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비문서를 불태우다.
단오절인 음력 5월 5일이 되자 김좌진은 노비들을 보내 안동 김씨 가문의 어른들과 마을의 촌장을 비롯한 주민들 몇몇을 초청했다. 김좌진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르는 어른들이 더 많았다.
문간채 앞마당과 안채 안마당에는 체일이 쳐지고 사랑마루 앞에는 멍석과 밀대방석이 스무장이나 펴져 있었다.
김좌진은 당숙 김창규를 모시고 오라고 쇠돌이를 보냈지만 대답도 하지 않고 오지도 않았다.
“여러분,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당숙 어른을 뵙고 오겠습니다.”
김좌진은 말에 올라 당숙의 집으로 찾아간다.
“당숙 어른, 며칠전 일은 용서하시고 저하고 같이 가셔서 노비를 해방시키는 일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김좌진이 마당에서 절하고 읍한 뒤에 이렇게 말을 꺼내자 당숙은 더욱 노여워하며 역정을 냈다.
“뭐라고? 네놈이 양반 체면을 망쳐놓고 그래도 나에게 종들을 풀어주는 일을 어찌 그리 뻔뻔스럽게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느냐? 참 염치도 좋은 놈이로구나!”
“당숙 어른께서는 못마땅해 하시겠지만 이제 우리 집의 종들은 오늘로서 종살이가 끝나고 자유의 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천한 놈들 좋을 대로 해주면 너와 네 어미에게 무엇이 이로운 게냐?”
“우리 나라 전체가 이제 양반과 상놈을 구분짓지 않고 종들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줄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왜놈들에게 국권이 전부 넘어가게 생겼는데 조선의 양반들이 신분에 걸맞는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국모를 시해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데 그까짓 조선의 양반들이야 여반장이지요.”
“.....”
당숙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앉아 있었지만 김좌진은 설득을 그치지 않는다.
“당숙님, 앞으로 무엇 때문에 종으로 있던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으려 하십니까? 앞으로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저 사람들의 손을 빌어야 할 텐데 무엇 때문에 인심을 잃고 사시려 하십니까? 못 이긴채 하고 따라 오시면 대우 받으실 일을 왜 이리 고집하십니까?”
한참 침묵이 흐른다. 이윽고 당숙은 몸을 움직여 마당으로 나왔다. 좌진은 환한 얼굴로 당숙을 모셔서 자신의 말에 태웠다. 그리고 종조부인 김병원의 집을 찾아간다.
“할아버지, 저희 집에 마침 좋은 술을 사 놓았는데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모시고 왔습니다.”
“응, 그래? 곧 나가마.”
김병원은 즉시 응락하고 노비를 불러서 차비를 차리라고 지시했다.
당숙과 종조부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온 좌진은 집안 어른들에게 방석에 앉도록 권하고 마루밑 멍석에는 종들을 차례로 앉게 하였다. 그리고 상석의 어른들에게 절을 한 뒤 종들 앞에 서서 읍한 다음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단오절인지라 집안 어른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술을 마시며 즐기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중대한 일을 발표하려고 이리 어려운 발걸음을 하여 모시도록 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단군왕검(壇君王儉)께서 개국(開國)하신지는 4천여년이 지났고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뉘어졌다가 신라가 당나라의 구원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붕괴시키고 다시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이 반도(半島)를 통일하여 백성들을 통치하다가 조선왕조가 창건된지도 5백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나라는 남북인(南北人)·노소론(老少論)의 사색당쟁(四色黨爭)으로 얼룩지고 수구파(守舊派)와 개화파(開化派) 간의 정치투쟁으로 어지러워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양반과 상놈, 적자와 서자, 상전과 종 등으로 구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러한 제도는 모두 사대부(士大夫)의 손에서 좌지우지되어 왔습니다. 사람이면 모두 같은 사람인데 어느 사람은 대를 이어 양반이고 어느 사람은 대를 이어 상놈이라니 이것이 말이 되는 소립니까? 나는 지금 여러분을 자유의 몸으로 해방시켜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누구에게 매인 몸이 아닙니다. 종도 아닙니다. 어디를 가거나 무엇을 하거나 여러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아서도 안 되고 누구를 간섭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원래 사람의 몸에서 나온 사람의 자식으로 양반도 아니었고 상놈도 아니었으며 물론 종도 아니었습니다. 