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러시아 ‘혁명의 배신’에 대한 실망
신진 사조의 선전장인 북경에서 새로운 사상을 접할 무렵, 우당은 여전히 향후의 독립운동 노선 설정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나 북경의 대조선공화국 인민위원회(大朝鮮共和國人民委員會)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홀로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했다. 그러던 중 1921년 5월 러시아에 갔던 조소앙(趙素昻)이 북경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 그를 찾아 나섰다.
우당 역시 새로운 혁명 사조라는 사회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식민지 민족해방을 지원하려는’ 러시아 레닌 정권에 기대하는 바가 컸으므로 궁금증을 갖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론을 알지 못했고, 사회주의 러시아가 어떤 상황인지도 전혀 몰랐다. 더군다나 러시아 민중이 차르 절대왕정 체제를 무너뜨린 것처럼, 조선 민중이 볼셰비즘으로 무장해야만 강력한 일제를 타도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북경에서 열린 군사통일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던 우당이 조소앙의 내방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 찾아갔다는 것은 그가 사회주의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소앙은 1920년에 덴마크, 단치히,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를 경유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러시아 혁명기념대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까지 러시아 각지를 시찰하고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르쿠츠크와 치타 등지를 거쳐 북경으로 귀환했다. 우당은 조소앙에게 국제 정세 및 혁명 이후의 러시아 상황에 대해 듣기 위해 그를 찾았던 것이다.
그는 먼저 차르 정권 대신 노동자·농민에 의한 정치로 평등사회를 이룩하고 있다는 러시아의 정치사회 상황에 대해 이렇게 묻는다.
“그 냉혹하고 무자비한 독재 정치가 과연 만민에게 빈부의 차이가 없는 균등한 생활을 보장한다는 이상을 성취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처럼 자유가 없는 인간 생활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리고 인간 생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평등 생활이 하루에 세끼 밥을 균등히 주는 감옥생활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한 독재권을 장악하고 인민을 지배하는 정치는 옛날의 절대왕권의 정치보다도 더 심한 폭력 정치이니 그러한 사회에 평등이 있을 수 없으며, 마치 새 왕조가 세워지면 전날의 천민이 귀족이 되듯이 신흥 지배계급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조소앙에게서 들은 러시아 혁명의 실상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조소앙은 러시아 각지를 돌며 목격한 민중의 참상을 자세히 전한 후, 우당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볼셰비키들은 그러한 현실이 과도기에 일어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혁명이 제자리를 잡고 나면 자연히 해소되는 문제라고 변명합니다.”
조소앙이 전한 ‘노동계급의 천국’ 혁명 러시아의 참상은 우당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버리게 했다.
실제로 러시아 민중과 아나키스트들의 헌신적인 투쟁으로 혁명에 성공한 뒤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 세력은 비밀경찰을 통해 점차 공포정치를 시행해나갔다. ‘러시아 혁명의 배신’은 우크라이나 농민자위 조직이며 혁명 동지인 마프노(Nesto Ivanorich Makhno)의 본부를 공격한 데 이어 대대적인 아나키스트 체포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1921년 2월 크로포트킨이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자마자, 볼셰비키 세력은 3월에 개최된 러시아 공산당 제10차 대회에서 아나키스트 세력의 축출을 공식 결의하였다. 이어 레닌 정권은 3월 크론슈타트에서 일어난 수병들의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공산주의 러시아의 참상과 탄압 사실이 전해지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실망과 반대 움직임도 본격화되었다. 러시아의 막시모프(Gregor Maximoff)나 볼린아이헨바움(V.M.Eichenbaum), 엠마 골드만(Emma Goldmann)을 비롯해 일본의 오스기 사카에[大衫榮] 등 아나키스트들은 레닌 정권의 탄압 사실과 러시아 민중의 기아 현실을 목격한 후 반공산당운동(反共産黨運動)에 앞장섰다. 이들은 당시 인식을 바탕으로《아나키스트가 본 러시아 혁명》이나《혁명의 실패》등 여러 저서를 통해 공산주의 정권의 공포정치와 이론의 한계를강력히 비판하였다.
중국과 한국인 아나키스트들도 마찬가지였다. 상해 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한 중국의 청년 아나키스트들 역시 외국어학사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한 후 부푼 꿈을 안고 ‘사회주의 혁명의 조국’ 러시아로 떠났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혁명 러시아의 현실에 실망한 나머지, 곧 귀국하여 볼셰비키 타도운동에 앞장섰다.
