하고 나쁜 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입니다."
- 변호사 제랄드 보일Gerald P. Boyle, 제프리 다머Jeffrey Dahmer의 재판중
식인풍습(2)
Cannibalism
사고에 의한 식인
"나는, 만일 어떤 시체라도 네가 살아남는데 도움이 된다면,
네가 그것을 이용하기를 원해.
그러니까, 만일 내가 죽었는데 네가 나를 먹지 않으면,
내가 어디에 가 있든지 그 곳에서 되돌아와 혼내줄거야" 라고 저비노는 말했다.
- 영화「얼라이브」에서
생존을 위한 식인행위는 자연적 기근이건 인위적 기근이건간에 대기근 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난파, 비행기 추락사고, 또는 산중이나 사막/정글/얼음속에 갇혀 길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일어났다. 미래에는 우주 미아가 됐을 경우도 덧붙여질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재난은 소수의 인원만이 관련된 일이기는 하지만 매스컴을 타서 널리 알려질 때가 많다. 기본 시나리오는 늘 똑같다. 자연과 싸우게 된다. 굶주림과 갈증, 인육밖에 먹을 것이 없고, 피밖에 마실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난파해서 살아남은 자들이 서로를 잡아먹거나, 불행하게도 난파한 곳의 원주민들(일례로 악명높은 피지족)에게 잡아먹히는 일은 수천년간 행해져왔다.(중략)
사건은 이렇게 일어났다. 1816년 7월 2일, 프랑스 정부 프리깃 함 '메두사 호'의 무능한 선장은 서아프리카 연안에서 배를 좌초시켰다.
7월 5일 오전, 선장과 고참 고급선원들은 보다 항해에 적합한 구명보트를 입고는 다른 이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선원과 군인들과 세네갈에 정착하려고 온 자들은 서둘러 꽤 큰 뗏목을 만들었다. 150명이 그 뗏목 위에 올라타자 1미터 정도 가라앉았고 물이 가슴까지 차올라왔다.
그날 밤, "모든 병사들과 선원들은 자포자기 했다. 이들을 진정시키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고 선의(船醫)인 사비니가 기록했다. 그 다음날 아침까지 20명이 죽었다. 일부는 바다에 빠졌고, 일부는 판자 사이에 떨어져서 익사했다.
7월 6일 밤, 어둠 속에서 파도가 더 높이 솟자 난장판이 되었다. 사람들은 와인 통을 깨부수고 미칠 때까지 술을 마시고는 날뛰었다. 깔려죽은 사람도 있었다. 고급선원들은 돛대로 몰렸고, 아무런 규칙도 없는 대살육전에서 단도와 기병도를 휘둘렀다. 모두 65명이 죽었다.
7월 7일, 바다가 잔잔해졌다. 아직 살아남은 이들은 지쳤고, 굶주려 있었다.
그들은 뗏목을 뒤덮은 시체에 달려들어 조각조각 잘라냈다. 그 자리에서 먹는 자들도 있었다. 탑승원 가운데 처음에는 이 혐오스러운 음식에 손을 대지 않으려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에는 인간성보다도 더 강한 욕구로 인해 통탄할 일이기는 하지만 이 끔찍한 식사가 삶을 연장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보다 먹기 좋도록 피가 흐르는 팔다리를 말리자고 제안한 사람이 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직 이를 거절할 만한 용기가 남아있었다. 그들에게는 와인을 좀 더 주었다.
7월 8일, 화약과 부싯돌을 이용하여 불을 지폈다. 인육을 구웠고, 이번에는 모든 이들이 먹었다.
7월 9일(7일째)에는 28명만이 남았다.
그 중 15명만이 며칠 더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머지는 모두 큰 상처를 입었으며 완전히 미쳐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음식을 배급받았으며 죽기 전에 포도주를 40병 정도 마실 수가 있었다. 그 포도주 40병은 우리에게는 필수적이었다. 우리는 회의를 했다. 병든 자들에게 반씩 배급해 주는 것은 이들의 죽음을 단지 얼마간 연장하는 것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천천히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랜 회의끝에 우리는 이들을 바다로 던져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불쾌한 일이기는 하지만 하루에 3쿼트씩 배분할 경우 남은 자들이 6일 더 마실 수 있는 분량이었던 것이다. ...3명의 선원과 1명의 병사가 이 잔인한 행위를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고개를 돌리고, 불쌍한 자들의 운명 앞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7월 16일, 생존자 15명은 범선 '아거스 호'에 의해 구출되었다. 육지에 닿기 전에 그 가운데 5명이 더 죽었다.(중략)
1899년 8월 2~3일, 돛대가 셋인 목조 범선 '드롯 호'는 목재를 싣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났다. 그러나 8월 11일에 플로리다 해협 부근에서 허리케인을 만나 좌초되었다. 선원 17명 중 9명과 선장이 선박과 함께 사라졌다. 생존자과의 면담에 근거하여 쓴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뗏목에는 5명이 타고 있었다.
...또 다른 동료의 안색에서 죽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이었다. 손과 발이 차고 끈적끈적했다. 그의 동료들은 그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그들은 신호만 떨어지면 가슴을 찌를 수 있도록 칼을 들고 있었다. 심장이 점점 느리게 뛰기 시작했다. 생명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을 때 칼을 심장에 꽂았다.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자 굶주리고 목마른 인간들이 그것을 받아마셨다.
