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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2.고조선에 대한 인식

개마기사단 |2011.09.18 13:44
조회 336 |추천 1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고조선사(古朝鮮史)는 살아있는 현대사다.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檀君朝鮮]의 실체를 부인했다. 현재 대부분의 국내 역사서도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술되어 있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사실상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강역과 중심지에 대해서도 만주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와 한반도 내로 비정하는 견래로 갈려 있다. 이 가운데 한반도 내로 비정하는 견해는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의 진실은 무엇인가?

● 고조선사의 시간.

카(E.H.Carr)가 남긴 "역사란 역사서술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언명(言銘)은 고조선사(古朝鮮史)에 적용될 때 현실적 구체성을 획득한다. '고조선사는 살아있는 현대사'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고조선사는 현대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 즉 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인했다. 반면 신채호(申采浩)는 1931년 일제(日帝) 경찰에 체포된 이후 여순 감옥에서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연재하면서 우리의 역사를 단군(檀君)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단군조선이 독립운동(獨立運動)의 한 이념으로 기능하기도 했는데 단군교(檀君敎)라고도 불리는 대종교(大倧敎)의 두번째 교주 김교헌(金敎獻)이 일제강점기에 신단민사(神檀民史) 등을 저술한 것도 단군을 국조(國祖)로 하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

한편 식민사학자들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을 부인한 반면 기자조선(箕子朝鮮)이나 위만조선(衛滿朝鮮)은 긍정했다. 이는 기자(箕子)나 위만(衛滿) 등의 중국인에 의해 한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유사(三國遺事)가 고려 후기에 저술되었다는 사실을 단군 부인의 근거로 삼았다. 몽고의 침략을 받고 있던 고려가 국난(國亂)을 맞아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으려는 의도에서 단군의 사적(史蹟)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실제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가 간행된 연대를 충렬왕(忠裂王) 8년 전후인 1281년에서 1283년 즈음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므로, 여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단군을 믿을 수는 없지 않냐는 주장도 연대기적으로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대에 썼다는 이유만으로 사실이 부인된다면 역사학의 존립 근거는 상실되게 된다. 자료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이 역사학이지만 해당 시기의 자료가 없다고 해서 실재했던 역사 사실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상고사는 고조선을 거쳐 북방의 부여 및 각 열국이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연속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한국 상고사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고조선으로부터 열국시대에 이르는 수천년의 역사를 단절적인 역사로 해석하면 많은 모순과 무리가 생기게 된다. 만주 서북부 지역에서 시작해 한반도까지 확장하는 우리 역사의 가장 앞머리에 있는 국가가 바로 고조선이다.

고조선은 그 건국 시기부터 논란에 휩싸여 있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라는 말은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기점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많은 반론이 제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문헌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다. 일연은 삼국유사 왕검조선조(王儉朝鮮趙)에서 위서(魏書)를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위서(魏書)에서 말하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檀君) 왕검(王儉)이 있어서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불렀으니 이는 고(高)와 같은 시기였다.'

여기에서 고(高)란 중국 고대의 군왕(君王)이었던 요(堯) 임금을 뜻한다. 고려 정종(定宗)의 휘(諱)가 '요'이기 때문에 이를 피해서 음이 비슷한 '고'자를 쓴 것이다. 이 기록에서 알수 있는 것은 일연이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그가 본 '위서'의 내용을 인용해 적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일연은 '위서'에 기록된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단군 왕검은 당고(唐高=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庚仁年)에 평양성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라는 기술 뒤에 "요(堯)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戊辰年)이다. 그러니 재위 50년은 정사년(丁巳年)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다."면서 의문을 표시했다.

이는 일연이 분명히 '위서(魏書)'를 보고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기록했음을 뜻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서'에 기록된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의문을 표시했을 리가 없다. 일연이 단군(檀君)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고기(古記)'라는 기록을 통해서였다.

삼국유사의 기이편(紀異篇)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존재한다.

