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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팸투어]쓰임을 받으면 실행하고 버림을 받으면 은거하라

김형석 |2011.07.05 20:09
조회 68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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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팸투어] 1. 쓰임을 받으면 실행하고 버림을 받으면 은거하라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복효근 시인의 詩 '어느 대나무의 고백' 中에서

 

대구시 달성군 문화유산 도동서원의 400년 수령의 은행나무를 보면서

왜 좋아하는 시 '대나무...'를 떠올렸는가?

 

문화관광 해설사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모신 서원이란 설명에

태생적 한계, 왕도정치의 꿈을 꺾인 조광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시대에 버림받고 유배지에서 김굉필은 조광조를 가르친다.

좋은 스승을 만났기 때문일까?

벼슬길에 올라 중종의 신임까지 받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실행이 성공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부패한 권력층에 날카로운 칼끝을 겨냥했다가 훈구파의 반격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임을 당한 사림파의 리더 조광조는

이상적인 자치 국가를 꿈꿨던 조선의 개혁 정치가였다.

 

야만의 시대, 나뭇잎 같은 선비의 명분과 목숨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불안감을 느낀 훈구파들은 

정암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모략을 구상하다,

나뭇잎에 꿀을 발라 개미가 갉아 먹게 한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역모의 증거로 그 나뭇잎을 중종에게 보이도록 했다.

 

손자, 제갈공명, 장자방도 울고 갈 비열한 간계로 게임 오버!

연산군을 폐왕으로 만들고 왕위에 오른 중종의 치명적 아킬레스건을 건드렸으니...


김굉필의 수제자 조광조의 개혁 정치의 실패를 역사책에서 배운 나는

"혁명은 쉬우나 개혁은 어렵다."라던 어느 정치인의 이야기처럼

격변기마다, 못다 이룬 꿈의 선비의 통한을 생각했었다.

조금 비겁하게 사는 게 편한 법이여...ㅎㅎ

 

386세대의 비애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한 낭만적 지진아는 언제부터인가?

'시대로부터 비켜 살기'를 노래인양 속으로 되내이며 살았다.

 미술관, 박물관 등으로의 여행을 통해 예술품에서 숨어 살며

'소유하지 않고 사랑하기'를 실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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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금은 도금할 필요가 없다

 

대구시는 스토리텔링을 활용, 이 은행나무를 '김굉필 나무'로 작명해 홍보하고 있다.

도동서원의 상징인 은행나무는 도동서원 건립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너의 노오란 우산 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곽재구 시인이 서정적으로 노래한 시 '은행나무'는

노오란 희망으로 민초의 가슴을 불타게 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큰 뜻을 펼치지 못한 선비들 염원의 분신일까?

 

그러나 노론소론, 동인서인 등 무뢰한 자들의 당쟁은

청렴하고 지조 있는 선비들에겐 '놀 물이 좋지 않아'

결국은 은신처가 자연이었을 것이다.

 

삿갓에 되롱이 입고 세우(細雨) 중에 호미 메고

산전(山田)을 홋매다가 녹음(綠陰)에 누었으니

목동(牧童)이 우양을 몰아 잠든 나를 깨워라.


-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꿈꾸던 선비, 김굉필의 시조

 

일반적으로 서원이나 향교에는 은행나무가 많이 있다.

행단(杏壇)이라 하면, 학문을 닦는 곳을 이르는 말로

공자가 은행나무 단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행단에 있는 나무가 "살구나무냐? 은행나무냐?"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행단의 행(杏)을 은행나무로 해석하고,

공자의 가르침을 받들거나 기리는 향교, 서원 등에는 대부분 은행나무를 심는단다.
공자의 행단을 염두에 두고 학문을 연마하는 유가(儒家)의 선비들이

조성한 단(壇)으로서 필요한 나무였다고 생각한 까닭이겠지.

또한, 가을에 주렁주렁 달린 은행처럼

선비들의 학문이 주렁주렁 결실을 보기를 바라는 뜻일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가 있는 은행나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김굉필 나무'는 열매가 맺지 않는 수나무란다.