이런 혐오스러운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머리가 뒤로 젖혀졌으며 눈이 감겼다. 마치 새들이 더 신선한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것처럼 식인종들은 두 번째 희생자에게 달려들어 칼로 찌르고는 심장 주변에 난 큰 상처 주위로 흐르는 뜨뜻미지근한 피를 빨아먹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마셨다. 피의 맛과 빛깔을 본 이들은 미쳐 버렸다. 죽은 고기를 조금 맛보더니 먹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더 따뜻한 피를 더 많이 먹겠다는 흉포한 욕구를 못이겨 제비를 뽑았다.(중략)
이제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유명한 사건에 대해 언급하겠다. 바로 콜로라도 식인종이라고도 알려진 알퍼드 패커Alferd Packer사건이다. 그에 관한 전설은 널리 퍼져서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와 관련된 서적도 여러 종이 간행되었으며 근래 신문에 보도된 것만 해도 수십 건이 넘는다. 영화(가장 최근의 것이 1979년에 찍은 것이다)도 있고, 뮤지컬도 있으며, 패커 팬클럽도 있고, 또 여기서는 티셔츠도 판매하고 있다.
그리고 보울더 소재 콜로라도 대학교에서는 알퍼드 패커 간이식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햄버거를 날것으로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으며, 매년 열리는 햄버거 먹기 대회에 참가할 수도 있다. 오늘날 로키 산의 작은 광산 마을인 레이크 시에서는 음식점 주인인 믹 해리슨이 '햄버거는 햄버거일 뿐이지만 맨버거(manburger)는 식사다"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한다.
패커는 1842년에 펜실베니아 주에서 태어났다. 12세가 되던 해에 그는 가출했다.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북군에 지원했으나 1862년에 간질을 이유로 제대했다. 그 이후에는 콜로라도에서 사금 채취에 나섰다. 그러고 나서는 '그는 길안내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알퍼드는 기회만 생기면 길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길잡이가 되었다. 작은 결함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점에는 함축된 의미가 있다.
사금 채굴꾼 집단은 '도살자'라고도 알려진 프랭크 밀러, '눈이 튀어나온 덩치 큰 빨간머리'인 섀논 윌슨 벨, 제임스 험프리스, 이스라엘 스완(늙은이 스완), 그리고 조지 눈(캘리포니아라는 별명의), 그리고 패커로 구성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난폭한 무리였다.
1874년 2월 9일에 야영지를 떠난 이들은 훨씬 더 위험한 지름길인 윗길을 따라 로스 피노스 인디언국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제대로 채비를 갖추지 않고 눈신발도 없이, 완전한 미개척지에 들어섰다. 55일 후 패커 혼자만 도착했다. 그는 먼저 길을 잃었고,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고용주들은 먹을 것을 찾으러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수상쩍은 이유로 의심을 사게 되었다. 패커는 매우 잘 먹고 지낸 듯이 보였을 뿐 아니라 돈이 너무 많았다. 아침 식사때도 위스키를 내놓으라고 하는 등 술을 흥청망청 퍼마셨고, 포커게임을 하곤 했다. 로스 피노스 고개 위쪽의 오랜 인디언 산길에서 마른 인육 조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자 그에게 린치를 가하자는 의견이 자자했다.
일설에 의하면 패커는 장미와 노루 가죽신을 먹고 지냈다고 하며,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동료 프리카세 요리, 야영꾼 일품요리'쪽이 더 가깝다고 한다. 패커는 결국 법정에서 선서한 뒤 증언을 해야 했다.
늙은이 스완이 가장 먼저 죽었다. 야영지에서 떠난 지 10일쯤 지난 후 나머지 5명이 그를 먹었다. 4~5일 후 험프리스가 죽었고 그도 먹혔다. 그는 133달러 정도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지갑을 발견해서 돈을 가졌다. 얼마 후, 내가 땔감을 구해오는 동안 다른 사람을 죽였단 사람이 살해당했고(다른 이들은 사고로 죽은 것이라고 했다) 그도 역시 먹혔다. 빌(섀논 윌슨 벨)이 스완의 총으로 캘리포니아를 쏘았다. 그리고 내가 빌을 죽였다. 총으로 쏘았다. 시체를 덮은 후 큰 조각을 베어가지고 떠났다. 그런 후 14일 정도 지나서 인디언 관리국에 도착했다. 벨은 라이플 총으로 나를 죽이려 했으나 실수로 나무에 부딪쳐 총이 망가졌던 것이다.
패커는 또한, "인육에 맛을 들였다. 인간의 가슴살이 지금까지 맛본 고기중 가장 맛있다"고 말했다.
패커의 체포는 일대 반향을 일으켰으며 언론에서는 인간의 탈을 쓴 악귀라고 표현하였다. '같은 인간의 상등육을 씹는 식인종'이라는 표제도 있었다. 콜로라도의 식인종, 알퍼드 패커의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패커는 이스라엘 스완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을 내린 게리Gerry 판사는 주목할 만한 연설을 했다.
신을 조롱할 수는 없고. 인간은 뿌리는 대로 거둘 것이오. 당신, 알퍼드 패커는 악행을 뿌렸으니 그 몇 배의 응보를 받아야 하오. ......희망을 버리고 생의 약속에 귀기울이지 마시오. 확실하고 두려운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시오. 아직도 당신을 사랑스러운 아들로 여기는 나이 든 부모를 만날 준비를 하시오. 9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당신은 혼을 잃고, 기백을 잃은 채 세상을 떠돌아 다녔소. 집도 사랑도 없고 당신을 이 땅에 묶어 둘 끈이 전혀 없소.