'또 고기(古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냈는데 그 아버지가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 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환웅에게 주어 다스리게 했다. 환웅이 그의 무리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바로 환웅천왕(桓雄天王)이다. (중략) 환웅이 잠깐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檀君) 왕검(王儉)이라 했다."'

'고기'는 '위서'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일연이 살았을 당시에는 현존하던 역사서였다. 특히 '단군고기(檀君古記)'를 뜻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고기'는 '삼국유사'뿐만 아니라 단군의 사적이 실린 제왕운기(帝王韻紀), 응제시주(應製詩註), 그리고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도 인용되었던 것이다. '고기'의 내용은 신화적이지만 이는 자슨들의 시조를 하늘과 연결시키려는 동북 종족들의 전통적 의식의 산물이지 일연의 창작품은 아닌 것이다.

일연(一然)이 비록 13세기에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썼지만 그 자신이 창작해 기술한 것이 아니라 위서(魏書)와 고기(古記)에 나와 있는 기록들을 인용해 기술한 것이다. 즉 '삼국유사'의 단군 기사는 비록 2차 사료지만 '위서'와 '고기'라는 1차 사료를 인용해 쓴 것으로서 1차 사료에 비추어 그리 떨어지지 않는 가치를 갖는다.

일제(日帝) 어용사가(御用史家)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타국의 식민지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그리려 했다. 단군(檀君)이 부정되어야만 중국 이주자인 기자(箕子), 위만(衛滿) 그리고 한사군(漢四郡)을 내세워 우리 민족의 역사가 타국의 식민지로부터 출발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현재의 일본 역사교과서도 한국의 역사를 이런 식으로 폄하, 왜곡하고 있다.) 식민지로 출발한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현대사의 적용 논리'가 개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단군이 몽고의 침략을 당한 고려 후기의 창작품이라는 일본인들의 논리는, 고려 이전에 단군이라는 존재가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들에 의해서도 반박될 수 있다. 첫째, 무씨사당석(武氏祠堂石)이 있다. 중국 산동성 가상현(嘉祥縣)에 있는 전한(前漢) 때 만들어진 무씨사당(武氏祠堂)의 석실(石室) 화상석(華像石)의 그림은 그 내용이 단군설화(檀君說話)와 흡사하다. 이 화상석을 군신(軍神) 치우(蚩尤)의 전투도(戰鬪圖)라고 보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는 단군설화와 유사한 내용이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저술하기 1200여년 전에 발해 연안에 알려져 있었음을 뜻한다. 둘째, 고구려의 각저총(角抵塚) 고분 벽화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씨름하는 두명의 역사(力士) 곁에 있는 큰 나무 밑둥 좌우에 곰과 호랑이가 짝을 이루며 등장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인들이 단군 사적의 주요 내용을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 셋째, 구당서(舊唐書) 고구려조(高句麗趙)는 "영성신(零星神), 일신(日神), 가한신(可汗神), 기자신(箕子神)을 섬긴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의 '가한신'은 바로 단군을 뜻하는 것이다. 넷째, 고려 목종(穆宗) 9년(1006년) 이전에 구월산에 환인, 환웅, 단군을 제사 지내는 삼성사(三聖祠)가 건립되었다는 사실에도 단군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하기 이전에 이미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왕력(王曆)의 고구려 동명왕조(高句麗東明王趙)가 주몽(朱蒙)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고구려는 단군보다는 시조(時祖)인 추모성왕(鄒牟聖王)을 더욱 숭배했다. 부여, 신라, 백제, 가야 등의 고대 국가들도 모두 자국의 직접적 시조를 가장 추앙했다. 한 시기를 건너뛰는 단군은 그 다음 추앙 대상이었다. 이들 고대 국가의 시조들은 모두 단군처럼 하늘과 연결되는 개국 사적을 갖고 있었다.