적색 러시아의 ‘혁명의 배신’은 단지 러시아 민중의 고통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레닌 정권에서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지원한 1백만 루블에 해당하는 이른바 ‘레닌 자금’으로 인해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횡령사건이 벌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게다가 1921년 6월 한국 독립운동사상 일대 참변이라 할 흑하사변(黑河事變)이 러시아 동북부인 자유시(自由市)에서 일어났다. 애초 공산주의 러시아군(赤系軍)은 왕당파 러시아군(白系軍)을 몰아낼 목적으로 한국인 독립군 부대를 자유시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한국인 독립군 부대의 무장력을 두려워한 소비에트 정부는 이 약속을 배신하고 무장해제를 요구하면서 한국인 빨치산부대로 하여금 대한독립군단을 공격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동족 간의 참극’으로 인해 대한독립군단의 피해는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이 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더욱이 독립군 지휘관인 이청천(李靑天)과 채영(採英)·오광선(吳光鮮) 등 간부급 84명은 중범자라 하여 이르쿠츠크 군사형무소로 이송되어 특별 수용되었고, 나머지 병사들은 탄광과 벌목장에 노역병으로 보내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처럼 혁명 러시아의 배신은 우당뿐 아니라 사회주의 러시아를 동경했던 많은 독립운동 애국지사들을 분노케 하였다. 우당처럼 조소앙에게서 ‘혁명의 배신’ 소식을 전해 듣고 러시아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했던 화암 역시 1921년 10월경의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결국 나(정현섭)와 이을규·이정구 세 사람만이 러시아행을 결정하고……북경에서 우리는 류자명을 만났다. 그는 우리의 러시아행을 반대했다. 얼마 전 조소앙이 서유럽을 돌고 왔는데, 상해 공산당과 일크스크 공산당 사이에 심한 충돌이 있어 일크스크파의 소개로 러시아를 가다 상해파에게 발각되거나 일크스크파에 발각되면 서로 죽이는 참상이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잘못하면 무의미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류자명의 말을 듣고 조소앙에게 직접 확인한 바 사실로 판명되었다. 공산당 내부의 암투가 치열하다는 것을 알고, 더구나 류자명의 만류를 뿌리치면서까지 러시아로 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그대로 북경에 머물게 되었다."- 정현섭,《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④ 사상적 번민 끝에 아나키즘을 만나다
공산주의 러시아의 현실과 볼셰비키 정권의 혁명 배신을 알게 된 우당은 한층 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신경과민이 될 정도’의 사상적 번민을 거듭하면서 그는 세계 정세나 다른 나라의 힘을 이용하려는 모든 운동 전략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되었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몇가지 판단은 우선 독립운동이 단시일에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므로 장기간에 걸쳐 힘을 기르고 기회를 기다리며 또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력(武力)과 인재(人材)를 양성해야 하는데 그 핵심적인 정신요소로서 이론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근래 들어 사회주의 조류가 급격히 밀려 들어와 그 색채를 뚜렷이 드러낸 만큼, 우당은 독립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시작된 운동의 근본 방략에 대한 우당의 사상적 번민은 1921년~1922년 사이에 최고조에 달하고 비로소 자리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우당이 독립운동의 방향 설정을 위해 확고한 사상적 이론과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느끼게 된 또 다른 계기는 만주 무장투쟁 세력 간의 알력과 갈등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누구보다 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단합에 힘썼던 우당은 1922년경 북경과 만주를 오가며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묶는 작업에 착수했다. 1922년 2월, 북만주의 8개 독립운동 단체와 남만주의 9개 독립운동 단체가 모여 팔단구회(八團九會)라는 회의를 열어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결성되었는데, 이 회의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우당 이회영이었다. 또한 같은 해 8월 23일, 환인현(桓仁縣) 마권자촌(馬圈子村)에서 열린 더 큰 규모의 남만한족통일회의(南滿韓族統一會議)도 우당이 주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의에서는 각 단체와 각 기관의 명의를 취소하고 무조건 통일제도에 복종한다는 것과 명칭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한다는 것, 통의부 군대 명칭은 의용군으로 결정하고 제도는 총장제로 한다는 것 등의 사항을 결정했는데, 이는 만주 지방의 독립군 부대를 통일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회의였다.
통합 결정에 따라 대한통의부는 1개 중대 약 800명~900명씩, 7개 중대가 있었으며 신의주와 청성진, 강계군 등지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전개했다.《독립신문》에도 1924년 4월부터 약 2개월 동안에 28회나 국내진공작전을 벌인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는 복벽주의자(復辟主義者)인 전덕원(全德元)과 공화주의자인 양기탁(梁起鐸) 간의 내부 파쟁에 휩싸이면서 급기야 서로를 습격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며 분열했다.
끝내 무력충돌까지 벌인 두 세력의 갈등에 크게 상심한 우당은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버렸다. 공화주의자와 복벽주의자의 무력충돌은 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우당은 그와 같은 무력충돌의 배경에 일단의 권력욕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그가 일체의 권력욕을 배제하는 아나키즘을 받아들이는 데 한 구실을 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당시 독립운동 진영은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받고 있던 상태였다. 그것은 중국 상해나 만주를 비롯해 러시아 연해주 등 해외 각지로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 진영 내에 수없이 많은 회(會)나 당(黨)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며 알력과 갈등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정하게 확립된 기본 이론이나 정책 없이 맹목적인 단결과 통일을 내세우는 것은 내적 구심력과 접착력이 없으므로 분산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독립운동의 본질은 “이민족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해방운동이므로 사상과 종파의 여하를 막론하고 다 같이 참여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래야 할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혼란과 마찰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고 앞으로의 운동전선에 새로운 정리정돈과 통합이 매우 절실했던 것이다.
