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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8의열단, 그리고 조선혁명선언

대모달 |2011.06.29 01:06
조회 227 |추천 1

 

① 불나방처럼 살다 간 젊은이들, 의열단(義烈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지사(志士)가 북경에서 새로운 사조를 통해 독립운동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무렵, 젊은 항일투사들도 새로운 항일투쟁의 방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독립이 곧 될 것 같았던 3·1운동이 일제의 무력진압에 의해 무자비하게 압살당하자,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는 외교적 청원이나 평화적 시위 또는 실력 양성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실이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한 민족의 독립은 민족 스스로 목숨을 걸고 나서 의열투쟁이나 무장투쟁 등 보다 적극적으로 강력한 항쟁을 통해서만 전취될 수 있다는 의식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지사를 비롯한 일부 젊은 열혈투사들에 의해 제창되었지만,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의 장엄한 역사의 밑바탕에는 우당이 일찍이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의 젊은 청년들이 있었다.

 

약산은 1919년 6월경 서간도로 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여러 동지들을 만났다. 그는 동지들에게 “지금의 상태는 우리가 신흥학교에서 공부만 하고 있을 수가 없은즉 속히 독립의 목적을 이루려 하면 직접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득하였다. 새로 얻은 무관학교 동지들은 이종암(李鍾巖) 열사(義士)를 비롯해 이성우(李成宇)·서상락(徐相洛)·강세우(姜世宇)·한봉인(韓鳳仁)·한봉근(韓鳳根)·신철휴(申喆休)·김상윤(金相潤) 등이다. 약산과 이종암은 1919년 7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의 별동대로 일컬어지는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의 단원들과 합숙하면서 약 3개월 동안 폭탄 제조법과 조작법을 배우고, 10월에 길림으로 귀환하였다. 이어 길림으로 망명해온 곽재기(郭在驥)·윤치형(尹致衡) 등과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가 합류하여 그동안 뜻을 함께 해온 동지 17명을 규합했다. 이들은 그동안의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조직 운영 방침과 당면 활동 방향을 밤 세워 논의한 끝에 11월 10일 길림성 파호문(把虎門) 밖 중국인 반씨 집에서 의열단을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의열단의 결성 과정과 구성원의 면면을 살펴보면, 최초 조직 구성은 단연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약산과 앞서 새로 영입한 8명 이외에도 권준(權俊) 등 10여명에 이른다. 이 밖에도 후일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한 무관학교 졸업생도 많았으니, 박태열(朴泰烈)·배중세(裵重世)·윤보한·이해명·최윤동(崔允東) 등이 그들이다.

 

일찍이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新民會)의 무장투쟁 전략에 따라 해외에 개척된 독립군 기지의 하나였다. 신민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 해체된 이후로는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해외 독립군 양성기지처럼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진작부터 광복회는 비밀리에 국내의 뜻 있는 청년들을 선발하여 만주로 망명토록 하여 신흥학교에 입학시켜왔던 것이다. 망명 직전까지 육영사업을 벌인 바 있는 황상규(黃尙奎)가 이 일에 상당 부분 관여했는데 실제로 그가 1919년 6월 길림에서 망명해 온 이수택(李壽澤)에게 신흥무관학교 입학을 권유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런 황상규가 신흥무관학교 출신 투사들을 의열단에 입단시키도록 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열단원들은 어떻게 선발되고 어떤 훈련 속에 투쟁을 전개했으며, 어떻게 싸우다 죽어갔는가? 의열단의 행동 강령이 매우 기밀을 요하고 세포 조직과 같이 움직여서 단원들조차 서로 모를 정도이기 때문에 자료로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의열단에 몸담았던 장지락(張志樂)의 회고를 통해 모습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의열단과 적기단 중) 의열단이 더욱 활동적이었고 1919년에서 1924년에 걸쳐 왜놈에 대한 테러를 국내에서만도 약 3백건이나 해냈다. 그들의 대규모 계획들은 실패하였지만 조그마한 계획들은 때때로 성공하였다. 1919년에서 1927년에 걸쳐서 왜놈들은 의열단원만 해도 3백명이나 처형하였다. 현재 살아있는 단원은 극소수이다. 이 단체는 무정부주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었다. 그로므로 조선 무정부주의자의 전성기는 1921년에서 1922년이었다.

