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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2.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다 ⑴

대모달 |2011.06.10 20:14
조회 169 |추천 0

 

★ 분노에서 실천의 길로

 

1907년 6월에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이 벌어졌다. 대한제국의 고종(高宗) 황제가 일제(日帝)의 압력으로 퇴위당한 것이다. 신민회(新民會)에서 활동하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지사(志士)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최초로 입수하고 고종의 매부(妹夫)인 조정구(趙鼎九)의 아들 조남익(趙南益)을 통해 이 사실을 고종에게 알렸다. 그리고 밀사(密使)를 파견해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도록 하는 거사(擧事)를 건의했다.

 

이에 고종은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을 은밀히 특사로 파견했으나 일본 측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이준은 현지에서 의문사(疑問死)하였다.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은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포위하여 강제로 고종을 황위(皇位)에서 물러나게 하고 황태자 이작(李坧)을 순종(純宗)으로 즉위시켰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자들이 제멋대로 황제를 갈아치웠다는 소식이 빠르게 확산되자 한국 국민들의 반발은 더욱 심해졌다. 각처에서 격분한 군중이 일본 경찰관들과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는 의정부(議政府) 참정대신 이완용(李完用)의 협조를 받아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하였다. 더욱 우스운 일은 이 조약문이 공식석상이 아닌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관저에서 조인(調印)되었으니 근대역사상 불법도 이런 불법이 일찍이 없었다.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속히 한국의 부강(富强)을 도모(圖謨)하고 한국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게 할 목적으로 좌(左)의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제1조 한국 정부는 시정개선(施政改善)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수(受)할 것

제2조 한국 정부의 법령의 제정 및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쳐야 할 것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구별할 것

제4조 한국 고등관리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로서 이를 행할 것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없이 외국인을 한국 관리에 용빙(傭聘)하지 말 것

제6조 메이지[明治] 37년 8월 22일 조인한 일한협약(日韓協約) 제항을 폐지할 것

제7조 우(右) 근거로서 하명(下命)은 각 본국정부로부터 상당한 위임을 받고 본 협약에 소인하는 것

 

메이지[明治] 47년 7월 24일 대일본제국 한국통감 후작 이토 히로부미 광무(光武) 8년 7월 24일 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이 소문을 듣고 흥분한 열아홉살의 청년 김좌진(金佐鎭)은 지금 나라가 이 지경이 되어 가는데 갈뫼마을에서 수십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만 매진해서는 안되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호명학교는 날로 번창하고 있었지만 김좌진의 마음은 분노와 씁쓸한 기분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김석범과 박성태를 교장실에 불러 자신의 뜻을 전했다.

 

“나는 나라를 구할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명분으로 이 학교를 세웠지만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어떻게 손쓸 수 없다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소. 하기는 이런 학교도 장래를 위해서는 필요하기도 할 것이오. 그러나 지금의 우리 나라는 장래 일꾼보다 지금 당장 목숨을 내놓고 구국의 대열에 뛰어들 그런 투쟁적 인물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소? 나는 더 이상 갈뫼마을과 호명학교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소.”

 

“그렇다면 어떻게 하려는가?”

 

“서울에 올라가 내가 할 일을 찾아보겠소. 내가 없는 동안 학교는 석범 형님과 박 선생 두 분이서 맡아 주시오.”

 

김좌진은 구국운동(救國運動)의 시야를 넓혀 효과적인 열매를 맺기 위해 서울에 가기로 한 것이다.

 

“잘 생각했네. 나도 언젠가는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네.”

 

김석범은 김좌진의 결심에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박성태도 김좌진의 손을 덥석 잡으며 격려했다.

 

“장도를 축하하네. 내가 필요할 때는 서슴치 말고 부르게. 나도 단숨에 달려가겠네.”