게리는 그 당시의 관례대로 곧 죽을 자에게 "당신은 교수형을 당할 것이오. 하나님이 당신의 영혼에 자비를 베풀기를"이라는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
패커의 술 친구이며 술집 주인인 래리 돌런이라는 자가 술에 약간 취하기는 했지만 재판을 참관하고 있었는데, 그는 레이크 시에 있는 자신의 주점에서 손님들에게 판사의 선고를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판사는 이렇게 말했소. "일어나, 이 게걸스러운 식인종 자식아. 일어나." 광분해서 손가락질하며 이렇게 말했소.
"힌즈데일 군에는 민주당원이 7명 있었는데 당신이 그 중 5명을 먹어 버렸어. 이 주의 민주당원 인구를 줄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교수형에 처하겠소. 패커 당신, 이 공화당 식인종아, 지옥에 떨어뜨리고 싶지만 법령이 이를 금하고 있소."
패커는 시 구치소로 이송되어 형 집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감옥에서 조용히 지낼 수 있었으나 함께 갇힌 주정꾼이 시끄럽게 굴자 잡아먹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 보시라! 패커의 변호사들은 소송절차에서 허점을 발견해서 이를 잘 활용했다. 그들은 전 재판과정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그들의 의뢰인은 1881년에 폐기된 콜로라도 준주(1876년에 주로 승격되었다)의 구법 하의 조항에 따라서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사실 1882년의 법 제정시에는 1881년 이전에 저지른 살인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데일리 리뷰 프레스》는 "살인자는 웃는다. 대법원은 1881년 5월 28일 이전에 저지른 살인은 범죄가 아니라 한다"고 발표했다. (중략)
석방된 후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고 과거에는 어땠는지를 얘기해주면서 살아갔다. 군의 박물관에는 패커가 교도관의 딸에게 만들어 준 인형 집이 있다. 주지사에게 완전히 사면해 달라는 패커의 마지막 상소내용은 '나는 죽어가고 있으며, 무죄이다'였는데, 무시되었다. 당시의 언론 보도에 의하면 그의 죽음은 극적이었다. '그는 초인간적인 힘이 생긴 듯 했다. 개처럼 짖었다.' 사망 진단서에는 죽음의 원인이 '노쇠, 근심, 걱정'이라고 보다 품위있게 적혀 있었다. 때는 1907년이었다. 남북전쟁에 참전한 퇴역 군인인 패커의 장례는 군장(軍葬)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50년에 공화당에서는 콜로라도 주의회 의사당 앞에 민주당원을 잡아먹은 패커를 기리는 금제 기념 명판을 세우려 했다. "이 위대한 주의 번영에 실질적이고 영속적인 도움을 준 시민을 본 의회에서 기념하는 것이 당연하고 타당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라는 말로 시작하는 제안은 잇따른 토론 끝에 허사로 돌아갔다. (후략)
미식가에 의한 식인
'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이라는 라틴 격언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남의 취향을 욕해서는 안된다'이다. 보다 자유롭게 해석하자면 '내가 남 같지 않아서 다행이야!'라는 의미이다. 식인풍습은 섬뜩한 주제이지만 이 장에서는 보다 가볍게 다루겠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사람들이 다른 이의 뱃속에서 그 종말을 맞지는 않겠지만, 제법 많은 사람이 별미요리(기본요리로 여겨질 때도 있다)로 여겨져 요리되었다. 즉, 순전히 인육을 좋아해서 먹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고상한 취미를 지녔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강조하듯이 세상에는 별별 취미를 지닌 사람이 있기는 하다.
관련문헌에는 그런 경우가 많이 열거되어 있으며 우리도 이미 여러 예를 들어보았다. 놀랍게도 사람의 고기맛이 어떤지를 실제로 설명한 기록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저자가) 찾아낸 한 경우는 이렇다. 피지족이 인육과 돼지고기 맛을 비교하여, 인육이 낫다고 말했다. 선택하라면 땅딸한 돼지보다는 '길다란 돼지'인 푸아카발라우아(=인육)을 선호한다.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키지만, 아래에 기록한 보고와 이야기들은 전체 사실을 모두 설명한 것이 아닐뿐더러 그 사실여부도 확실하지 않다. 이 주제 자체가 제멋대로 불리거나 지어내기에 좋다. 예를 들어 흉포한 카리브인은 갖가지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이런 전설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풀려졌다. 그래서 이들은 사로잡힌 자를 이등분해서 내장과 팔다리를 먹고, 우리가 햄을 만드는 것처럼 나머지 부위는 소금에 절여 말린다고 전해졌다. 현실 감각을 되돌려주기 위해 다음 사실을 알려주어야겠다. 실제로 카리브인은 염장법을 유럽인에게서 배웠다. 그 이전에는 소금에 절이는 법을 모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독특한 조리법을 읽어보자.
피지족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부족도 인간을 맛있는 요리로 여겼다. 바자, 산드, 팜비아, 만제마, 와다이, 하우사란드, 저르세 모두 다른 어떤 음식보다 인육을 즐겼다. 솔로몬 군도의 여러 부족, 뉴칼레도니아 섬, 페이트 섬, 에로망고 섬, 그리고 뉴질랜드 등에서도 인육을 먹었다. 바수토족이 식인행위를 그만두게 하려고 이들에게 소떼를 주었으나, 쇠고기를 한번 맛보더니 사양했다.
