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데 새어나오는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낄낄낄 정도의 방정맞은 웃음. 영화를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영화관을 나오면서도 잡히지 않는 무수한 것들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지만, 그게 명확해질 리가 없지. 그래서 난 또 낄낄낄 웃었다. 언젠가부터 조금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가 좀 변한 것 같았거든. 뭔가 좀 더 밝아졌고, 착해졌으며 왠지 모르게 우리에게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멀리서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그런 존재였으면 했는데, 불안하게 자꾸 다가오는 거야. 심지어 몇몇 영화들은 싱그러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하하하>와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참 행복하게 감상했다. <옥희의 영화>를 보면서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감동적이기도 했으니까. 근데 내가 좋아하는 홍상수는 아니었다. 그리고 <북촌방향>를 보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그는 아직도 처연한 인생의 뒷골목을 얼빠진 얼굴로 배회하는 음울한 남자야.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킥킥거리며 웃겠지만, 뒷맛이 왜 이리 씁쓸한지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내 생각인데 이 영화 <북촌방향>은 홍상수를 설명할 때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주된 영화일 것이다.
북촌방향은 내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말할 거리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말을 줄이고 싶다. 굳이 주절주절 떠들지 않아도 북촌방향은 근사한 영감을 주는 작품이다.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들은 그 의미 하나하나를 따지고 싶을 정도로 정감 가는 정서를 풀어놓는다. 난 그저 영화에서 솟구치는 감정의 침투를 그저 즐기면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니 헛된 노력말고, 그저 보고 자신만의 느낌을 흡수해내면 그만이다. 그래도 몇가지 기억나는 것들을 적어두려 한다.
흑백세상
왜 흑백영화여야만 했을까. 홍감독님의 말씀대로라면 우연히 촬영감독을 통해 흑백영상으로 바뀐 영상을 보았는데, 그 느낌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딱 맞아떨어져 즉흥적으로 바뀐 것이라 한다. 빛이 주는 자극을 누르고, 단순하게 그 상황을 주시하고 싶었다는 본인의 말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내게 흑백영화가 주는 느낌은 북촌이라는 공간이 주는 정감어린 분위기 그 자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중에 서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그 공간에 대한 사랑이 깊이 느껴진다. 특히 또 다른 흑백작품인 <오 수정>과 <극장전>이 그랬다. 흑백으로 담긴 북촌의 사랑스런 술집과 밥집을 비롯한 아늑한 골목들은 흑백이라는 근사한 틀에 담겨 한층 아늑한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또한 흑백은 색의 구조를 0과 1로 단순하게 표현해낸다. 현재의 시간을 죽이고, 관객이 넣고 싶은 적절한 색을 상상 속에서 항유하는 경험은 신비로운 효과를 준다. 영화가 만든 북촌이라는 공간에서 인물들이 그 어떤 시간적인 제약 없이 즐겁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술 한잔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준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관객들은 그 대화에 끼어 그들의 수다를 즐기면 그만이다. 대화의 내용 자체가 인생에 대한 관념적인 담론들이고, 어떤 주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개인적인 이야기들이다보니 딱히 어떤 지식이나 그들의 경험에 대한 추측이 없이도 대화를 즐길 수 있다. 결국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 있어 정말 그들의 대화장소에 끼여 술 한잔하며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인텔리들의 대화에서 찌질한 면을 발견하는 것은 홍상수 영화만의 재미지만, <북촌방향>은 그들의 속물근성을 즐기지 않는다. 여자를 꼬시기 위한 뻐꾸기는 여전하지만, 허튼 수작으로 비열한 속내를 내보이는 경우는 없다. 대화들은 갖가지 일상의 유머가 담긴 즐거운 술자리용 대화 딱 그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인물들 하나하나에 정이 많이 간다. 영화의 흑백의 아늑한 분위기가 대화가 주는 감정의 밀도를 높여준 이유도 있다. 내 옆자리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을 참질 못하고 키킥 거리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는 관객 전체가 그들이 하는 대화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상수 영화라고 하면 불편하고 거북한 상황에 놓인 대화들이 주를 이루는 불편한 영화라고 생각했던 관객이라면 <북촌방향>의 유머러스하고 부드러운 상황상황이 새롭게 느껴질 게 분명하다.
