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도범죄 혐의로 체포되다
대한제국이 병탄당하자 이제 조선 땅은 일본의 새로운 영토로 편입되었고, 서울 거리는 온통 일본 헌병들 일색(一色)이었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해산시키고 그 인원 일부를 헌병대 보조원과 경찰대 정보원으로 채용했다. 일본 헌병 한 사람에 친일조선인 5명씩 보조원으로 배정하여 조선의 민간인들을 모두 감시하였다.
조선 땅 전체가 마치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형세로 변해가고 있는 동안 가회동 막바지에 있는 김좌진(金佐鎭)의 집에는 노백린(盧伯麟)을 중심으로 윤치성(尹致誠)·신현대(申鉉大)·권태진(權泰鎭)·김한종(金漢鐘)·박상진(朴尙鎭)·안승구(安承龜)·민병옥(閔丙玉)·조향원(趙享元) 등이 술상을 차려놓고 모여 앉았다.
비밀결사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이었던 노백린은 국외에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설립하고 군사기지를 건설하여 현대적 군사훈련과 신식무기를 갖춘 정예 독립군을 양성, 무력(武力)으로 일제(日帝)를 구축하겠다는 조직의 방침에 따라 간도 땅을 시찰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김좌진과 그의 동지들은 내일 출발하는 노백린의 송별연을 열고 앞으로의 대책과 행동방략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노백린을 위한 간소한 송별연은 조용하고도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조심스럽게 열렸다.
모인 사람들은 일본군의 토벌로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의병들과 반일지하공작(反日地下工作)을 펼치던 가운데 일본 헌병들의 탄압으로 희생된 동지들을 생각하며 한숨지었고 조국 독립을 위하여 중국 영토로 떠나는 선배들을 위로하며 장도를 축원했다.
김좌진이 “백번을 죽더라도 광복(光復)의 그날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하니 노백린은 답사로서 “백야(白冶) 같은 동지를 국내에 두고 떠나니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남아 있는 동지들이 일심단결(一心團結)하여 독립운동에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
밤은 깊어가도 술잔을 주고 받는 동지들은 아쉬운 마음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술냄새와 담배연기가 어우러져 방안은 침침하다. 그 향기는 취운루에 희미한 달빛과 어울려 조국의 광복이 오는 날 밝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전해주고 있었다.
이튿날 동지들의 전송을 받으며 노백린은 쓸쓸한 의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1910년 9월에 황성신문(皇城新聞)이 폐간되고 오성학교(五星學校)도 사실상 일본인이 장악하여 한국인들이 제작한 교육용 교과서도 모두 몰수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주차헌병조령(朝鮮駐箚憲兵條令)이 공포되고 다음달인 10월에는 조선총독부관제령(朝鮮總督府官制令)이 공포되어 조선인 귀족 74명에 대한 일본식 작위(爵位)가 부여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김좌진은 관철동 염색상(染色商)을 석유상(石油商)으로 바꾸고 신의주의 직물회사(織物會社)에도 석탄상(石炭商)을 겸하여 운영했다. 그리고 꾸준히 중국 서간도(西間島) 이주(移住)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습격하는 계획을 짰다. 김좌진의 책략에 따라 1910년 12월 14일 밤에 안승구·민병옥·조향원 세 동지가 경성서부 반석방 한림동에 있는 우성모의 집에 침입하여 돈 4원으로 만든 가제품 4개, 금지환 11개, 귀걸이 1개 등을 강취하였다. 17일 밤에는 경성북부 제동에 있는 남정철의 집을 다시 침입하여 그 집에서 손님으로 자고 있던 조시영·김용수 등의 돈까지 털어 20원의 돈을 강탈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강도행각을 벌이며 모은 돈은 애국지사들의 망명자금이나 이주비용으로 충당되었다.
김좌진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게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독립을 이루려면 오직 무력(武力)을 양성하여 전쟁을 벌이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친일파를 대상으로 강압적인 방법을 써서 군자금을 모으는 일도 이런 판단에서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회동에 있는 김좌진의 집에 노백린이 보낸 밀사가 찾아왔다. 밀사가 전한 노백린의 서신에는 군관학교 설립자금 10만원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씌여 있었다.
김좌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2만원의 돈을 모았지만 그 정도 액수로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종증조부(綜曾祖父)뻘 되는 김종근(金宗根)을 찾아가 따짜고짜 돈 5만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김종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김좌진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5만원이나 되는 큰 돈을 빌려달라는 것인가?”
“종증조부께서는 서울 장안에서 알아주는 알부자이신데 그만한 돈이 없겠습니까? 저에게 그 돈을 주시면 종증조부께서도 음덕(陰德)을 입어 좋으실 것입니다. 사람은 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한다지 않습니까?”
김좌진은 처음에는 부드러운 말씨로 김종근을 설득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종근은 쉽게 돈을 주려 하지 않는다.
“그 돈을 도대체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혹시 자네가 독립운동인가 뭔가 하려고 그 돈을 달라는 건 아니겠지?”