성별, 나이 종족에 따른 선호도도 각각 달랐다. 19세기 초 런던에서 몇 년 동안 거주한 뉴질랜드의 한 부족장은 "가장 그리운 것은 사람 고기 잔치이다. 영국인 고기는 진절머리가 난다. 여자와 아이의 살이 가장 맛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라이베리아의 벨레족은 남자만을 먹었다. 이들은 여자의 살은 쓰다고 믿었다. 마오리족 중 일부는 50세의 남자를 더 좋아했고 백인보다는 흑인을 선호했다. 그들은 고기를 날로 먹지 않았으며 고구마 양념에 쓰기 위해 엉덩이기름은 저장해두었다. 피지족은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여겨지는데 이들도 백인의 고기맛을 싫어했다. 남자보다는 여자를 더 좋아했고 상박부와 허벅지가 가장 맛있는 부위라고 생각했다. 요리를 두고 '죽은 사람처럼 연하다'라고 하는 표현이 최상의 찬사일 정도로 그들은 인육을 좋아했다.
타타르족은 특히 여자를 좋아했다. 장교들은 통통한 소녀들을 먹었고, 일반 병사들은 질기고 힘줄 많은 부인네를 먹어야만 했다. 진미로 여긴 가슴살은 귀족들이 차지했다. 바자의 왕은 여자와 소녀만을 먹었다. 야오바족의 족장은 며칠마다 한 번씩 어린 소녀를 도살했으나 가슴살만 먹었다. 머리 사냥을 한다는 것이 확인된 탕갈레족은 특히 적의 여자 머리를 요리하여 먹었다. 가젤 반도의 한 족장은 태아의 살코기를 즐겼기 때문에 임신한 여자들을 사냥했다. 그리고 11세기 중국에서는 사람고기를 먹는 것이 흔해빠진 일이었으며 인육을 파는 음식점에서는 늙은 남자/여자/아이로 만든 요리가 각각 이름이 달랐다. 이걸 보면 고기 맛이 아마 각각 달랐다고 추정할 수 있다. 정리해보면, 여론은 다음과 같은 쪽으로 흐른 것 같다 - 여자와 아이들이 남자보다 맛있고, 백인보다는 흑인이 맛있다(어느 책에서는 중국인을 선호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주로 채식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린이가 노인보다 맛있다고 여긴다.
신체 부위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측면에서 많이 언급했었다. 나이지리아의 부족들은 손바닥, 손가락, 발가락을 좋아했다. 원숭이 고기도 사람 고기만큼 좋다고 생각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뇌와 골수를 선호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다. 이보족 식인종들은 손가락 마디를 좋아했다. 진캉 드약족은 머리만을 먹었다. 나이지리아의 바품 반사우족은 포로들을 죽이기 전에 풀무로 펄펄 끓는 야자유를 위장에 집어넣어 고기가 더 연해지도록 했다. 때로는 시체에 야자유를 펌프해 넣고 절였다. 인도네시아의 식인종들은 발바닥을 좋아했다. 뜨거운 물푸레나무 위에 놓고 훈제한 음경을 진미로 여긴 부족도 있다.
다른 지역의 부위별 선호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심장과 간 - 아프리카 남부와 동부, 멕시코, 피지
신장 - 다르 포르
신장의 지방 - 호주
배꼽 - 베추아나
생식기 - 헤레로
뇌 - 뉴기니, 대다수의 머리 사냥꾼
눈 - 폴리네시아와 뉴질랜드
뺨 - 토르
손 - 뉴칼레도니아
발 - 와레가
1972년 안데스 산맥 비행기 추락사고의 경우 영양적 측면에서 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그들 모두 골수는 좋아했다. 뼈에서 살을 깨끗이 발라낸 후에는 도끼로 갈랐다. 칼이나 철사로 골수를 빼내어 모두 나누어먹었다. 거의 모든 시체의 심장 주변에 엉겨있는 핏덩어리도 먹었다. 살과 지방과는 맛과 질감이 달랐으며, 이들은 이제 그 주식에 질려 버렸다. 감각적인 면에서만 다른 맛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육체도 오랫동안 섭취하지 못한 무기물, 그 중에서도 특히 소금을 요구했다.
소금은 아마 식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것에 관해서 약간의 의견을 가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너희들은 지상의 소금이니라"는 말이 성경에도 나와 있으며, 결혼을 앞둔 나치 친위대 젊은이들은 '순결'의 상징으로 소금 저장고에 들어가는 풍습이 있었다. 인간의 몸은 지난 30억년동안 대양과 같은 용액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최초의 몇 달 동안을 염분의 용액이 든 자루속에서 보내며, 뇌와 뼈를 비롯한 인간의 신체 어디에나 염분이 섞여있다. 이상한 일이지만, 이것은 나트륨(아주 불안정해서 물에 닿기만 해도 불꽃을 내며 터지는 금속)과 치명적인 염소 가스로 구성되어 있다. 이 혼합물을 삼키면 뱃속에서는 염산이 형성된다. 만약 몸 속에 소금이 없다면 우리는 경련과 마비를 일으키다 죽고 말 것이다. 선사시대의 인류에게 필요한 염분을 공급해 준 것은 날고기였다. 마사이 부족인들은 오늘날에도 가축의 피에서 염분을 공급받는다. 나폴레옹의 대군은 모스크바에서 퇴각할 당시 소금의 결핍으로 쓰러졌다. 그것으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지고 유행병이 창궐하며, 상처가 낫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히브리인과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제물을 소금에 절였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오늘날 성수에 소금을 뿌린다. 그리고 원자로를 냉각시켜 주는 것도 다름 아닌 나트륨 용액인 것이다.