나라의 제도가 잘못되어 여러분과 여러분의 조상들을 고생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잘못된 제도는 이제 고쳐져야 합니다. 그래서 양반도 없고 상놈도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나라를 위하여 서로 힘껏 돕고 자기 능력껏 일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아무 대책없이 우리 집을 나가면 생계가 막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 여러분의 생활대책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걱정 마시고 각자 하고 싶은 생업에 종사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좌진은 집안 어른들과 종들이 보는 앞에서 노비문서를 차례로 찢어 불태웠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좌진의 집 종들은 크게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좌진은 이어 종들에게 토지문서를 나누어 주고 말을 이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나누어 준 토지는 원래 여러분의 것입니다. 우리 집안은 여러분이 열심히 일해준 덕분으로 여러분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을뿐 우리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우리 집에서 일하듯이 열심히 일하여 지금까지 돈을 모았더라면 왜 그것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사회제도가 잘못된 것 때문에 여러분의 노동력을 착취해 살아온 것입니다. 앞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굽히지 말고 우리와 동등한 입장에서 모든 일들을 처리해 나가시길 바랄 뿐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본 집안 어른들은 숙연한 모습으로 좌진의 처사가 백번이고 옳다고 칭찬했으며 촌장과 마을 사람들도 감탄했다.
노비 신분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가노해방(家奴解放)이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부터 무엇이든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고 또한 자기 처자식을 자기 뜻대로 지킬 수 있고 자기 재산도 생겼다는 것에 흥분과 기대를 가지고 젊은 주인에게 감사했다. 늙은 종들은 모두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엎드려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잔치상에 놓였던 음식들을 자시라 하니 맛있게 줏어먹는 것은 아이들뿐이었고 어른들은 술만 마신다.
김석범은 토지분배를 옆에서 도와주며 좌진의 기백을 크게 칭찬했다.
“자네가 그 어린 나이에 낡은 사회적 풍습을 버리고 과감히 근대화에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모두가 탄성을 자아내고 있네.”
“별 말씀을..... 저는 십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열일곱살의 좌진은 활짝 웃으며 얼마 전 자신의 노비였던 사람들에게 술잔을 권하는데 바빴다. 어제까지 그렇게 속상해 하던 좌진의 어머니도 오늘만큼은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다.
★ 호명학교(湖明學校) 설립
자기 집안의 가노(家奴)를 해방시킨 김좌진이 두번째로 뜻을 둔 일은 바로 낡은 신분제도 때문에 문맹이 된 백성들에게 교육을 전개하여 문맹퇴치에 앞장서는 일이었다. 김좌진에게는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은 김석범이란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지만 그 한사람만으로는 학교를 세워 교육계몽운동(敎育啓蒙運動)을 벌이겠다는 김좌진의 뜻을 제대로 뒷받침할 수 없었다.
그는 오래 고민하던 끝에 종조부인 김병원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좌진이 네가 가노해방을 거행한 것은 나도 잘한 일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 집안은 아직 종들을 풀어주기에는 문제가 있어. 아흔아홉칸이나 되는 집을 도대체 누가 관리할지 막막해진다. 우리 식구들도 반대할테고...”
“종조부님께서 그와 같은 생각을 하신 것도 대단한 개화입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조정은 이미 오래 전에 갑오경장(甲午更張)을 통해 노비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는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지요. 게다가 왜놈들이 우리 나라의 모든 권한을 틀어쥐고 있는 이상 양반도 상놈도 구분될것 없이 조선 사람은 전부 왜놈들의 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슬픈 현실입니다.”
“휴우... 어쩌다 나라 꼴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
종조부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김좌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끄집어낸다.