 

쓰임을 받으면 행하고 버림을 받으면 숨는다

(用之則行, 舍之則藏 용지즉행 사지즉장)

 

논어의 '술이편'에 나오는 말인데

"쓰임을 받으면 실행하고, 버림을 받으면 은거하라."로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가끔 읊조린다.


경제란 무엇인가?

경세제민(經世濟民), 즉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이다.

 

파국적 당파싸움에서 밀려난 선비들은

유배지에서, 낙향한 촌거에서

강태공처럼 낚시만 하며 때를 기다리지 않았다.

후학을 양성하며 못다 이룬 꿈은 '교육의 힘'을 믿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스스로 공부하며

황금포 용포(龍布) 앞에서 '경세제민'을 역설할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은행나무 심은 뜻은?

내심...결실의 계절 가을이 오면

은행잎들이 왕의 색, 노랑으로 물들어

임을 더욱 그리워하라는 뜻?

 

그러나,

대한민국의 역사에는 피바람 부는 사화(士禍)의 칼바람들...

 

김굉필 선생은 폭군 연산조의 갑자사화 때 유형지에서 사약을 받는다.

그의 스승 김종직은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는 유학자에게 치욕적 능멸인

무덤에서 관을 꺼내어 시신을 참수하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쓴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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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폭염 속의 빙수 같은 글, 위대한 영혼의 미소를 만나다

 

우리나라 서원 공간배치의 기본 모델이라는 도동서원을 조망하기 위해

다람쥐가 많은 고갯마루라는 다람재에 올랐다.

풍수지리에서 명당인

배산임수(背山臨水)는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본다는 뜻이라는데

대니산과 낙동강의 그림 같은 풍경을 보다 만난 김굉필 선생의 시비.

 

路傍松(노방송) 길가의 소나무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으며
오가는 길손 영송하느라 수고롭구나
겨울철에 너와 마음 같이하는 이를
지나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나 보았는가


一老蒼髥任路塵(일로창염임노진)
勞勞迎送往來賓(노노영송왕래빈)
歲寒與汝同心事(세한여여동심사)
經過人中見幾人(경과인중견기인)

 

김굉필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도학(道學)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평가된다. 노불(老佛)을 사도(邪道)라 하여 배격하고 유학의 도통(道統)에 참여할 때 참다운 진리를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수기(修己)의 대요(大要)는 언행을 삼가는 것[謹言行]과 위의를 바르게 하는 것[正威儀]에 있으며, 수기의 근본이 정심(正心)·성의에 있으니만큼 수기를 위한 궁행(躬行)의 요체는 경외를 숭상하는 것[崇敬畏]과 일욕을 경계하는 것[戒逸慾]에 있다고 파악했다. 이러한 수기의 행(行)이 있은 다음에야 도술을 밝히는 것[明道術], 인재를 가리는 것[辨人才], 정치의 대체를 파악하는 것[審治體], 인정을 살피는 것[察人情] 등의 치인(治人)의 대요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수기의 궁행을 의리실천의 필수 전제조건으로 여기는 점이 학문은 〈소학〉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여 〈소학〉이 제시하는 생활규범을 실천하는 데 힘썼던 까닭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조선 주자학의 기본문제였던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의 문제가 아직 논의되고 있지 않았으나, 그는 이미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간략하나마 다루고 있었다. "천하의 만물은 이(理)가 있고 분(分)이 있으니, 이(理)는 만 가지 것이 모여 하나가 된 것이고 분(分)은 가지로 나뉘어도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하여 보편과 특수의 일체성을 강조했다.