단군이 민족 전체의 시조로 받들어진 때는 고려시대였다. 그 이전의 다른 고대 국가들은 모두 자국의 시조를 직접 하늘과 연결하고 있어 단군을 시조 이상으로 숭모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태어날 때 용 같은 신기한 광채와 자색 기운이 비쳤을 뿐 하늘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은 까닭에 고려의 경우 단군을 민족 전체의 시조로 받드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고려 인종(仁宗) 9년(1131년) 묘청(妙淸)의 건의로 평양에 설치된 팔성당(八聖堂)의 네번째 존재에 '구려평양선인(句麗平壤仙人)'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선인(仙人)'이 바로 단군(檀君)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동천왕조(高句麗東川王趙)의 "평양성을 쌓고 백성돠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원래 선인 왕검(仙人王儉)의 택(宅)이다."라는 구절과 연관지을 수 있다. '선인 왕검'은 물론 단군을 뜻한다. 고려시대에는 선인이 단군의 이칭(異稱)이었던 것이다.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주몽(朱蒙)과 싸우는 비류국(沸流國)의 군주 송양(松讓)이 자신을 '선인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 경우의 선인도 단군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류국은 만주 흔강 유역에 존재했던 국가이다. 이는 단군 사적이 단순히 평양 지역에 국한된 지역 전승이 아니라 만주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사적임을 뜻한다.

고려의 학자 이승휴(李承休)는 충렬왕(忠裂王) 23년(1297년)에 저술한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못박았다. 이승휴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한 사실을 기록하면서 "단군 원년 무진으로부터 이 때(935년)까지가 무릇 3288년이다."라고 써서 단군을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나아가 이승휴는 "시라(尸羅; 신라), 고례(高禮; 고구려),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濊), 맥(貊), 응(膺)이 있는데, 이들 나라의 여러 임금이 누구의 후손인가를 묻는다면 세계(世系)는 역시 단군에서부터 이어져 왔다."고 기록했다. 여기에서 '응'은 '제왕운기'의 백제기(百濟記)에서 백제를 '응준(鷹準)'이라고 쓴 것과 연결해 백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무렵이 되면 단군이 고구려, 백제, 신라를 비롯해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존재했던 고대 국가들의 공통된 시조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런 인식은 고조선 이후에 존재했던 여러 고대 국가들이 자신들이 고조선의 강역에서 나누어 일어났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단군이 천년 이상 나라를 다스렸으며 후에 산신(山神)이 되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의 기록도 믿지 못할 비과학적 기술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단군(檀君)'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고조선의 통치자에 대한 칭호였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중국의 임금 칭호인 '왕(王)'이라는 용어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통치자를 '단군(檀君)' 또는 '한(汗)'으로 불렀다는 주장이다. 이런 분류법에 따르면 단군은 천자(天子)나 황제(皇帝)처럼 통치자를 뜻하는 용어이고, 왕검(王儉)은 초대 단군의 이름이 된다. 삼국유사는 단군조선의 시조 단군 왕검만을 밝히고 있는데, 현재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위서(僞書)라고 치부하고 있지만 환단고기(桓檀古記) 같은 책들은 시조 단군 왕검을 비롯하여 47대 단군의 계보를 밝혀 놓기도 했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대종교(大倧敎) 교도인 계연수(桂宴壽)가 1911년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世記),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라는 네 종류의 책을 묶어 편찬한 서적인데 아직까지 진위 논쟁이 치열하다. 위 책들에 기록된 단군의 세계(世系)는 다음과 같다.