또 다른 '긴 돼지' 요리법이 있다. 1610년에 새로 개척된 버지니아 식민지에서는 굶주리던 한 개척자가 아내를 살해해서 소금에 절이고 양념을 뿌렸다. 그 행위가 발각되었을 때, 그는 살점 한 조각을 먹고 있었다. 그는 "구웠을 때가 맛이 더 나은지, 아니면 삶았을 때나 불고기로 했을 때가 나은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1920년대 독일에서 직업을 찾아 도시로 나온 농촌소녀들을 죽여 소세지를 만든 악명높은 그로스먼에 관해서는 앞에서 말했다(여기선 생략되었으나 뒤에 언급됨-overdose). 관련 저서에 계속 등장하는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희생자들을 토막내어 뜨거운 돌을 넣은 구덩이에서 구웠다. 호주의 부족 중에는 부족 일원의 시체를 훈제하여 열로 인해 액화된 부분을 먹었다.
인육을 훈제하는 것은 흔하다. 바딩가는 팔, 다리, 머리를 자른 후 연기 속에 집어 넣었다. 그렇게 하면 특히 맛있다고 설명했다. 브라질의 투아리족은 죽은 자를 화장한 후 재를 보관했다가 식사때마다 섞어먹었다. 하맛사족도 훈제 고기를 좋아했지만 손이나 발을 먹으면 즉사할 것이라고 믿었다. 바날라 족은 노예의 팔과 뼈를 부러뜨리고 사흘 동안 강에 담가두었다. 피부가 더 잘 벗겨지고, 살이 연해지기 때문인 것 같다. 만제마족은 썩어서 코를 찌를 정도로 냄새가 나도록 인육을 사흘 동안 물에 담가두었다. 바상가족은 죽은 적을 하룻밤 동안 물에 담가둔 후, 다음날 머리와 허벅지를 잘라서 개미집 위에 넣어두었다. 만일 개미가 그 고기를 먹으면 좋은 고기였다. 변질된 시체를 먹는 것은 널리 퍼진 듯 하다. 변질 시키는 정도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으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맛의 문제였던 것 같다. 탄나족은 시체를 땅에 2주동안 묻어두었다가 꺼내서 먹었다. 뉴기니의 무족도 비슷했다. 아마존 정글의 타리아나족과 투카노족은 일부러 만든 특수한 집에 죽은 자를 묻고, 칵시리라는 술을 준비하여 발효시켰다. 한 달 후, 심하게 변질된 시체를 파내어 태우고는 그 잔해를 갈아서 칵시리와 섞었다.
다음과 같은 특별 요리는 드라큘라의 원형이랄 수 있는 블라드가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눈에 거슬린 귀족들을 목 베어 죽이고는 그 머리를 게들에게 먹였다. 희생자의 친지와 친구들이 초대된 잔치에는 게 요리가 나왔다. 그러나 어쩌면 이 이야기는(피터 유스티노프의 재미있는 자서전,『세상에 이런 일이Dear Me』에 실린) 아들라이 스티븐슨의 이야기만큼 의심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뉴기니의 가톨릭 선교단체의 노력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통계조사에 따르면 뉴기니 사람들은 성 금요일에는 어부의 고기를 주요리로 먹었던 것이다."
사디스트와 미치광이들에 의한 식인
선교사들은 피지 제도에서 600명을 잡아먹은 식인잔치가 벌어졌다고 보고했다. 피지족의 식인풍습의 잔인함은 전례가 없을 정도였다. 산채로 부위별로 토막을 내고, 희생자의 눈 앞에서 팔다리를 요리해서 먹고, 또 낚시 바늘로 혀를 가능한 한 잡아빼서 잘라 씹으면서 희생자를 비웃었다. 뉴기니의 도보두라족처럼, 피지족도 자기 아이들이 포로가 된 아이들을 죽이는 것을 허용했다. 보통은 화살을 쏘아서 아이들을 살해했다.
- 에발트 폴하르트Ewald Volhard, 『식인풍습』
사디스트들
타인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데서 즐거움을 얻는 사디즘이 식인풍습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앞에서도 그런 경우를 살펴보았고, 특히 <처벌, 무관심, 일체화에 의한 식인>에서는 그런 예를 많이 들었다. 반면에 생존을 위한 식인행위에서는 전혀 그런 면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순전히 가학적인 이유에서 행해진 경우도 있다.
끊임없이 전쟁을 하며 포로를 무자비하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한 이로쿼이족은 포로들의 손톱을 잡아빼고, 사지를 자르며, 참수한 다음에 먹었다. 때로는 산 채로 구울 때도 있었다.