 

결심이 선 김좌진은 어머니와 아내 오숙근, 그리고 아우인 김동진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남아로 태어나 나라의 어지러움을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 하여 외면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은 장부다운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집을 떠나 애국지사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나라를 구할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동진이도 이제 다 컸으니 집안 일은 동진이에게 맡기셔도 무방할 듯합니다.”

 

김좌진의 말을 듣고 어머니 이씨는 고개를 숙일 뿐 말이 없었다. 아내 오숙근도 처연한 표정으로 김좌진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갈뫼마을의 부자집 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호강할 것이란 친정 식구들의 기대와는 달리 가노(家奴)를 해방시키고 전답도 다 그들에게 떼어주며 이제는 학교를 세우는 일에 집안의 재정을 거의 써서 자신이 직접 힘든 일에 나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 뒷바라지까지 하게 하여 고생만 시키더니 이제는 나라를 구한답시고 홀로 서울로 가겠다는 남편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조선의 전통 양반가문의 며느리로서 남편이 하려는 일에 감히 반대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동생 김동진도 긴장된 눈빛으로 김좌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네 뜻이 정녕 그렇다면 이 어미가 어찌 말리겠느냐? 그러나 네 안사람을 데리고 가거라. 아내의 인종(忍從)은 오직 남편과의 생활에서만 의미가 있는 법이다. 어차피 뜻을 세웠으면 집안 문제는 염려하지 말고 네가 하려는 일에만 전념하거라.”

 

어머니 이씨가 며느리인 오숙근을 바라보다가 김좌진에게 당부했다. 김좌진은 아내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무조건 거역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치더라도 각오하고 인내해야 할 것이오.”

 

그렇게 해서 김좌진은 어머니와 동생과 작별하고 홍성을 떠나 서울의 변두리 가회동(嘉會洞) 취운정(翠雲停) 근처에서 거주지를 잡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김좌진이 서울에서 거주하기 시작하는 동안 다시 나라 안에는 변란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1907년 8월에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되고 이 조치에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항쟁에 가담함으로써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이 전개되었다. 종래의 유생들이 조직한 의병부대는 무장력도 전투력도 전략·전술도 형편없는 오합지졸(烏合之卒)에 불과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백전백패(百戰百敗)하기 일쑤였으나, 해산 군인들이 의병부대에 가담함으로써 활동 지역이 넓어지고 전투력도 강화되면서 보다 다양한 작전을 구사하여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히며 승리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1908년 3월에는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 두 한국인 청년이 미국 오클랜드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는 동양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다”는 망언을 한 미국인 외교관 스티븐스(D.W. Stivens)를 처단하는 의거(義擧)를 결행하였다는 소식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김좌진은 스티븐스 암살 소식을 듣고 육군무관학교 교관이었던 노백린(盧伯麟)을 찾아갔다.

 

“김 동지, 반갑소. 언제 올라 오셨나?”

 

“어제 아주 올라왔습니다.”

 

“그러면 호명학교는 누가 관리하나? 그만 집이치웠나?”

 

노백린은 성격이 호방하고 직선적이었다.

 

“고향선배에게 운영을 위임했습니다. 아, 근데 통감부 외교고문을 지낸 스티븐스가 죽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전명운과 장인환이라는 두 애국지사가 암살했다네. 특히 전명운이란 친구는 담양(潭陽) 전씨(田氏)로 미국에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조직한 공립협회(共立協會)의 회원이었다네. 미국의 재판정에서는 그의 애국심에 도취되어 무죄로 석방했지만 장인환은 아직 재판이 진행중이라고 하더군.”

 

김좌진은 사실을 확인하니 의기가 하늘을 치솟는 듯했다.

 

“묵은 체증이 다 뚫리는 듯합니다. 참으로 장한 일입니다.”

 

그 때 한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노백린이 김좌진에게 그를 소개한다.

 

“서로 인사나 나누지. 이 사람은 나와 같이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다닌 윤치성(尹致晟)씨일세.”