제1대 단군 왕검(王儉), 제2대 단군 부루(扶婁), 제3대 단군 가륵(嘉勒), 제4대 단군 오사구(烏謝丘), 제5대 단군 구을(丘乙), 제6대 단군 달문(達門), 제7대 단군 한율(翰栗), 제8대 단군 우서한(于西翰), 제9대 단군 아술(阿述), 제10대 단군 노을(魯乙), 제11대 단군 도해(道奚), 제12대 단군 아한(阿漢), 제13대 단군 흘달(屹達), 제14대 단군 고불(古弗), 제15대 단군 대음(代音), 제16대 단군 위나(尉那), 제17대 단군 여을(余乙), 제18대 단군 동엄(冬奄), 제19대 단군 구모소(構牟蘇), 제20대 단군 고홀(固忽), 제21대 단군 소태(蘇台), 제22대 단군 색불루(索弗婁), 제23대 단군 아홀(阿忽), 제24대 단군 연나(延那), 제25대 단군 솔나(率那), 제26대 단군 추로(鄒魯), 제27대 단군 두밀(豆密), 제28대 단군 해모(奚牟), 제29대 단군 마휴(摩休), 제30대 단군 내휴(奈休), 제31대 단군 등올(登兀), 제32대 단군 추밀(鄒密), 제33대 단군 감물(甘物), 제34대 단군 오루문(奧婁門), 제35대 단군 사벌(沙伐), 제36대 단군 매륵(買勒), 제37대 단군 마물(麻勿), 제38대 단군 다물(多勿), 제39대 단군 두홀(豆忽), 제40대 단군 달음(達音), 제41대 단군 음차(音次), 제42대 단군 을우지(乙于支), 제43대 단군 물리(勿理), 제44대 단군 구물(丘勿), 제45대 단군 여루(余婁), 제46대 단군 보을(普乙), 제47대 단군 고열가(高列加)

삼국유사가 저술되기 1천여년 전 중국 측 문헌 자료에 이미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도 고조선의 건국 시기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에 걸친 시대를 포괄하는 '산해경(山海經)'과 기원전 7세기경의 것인 관자(管子)를 필두로 중국의 여로 문헌에는 고조선이 등장하고 있다.



"조선(朝鮮)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해(海)의 북쪽이며 산(山)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燕)에 속한다." 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 "환공(桓公)이 관자에게 '내가 듣건대 해내(海內)에 귀중한 예물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하던데 그것에 대해 들을 수 있겠소?'라고 하니 관자가 '음산(陰山)의 유민이 그 한가지요, 연(燕)의 자산 백금이 그 한가지요, 발(發)과 조선의 문피(文皮)가 그 한가지요,(후략)'라고 답했다." 관자(管子) 권23 규도(揆道)편 "소진(蘇秦)이 (중략) 연문후(燕文候)에게 말하기를 연의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으며(후략)" 전국책(戰國策) 연책(燕策) "진(秦) 제국의 땅이 동쪽으로 해(海)에 이르고 조선에 미쳤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또한 고고학의 발굴 성과도 고조선의 건국 시기에 대한 훌륭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고조선의 표지유물은 고인돌과 청동검(靑銅劍) 그리고 미송리형 토기 등인데 이 중 청동검의 사용 연도는 큰 중요성을 갖는다. 청동기시대에 성립된 국가가 고조선이기 때문에 청동기의 사용 연도는 곧 고조선의 건국 시기가 되는 것이다.

최근까지 한반도의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10세기를 넘을 수 없기 때문에 고조선의 건국 시기도 이 시기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인식해 왔다. 그러나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만주 지역에서 먼저 시작되었기 때문에 만주 지역의 청동기 사용 연도를 폭넓게 적용해야 한다. 최근의 고고학 발굴 성과에 따르면 요동반도의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1500년~기원전 1300년까지 올라가며 향후 발굴 결과에 따라 시기가 더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발해 연안의 초기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2000년~기원전1700년경까지 올라가는데 이 또한 앞으로의 발굴 성과에 따라 더 올라갈 개연성이 있다.