중국 역사는 음식이든, 에로티시즘이든, 고문이든 간에 완벽한 쾌락주의를 보여준다. 황제들이 고용한 고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기예의 일종으로 갈고 닦아 완성해야 한다고 여겼다. '천 번의 죽음'이라는 고문을 가할 때가 절정이었다. 이 과정은 수개월동안 계속 되었다. 상당히 세밀한 해부학적 기준을 적용하여 죽어가는 자를 찌르고, 베고, 으스러뜨리고, 태웠으며, 죽어가는 자에게 그 자신의 살점을 먹였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카르파티아의 흡혈귀 부인은 소름끼치는 인간이었다. 1560년에 태어난 엘리자베스 바토리Elizabeth bathory는 엘리자베스 1세와 이반 뇌제(雷帝) 시대의 사람이다. 그녀는 매우 총명하며 교양있는 여자였다. 이 나라의 영주도 겨우 글씨만 쓰는 정도인 시대에 그녀는 헝가리어, 독일어, 그리고 라틴어를 능숙하게 쓸 수 있었다.
바토리는 650명의 처녀들을 살해하여 그들의 피로 샤워하고 목욕했다. 그녀는 동이 트기 전 마법의 시간인 새벽 4시에 핏물에 푹 잠겨 목욕을 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피도 마셨다. 이는 모두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늙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보다 더 젊고 매력있는 여자를 벌하기 위해서 잡아먹었다. 가학적이고 무자비한 바토리는 유럽 역사상 믿을 만한 기록이 남아있는 '흡혈귀'로 여겨진다. 브람 스토커Bram Stoker의 드라큘라는 이 실제 인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중략)
엘리자베스 백작부인이 거느린 능숙한 고문자 중 하나인 도로티야 스젠트는 법정 증언에서 "마님이 때릴 힘이 없을 정도로 기분이 나쁜 때에는 하녀 중 하나를 갑자기 잡아당겨서 뺨에서 살을 베어 물고, 가슴과 어깨를 물어 뜯었어요. 하녀의 손가락에 바늘을 꽂고 '아프면, 빼봐라. 이 음탕한 년아'라고 말했죠.
그러나 하녀가 손에서 바늘을 잡아 빼면 마님은 매질을 하고, 면도날로 손가락을 베라고 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처녀를 우리에 매달아놓고는, 도카(또 다른 고문자인)가 벌겋게 달군 인두로 지지고 찌르기 시작했다. 처녀는 인두를 피하려다 주변에 박힌 수백개의 창살에 찔렸다. 엘리자베스 백작부인은 성적 흥분상태에서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우리 밑에 놓은 의자에 앉아서 얼굴과 주름진 목, 팔에 비처럼 떨어지는 핏방울을 받으며 심지어 이를 마시기까지 했다.
가끔은 젊은 청년들에게 소름이 끼치는 '복수'를 하곤 했다. 그녀의 '처녀들'을 갈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다가 들킨 청년들에게 그 여자들의 살을 몰래 먹였던 것이다.
미치광이들
사람을 먹은 미치광이들이 있다는 사실에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임상 문헌에 기록된 사건 중에는 측두엽 간질 발작증인 환자가 아기를 프라이팬에 얹은 경우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중, 로만 폰 스턴베르크-운젬이라는 한 남작은 자신이 징기스칸의 후신이라 믿고, 인간의 피를 마셨다. 공산당원들이 그를 붙잡았다. 그는 1920년에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이런 이야기가 모두 사실은 아니다. 캐나다의 북부 산림지에 사는 크리 인디언과 오지브와 인디언 일부가 전문 용어로는 윈디고 정신병이라고 불리는 기묘한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주장은 거짓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병은 심한 불안증으로 초기에는 우울 증세를 보이다가 일반 음식을 혐오하게 된다. 그 이후에는 인육에 광적으로 끌리게 되며, 결국에는 식인에까지 이르는 병이다. 관련 저서를 샅샅이 훑어보아도 이른바 정신병이라 불리는 이 증상을 직접 관찰한 임상의나 인류학자, 또는 다른 객관적인 관찰자는 단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존재 가능성이 거의 없는 병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크라이나의 1947년 기근 때 식인행위가 벌어졌다는 보고가 있다. 니키타 후르시초프는 자서전에서 그의 부하가 "그 여자는 자식의 시체를 테이블 위에 놓고 토막내고 있었습니다. 칼질을 하면서 재잘댔습니다. '우리는 벌써 마네슈카(귀여운 마리아)는 먹었어요. 이제 바네슈카(귀여운 이반)를 소금에 절여 놓을 겁니다. 이걸로 한동안 견딜 수 있을 거에요'라고요. 상상이 가십니까? 이 여자는 굶주리다 못해 미쳐서 자기 자식을 도살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런 명백한 경우가 아닌 다른 사건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살인자들은 사디스트인가, 아니면 미치광이인가? 또는 둘 다인가? 다음을 읽고 독자는 어떤 판결과 형을 내릴 것인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배경은 1920년대의 베를린이다. 오토 프리드리히Otto Friedrich의『대학살 이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이 모든 연쇄 살인사건 중에서, 1920년대에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게오르그 하르만이라는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남자가 저지른 만행이었다. 그는 좀도둑을 밀고하는 비공식 경찰 요원이었다. 그로스먼과 마찬가지로 하르만도 하노버로 일거리를 찾아오는 농촌 젊은이 중에서 희생양을 고르기 위해 기차역 주변을 맴돌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그로스먼과는 달리 남자만을 찾았다. 그는 청년들에게 샌드위치와 맥주를 주며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 중 하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재운 후 젊은이를 강간하고, 결국에는 희생자의 목을 물어뜯었다. 하르만은 그 장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변호사에게 말했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 뒤의 일은 깜깜이었다. 다음날 소년이 하나 또 죽어있는 자기 방에서 정신을 차렸을 뿐인 것이다.