 

“저는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김좌진과 윤치성이 서로 악수를 나눈 뒤 노백린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김 동지 같은 청년들이 뜻을 세운다면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네. 나는 조만간 실암(實菴) 권동진(權東鎭) 선생에게 김 동지를 천거하여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가입시키고 언론기관에 침투시킬 것이네.”

 

“잠깐만...!”

 

김좌진이 노백린의 말을 끊는다.

 

“대한협회라는 정치단체는 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라는 왜놈이 운영자금을 대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찌 왜놈이 운영하는 어용단체에 들어가 나라를 팔겠습니까?”

 

“자네의 말이 옳지만 꼭 왜놈이 배후에 있다고 해서 왜놈들 뜻에 조종당하는 건 아니야. 대한협회에는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위암(韋庵) 장지연(葦庵張)·석농(石儂) 유근(柳瑾) 같은 애국적인 언론인들이 많이 포진돼 있네. 이 단체는 왜놈들의 돈을 끌어모아 국가의 부강을 꾀하고 교육과 산업의 진흥에 힘쓰면서 국민의 자질을 향상시키려는 계몽운동에 이용하고 있지.”

 

“그래서 제가 언론사에 들어가 무얼 해야 합니까?”

 

이번에는 윤치성이 설명한다.

 

“요즘 각 언론사에는 곡필아일(曲筆阿日)이란 말이 유행한다고 하오. 왜놈들의 폐간 압력을 피하기 위해 사실과 다르게 신문을 만들어내고 있지요. 지금 언론사 중에는 여태까지 배짱껏 버티고 고통을 참는 것이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인데 그로 인하여 왜놈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간접적으로 돈줄을 끊기 시작했다오.”

 

“그래서 나는 황성신문의 김상천 사장에게 주주총회를 긴급히 열도록 하고 현시점에서 왜놈 때문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말고 일본인들이 우리를 밉게 봐서 돈줄이 끊겨 운영난에 봉착했다고 설명하고 임시 결산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자금을 충당해준다고 말하면 되지. 그러면 김 동지가 황성신문의 이사직에 오르기는 여반장 아니겠나?”

 

노백린이 이렇게 말하자 김좌진은 아직 약간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이었다.

 

“자금을 충당할 여력은 있어요?” 

 

“내가 수안에서 금광채굴사업을 하고 서울에서는 피혁상을 경영하는데 요즘 매출이 그럭저럭 잘 되니 그 이익으로 자금을 충당하면 될 것이네.”

 

노백린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김좌진을 바라보았다.

 

★ 비록 침략의 원흉이 쓰러졌어도...

 

노백린(盧伯麟)의 계획은 한치의 착오없이 맞아들어 김좌진(金佐鎭)은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의 이사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는 첫 이사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최연소 이사답지 않게 신문사의 정도유지(正道維持) 문제에 대한 대책을 거침없이 늘어놓았다.

 

“황성신문은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의 입장을 대변하고 외세의 침략을 규탄했던 애국적인 언론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왜놈들의 압력으로 신문사를 운영하는 자금이 자주 끊기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지를 가지고 끝까지 정도(正道)를 지켜야 할 것이며 그래야만 언론이라 할 것입니다. 저는 학문이 일천하고 나이도 어린데다 신문의 생리도 잘 모르고 그 일을 해낼지 두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맡겨주신다면 비틀거리는 나라의 운명을 다시 세운다는 일념으로 선두에 서서 악랄한 왜놈의 탄압에 맞서 이겨낼 각오는 돼 있습니다.”

 

김좌진의 말이 끝나자 신문사의 이사들이 하나같이 박수를 치며 호응하였다.