 

한편 "작은 털에도 태극이 갖추어져 있으며 태산이 크다고 하지만 그 역시 하늘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형이상(形而上)으로 보면 천지도 또한 일물(一物)이 되고 형이하(形而下)로 보면 사물마다 무극(無極)이 된다"고 이일분수설을 설명했다.
그의 학문은 조광조, 김안국(金安國) 등에 전해져 뒷날 지치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김안국·이장길(李長吉)·윤신(尹信)·이장곤(李長坤)·김정국(金正國) 등이 있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이황은 그를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으로 칭송했다. 아산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 화곡서원(花谷書院)·희천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 景賢錄〉·〈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인용: 金武鎭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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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학동자니 어찌 대의를 알겠는가?

 

"글을 읽었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는데

소학 책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이제부턴 마음을 바쳐 자식의 직분을 다하려 하니

구차스러운 부귀를 어찌 부러워하리오."

김굉필 선생이 남긴 '소학을 읽고(讀小學)'라는 제목의 시다.

하늘의 이치를 깨우치려는 거창한 공부에 매달리기에 앞서

대학자는 겸손하게 '기본의 충실'을 다짐한다.

소학 공부를 몹시 중시했던 김굉필은

말년까지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하면서

위정자의 덕목으로서 수기(修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치인(治人)에 역점을 두어 제도 개혁을 통한 부국안민(富國安民)에 치중하나

수기(修己)에 역점을 두어 치자(治者)의 도덕적 자기 절제를 통해 부패를 막으나

무엇이 문제인가?

백성의 평안을 위한 선정(善政)이라면.

 

아무리 높은 벼슬을 하는 선비라도 선생의 사당에 들어설 땐,

갓이 문에 닿지 않기 위해 머리를 숙이고...

환주문(喚主門),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르는 문'을 들어서야 한다.

 

도동서원(道東書院)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서원이다. 2007년 10월 10일 사적 제488호로 지정하였다.
조선 오현의 한 사람인 문경공 김굉필(1454년~1504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68년(선조 1년) 유림에서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우고 쌍계서원이라 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 후 1605년(선조 38)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고 당시의 동명이 보로동이었으므로 보로동서원이라 불렀다. 그 후 2년 뒤인 1607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면서 공자의 도가 동래하였다는 의미로 도동서원이라고 하였다. 이때 동(洞) 이름도 도동리로 개칭되었다.[출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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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도동서원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으로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하였으며,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 '소수 서원'이라 사액한 것이 시초이다.

 

민흘림 기둥에 하얀 상지(上紙)는 조선5현 중 최고를 모셨다는 의미란다.

사액을 용렬한 임금, 선조에게 받은 것이 조금 찜찜...

 

그러나, 붕당정치의 악행으로 갑자사화 때

귀양지 전라도 순천에서 희생됐던 김굉필 선생을 모신

도동서원은 대원군의 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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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동서원 곳곳에 배치된 고졸미(古拙美)의 조형성!

유구무언이다.

용, 거북, 다람쥐 등 석물들이 서툰듯한 자연스러움으로

여행블로거 기자단 일행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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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제물을 살피던 곳, 생단(牲壇)이란다.

생단이란 제향 때 제수로 쓰일 희생 제물인 돼지 등을

수관(獸官)들이 제사 전에 미리 제물을 검사하였다.

 

"충(充)!"

"불(不)!"

이 한 단어에 짐승의 목숨은 저승길로 행차해야 했단다.

인간의 형벌로 치면 단두대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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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양오행의 사상을 담아 축조되었다는 흙담이 매우 아름다웠다.

미(美)는

너무 머리로 읽으려는 것보다

눈으로 음미하며 맛보는 것!

그럴려면 미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아집과 철학이 확립되어야 하겠지만...

 

왜 이런 앞을 가로막는(?) 벽을 좋아하는 건가?

남들이 무심히 넘기는 것들이 나는 좋아ㅎㅎ

 

도동서원 강당사당부장원(道東書院講堂祠堂附墻垣)은 보물 제350호이다. 강당, 사당, 담장을 이른다.
담장은 자연석 등을 정렬시킨 지대석 위에 자연 막돌을 쌓고 그 위에 암키와를 5단으로 줄 바르게 놓아 그 사이에 진흙층을 쌓아 올렸다. 또한 기와담장 사이에 100cm 정도의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워 넣었다. 담장에 암악새와 수막새를 사용한 것은 음양의 조화를 통해 생명력을 불어넣고 장식효과를 최대한 살린 것으로 담장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전국에서 토담이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곳이다. [자료: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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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필 선생과 정구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제향 시연을 했다.

