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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10 다물단과 김달하 피살사건 ⑴

대모달 |2011.06.29 14:55
조회 285 |추천 0

① 다물(多勿)의 정신으로 친일파를 척결하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1924년 4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기 전부터 자신의 평생 동지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류자명(柳子明)과 함께 북경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할 별도 조직을 지도한 것으로 보인다. 1923년경 조직된 것으로 알려진 다물단(多勿團)이 그것이다. 우당의 아들 이규창의 회고에 의하면, 다물단은 우당의 형인 이석영(李石榮)의 첫째 아들인 이규준과 우당의 첫째 아들로 민주당 국회의원을 지냈던 이종찬의 아버지이기도 한 이규학, 그리고 이성춘 등 젊은이들이 의열단의 참모인 류자명과 상의하여 만든 단체라 한다. 또 그는 맏형 이규학의 심부름으로 단재의 다물단 선언문을 전해주었다고 진술한 적이 있는데 이는 다물단의 정신적 지도자가 단재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정규(李丁奎) 지사(志士) 역시 이석영의 아들인 이규준이 직접 행동 단체로서 다물단을 조직했으며, 우당이 운동의 정신과 요령을 지도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진술을 모아볼 때, 우당과 단재는《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발표 이후 북경에서 열혈 청년들을 모아 의열단과 같은 직접 행동 단체를 지도했음을 알 수 있다.

 

다물단의 ‘다물(多勿)’이란 ‘옛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자’는 뜻을 내포한 고구려식 단어로서 일제에 빼앗긴 국토를 되찾자는 뜻과 ‘모든 일을 비밀리에 처리한다’는 함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최초의 단장은 북경대학 유학생은 황해관이 맡았으며 이듬해인 1924년 즈음 단원이 약 40명에 이르렀다. 이들 단원이 서간도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총장 김동삼(金東三)과 왕래를 한 것으로 보아 만주 지역에서 결성된 다물청년당(多勿靑年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당이 다물단을 지도하면서 류자명과 함께 주도한 일은 일제의 고급 밀정 노릇을 일삼던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한 사건이다. 당시 북양군벌의 거두인 단기서(段祺瑞)의 부관으로 일하면서 북경의 유력 인사들과 접촉이 잦았던 김달하는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기록에서조차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언급될 정도로, 이미 김달하는 1915년경 총독부의 은밀한 사명을 받아 북경에서 밀정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즉 조선의 독립을 위해 북경에서 일하는 애국지사들의 비밀을 팀지하여 총독부에 보고하고 고액의 생활비를 타왔던 것이다.

 

심산은 이를 모르고 그와 가까이 지냈는데,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이 사실을 귀띔해준 일이 있었고 또 본인도 김달하에게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제의받은 이후 그의 본색을 알게 되었다. 심산은 김달하와 절교한 후 우당과 상의하였고, 두 사람이 류자명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이에 류자명은 의열단 본부와의 논의나 의사 결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재량껏 단원을 동원해 다물단과 합작으로 김달하를 제거하기로 했다.

 

김달하가 심산을 회유하려다 실패한 지 얼마 안 되는 1925년 3월말 오후 여섯 시, 이인홍과 이가환은 안정문(安正門) 내의 차련호동(車輦胡同) 서구내로북 23호 김달하의 집 문을 두드렸다. 하인이 나와 누구시냐고 묻자 두 사내가 달려들어 뒷결박을 짓고 입에 재갈을 물려 한구석에 틀어박아 놓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가족과 함께 방 안에 있던 김달하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손을 바지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이인홍이 김달하를 제압하면서 그의 권총을 압수했다. 두 사람은 가족들을 차례로 묶은 다음 김달하를 뒤채로 끌고 갔다. 그리고 품에서 꺼낸 문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펼쳐 놓았다. 바로 의열단에서 내린 사형선고였다. 몇 시간 후 겨우 결박에서 벗어난 가족들은 목에 올가미가 걸린 채 숨져 있는 김달하의 시신을 뒤채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이회영 일가에 큰 타격을 주었다. 먼저 우당의 딸 이규숙이 공안국에 피검되었다. 이 일의 배경에는 사촌 오빠이자 다물단원인 이규준이 있었다. 그 결과 이규숙이 집안 내부 사정을 탐문하고 갔다는 사실이 밝혀져 연행됐던 것이다. 이회영 일가의 수난은 이뿐이 아니었다. 아들 이규학이 이 사건과 관련되어 급히 상해로 도피해야 했다. 그 와중에서 이규학의 두 딸 학진과 을진이 성홍열(猩紅熱)로 사망했다. 또한 우당의 6개월 된 어린 아들 이규오까지 사망해 우당은 순식간에 아들 하나와 손녀 둘을 저세상으로 보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겪었을 고초는 일반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언론인 월봉(月峰) 한기악(韓基岳)이 그 비참한 일들의 뒤를 도맡아서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당의 어린 딸 현숙마저 뇌막염에 걸리고 말았다. 월봉이 자선 병원으로 데려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입원시켰다. 하지만 병원에서도 손을 놓을 정도로 중증이었다.

 

이회영 일가의 비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김달하가 제거된 후 그 내막을 모르고 있던 부인 이은숙이 아들 규창을 데리고 조문을 갔는데, 이것이 독립운동가 사회에 말썽을 일으켰다. 이은숙은 김달하의 소행은 나쁠지 몰라도 그 부인 김애란은 평소에 가끔 경제적 도움을 주돈 처지였으므로 예의상 조문을 간 것인데, 우당이 김달하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부인을 조문 보냈다는 엉뚱한 소문으로 번졌던 것이다.

 

당시 이런 비난이 얼마나 높았는지 한세량의 집에 유숙하고 있던 심산과 단재가 절교 편지를 보내온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김달하의 밀정 행위를 성토하고 그의 제거를 함께 논의했던 심산이 절교 편지는 보낸 것은 우당을 밀정으로 의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만큼 당시 북경의 한국인 사회는 긴장되어 있었다.

 

우당은 심산의 편지를 받고 그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비난은 그에게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다. 급기야 다물단 조직을 지도한 그를 다물단의 단원들이 감시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돌파구를 연 사람은 이은숙이었다.

 

이은숙은 아침 일찍 규창을 데리고 집안 식구들 모르게 부엌용 칼을 지니고 단재와 심산이 있는 집으로 갔다. 이은숙은 심산과 단재에게 김달하를 처음 우당에게 소개한 사람이 누구냐고 따지는 것을 시작으로 남편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또한 심산과 단재에게 우당이 잘못이 없음을 만천하에 표명하도록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자결하겠다는 단호함을 보였다. 두 사람은 오해를 풀고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부터 이회영 일가에 대한 부정한 말은 일체 돌지 않았다.

 

이후 심산은 1925년 봄, 우당과 함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한 끝에 내몽고 지방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생활근거지를 조성하여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제2차 봉직전쟁(奉直戰爭)과 오패부를 물리치고 북경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풍옥상(馮玉祥)에게 교섭한 결과,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의 황무지 3만 정보(町步)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심산은 그 땅의 개간 및 재만동포의 이주 비용 약 20만원을 마련하고자 8월에 단신 국내로 잠입하여 비밀리에 모금활동을 펴나갔다.

 

그러나 의외로 호응이 미미하여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황무지 개간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에 그는 유림들에게 간신히 모금한 3천 5백원을 가지고 국내에서의 의열투쟁 계획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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