시간성의 거세
그의 전작 <옥희의 영화>를 보며 4가지의 이야기가 홍상수 감독의 머리에서 어떤 시간적 흐름으로 구성되었는지 분석한 적이 있다. 그만큼 시간을 이어붙이고 싶은 욕구는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의 바람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시간이라는 기준을 중심으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그건 본능과 같은 욕구다. 우리의 삶은 항상 시간단위로 스케쥴을 짜고, 과거를 시간으로 정리해내려 하지 않나. 하지만 <옥희의 영화>는 그 시간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구체적인 설명을 회피한다. 그저 관객이 4-3-1-2 혹은 1-3-2-4 이런 식으로 우스운 조각놀이를 하게 된다. <북촌방향> 역시 시간성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은 최대한 자제하고, 그 장면장면에 집중하려는 의도가 옅보인다. 인물들이 그 어떠 시간의 흐름에 관계 없이 '우연'이라는 설명 불가능한 시간대에서 놀고 있다. 매일 소설이라는 술집에서 갖가지 얘기를 하지만, 성준은 마치 어제 기억은 모두 잊은 듯 '오늘은 소설이라는 술집에 갔다'고 말한다. 3~4일간 성준의 여행을 따라다니려고 마음 먹던 우리는 그의 말투에서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게 과연 시간의 흐름으로 정렬된 이야기가 맞는가. 그저 하루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은 아닐까. 하나의 상황에 여러장면을 붙여넣은 것은 아닐까. 갖가지 추측으로 혼란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간성의 배제는 영화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구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흑백화면을 통해 자극을 최대한 누르고, 인물들간의 대화에 집중했던 영화는 시간의 제약마저 완전히 벗어던짐으로서 인물들이 그 공간 속에서 순간순간 하는 말과 행동에 모든 집중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신화적이고 마치 오래된 우화를 듣는 듯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면, 홍상수가 애써 배제하려고 했던 시간성의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유령들
이런 신비로운 기운들은 인물들에게서도 나타난다. 1인 2역으로 출연하는 경진과 예전은 예전이 경진의 과거는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북촌의 '소설'이라는 술집의 예전이라는 여자를 보며 똑같이 생겼다고 말하는 성준의 발언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은 자연스럽게 오래전 연인이었던 성준과 경진의 첫 만남을 생각하게 되고, 암묵적으로 영화도 그 장단에 맞춰 흘러간다. 영화엔 성준이 술집주인인 예전과 두 번의 키스를 하는데, 그때 그를 자극시킨 것은 경진이 보낸 문자 때문이었다. 다른 공간에서 헤어진 전 연인인 경진의 문자를 받고, 북촌에서 성준은 예전의 경진인 예전과 키스를 한다. 이 순간부터 난 북촌에서 만난 이 사람들은 성준의 꿈속에서 만든 허구의 인물들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시간과 공간을 벗어던진 흑백의 북촌은 성준이 지방의 대학교수를 하며 그리워한 추억의 산물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경진은 성진이 오래전에 사귀던 애인이고, 예전은 처음 본 술집주인이다. 하지만 성준은 경진의 문자를 받고, 예전의 입술로 돌진한다. 그리고 두번째 키스에서 예전은 돌연 성준에게 오빠!라고 말하며, 우리가 기억하는 영화 초반 경진의 말투로 성준에게 모두 다 버리고 자신에게 와달라고 애원한다. 영화의 의미상 같이 동행한 영호와 보람을 보내고 다시 와달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 말투 자체가 경진이 그에게 애원하는 것으로 들렸다. 이 장면은 무척 섬뜩한 기운을 풍기는데, 그 이유는 이 장면에서 우리가 믿고 시간의 흐름 자체가 다시 한 번 역으로 뒤틀리기 때문이다. 단순히 추측으로만 믿고 있던 경진과 예전이 하나의 사람으로 치환되면서 바뀌어 지는 시간구조는 이 영화의 인물들의 현실성을 배제하는 효과에 힘을 보탠다. 성준과 술자리를 하는 영호와 보람 그리고 중원까지 성준이 만든 유령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영화의 스틸 컷을 통해서도 보면 알겠지만, 그들은 마치 아스라진 기억 속에 존재하는 희미함을 가진다. 성준이 가진 욕망과 트라우마가 만든 꿈속 세상이 북촌방향을 구성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화가 풍기는 처연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감당해낼 자신이 없어진다.