 

의열단원은 불과 몇명 안 되었다. 많은 단원을 확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핵심은 50명으로 구성된 하나의 통일체이며, 모든 것이 엄격하게 비밀로 되어 있었다. 이 통일체의 각 단원은 각각 다른 반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여러 시기를 통산해도 의열단원은 도합 수백명에 불과하였다. 의열단의 활동자금은 모두 조선에 있는 부유한 사람들이 임시정부를 통해서 낸 것이다. 임정은 조선이 완전히 독립한 후 30년 이내에 상환한다는 조건으로 3천만 달러의 공채는 발행하였다. 당시에는 약간의 미국인과 선교사들까지도 ‘조선독립의 벗’ 운동에 참가하였다. 의열단은 상해에 열두군데의 비밀 폭탄제조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지도한 사람은 이 비밀결사의 단원인 마르틴이라는 독일인이었다……

 

그때쯤이면 이미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청년단체들이 다수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 왜놈들은 이 단체들을 탄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사회단체들이 테러리즘에 반대하고 의열단을 비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는 왜놈들이 테러리스트들을 박멸하기 위하여 테러리스트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왜놈들은 선전과 대중운동보다는 폭탄과 총을 훨씬 더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1924년까지 3백명에 가까운 가장 우수하고 용감한 의열단원들이 왜놈들에게 살해당하였다. 별로 성과도 없이 희생만 늘어나자 단원들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남아있는 의열단원의 태반은 공산주의자와 합류하였으며 대중적인 정치활동에 가담하기를 원했다. 이때까지 살아남았던 의열단원 거의 전부가 1925년부터 1927년 사이에 중국혁명을 위해 싸우다가 죽었다."

 

장지락의 회고처럼 의열단원들은 중국과 조선 국내 등지에서 수많은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그중 잘 알려진 것만으로도 박재혁(朴載赫)의 부산경찰서의거(釜山警察署義擧:1920년 9월),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의거(密陽警察署義擧:1920년 12월), 김익상(金益相)의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朝鮮總督府爆彈投擲事件:1921년 9월), 그리고 김익상·오성륜(吳成崙)·이종암 세 사람이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남작(男爵)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황포탄의거(黃浦灘義擧:1922년 3월), 김지섭(金祉燮)이 일본의 궁성 쪽으로 폭탄 두 개를 던진 사건인 니주바시의거(二重橋義擧:1924년 1월) 등이 있다. 이처럼 의열단은 중국 관내와 조선 국내, 일본 도쿄 등을 넘나들며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의 파괴와 수뇌부 암살 활동을 활발히 펼쳐 일본 경찰과 정보기관을 공포에 떨게 했다. 장지락의 말대로, 일제는 선전이나 대중운동보다는 폭탄과 총을 사용하는 저항을 더 무서워했던 것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의열투쟁을 전개한 한국 청년들의 평상시 생활은 어떠했으며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 장지락은 의열단원들이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하고, 수영과 테니스 등의 운동을 통해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매일같이 사격연습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었다. 언제나 죽음을 앞두고 있어 마음껏 생활하였던 멋진 친구들이며 러시아 출신 미녀들과의 짧고 강렬한 연애를 즐기다 기꺼이 권총과 폭탄을 들도 적지로 뛰어든 불나방 같은 젊은이들.

 

이들의 생활습관은 마치 러시아 혁명 초기에 불꽃처럼 살다간 테러리스트들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엄숙하면서 절제된 생활은 러시아의 테러리즘을 주도한 네차예프(Nechaev)의《혁명가의 교리문답》을 보는 것 같다. 다음의 경구는 의열단원들을 연상시킨다.

 

"혁명가는 죄인이다. 그에게는 사적 이해도, 개인적인 일도, 사사로운 감정이나 집착도, 사유재산도, 심지어 이름조차 없다. 그는 모든 관심과 생각과 열정을 혁명에 바쳐야 한다. 혁명가는 모든 교조주의를 경멸해야 한다. 그는 평화를 위한 과학을 포기하고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한다. 그가 아는 과학이라고는 파괴를 위한 것뿐이다……그의 목표는 단 하나이다. 그것은 이 비열한 질서를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파괴하는 것이다. 혁명가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만큼, 남에게도 엄격해야 한다. 그는 가족애, 우정, 사랑, 감사, 명예와 같이 나약한 감정을 혁명가다운 냉철한 열정 하나로 억눌러야 한다. 그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이나 위안은 혁명의 성공에서 온다……혁명가는 자신처럼 투철한 혁명적 활동을 보여주는 자만을 아끼고 친구로 삼을 수 있다. 우정과 헌신을 비롯해서 동지들에 대한 다른 의무가 갖는 비중은 그것들이 파괴적 혁명을 이루기 위해 어느 정도의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장 프레포지에,《아나키즘의 역사》

 

그러나 의열단의 이러한 폭력투쟁이 독립운동 진영 모두에게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외교독립론(外交獨立論)과 실력양성론(實力養成論)을 부르짖은 상해 임시정부 내의 일부 인사를 비롯해 대중운동의 조직과 정당 활동을 공공연히 내세운 공산주의 세력에게 의열투쟁은 한낱 ‘공포 수단에 의지한 과격주의’로 비쳐졌다. 상해 황포탄(黃浦灘)에서 일어난 의열단의 투쟁을 계기로 이러한 논란은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했다.