 

김좌진은 황성신문의 이사직을 맡으면서 동시에 경성고아원(京城孤兒院)의 총무로도 재직하면서 활발한 계몽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같은 계몽운동은 한반도를 자국의 새로운 영토로 삼으려는 일본의 야욕을 분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민족경제를 파탄시키는 일본의 수탈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1908년 7월에는 홍삼전매법(紅參專賣法)을 공포하고 9월에는 일한와사회사(日韓瓦斯會社)를 설립하였으며, 11월에는 어업권(漁業權)을 공포하고 12월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설립하여 민족자본을 강탈하고 각종 이권을 독점하였다. 이에 반발하는 국민들이 늘어가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타도하기 위한 의병항쟁이 활발해졌다.

 

의병들은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烏合之卒)이었고 화승총(火繩銃)이나 궁시(弓矢) 같은 구식 무기로 무장하여 신식 양총(洋銃)을 갖춘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지면 항상 패퇴했다. 그러나 해산 군인들이 의병부대에 가담하면서 작전범위도 넓어지고 신식 무기도 갖추게 되면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등한 싸움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의병들의 유격전(遊擊戰)이 더 집요해지고 치밀해지면서 일본군이 패배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한국을 흡수하려는 일본 측의 계획은 더욱 늦추어질 수 밖에 없었다.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이 쉽게 진압되지 않고 빠르게 진행될 것만 같은 한국병합(韓國倂合)이 자꾸 늦어지자 일본 본토에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한국통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마츠무라 류노스케[松村雄之進]·토야마 미츠루[頭山滿] 등 이토 히로부미와 정적(政敵)관계에 있는 인물들은 “이토는 1년안에 한국병합을 추진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4년이 지난 지금까지 큰 진전도 없으며 조선인 무장폭도들에게 우리 군인들만 희생되고 있으니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라며 노골적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이 한국을 흡수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았으며 의병항쟁에 대한 토벌은 언젠가 성공적으로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그는 정치적인 마찰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한국통감(韓國統監)의 직책을 사임한다.

 

이렇게 나라 안이 일본군과 의병들간의 전쟁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이 어지러운 가운데 김좌진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추정(秋汀) 이갑(李甲) 등이 주도하는 서북학회(西北學會)에 참여하여 오성학교(五星學校)의 교감을 맡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가 창립되자 여기에도 가입하였다.

 

한편으로 김좌진은 서울에서 애국 청년들을 규합하여 비밀결사조직을 만들고 본격적인 배일민족운동(排日民族運動)을 전개하려 했으나 운영자금이 부족한 문제로 고민하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돈을 모아야 했다.

 

여러가지 구상 끝에 관철동(慣澈洞)에 염색상(染色商)을 차리고 무역상(貿易商)까지 운영하면서 반일운동(反日運動)에 종사하고 있는 동지(同志)들을 상인으로 가장시키고 비밀리에 연락까지 하는 방법을 마련했다. 그래서 이창양행(怡昌洋行)이란 대형상점이 세워졌다. 또한 이와 연계하여 중국과 접촉할 수 있는 평안북도 신의주에 염색회사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구상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목적은 애국 청년들의 규합과 연락장소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김좌진은 서울에서 논코뜰 새 없이 분주했다.

 

그러던 가운데 1909년 10월 하순에 황성신문사로부터 김좌진에게 급한 연락이 왔다. 먼 만주 땅에서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가 발생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브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에 왔다는 소식을 접한 안중근(安重根)은 우덕순(禹德淳)·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벨기에제 M1890 브라우닝식 권총(拳銃)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쓰러뜨렸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공로자이며 수상(首相)을 두 번이나 지낸 당시 일본 정계의 거물인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무명 청년에게 암살당한 이 사건은 국제사회에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참으로 통쾌하고 후련한 일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이란 청년은 어떤 인물입니까?”

 

“안중근은 최재형(崔在亨)과 이범윤(李範允)이 조직한 동의회(同義會)에서 의병부대를 구성하자 그 부대의 참모중장으로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에 참전했다고 하네. 지난 3월에는 11명의 동지를 모아 손가락을 끊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맹세를 했다는군.”