“왜놈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입니다. 좋은 일 하는데 쓰신다 생각하시고 좀 빌려 주시지요.”
“세상이 변했는데 너는 어째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여 재앙을 자초하는 것이냐? 우리가 조선의 백성이 되든 일본의 신민(臣民)이 되든 아무 탈 없이 잘 살면 그만인데 너처럼 독립운동 같은 무모한 행동을 하다가는 자신은 물론이요, 가족들까지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니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물러가거라!”
김좌진은 속이 끓어올라 벌떡 일어나서 김종근의 멱살을 잡았다.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나와 보고 말렸으나 말릴 도리도 없고 김좌진의 얼굴은 마치 성난 표범처럼 무서웠다.
“아니, 이게 미쳤나? 어서 놓지 못해!”
“왜놈들에게 빌붙어 사리사욕만 채우는 네놈에게 이런 사정을 하는 내가 바보였다. 아무리 나보다 연장자이지만 너는 정말 사람답게 살지 않았구나!”
김좌진은 김종근을 방바닥에 패대기치듯 내리꽂았다. 김종근이 널브러져 우는 소리를 내고 있는데, 권총을 든 경찰관들이 들이닥쳤다. 김종근의 식구들이 신고한 모양이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경찰서까지 신고해서 이 난리를 피운단 말이냐? 참으로 가증스럽구나.”
김좌진은 순순히 연행되어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미 민병옥·안승구·조형원 등 김좌진의 동지들도 잡혀와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친일파의 집을 습격해 강도행각을 벌였다는 사실이 낱낱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재판에 회부되어 1911년 5월 17일에 판결되었는데 안승구·민병옥은 징역 7년, 김찬수·조형원은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김좌진은 2년형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홍성군 갈뫼마을에서 운영되고 있던 호명학교(湖明學校)도 강제로 폐쇄되었고, 김좌진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 오숙근은 미어지는 가슴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갈뫼마을로 돌아온 오숙근은 시어머니와 시동생 내외를 책임져야 하는 신세가 되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방물장사를 시작했다.
호명학교 졸업생들과 폐교로 인하여 재학중 학업을 중단하게 된 학생들, 그리고 김좌진의 노비였다가 신분제에서 탈피한 사람들이 김좌진의 집에 찾아와 추수한 벼 한섬씩 지고 와서 곡간에 쌓아올렸다. 오숙근은 이것을 말렸으나 김좌진의 투옥으로 더욱 어려운 형편이 된 그의 가족들을 모른 체 할 수 없다고 하여 끝내 곡식을 내려놓고 떠나니 이것이 약 150석 정도 되었다.
그 이튿날 오숙근은 김좌진이 호명학교를 세우는데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김석범을 찾아가 어제 집에 들어온 벼 150석을 모두 팔아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이 곡식은 우리 집 곡식이 될 수 없습니다. 저런 은혜는 호명학교에서 열심히 지도하신 선생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부 선생님께 드려야 하겠지만 선생님이 받으실리 없고 그렇다고 가져온 사람들에게 도로 나누어 주기 어려운 일이니 다 팔아서 남편이 목표하던 군자금으로 내놓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김석범은 오숙근의 말에 머리를 숙이며 약방을 경영하면서 얻은 수익금 일부를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이렇게 하여 겨우 5만원의 돈이 마련되자 오숙근은 윤치성을 통하여 중국 땅에 있는 노백린에게 전달되도록 하였다. 그와 같이 볏섬을 처분하니 김좌진의 집 곡간은 텅 비어 참새들만 철없이 지저귀고 마굿간에는 고양이 소리만 들렸다.
오숙근은 서릿발 날리는 추워지는 계절에 차가운 감옥에서 콩밥으로 끼니를 때울 남편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만삭이 된 몸으로 머리에는 장사봇짐을 이고 이 부락 저 부락 장사를 다녔다. 그렇게 힘든 세월이 흐르기 시작해 6월 9일에는 오숙근의 몸에서 여아(女兒)가 태어났으니 김좌진의 첫번째 딸인 옥남(玉男)이었다. 아들을 얻기 바랬건만 여자 아이라 오숙근은 몸을 옆으로 누인 채 눈물만 흘리고 시어머니 이씨 부인도 며느리의 저런 모습에 심장이 터질 듯 했다.
아이를 순산한 김좌진의 아내 오숙근은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한 채 밖으로 나와 살림을 챙긴다. 집안형편이 어려운 줄 알고 이곳 저곳에서 미역을 사 보내고 산모의 건강을 묻는 목소리가 많았다. 오숙근의 친정 아버지인 오일영은 안성에서 사람을 보내 미역을 한짐 지워서 찾아가도록 했으니 사위가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딸 생각을 해서였다.
하루가 10년 같은 세월의 어둠 속에서 고생을 거듭하며 방물장수를 계속했지만 오숙근은 딸 옥남이 자라는 재미를 느끼며 위안을 삼았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