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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6왜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했는가? ⑵

대모달 |2011.06.24 02:16
조회 204 |추천 0

② 독립운동가들의 단골 거처

 

우당은 북경의 자금성 북쪽 후고루원(後鼓樓圓)의 한 가옥을 빌려 살았다. 우당의 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북적거리는 사랑방이 되었다. 북경에 온 독립운동가들은 일단 우당의 거처에서 몇 달을 보낸 후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북경에서 이회영과 함께 지낸 셋째 아들 이규창은 “그 당시 국내에서 뜻을 품은 청년들은 중국 북경에 오면 반드시 나의 부친을 뵙게 되고 대체로 우리 집에 거주하였다”고 회상했다. 북경의 우당 거처는 모든 독립운동가가 한 번씩은 거쳐가는 필수 코스였던 것이다.

 

1920년대 초기 북경에 머물고 있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일명 북경삼걸(北京三傑)로 불리었다. 나이도 우당이 두 사람보다 12~13세 많아 맏형이지만, 성품이 온후하여 늘 고집부리는 두 사람의 이견을 조율하는 노릇을 하였다. 1921년 4월 북경에 올라온 류자명(柳子明)도 이즈음 그의 집에서 머물렀다. 류자명의 소개로 화암(華岩) 정현섭(鄭賢燮)과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형제 역시 10월경 우당을 만나 자주 교류하였다. 이들은 모두 우당의 항일투쟁(抗日鬪爭) 방략을 이은 후계자들인 동시에 사상적 공감을 나누며 생사를 함께 한 평생 동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이른바 재중한인(在中韓人) 아나키스트 그룹의 역사가 시작된다.

 

북경에서 우당과 자주 만났던 인물들로 아들 이규창이 기억하는 사람들을 적으면 그대로 한국 독립운동 인물사(韓國獨立運動人物史)가 된다.

 

"김규식(金奎植)·신채호(申采浩)·김창숙(金昌淑)·안창호(安昌浩)·조소앙(趙素昻)·조성환(曺成煥)·박용만(朴容萬)·이천민(李天民)·김원봉(金元鳳)·이광(李光)·송호성·홍남표·유석현·어수갑(魚洙甲)·류자명·이을규·이정규·정현섭·김종진(金宗鎭)·소완규(蘇完奎)·임경호·한진산·이정열·한세량(韓世量)·최태연·박승병·성준용·윤기섭(尹琦燮)……

 

그리고 국내에서는 이득년·유진태·유창환·김진호(金鎭浩)·윤복영(尹復榮)·홍증식·정인보(鄭寅普)·변영태(卞榮泰)·이관직(李觀稙) 등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규창,《운명의 여진》

 

김규식·안창호·김창숙·조소앙은 민족주의를 고수했고, 홍남표와 성주식은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류자명·이을규·이정규·정현섭·김종진은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또 김원봉과 유석현은 일제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의열단 지도자들이었으니 우당의 북경 거처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모든 노선과 온갖 성향의 독립운동가들이 나눠지고, 얽히고 설키는 인연의 장소가 되었다. 게다가 후고루원호동 소경창 골목 가까이에는 북양군벌 단기서(段祺瑞)의 부관으로 일하는 김달하가 살고 있었고, 걸어서 약 20분 거리에 단재가 머물던 관음사(觀音寺)가 위치해 있다. 따라서 이들은 아침저녁으로 자주 만나 독립운동의 대소사를 논의할 수 있었다.

 

당시 우당의 후고루원 거처에 함께 기거했던《상록수》로 유명한 소설가·시인 심훈(沈熏)은 그의 친절한 접대를 받으며 한 달간 묵었다. 심훈이 연극 공부를 하러 프랑스에 가고 싶다는 말을 전하니, 우당이 강경히 반대하면서 “너는 외교가가 될 소질이 있으니 우선 어학에 정진하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한다. 별 연고도 없는 청년까지 세심히 배려했던 우당은 그러나 이런 생활 태도 때문데 곧 생활비가 바닥나게 되었다. 자기 집에 잠시 있다 떠난 청년에게 통김치를 가져다 줄 정도였으니, 그의 집에 기거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어떻게 정성을 다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아들 이규창은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

 

"국내나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신다는 분들은 쉴 사이 없이 집에 와 머물렀다. 그뿐인가? 매일같이 10명, 20명 혹은 30, 40명 정도 되는 분들이 점심과 석식을 하게 되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요 장구한 세월을 접대하게 되니 인력과 경비는 얼마나 들었을 것인가? 짐작만 하여도 어마어마하였다…… 모친을 위시하여 형수와 송동집 아줌마(이회영의 장남 규룡의 소실)가 있었는데 그 노력을 어찌 일일이 말할 수 있겠는가?"- 이규창,《운명의 여진》

 

그러니 곧 생활비가 떨어져 자주 이사를 해야 했다. 1922년 봄 무렵 서직문(西直門) 근처의 이안정(二眼井)이라는 다소 큰 집으로 옮긴 일가는 집의 후원에 채소를 심어 반찬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몰려드는 손님을 대접하기에는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어쩔 수 없이 인근 상가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 2년 동안 갚지 못한 돈이 2천~3천원에 이르러 식구 모두 곤욕을 치러야 했다.

 

2년 반을 쫓아다녀도 외상값을 받지 못하자, 중국 상인들은 결국 자신들끼리 빚을 탕감해 주기로 결정하고 우당을 찾아왔다.

 

“동양귀(東洋鬼:일본)의 침략으로 우리 나라에까지 와서 독립운동을 하는 분께 외상값을 탕감하는 방법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생각하려오. 과거 우리가 좀 심하게 대한 것을 용서하시오.”

 

외국의 상인들에게 누를 끼친 것이었으나, 망국민의 신세로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때부터 가난은 우당 일가에게 하나의 숙명이 되었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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