“비록 나라의 국권이 언젠가는 왜놈들에게 넘어가겠지만 우리 민족이 영원히 왜놈들의 종으로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떤 방법을 쓰든 끈질기게 싸워 독립을 쟁취해야지요. 그런데 문제는 조선의 백성 대부분이 학문을 배운 적도 없고 심지어 글씨 하나조차 쓰지 못하는 문맹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백성들이 일치 단결하여 독립을 이루는 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선 우리 마을에 학교를 세워 마을의 아이들부터 무식함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일을 할까 합니다.”
“그게 쉬운 일인가?”
“할아버님이 앞장서서 학교를 창설하셨으면 합니다. 교사(校舍)를 따로 지을 필요도 없이 이 집에서 교육을 하면 되니까요.”
“뭐라고? 말을 하면 쉽지만 그게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종조부는 심각한 얼굴로 반문한다. 그러나 좌진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다.
“제가 풀어준 종들이 30여명 정도 되고 우리 동네에는 노비들의 자식들이 많으니 그들을 다 받기로 한다면 학생을 50여명 정도 모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만 영입한다면 학교를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김좌진의 계획이 타당성이 있었다. 그 때 갈뫼마을에는 양반 신분의 가족 20여호를 빼놓고 서당이라도 다닌 젊은 사람이 없고 양반 가문에서도 공부를 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김병원은 즉시 마을에서 알아주는 기술을 지닌 목수를 불러 자신의 집 바깥채 30칸을 뜯어 고쳐 교실로 만들도록 지시했다. 집안 어른들 가운데 가장 재력이 좋은 종조부가 적극적으로 김좌진의 뜻을 동조하니 그의 마음은 날아갈 듯 기뻤다.
김좌진은 김석범이 운영하는 한약방을 찾아가 종조부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전했다. 김석범도 반가워하며 김좌진의 어깨를 두드리고 격려했다.
“좌진 아우, 참으로 큰 일을 두 번 행하는구먼. 그런데 학교를 세우려면 교육방식부터 먼저 의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 때문에 제가 형님을 뵈러 온 것입니다. 형님께서 교육방침과 교재를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김좌진과 김석범 두 사람은 해가 저물도록 머리를 맞대고 학교 설립에 대한 계획을 의논하고 설계했다.
학교 설립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한 어느 날 김좌진은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선생을 만나기 위해 산수동의 인지재(仁智齋)로 말을 몰았다.
지산 선생은 성균관대사성·승정원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던 관료 출신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에 반발한 민종식(閔宗植)이 1906년 5월에 홍산(鴻山)에서 거의(擧義)를 선언하자 군자금을 의병부대에 대주며 배후에서 항일전(抗日戰)을 지도하고 있었다. 훗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전국 유림 137명의 청원을 받아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한 인물이었다.
“네가 좌진이로구나. 집안의 종들을 풀어주고 논과 밭까지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산 선생은 김좌진의 절을 받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김좌진은 지산 선생의 표정을 살피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어르신께서는 그 일이 노엽지 않으신지요?”
지산 선생은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의 입장에 선 유림이었기에 김좌진의 가노해방에 호의적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의외로 지산 선생은 김좌진을 칭찬하고 있다.
“이미 우리 나라가 서양식 제도와 문명을 받아들인지 오래인데 양반과 상놈의 구분도 언젠가는 없어져야겠지. 우리 가문에도 너 같은 깨어 있는 청년이 자라고 있구나.”
김좌진은 용기를 얻어 자신이 학교를 세워 문맹퇴치에 나서겠다는 계획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지산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좌진의 뜻에 지지를 표한다.
“좋은 생각이다. 배운 놈들도 나라를 팔아먹고 있는데, 백성들이 무지하여 배우지 않으면 어찌 왜놈들을 막겠느냐?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다 사람이 아니다. 가진 생각과 하는 행동이 올발라야 진짜 사람인 것이다. 지금까지 나라가 잘못 돌아간 것은 위정자(爲政者)의 책임도 있겠으나 무지한 민중의 책임도 있다. 네가 민족교화의 길을 택하여 학교를 세우겠다니 어른다운 착상이다. 학교 이름을 호명(湖明)으로 하도록 해라.”