사당 동쪽의 흙담 건축물에 난 사각형 구멍은  제문을 태우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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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의 명륜당에 해당하는 도동서원의 강당 중정당(中正堂),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실천하려던 유생들의 글읽기와 논쟁의 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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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수월루에서 바라다보이는 강 건너 고령군.

 

개진(開津) 포구라고 부른다는데

포구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면 팔만 대장경이 이곳을 통해 옮겨갔기 때문에 개경포(開經浦)라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팔만대장경도 여기에 내려 가야산 해인사로 옮겼다는데,

올해가... 국보 제32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의 과학적 우수성과 역사적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려는

'2011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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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연서원 입구 느티나무 '곽재우나무'

 

장군의 환생인가?

홍의(紅衣)를 입은 사내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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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장마 속에 찾은 예연서원에서 배운다.

"의로운 충절의 피는 후세에도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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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원서원과 은행나무 '곽준 나무'

 

 “집에 물이 새는 것을 아는 자는 지붕 아래 있고, 실정(失政)을 아는 자는 초야에 있다."

                                      (知屋漏者在宇下, 知政失者在草野)


              예원서원은 1980년대 복원하여 도동서원 같은 한국 건축의 전통미에 대한 감동은 적었다.

그러나,

위난에 처한 강토를 구하기 위해

구국의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마다치 않던

흠모하는 곽재우 장군을 만난다는 기쁨은 너무 크다.

 

예연서원을 나서며...

 

충익공(忠翼公)의 은둔에서

 유방에게서 토사구팽을 당한 한신의 길과

 자연에 은거한 장자방의 길을 생각했다.

 

곽재우 장군을 버린 자들은 누구인가?

김덕령 장군을 베어버린 자 누구인가?

이순신 장군을 사지로 몰고 간 자 누구였던가?

왜적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한 구국의 영웅들

우리가 내치고, 우리가 죽였다!

 

민족, 민중의 열망과 사랑의 반대쪽에 있는

소아(小我)와 사익에 눈먼 사악한 그림자 같은 치들!

예연서원 사진 풍경 속, 전봇대처럼 뽑아버려야 할 자!

진정 누구였던가?

 

역사에서 배우자!

 

 

예연서원(禮淵書院)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곽재우(1552∼1617)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하여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하여 큰 공을 세운 인물로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의 ‘홍의장군’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광해군 10년(1618)에 ‘충현사’로 처음 세웠고 현종 15년(1674)에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숙종 3년(1677)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예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77년과 1984년에 걸쳐 복원하였다. 현재는 곽재우의 재종숙으로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곽준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있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과 강당 등 주요 건물과 제물을 준비하여 두던 고사, 숙소로 사용되던 동·서재 등이 있다. 사당은 곽재우와 곽준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강당은 유림의 회합장소와 교육 장소로 사용하던 건물로 중앙에는 마루를 구성하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한 구조이다.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경내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비석이 있어 흥미롭다.[출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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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1 대구 방문의 해' 및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홍보를 위해 추진한

대구광역시의 '여행블로거 기자단' 문화관광 2차 팸투어 문화답사기입니다.

7월 초, 1박 2일 일정의 팸투어는

인흥마을, 용연사, 도동서원, 예연서원, 동촌유원지, 서문시장, 동성로, 대구수목원, 우방랜드, 수성유원지, 반고개 등과

대구시의 맛집, 친환경 사업장 등을 투어 했습니다.

 

다음 글은,

 쓰레기 매립지가 친환경 문화공간으로 경천동지하여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대구수목원에서 만난 불륜화(不倫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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