 

1922년 3월 28일, 의열단은 일본의 육군대장을 지냈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남작(男爵)이 당시 상해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일제 군부의 거물이고 해외 팽창정책 추진자로 이름 높았던 다나카 남작은 당시 모종의 밀명을 띠고 필리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들르게 되었다. 상해 황포탄 홍구 공공마두에는 제1선의 김익상과 제2선의 오성륜, 그리고 3선의 이종암 등 3명이 각각 권총(拳銃)과 수류탄(手榴彈)·단도(短刀) 등을 감춘 채 기다리고 있었다.

 

무수한 환영 인파 속에 기선에서 내린 다나카 남작이 마중 나온 인사들과 악수를 하누는 순간, 제1선의 오성륜이 주머니 속에서 권총을 꺼내 다나카의 가슴을 향해 발사했다. 다나카를 명중시켰다고 확신한 오성륜은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하지만 오성륜이 명중시킨 사람은 다나카 남작이 아니라 우연히 그의 앞을 지나가던 영국인 여자였다. 저격수가 있음을 알아차린 다나카는 잠시 그녀를 안고 죽은 채 하고 있다가 사람들 틈을 헤치며 자동차가 있는 곳을 향해 뛰었다. 그 순간 제2선의 김익상이 군중들을 헤치며 권총으로 두 발을 쏘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총탄은 그의 모자만 궤뚫었을 뿐이었다. 김익상은 이어 폭탄을 꺼내 다나카의 차량을 향해 던졌으나, 불발이었다. 제3선의 이종암이 군중을 헤치고 나서며 자동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자동차는 달리기 시작했고 그 곳에 서 있던 미국인 해병이 폭탄을 발로 차 바다에 빠뜨렸다.

 

다나카 남작은 제1선에 이어 2선, 3선의 공격을 모두 피해 구사일생으로 도주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육군상을 역임하고 예편한 다음, 1927년에 총리대신이 되어 일본의 대륙침략 정책을 총지휘하게 되니,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종암은 입고 있던 외투를 재빨리 벗어 던지고 군중 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으나, 오성륜과 김익상은 현장에서 너무 지체한 나머지 일본 헌병들과 경찰관들에게 쫓기고 말았다. 두 사람은 권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며 구강로(九江路)를 지나 사천로(四川路)로 달렸으나, 결국 막다른 골목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오성륜은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 갇혀 혹독한 조사를 받으며 압송될 날짜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으나, 함께 들어온 일본인 죄수들의 도움으로 창살을 자르고 극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러시아로 건너갔다가 1925년경 다시 의열단에 복귀했다. 오성륜의 탈출 소식에 놀란 일본 경찰은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알고 또 한번 경악하였다. 일본 영사관은 그를 급히 나가사키로 호송했다.

 

김익상은 그해 9월 25일,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일제 지배 권력층은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소재판에서 재판장을 바꿔가면서 기어코 김익상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말아다. 김익상은 이에 대해 극형 이상의 형벌이라도 사양하지 않는다며 상고도 하지 않은 채 당당히 맞섰다. 그런데 의외로 은사(恩赦)라는 정치적 쇼가 진행되어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1927년에 다시 20년으로 감형된 그는 1942년 만기 출소했다. 출소 후 김익상은 고향에 돌아왔는데, 어느 하루는 일본 형사가 잠깐 조사할 게 있다며 데려 가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② 신채호의《조선혁명선언》과 류자명·이회영

 

1922년 황포탄의거(黃浦灘義擧)는 상해를 비롯한 전 중국과 일본에 의열단의 이름을 다시 한번 드높이는 계기였지만, 다나카 남작을 암살하는 데 실패하고 현장에 있던 영국인·미국인·중국인 등 무고한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외국인들 사이에 한국인들의 폭력투쟁에 대한 나쁜 인식과 여론을 악화시키는 부작용도 가져왔다. 일본 총영사관의 압력에 굴복한 공동조계와 프랑스 조계(租界) 경찰 당국은 한국인 독립운동자의 ‘불온행동’, 특히 총기류 휴대와 사용에 대한 단속 강화 방침을 공표했다.