어느 날 아이들이 레느 강변에서 해골을 발견했다. 그리고 며칠 후 해골이 또 하나 강변에 쓸려 올라왔다. 경찰은 강물 바닥에서 24~26명 정도의 뼈를 발견했다. 그러나 누구도 이 해골과 하르만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실종된 소년의 어머니가 다른 소년이 아들의 재킷을 입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야 사건의 실마리가 풀렸다. 그 소년은 하르만의 하숙집 여주인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하르만은 헌옷 장사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시체를 잘 활용했다. "그는 시체를 깨끗하게 토막냈다"라고 당시 하노버에 살고 있던 소설과 빅키 바움이 말했다. "그리고 깔끔하게 삶은 고기를 다져서 양념했다. 이 고기를 돼지고기 또는 송아지 고기라고 표시된 항아리에 담았고 암시장으로 갔다. 고기는 꽤 비싸게 팔렸다. 하르만이 범행을 모두 털어놓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지만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저 걱정스레 숨겨놓은 식료품을 살펴보거나 몰래 토했고, 대부분은 비싸게 산 양념고기 항아리를 내버렸다."
하르만의 체포와 재판은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희생자의 어머니 한 명이 그에게 덤벼들려 했다. 그는 린치 당할까봐 두려워 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범죄나 예정된 사형 집행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다. 그 지역의 정신의학 교수인 테오도르 레싱은, 하르만은 정신이상자여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판사는 의사의 진술을 막았으며, 하르만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결국 하르만은 사형되었다. 사형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베를린의 아이들은 그에 대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뉴욕에서 교사로 있는 당시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에 '기다려요, 끈기를 가져요, 그러면 당신에게도 행복이 찾아올 거에요'인가. 그 비슷한 노래가 히트했었다. 그러나 모두들 가사를 바꾸어 불렀다."
기다려요, 조금만 더 기다려요.
그러면 곧 하르만이 작은 손도끼를 가지고 찾아올 거에요.
당신을 훈제할 거에요.
이 사건이 재발굴된 것은 어쩌면 필연일 수도 있다. 독일 영화 「늑대들의 친절함」(1973)은 이 사건을 현대화 한 것이다. 경찰은 하르만(코작의 동생처럼 생긴 배우가 역을 맡았다)을 정보원으로 이용하려 한다. 하르만은 친절한 정육점 주인답게 시체로 소세지를 만든다. 고기가 매우 부족하던 때에 만인에게 도움을 주는 듯이 보인다. 오케스트라는 배경음악으로 「사랑의 기쁨」 그리고 「자니 내 사랑」을 연주했다. 모두들 이 영화를 좋아한 듯이 보인다. 특히 비평가들은 표현주의 영화니, 천재성이 보이니 하며 찬사를 보냈다.
기타 형태
마지막으로, 기본적으로 나눈 어떤 부류에도 잘 들어맞지 않는 식인형태가 여러 가지 있다. 시킴의 로파족은 가장 기묘한 내집단 식인풍습을 지니고 있었다. 외부인을 잡지 못하는 경우, 결혼식 때 장모를 잡아먹었다. 일부 부족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잡아먹는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은 다시 차지해도 된다는 논리에 따른 것 같다. 우루과이의 차반트족의 어머니들은 출산때 소모한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사산된 아이들을 먹는다. 자기 자신을 먹는 식인행위도 몇 번 있었던 것 같다. 중국에서의 식인풍습은 윗사람에 대한 충성심과 부모에 대한 효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앞으로 또 다른 형태의 식인행위가 발견될 수도 있다.
특수한 경우 : 의학적 ,법률적, 심리적인 면에서....
미국의 모든 대도시에서는 교회 지하나 시민회권에서 근친상간의 피해자나 제례의식의 피해자를 위한 모임이 거의 매일 밤 개최된다. 교회나 다른 기관에서는 분열성 질환 환자나 악마주의 제례의식의 피해자를 위한 상담을 제공하고 있다.
- 《타임》지, 1993년 11월 29일자
구루병
(전략)구루병은 식인행위와 관련이 있는가? 미국 의사협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구루병은 진행성이며 치명적인 감염성 뇌질환으로 뉴기니 고지대의 일부 원주민에게서 나타난다. 구루병은 식인으로 인한 바이러스 전파로 인해 발생한다. 이 질병은 이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느리' 바이러스(몸에 침입한 후 수개월 또는 수년 후에야 질병의 증상이 나타난다)가 일으키는 질병이며, 잠복기는 길면 30년 정도에 이를 수도 있다. 점진적 운동 실조(失調), 결국에는 치매증상이 나타난다. 구루병의 병원체는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면역 결핍 바이러스)와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에 최근에 관심을 끌고 있다.