이정규는 이러한 위급하고 어려운 판국에 각종 사상의 회오리바람을 맞으며 가장 괴로워한 사람이 우당이라고 보았다. 그는 우당이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적 공세와 유도에 부딪쳤을 때에야 비로소 스스로의 이론의 빈곤과 단순함을 느꼈으며, 따라서 자신의 견해와 이론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나아가 그는 “선생이 사상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이 확정된 때는 1922년 겨울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 무렵 우당이 북경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일 때의 모습을 부인 이은숙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하루는 몽사(夢事)를 얻으니, 가군(家君)께서 사랑방에서 들어오시며 희색이 만면하여, “내 일생에 지기(知己)를 못 만나 한이더니, 이제는 참다운 동지를 만났다” 하시며 기뻐하시기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홀연히 깨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곰곰 몽중에 하시던 말씀을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이 오려나 하였더니, 그날 오정쯤 해서 이을규씨 형제분과 백정기씨, 정현섭씨 네 분이 오셨다."- 이은숙,《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
이은숙은 이때가 1923년이라 기억하고 있다. 이미 우당의 나이 57세로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껴 러시아행을 포기한 이을규와 이정규 형제는 북경대학에서 노신과 에로센코와 교류하며 에스페란토와 세계주의에 눈떴고, 화암 역시 이석증·오종휘 등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의 교류로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정의감이 강하고 남을 잘 이해하고 동정심이 강한” 백정기(貞基義)는 부정을 미워하는 의분이 강한 ‘행동파’ 열혈 청년이었다.
이정규는 또 ‘선생의 사상이 확정되는 계기’로 1923년 9월에 있었던 ‘이상농촌 양도촌(洋濤村) 건설 계획’을 들고 있다. 이상촌 건설 계획이란 호남성(湖南省) 한수현(漢水縣) 동정호(洞庭湖) 호반의 양도촌의 광대한 토지를 가진 중국인 아나키스트가 자신의 땅을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공동경작, 공동소비, 공동소유하는 협동체를 조직해 이상촌으로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인 아나키스트의 요청으로 구상된 이 계획은 재중한국인들에게 인삼 같은 특수작물을 제배케하고 농부를 이주시켜 촌락을 건설하면 향후 독립군 기지 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라는 제안인 것이다.
당시 북경대학 재학생이었던 이정규는 이민과 농지 개척의 경험담을 들으려서 신흥무관학교 설계자였던 우당을 찾아왔다. 우당은 매우 흥미 있게 이 계획을 들었으며,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좀 더 깊이 생각해보자고 하였다. 이어 우당은 이정규와 함께 아나키즘사상에 대해 오랜 시간 문답하였다. 이정규는 당시 우당과의 이 대화가 “선생으로서는 무정부주의라는 사상의 내용을 들어보는 첫번째 기회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미 임시정부 대신 자유연합적 독립운동 지도본부를 구상한 바 있고, 조소앙과 류자명 그리고 단재 등에게서 러시아의 현실을 전해 듣고 새 사조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노혁명가 우당 이회영 지사가 대학생 이정규에게 아나키즘 사상에 대해 처음 들었을지는 여러 의문이 든다. 다만 마침 이때 우당이 사상적 진로를 모색하던 때었으므로 이상농촌 곤설과 아나키즘 사상을 둘러싼 이정규와의 대화는 우당에게 큰 충동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사상적 번민을 거듭하던 시절, 당시 우당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을 실현할 수 있는가였다. 그는 시대적 조류를 따르고 자신의 천품과 성격에 따라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을 목적으로 하며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운동도 이것을 위해서만 빛이 나는 것이며, 혁명운동도 이것으로만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우당은 단재와 만날 때마다 이러한 문제를 고민했다고 한다. 즉, 여러 선진국의 현 정치제도를 그대로 답습 모방하여서는 자유·평등의 사회가 실현될 수 없지 않겠는가, 또 그들의 정치를 모방한다면 부자유와 불평등에 의해 불만·불평·억압이 생겨나는 현대사회의 결함을, 새로이 독립할 우리 나라에서도 반복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렇듯 봉건주의 사회에서 각종 혜택을 받고 온갖 특권을 누렸던 조선의 정통 사대부 귀족 출신 배경을 가진 우당이 복벽주의를 거들떠보지 않고 자유협동주의, 즉 아나키즘을 사상적 종착점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한국의 역사에서 기적 같은 일이다. 우당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성의 꼬리에 얽매이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자신을 반성하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호홉하여 변화와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나갔던 매우 선각적이며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우당은 독립운동의 진로 모색뿐 아니라 단재를 비롯해 의열단의 참모격인 류자명, 한국의 대표적인 아니키스트인 이을규·이정규 형제와 화암 등과 자주 만나 새 사회 건설을 주제로 논의를 계속했다. 그런 가운데 1923년 말에 이르러 자신도 자유협동주의(自由協同主義)의 이상과 그 조직 이론으로 새 한국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나아가 단재와 더불어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자임했으며, 진정한 독립운동은 아나키즘에 의한 자유협동적인 무장투쟁임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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