 

중국 주재 미국 대사관 공사도 “조선인 독립당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의 행함과 같은 잔혹한 수단으로 나옴은 미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이든지 찬성치 아니하는 바이다”라며 이 조치를 거들었다. 심지어 임시정부의 일부 인사는 국내 신문보도를 통해 “조선 독립은 과격주의를 채용하며 공포 수단을 취하여 달할 것이 아니다……그들은 과격주의자이므로 임시정부와는 관계가 없다”면서, 의열단의 행동을 마치 단순 ‘과격주의’의 소치로 비난하고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애써 부인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이에 의열단은 자신들의 이념과 정체성을 대내외에 알릴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자신들이 무조건적 암살만을 일삼는 테러조직이 아니라 명확한 항일이념과 목표를 가진 독립운동 단체임을 밝힐 필요가 있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테러에 반대한다는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의열단 활동을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맞서 테러 활동을 주요한 수단으로 하는 항일투쟁의 방법론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저 유명한《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이 나오기까지에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뿐만 아니라 류자명(柳子明), 그리고 그들과 오랫동안 사상 토론을 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등 ‘북경 한국인 아나키스트 그룹’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1921년 당시 단재는 극도의 빈곤 생활에 시달리다가 필생의 소원인 조선사(朝鮮史)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승려가 되어 있었다. 이 기간에 그는《조선사통론》을 비롯해《문화편》·《사상변천편》·《강역고》·《인물고》등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오늘날 전해지지는 않는다.

 

1년 후 승복을 벗은 단재는 우당의 동생 이호영(李頀榮)의 집에서 하숙하면서《동아일보》와《조선일보》등에 기고하며 조선사 연구를 계속했다. 당시 단재는 북경으로 온 후 우당과 매일 만났다. 이규창은 자신의 자서전 여러 곳에서 단재와 심산이 우당과 매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실을 적고 있다. 단재가 류자명의 요청을 받고 상해로 간 것은 이 무렵이었다.

 

류자명 역시 1921년 4월 북경에 올라온 이후 우당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후 그해 겨울 천진(天津)으로 가 거류민단을 만들어 활동하던 중 의열단장인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다. 류자명은 의열단에서 통신 연락과 선전 등 참모장 역할을 맡았는데, 상해의 황포탄의거 이후 테러리즘에 대해 일부 임정 인사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반박하자 이에 맞서 의열단의 주장을 발표하고자 했다. 그는 평소 존경하던 단재를 찾아 부탁드리고, 그를 상해의 아지트로 데리고 가 비밀 폭탄 제조공장 등을 견학시켰다.

 

이후 류자명은 약 한달 동안 단재와 합숙하며 선언문을 작성했다. 따라서《조선혁명선언》은 단지 단재 개인의 사상을 피력한 것이 아니라, 우당과의 긴밀한 의견 교환과 류자명의 협조를 통해 만들어진 명문장(名文章)인 동시에 북경 한국인 아나키스트 그룹의 공동선언문이라 봐야 할 것이다.

 

선언문은 먼저 일본의 강도정치(强盜政治), 곧 이족통치(異族統治)가 조선 민족 생존의 적(敵)이 된 상황에서 자치론(自治論), 내정독립론(內政獨立論), 참정권론(參政權論)을 주장하여 타협하려는 자나 그 아래에서 기생하려는 문화운동자 모두 적과 동일하다고 규정했다. 또한 외교론(外交論)이나 실력양성론(實力養成論) 역시 ‘일장의 잠꼬대’요, ‘미몽’일 뿐이라고 준열히 비판했다.

 

그리하여 민족의 생존 유지의 정당한 수단은 오직 혁명으로 강도일본(强盜日本)을 살벌(殺伐)함일 뿐이고, 그것이 아니고는 강도일본을 구축(驅逐)할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혁명이 유일한, 필수의 살길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면서《조선혁명선언》은 이 혁명이 ‘민중 자신을 위해서’ 민중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일으키는 ‘민중혁명’·‘직접혁명’이고, 민중혁명의 첫 걸음은 ‘민중의 각오’임을 갈파했다. 또한 암살과 파괴, 폭동의 형태로 표출되는 ‘민중적 폭력’의 대상으로 이전의 ‘7가살(七可殺)’ 규정에 없던 ‘일본 천황 및 관공리’와 ‘일본인 이주민’을 추가했다.