세실Cecil의 권위있는 저서『의학 교과서』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CJD(크로츠펠트-제이콥병)는 구루와 진전병(스크라피)과 매우 가깝다. 진전병(震顫病)은 양에게서 일어나는 해면상 뇌질환으로, 다른 동물에도 전염이 가능하다. 구루병은 과거 파푸아 뉴기니의 동쪽 고원지대에 거주하는 포어족에게서 풍토병으로 나타나는 질환이다. 소뇌기능 부전과 치매가 나타나며 2년안에 사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남자보다는 여자와 아이들이 잘 걸린다. 상황을 살펴볼 때 사망한 친지의 감염된 조직, 그 중에서도 특히 뇌를 손으로 만지게 되는 제례의식을 통해서 구루 병원체가 전염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풍습은 중지되었으며, 1959년 이후 구루병의 발병 수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구루병으로 죽어가는 환자의 뇌조직을 침팬지의 뇌에 접종하자 침팬지가 오랜 잠복기 후에 비슷한 질병을 일으켰다.
AMA백과사전에서는 구루병이 식인행위로 전파된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세실의 고전적인 교과서는 "상황을 살펴볼 때..... 손으로 만지게 되는 제례의식을 통해서 구루 병원체가 전염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두 설명은, 격론의 일부분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그 논쟁은 다음과 같이 벌어졌다.
국립보건소 소속의 다니엘 칼톤 가듀섹Daniel Carleton Gajdusek박사는 구루병의 근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식인행위를 하는 장례의식때 감염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76년에 그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사이언스》지에, 널리 인용되는 사진을 발표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한 사진은 구루병으로 죽은 여인을 보여주려 했고, 바로 아래 사진에서는 포어족 몇몇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고기를 먹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캡션에는 파푸아 뉴기니의 포어족이 인육을 요리해 먹는다고 적혀있다. 이 사진을 보고 캡션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인풍습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의 사진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가듀섹은 이 사진이 돼지를 잡아먹는 잔치를 찍은 것이었다고는 인정하지만, 포어족이 실제로 식인행위를 하는지를 의심하는 자들을 거세게 반박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주민 전체가, 총리에서부터 모든 사람이 이들이 식인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나이든 사람들은 친척들을 요리해 먹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누가 누구를 먹었고, 언제 먹었는지를 열거한다."
뒷처리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가듀섹은 그 뒤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찍었다고 주장하는 식인행위 사진을 공개하기를 거부했다. "이와 관련되었거나 이에 대해(식인풍습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논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런 주장에 대꾸하는 것 자체가 체면 깎이는 일이다."
뉴기니의 헤와족을 연구한 라일 스티드먼Lyle Steadman도 가듀섹의 주장에 반대하는 쪽이다. 그는 가듀섹의 2가지 주장 모두에 의문을 표했다. 첫 번째 주장에 대해서 스티드먼은 뉴기니 원주민들을 두고 다른 부족 사람들이 식인종이라고 한다거나, 그 자신들도 과거에 식인종이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것은 유럽에서의 마녀 사냥과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마녀라고 해서 사형당한 사람들은 많았다. 많은 수의 여자들은 법정에서 자신이 마녀이며, 아기들을 먹었다고 했다."
두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단순히 이렇게 반박했다. "식인 풍습은 구루병의 전염에 무관하다. 뉴기니 원주민들의 매장 풍습에 의해서 여자와 아이들이 구루병 바이러스에 접하게 될 수는 있지만, 두개골과 시체를 손으로 만지는 것이 크게 작용한다. 눈이나 코, 잎에 닿아서 점막을 통해 전파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 바이러스를 먹었다고 해서 구루병에 걸릴 확률은 거의 없다." (중략)
윌리엄 아렌즈William Arens는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억제된 표현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 주제를 조사하는 동안, 가듀섹(1978)과 일련의 서신 교환을 했다. 그는 친절하게도 답변해 주었으나,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이 인쇄중이었을 때 가듀섹은 이 문제를 보다 조심스럽게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에 와서는 '혈류에 직접 침투하는 방법 외에 감염된 조직을 먹거나 마셔서, 또는 그 외의 방법으로 감염될 수 있다는 수긍이 가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이 다시 바뀌었다. 그 후 1986년 《사이언스》지 기사에서 가듀섹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 모두 그들이 식인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는 100퍼센트 기록된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런 논쟁에 참여하는 자체가 체면 깎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식인행위를 하고 있는 사진이라고 주장한 사진들을 발표하지 않는 것은 너무 혐오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고 나서 '엉덩이가 무거워서 뉴기니에 가지도 않는 책상물림 인류학자들'을 비난했다. "가기만 하면 수백 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의 점잖음과는 거리가 먼 훌륭한 말이다.(후략)
미뇽넷 호의 마지막 항해
1884년에 요트 미뇽넷 호의 생존자인 2명의 훌륭한 선원이 리처드 파커Richard Parker라는 어린 동료선원을 잡아먹기 위해서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 무시무시한 사건은 영미법 연구자들에게는 익숙한 '여왕 대 더들리와 스티븐스'라는 유명한 판례로 남아있다. 영국 고등법원의 법정판사 5명은 배가 아무리 고플지라도 동료를 잡아먹으면 안된다는 판결을 내렸다.(중략)
< Richard Parker and the Mignonette >
독자도 깨닫고 있겠지만 식인행위에는 2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 차이는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즉 여기서 의미를 지니는 논점은 식인행위 자체가 아니라 살해여부이다. 브라이언 심슨Brian Simpson은 100년도 더 지난 미뇽넷호 재판을 논의하면서 이 점을 상당히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는 미뇽넷 사건은 '불가피성 변론'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중심적인 판례라고 생각한다. 생존본능과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엄수하는 도덕률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극명하게 다룬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만일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이것은 법적으로 허용되는 일인가, 허용되어야 하는 일인가?(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