 

황성신문의 사장인 석농(石儂) 유근(柳瑾)의 설명을 듣자 김좌진은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것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식을 더욱 불사를 계기가 될 것입니다. 아! 우리 나라에 아직도 그같은 의로운 사람이 있었다니.....”

 

이토 히로부미 피살에 충격을 받은 일제(日帝)는 한국병합을 더 늦출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시켜 한국병합에 대한 건의서를 내도록 했다. 그러나 12월 22일에는 종현천주교회당(鐘峴天主敎會堂)에서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던 도중 애국 청년 이재명(李在明)의 습격을 받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재명은 이완용이 인력거(人力車)에 오르는 순간 비수(匕首)를 뽑아 서너번을 찔렀으나 허리와 어깨에 상처를 입히는데 그치고 이완용을 죽이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아! 어찌하여 하늘은 이완용(李完用)이나 송병준(宋秉畯) 같은 매국역적들에게 구차한 목숨을 붙여 주시어 연명하게 하는가?”

 

김좌진은 이완용 암살 미수 의거(李完用暗殺未遂義擧) 소식을 듣고 실망과 분통을 터뜨렸지만 자신이 더욱 분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안승구(安承龜)·민병옥(閔丙玉)·조향원(趙享元)·김찬수(金燦洙) 등 동지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싸우는 의병들에게 식량과 무기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軍資金)을 모금하는 활동에 나섰다.

 

1910년 3월에는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이 실시되어 일본의 농민들이 조선에서 농지(農地)를 많이 소유할 수 있도록 했으며 5월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신임 통감으로 부임한 후에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강제로 매수하여 매일신보(每日申報)로 바꾸고 훗날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삼았으며, 경성일보(京城日報)와 서울프레스 등 친일언론만을 남기고 나머지 신문을 폐쇄하는 언론탄압을 실시하였다.

 

마침내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은 이완용·박제순(朴齊純)·조중응(趙重應) 등 매국 대신들을 창덕궁(昌德宮)으로 불러모아 순종(純宗) 황제가 불참한 가운데 제멋대로 어전회의를 열고 병합조약문(倂合條約文)에 조인(調印)하는 형식적인 절차를 밟아 경술병합늑약(庚戌倂合勒約)의 체결을 완성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왕조(朝鮮王朝)는 고려의 무관(武官)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개창(開創)된 지 519년만에 종막을 내리고 한반도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새로운 영토로 흡수되어 식민지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일제(日帝)는 늑약 체결을 바로 발표하지 않고 7일이 지난 뒤인 29일에야 공포하였다. 우리는 8월 29일을 국치일(國恥日)로 여기고 있지만 실제 늑약이 체결된 날은 22일이었다.

 

그 날은 한국 민족의 초상날이었다. 하늘은 맑고 바람 한점 불지 않았지만 서울 거리는 상가집을 방불케 했다.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고 이곳 저곳에서는 통곡소리가 터져 나온다. 우국지사들은 나라를 되찾자고 다짐하고 국외로 떠났으며 일본군의 무자비한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으로 수많은 의병들이 희생되었다. 유명한 문장가인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 황현(黃玹)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끝내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이제 왜놈들이 개미떼같이 깔려 있는 서울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제는 해외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해 자금을 마련해야 하고, 자금을 모으려면 지하공작(地下工作)을 통해 반강제(半强制) 수단으로 모금해야 한다.’

 

처음부터 국권피탈의 불행을 예상하고 있었던 김좌진은 곧 자신의 행동방향을 정하고 동지들을 가회동 취은루 옆 자기 집으로 소집했다.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을 흡수하는데 성공하자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개편하고 일진회(一進會)·조선협회(朝鮮協會) 등 한국병합에 협조했던 매국단체 10여개를 해산시켰다. 전쟁이 끝나면 군복과 총기(銃器)를 버리는 이치와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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