 

나아가 의열단은 민중을 권위로 지도·지휘하는 엘리트 전위조직이 아니라, 민중의 일원으로서 직접 행동하는 선동대와 같은 존재라 보았다. 선언문은 민중이 자율적·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주인이고 따라서 당과 같은 조직의 지도나 매개 없이 직접 혁명을 주도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는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에 매우 근접해 있다.

 

또한《조선혁명선언》은 일제의 모든 식민지 지배 권력의 본질이 강권·억압 통치인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의 전면적 부정과 파괴로써 ‘자유적 민중’과 ‘민중적 경제 및 사회문화’를 창조하고 건설하는 것을 ‘이상적 신조선’의 미래로 전망하였다. 이는 ‘파괴가 곧 건설’이며 이를 통하여 ‘억압과 강권’의 구세계에서 ‘해방과 자유’의 신세계로 나아간다는, 아나키즘의 논리구조를 따른 것이다. 이는 앞서 우당과 단재가 고민했던 자유평등의 신사회 건설 방향과 매우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혁명선언》은 그 웅혼한 필치만으로도 의열단원들을 감격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즉시 팸플릿 형태로 인쇄되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한 각 단체 대표들에게 우선 배포되었다.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나 국내에서 온 일부 대표틑 귀국을 포기하고 단원으로 가입했다. 선언문은 각지 대표들의 손으로 또는 우편으로 중국을 비롯해 노령과 미주, 국내에도 전달되었으며, 도쿄에는 일부러 단원을 잠입시켜 살포하였다. 거사를 위해 파견되는 단원들도 이 선언문을 꼭 휴대하여 혁명이념과 논리 등을 숙지하도록 했다.

 

선언문의 발표는 단원들의 사기와 자부심을 크게 앙양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그들은 의열단이야말로 민족혁명·민중혁명의 행로와 운명을 같이할 진정한 혁명단체이며, 자신들이야말로 일제 타도에 헌신할 진정한 혁명가라는 강렬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이 선언문은 1924년 4월 대만인 범본양(范本梁)의 신대만안사(新臺灣安社)에서 발표한 선언문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선언문 발표 이후, 의열단은 중국은 물론 러시아와 일본, 조선 국내 각지에 단원들을 파견·배치하여 지역 거점을 확보하고 활동반경을 넓혀갔다. 1923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방면, 일본의 도쿄와 고베·오사카·요코하마 등지로 단원을 파견하여 활동 구역으로 삼았다.

 

중국 지역도 관내에만 국한하지 않고 만주는 물론 대만과 몽고까지 활동권으로 삼았는데, 몽고에서는 지방단원 총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렇게 여러 지역의 운동자들과 제휴하여 역량을 결집한 의열단은 1923년 하반기부터 만주와 서울, 도쿄 등 세 곳에서 동시다발적인 거사를 계획했다. 즉 북경과 천진을 전진기지로 삼고 서울과 도쿄에서 대규모 암살·폭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의열단장인 약산은 상해에 들른 오스기 사카에[大衫榮]와 은밀히 만난 바 있다. 두 사람은 혁명에 대한 쌍방의 의견에 일치를 보고, 수평사(水平社) 등 일본 내 연락 기관을 두어 비밀리에 암살·파괴활동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의열단은 일본 내 폭탄투척 계획을 세우고, 곧 실행 책임자로 임시정부 비서국장 출신인 김한(金瀚)을 지목해 조선 국내로 파견했다.

 

김한은 1922년 9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서 박열(朴烈)과 극비리에 만났다. 의열단은 박열을 중심으로 한 도쿄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과 공동 행동을 하기로 하고 폭탄 50개를 이송할 준비를 했다. 일본에서의 거사는 주요 시설물 파괴를 비롯해 일본의 황태자 및 정부 요인 암살 등 총공격의 형태로 10월 중에 시행하기로 계획되었다.

 

하지만 의열단의 거사 계획은 단원을 가장한 일본 경찰관 황옥(黃玉)의 밀고와 1923년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의거(鍾路警察署義擧)로 폭탄을 모두 압수당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1923년 9월 1일 일본에서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가 발생해 조선인에 대한 대량학살이 자행되었고, 박열마저 체포됨에 따라 의열단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계 첩보 기관에 따르면, 1923년 8월 당시 20여명의 의열단원이 도쿄에 파견된 바 있는데, 불행히도 이중 다수는 갑자기 발생한 대진재 당시의 대학살로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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