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영화 '써니'는 정말 정말 재미있었음.
감동이 쉬이 가시질 않아서 그냥 나 혼자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쓰는 글이고, 내 글이 늘 그렇듯 길고 지루하며
더구나 스포일러까지 있으니 읽지 않기를 권함.
2.원래 보려고 했던 영화의 상영시간을 놓쳐서
울며 겨자먹기로 봤던 같은 감독의 전작 과속 스캔들과 달리,
써니는 개봉 소식을 듣자마자 기대감을 한껏 키웠음.
그렇게 큰 기대를 안고 관람을 했는데도 결과적으로는
기대 이상이었음. 이건 정말 쉽지 않은 일임.
대개 천재감독들의 메이저 데뷔에 있어서 2연타를 치는 경우가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정말 쉽지 않은 일임.
3. 써니는 여러모로 지브리 애니메이션 '추억은 방울 방울'
-이하 '추방'-과 닮은 구석이 많음.
다만 스토리 구조가 '추방'과는 판이한데 스토리 구조만 두고
보자면 영화 '친구'와 더 닮아 있음. 물론 친구보다는
가볍고 화사함. 이야기의 얼개도 조금 더 조밀한 느낌이 듬.
(영화 도중 이야기가 더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쩐지 나아가지
않고 굳이 멈추는 듯한 구간이 더러 있었는데 감독판이 따로
나올 것이라니까 정말 반가운 소식임. 난 이 감독이 정말 마음에
듬.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확신이 과속 스캔들과 써니를 거치면서
더욱 공고해졌음.)
그러한 스토리 구조를 제외하면 추방을 많이 닮아 있음.
추방에서 시도되었던 재미있는 연출이나 설정등이 써니에서도
뚜렷이 비치는데 특히 써니와 추방 두 영화
모두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현재의 주인공이 과거의 주인공 자신을
조우하는 장면은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표절 시비를 걸고
넘어진다해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갈만큼 쏙 빼닮은 것 같음.
그러나 확실히 해둘건, 써니는 친구와 추방을 합친 것보다
재미있는 이야기임.
4. 스포일러- 리더의 자격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함.
세가지 옛날 이야기가 한꺼번에 떠오름.
이야기 하나. 무엇보다 '사공명주생중달'의 이야기가 생각남.
오장원의 큰별이 지던 날, 별을 읽을 줄 아는
사마의는 공명의 죽음을 확신함.
공명은 사마의가 자신의 죽음을 알아챌 것이라 보고
저를 빼닮은 목상을 미리 만들어 두었는데
퇴각하는 촉군을 공격하던 사마의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공명의 좌상을 보게 됨. 실제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아마 사마의는 순간, 거의 똥오줌을 지렸을 것임.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울었을 것 같음.
어쨌든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준 덕분에
촉군은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
(사족이지만 고우영 삼국지에선 이 이야기가 훨씬 더 극적으로 연
출되어 있음. 공명을 본뜬 목상이 아니라 아예 공명의 주검을
수레에 앉혀 고정시킨 것으로 묘사됨.)
이야기 둘. 해하땅에서 사면초가와 패왕별희 이후의
항우 이야기도 생각남.
항우는 최후까지 제 수하에 남은 수십여명의 부하들을 위해
지략에 있어서 반은 귀신이나 다름없는 한신의 십중포위를 뚫고
기어이 부하들을 고향가는 배에 실어 보낸 뒤,
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음. 더구나 그는 저를 배신한 부하에게도
득이 되는 죽음의 방식을 택함.
그의 세가 하늘을 찌를 때 그가 다소간에 교만에 차 있었던 것은
맞지만 최후에 그는 진짜 남자였고, 리더였음.
이야기 셋.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는 하도 오래 전에 읽은 이야기라
내가 어디서 읽었는지도 기억이 안남. 게다가 지어낸 티가
너무 많이 남. 중세 독일에서 있었던 일로 기억함.
나라의 골칫거리였던,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일종의 갱단이 일망타진 되었는데 전원 사형 판결을 받음.
갱 두목이 판사에게 쇼부를 침.
만약 내 목이 베이는 순간 내가 내 목을 들고
내 부하들을 지나쳐 간다면 내 부하들은 살려 달라고 쇼부침.
판사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좀 낭만을 아는 모양이었나봄.
좋다. 쇼부 받아들임.
목이 베이자 마자 땅에 떨어지는 제 머리를 받아든 두목은
제 부하들을 한놈도 빼놓지 않고 모두 지나침.
죽은 두목의 몸은 그제서야 쓰러지고 부하들은 석방됨.
'너희는 새삶을 살아라' 두목의 마지막 유언을
부하들은 피눈물로 되새김.
써니에서 보여주는 춘화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는 상위에 소개한
세가지의 '옛날 이야기'처럼 너무나 애틋하고 절절해서,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지금에선 사실상 판타지에 가까움.
판타지일진대.
우리는 너무나 지쳐 있음. '지어낸 이야기'와 달리
'벌어지는 이야기'는 우리를 몹시 슬프게 함.
수십년만에 만난 동창이 만취 끝에 폭행과 추행을 일삼았다는
뉴스 기사도 있었고, 동창을 상대로 한 사기나 강매 이야기는
이제 뉴스 기사로 실리지도 않음.
그러한 작금의 세태와 맞물려 너무나 큰 울림을 주는 판타지임.
죽은 리더를 앞에 두고 그녀들이 벌이는 춤판은
그래서 지금도 생각하면 목젖에 콧물이 모이는 느낌임.
리더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 여전히 나는 생각중임.
써니는 가벼운 이야기로 무거운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임.
천재가 세상에 이야기를 던질 때는 대개가 그러함.
두번 말하지만 난 이 감독이 정말 마음에 듬.
5. 뒷 이야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아름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이 이야기가 써니보다 더 재미 있었음.
아름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본드하는 선배들이 있었다고 함.
그날도 어김없이 학교 강당 건물 뒷편에서
넷이 모여 본드를 하고는 한껏 취해 있는데 갑자기 리더 격인 애가
벌떡 일어나더니 외침. "우리, 학교 운동장 한번 들어볼래? "
나머지 셋도 벌떡 일어나더니 예전부터 꼭 들어보고 싶었다며,
해보면 별 것 아닐 거라며 의기투합함.
그리고 넷이서 갈지자로 뛰어가 학교 운동장에 도착.
운동장 귀퉁이마다 한명씩 서서
리더의 구령에 맞춰 학교 운동장을 들어올림.
당연히 엄밀히 말하면 학교 운동장을 들어올리는 환각에 빠짐.
학교 운동장을 들어올리는 작업은 하교시간까지 이어짐.
네명의 본드 선배들이 들어올린 학교 운동장을 지나쳐
전교생이 하교함. 그 넷은 전설이 됨.
글로 옮겨 놓고 보니까 덜한데 아름이한테 직접 들었을 땐
웃다가 까무러치는 줄 알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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