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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원숭이들이 한짓..★독도방문 허락하면 안됩니다.. 이걸보면요

반대 |2011.07.29 13:38
조회 243 |추천 0

한국 정부 고문 이시즈카 에조

 

에조 보고서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에조란 한 일본인의 보고서로 을미사변 직후 바로 작성되어

스에마쓰 법제국장에게 전달된 시해사건에 가담한 일본 관련자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해 쓴것이라 한다.

 

서간용 두루 마리에 먹으로 씀(명치28년10월9일부)伊東 백작가 문서 조선왕비사건 관계자료.

 

 번역출처  http://blog.naver.com/neko772/10007322832

 

 

 

 

스에마쓰 장관님,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 건청궁 옥호루에서 민비를 시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를 드리고자 합니다.민비는 강제로 저고리가 벗겨져 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태로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낭인 하나가 거센 발길로 민비의 가슴을 밟고 짓이기자 또 하나의 낭인이 민비의 가슴을

칼로 베었습니다. 일은 그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왕세자를 불러 죽은 여인이 민비임을 확인한 낭인들은 모두 민비의 주위에 몰려 들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가장 고귀한 여인을 앞에 두자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왕비를 시해했다는 기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조선 제일의 미녀를 앞에 두어서였는지...

 

낭인들은 민비의 하의를 벗겼습니다.한 낭인이 발가벗겨진 왕비의 음부를...

숫자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몇몇 낭인이 결국은 바지를 벗고 성기를 꺼내 왕비의

희고 깨끗한 몸에...정액으로 얼룩진 조선 왕비의 시체를 앞에 놓고 낭인들은

대일본 만세를 불렀습니다.

  

 

 

3.謀議者
推察するに岡本は主唱者たるの如し 大院君の入闕を斡旋したるは正しく同人なり 外に柴 楠瀨 杉村は密議に參與したりと云う 其他は少しも關知せず 守備隊長馬屋原の如きは命令的に實行の任に充られたるが如し


4.實行者
此荒仕事の實行者は訓練隊の外守備兵の後援あり(後援は或は當からざるが如し)尙ほ守備兵の外に日本人二十名若あり熊本人多數を占(漢城新報社迹)中に新聞記者數名又醫師商人もあり 隨て洋?和?相混ぜり 岡本は大院君と同時入城し實行の任に當れり 守備隊の將校兵卒は四門警衛に止まらず門內に侵入せり 殊に?次馬連は深く內部に 入입み王妃を引き出し二三個處刃傷を及し且つ裸?とし局部檢査(可笑又可怒)を爲し最後に油を注ぎ燒失せる茅 誠に之を筆にするに忍びざるなり 其他宮內大臣は頗る慘酷なる方法を以て殺害したりと云う 右は士官も手傳へたるも主として兵士外日本人の所爲に係るものの如し大凡三時間余を費して右の荒仕事を與したる後右日本人は短銃又は劒を手にし徐徐として光化門 (王城正門)を出て群集の中を通り拔けたり 時已に八時過にて王城前の廣小路は人を以て充塞せり   3.모의자   추측하여 살펴보건데 오카모토가 주모자인 것 같습니다. 대원군의 입궐을 斡旋한 것은 바로 이 사람입니다. 그 이외에 시바.크스세.스기무라가 시해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기타는 적어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수비대장 마오하라같은 사람은 명령으로 실행의 임무에 충당된 것 같습니다.    4.실행자   이 막된 짓의 실행자는 훈련대 이외에 수비병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후원은 혹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다만 수비병 외에 일본인 20명쯤이 있었습니다. 구마모토현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여 그들 중 신문기자 몇 명 또한 의사,상인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양장, 화장(일본옷)이 서로 섞여 있었습니다.   특히 무리들[野次馬達]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이끌어내고두 세 군데 칼질을 저질러 (刃傷을 입히고 나서) 나체로 하고 국부검사(우습기도하고 화가 치미는 일입니다(可笑又可怒)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뿌려서 태워버렸다든가 참으로[誠히] 이것을 쓰기 염려가 됩니다.   차마 쓸 수 없습니다. 기타 궁내대신은 몹시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위는 사관도 도와주기는 했지만 주로 병사 외 일본인들이 저지른 짓인 것 같습니다. 대략 세 시간 여를 소비하여 위 막된 짓을 저지른 후,   일본인들은 단총 또는 도검을 손에 쥐고 徐徐히 광화문을 나가 군중 가운데를 뚫고 나갔습니다. 그 때가 벌써 여덟시가 지났고 왕성앞 대로(廣小路)는 사람으로 充塞했습니다.  

 

에조 보고서가 발견된 경위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를 1988년<민비 암살>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 여사가 자신의 저서에서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때 내부 고문은 정식 직책이 아니라 명목상의 직책이라는 주장이 있다.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7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가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가 1964년 《코리아평론》10월호에〈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를 이와나미에서 발간했다.   여기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고,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신학자 안병무 선생이 《한일합병사》(범우사)로 제목을 바꾸어 번역했는데, 문제의 ‘능욕설’ 대목이 존재한다.   소설가 김진명이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을 읽다가 그 행간에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음을 깨닫고, 그 책을 번역한 김은숙 교수를 통해 후사코 여사로부터 대여섯 권의 전적을 소개받았으나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뒤 한국과 일본을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고, 후사코 여사마저 “기억이 희미하다”라며 물러섰다.

막다른 골목에서 김진명은 평소 알고 지내던,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는 권용석에게

보고서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고 귀국한다.

 

김진명이 한국에서 지내던 어느 날 권용석이 그에게 책 몇 권과 자료를 보내었다.

 

그중에는 《일본의 한국병합》도 있었고, 그 책을 읽다가 김진명은 ‘능욕’ 장면 중 일부를 발견하였지만,

에조 보고서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진명은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 《일본의 한국병합》을 다시 꺼내들었다.

 

문득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발견한 장소를 어딘가에 밝혀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에조 보고서〉를 언급한 그 책의 223쪽 주석에 출전이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장,

헌정사편찬회문서 라고 밝혀져 있었다고 한다.

 

김진명은 일본의 권용석에게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가서 그 문서를 찾아 팩스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에조 보고서〉 전문은 장장 107년 만에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이다.

 

에조 보고서는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 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정지환. “[단독발굴] '에조 보고서' 일본서 입수 국내 첫 공개

《오마이뉴스》, 2002년 6월 3일 작성. 2008년 9월 4일 확인.

 

http://ko.wikipedia.org/wiki/%EC%97%90%EC%A1%B0_%EB%B3%B4%EA%B3%A0%EC%84%9C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7332

[출처] 을미사변 - 명성황후 시해사건 2 에조 보고서|작성자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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