지산 선생이 학교 이름까지 지어주자 김좌진은 훈훈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학교를 운영하는데 있어 선생님의 조언을 구할까 합니다. 많은 지도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집안 어른과 김석범의 도움으로 학교를 개설하게 된 김좌진은 ‘호명학교(湖明學校)’란 간판을 내걸고 1906년 6월에 학생 40여명을 모아 개교식을 가졌다. 김석범은 개교식의 사회를 맡아 먼저 자신의 집 바깥채를 교실로 개조하고 비품까지 준비해준 김좌진의 종조부 김병원을 소개했다. 김병원은 학생들과 내빈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이 갈뫼마을의 늙은이가 어찌 세상의 일을 짐작이나 했겠소? 나의 종손 좌진이와 김광호 선생의 조카 되는 석범 군의 애국심은 참으로 지하에 계신 조상의 영혼들마저 감복시킬 만하오. 우리 나라가 이대로 왜놈들의 땅이 된다면 우리 모두 왜놈의 종이 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목숨을 지탱하기 어려운 실정이라오. 인생은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한다 했으니 이 놈도 갈 때가 얼마남지 않있기에 재물을 아껴 다 무엇하겠소? 여러분이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의 강한 동량이 되어주기 바랄 뿐이오.”
김병원이 간략한 몇마디로 인사를 끝내자 학생과 내빈들은 박수를 쳤다.
“다음으로 교장 선생님께서 개교기념의 말씀을 하시겠습니다.”
김석범의 말이 끝나자 김좌진이 연단에 서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제 과거의 악습에서 벗어나 변화되는 국제 정세를 살피며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총과 대포로 무장한 외국의 군인들이 수천명씩 경성에 들어와 자기 나라에 유리하도록 서로 이권 다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왜놈들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자 황실을 위협하고 내정을 간섭하여 우리 나라의 군대를 축소시키고 그 군권마저 손아귀에 넣고 좌우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외교권까지 박탈해 갔으니 실제는 나라가 없는 것가 다름없습니다.
여러분,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선조들은 다른 나라가 열심히 국력을 키우고 있을 때 도포를 입고 정자에 앉아 장죽만 들고 종들만 부려먹으면서 외국의 좋은 문물은 배척했기에 나라가 발전없이 후퇴하여 이 꼴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갈뫼마을에서는 다른 나라가 강국으로 발전한 원인을 배우고 다른 나라보다 연구하고 개발하는 학구의 전당을 만들기 위하여 나도 배우고 너도 배우는 학교, 즉 선생도 배우고 학생도 배우는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에 그 이름을 호명학교라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속과 겉을 모조리 한꺼풀씩 벗겨내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여 다른 나라의 국민보다 몇십배 피나는 땀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이 시각부터 과거를 버리고 새롭게 힘을 합쳐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이 일은 멀고도 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뜻만 있으면 무서운 것이 없고 못할 일이 없습니다.”
김좌진의 이같은 개교인사는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이같이 개교행사가 끝나자 바로 좌석을 배정하고 교단 위에는 태극기를 사방에 펴서 걸어 놓고 수업을 시작하였다. 수업은 김좌진과 김석범이 번갈아 가며 강의했지만 학생 수에 비해 강사가 부족하다는 현실에 직면하자 교장인 김좌진이 서울로 올라가서 김석범과 친분이 있는 박성태(朴性泰)를 만나 호명학교의 교사로 초빙하였다.
호명학교에서 신학문을 가르친다는 소식은 인근 고을에도 널리 알려져 아이들을 학생으로 보내겠다는 부모들이 늘어나 학생 수는 어느덧 60여명에 이르렀다. 그러던 가운데 김좌진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홍주성(洪州城)을 점령하고 있던 민종식의 의병부대가 다나카[田中參] 소좌(少佐) 휘하의 일본군 2백여명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패퇴했다는 것이다. 민종식은 지산 선생의 후원을 받던 의병대장이었다. 김좌진은 지산 선생에게서 변고가 생기지 않을까 하여 크게 우려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