지속적으로 낄낄대며 웃던 난 성준이 예전과 납득할 수 없는 이별을 하면서부터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성준은 자신을 위해주는 영호형을 만나기 위해 전화를 하지만 그는 더이상 만나기 귀찮다는 듯 그를 피한다. 우연히 만난 과거에 자신에게 잘 했었던 한 영화인은 자신을 못 본 척하고, 오래전 수업을 들었던 선배 영화인은 자신을 인사치레나 하며 대한다. 그는 다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북촌으로 한 잔 하러 가는데,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가 나타난다. 전국민이 사진작가인 시대에서 사진을 찍는 여자다. 성준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사진기를 응시한다. 우리는 무너지는 감정을 어쩔 도리가 없이 견뎌야 한다. 도대체 어떤 것이 이렇게 자신을 처연하게 하는지 감도 잡지 못한 체 영화관을 나서야 한다.
김상중과 김의성
매주 토요일 저녁에 심각한 얼굴로 그것이 알고 싶다던 김상중을 스크린에서 보니 무척 정겨웠다. 안정감 있는 연기로 그가 연기한 영호라는 인물은 이 영화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지탱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했다. 아무런 욕구도 없고, 인간적인 고민도 없어보이는 영화평론가를 연기한 김상중은 영화에 단 한 번 알 수 없는 이유로 감정을 폭발하는 장면이 있었다. 자신이 아끼는 후배에게 조언을 하는 장면인데, 그는 이 장면을 통해 유일하게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말을 한다. 충분히 인상적인 연기였다. 영화에서 성준의 첫 번째 영화에 주연을 한 중원으로 출연하는 김의성은 실제 홍상수 감독의 불세출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실제 주연배우라는 점도 재미있다. 그는 영화에서 베트남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살이 많이 쪄서 안됐다는 소리를 듣는데, 그건 현실에서 홍상수 감독이 김의성을 보는 시각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의 잔재미 중 하나다.
내 생각에는 말야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북촌방향에 대해 실컷 떠들었다. 근데 왜 이리도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멈추지 않는 것일까. 의문은 더해가고, 손에 잡히는 건 없다. 그건 아마도 내가 억지로 이 영화에서 의미를 찾아내려 애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어 북촌방향에 모인 사람들과 같은 짓을 하고 있을 테니까. 벌써부터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글쟁이들의 그의 영화에 대해 특별한 담론을 만들어낼 것도 기대된다. 이 글 역시 느낌을 모두 정리하지만, 뭔가 가슴속에서는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글을 쓰는 와중에도 수두룩하게 쌓여간다. <북촌방향>을 보고 가슴 벅찬 느낌을 느꼈다면 아마도 이 설명치 못하는 감정들의 발산 때문일 것이다. 현실감을 거세해버린 영화는 생각을 풍요롭게 한다. 생각은 더 멋진 영화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고, 무료한 일상에 글 질을 하게 하는 2차적 영감을 파생시킨다. 나이를 먹어가며 홍상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풍요로움의 혜택을 받는 것이다. 생각할 것을 줄이고픈 세상에서 생각의 재미를 알려주는 영화는 항상 반길 수 있다. 언제까지 그의 영화를 보며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두고 수많은 논객들이 설왕설래 할 테지만, 모두들 행복한 얼굴로 <북촌방향>의 유령들에 대해 정감어린 말들을 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말야라고 말을 시작하며.
참고로 홍상수 감독은 얼마 전 국내에 개봉 해 좋은 평가를 받았던 <코파카바나>의 이자벨 위페르와 차기작의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주연은 그녀와 유준상이고, 영어 대사가 85퍼센트 이상이라고 한다. 가제는 '다른 나라에서'이고, 내년 상반기 정도에 우리는 개봉이 예정되어 있다.(물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의 영화는 뉘양스가 중요한 작품인데, 영어 대사를 보고 그 뉘양스를 느낄 수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김기덕 이외에 이렇게 빠른 속도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이 있었던가. 영화팬으로선 즐거운 일이지만, 그의 빨라지는 영화 제작 속도처럼 어느 한 순간 그의 영감이 사그라들지는 않을지 섣부른 조바심이 앞선다. 그 만큼 홍상수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내게 큰 의미를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