기원전 2000여년까지로 추정할 수 있는 현재까지의 청동기 발굴 성과만 가지고도 기원전 2300여년이라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조선 건국 연대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따라서 기원전 2300여년이라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위서(魏書) 등의 문헌 사료는 물론,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도 뒷받침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이는 또한 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정하고 위만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보고 있는 남한 학계의 이른바 통설에 중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의 개시에 대해 최초의 국가이자 노예 소유주 국가인 고조선을 중심으로 기원전 30세기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고조선의 강역

고조선은 건국 시기뿐만 아니라 그 강역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고조선의 강역 또한 건국 시기처럼 고조선사(古朝鮮史)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만주 서쪽 끝의 난하(爛河)에서부터 한반도에 걸쳐 있었다는 신채호(申采浩)의 주장에서부터 평안북도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이병도(李丙燾)의 주장까지 그 편차가 매우 큰 것이다. 극과 극을 달리하는 두 주장 중 무엇이 옳은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조선의 도읍지를 검토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 경우 도읍지가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몇 번의 천도 과정을 거친 것을 볼 때, 멸망 당시의 도읍지가 어디였는가 또한 검토해야 한다.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주장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대동강(大同江) 유역이 고조선의 중심지였다는 대동강 중심설과 만주의 요녕성 일대가 중심지였다는 요녕성 중심설, 초기에는 요동 지역에 있다가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했다는 중심지 이동설이 그것이다.

대동강 중심설은 고조선의 도읍지가 대동강 유역이었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가 맞다면 고조선은 평안남도 일대에 걸친 작은 소국(小國)이 된다. 대동강 중심설은 고조선 강역사 연구에서 가장 오랜 통설이었는데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들의 한국인 제자들이 심화시킨 내용이기도 하다.

대동강 중심설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단군 왕검은 당고(唐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平讓城)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라는 기술을 근거로 삼고 있다. 고조선의 중심지를 대동강 유역으로 상정하는 이런 견해는 이후 조선 초기의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같은 역사서들의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일부 실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했다.

중국의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에서 한나라 초기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패수(浿水)라고 기록한 것도 고조선의 중심지가 대동강 유역이라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패수를 한백겸(韓百謙)은 청천강으로, 정약용(丁若鏞)은 압록강으로 비정했는데, 이 중 정약용은 고조선의 중심지는 한반도 북부였지만 후에 영토를 확장해서 요서(遼西)를 점령하고 연(燕)과 국경을 접했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정약용의 이런 견해는 만주에 있전 고조선이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중심지 이동설과는 역발상이기도 하다.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한진서(韓鎭書)는 해동역사속(海東繹史續)에서 고조선의 도읍지는 평양이지만 그 강역은 요서지방을 훨씬 넘어선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실학자들의 이런 견해는 대동강 중심설을 인정하면서 고조선의 강역이 만주까지 확장되었다는 절충적 견해이기도 하다.

중국 북위(北魏) 때의 학자인 역도원(驛道元)이 수경(水經)에 주석을 가한 수경주(水經注)의 '패수'에 관한 기록도 대동강 중심설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역도원은 수경에서 기록한 패수의 흐름에 의문을 품고 북위를 방문한 고구려 사신에게 이에 대해 질의했다. 그러자 고구려 사신은 "성(城; 고구려 수도를 뜻함)은 패수(浿水)의 북쪽에 있는데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즉 한(漢)의 무제(武帝)가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의 치소(治所)를 지나 서북 방향으로 흐른다"라고 대답했다. 즉 고구려 사신이 말한 성이 평양성이라면 패수는 대동강이 되는 것이다.

대동강 중심설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더욱 체계화시켰다. 일제는 1930년대 평양 일대에사 중국계 유물들이 대거 발굴되자 이를 근거로 대동강 중심설을 더욱 체계화시켰다. 이는 중국계 유물이라는 구체적 물증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이병도(李丙燾) 등 실증주의 사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병도는 아사달(阿斯達)을 현재의 평양으로 보고 '사기(史記)'의 패수(浿水)를 청천강으로, '한서(漢書)'의 열수(列水)를 대동강으로 보아 고조선의 영역을 평안남도 지역으로 비정했다. 이처럼 여러 문헌 사료와 고고학 사료들을 근거로 체계화한 대동강 중심설은 최근까지도 움직일 수 없는 통설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동강 중심설은 또 다른 문헌 자료와 고고학 자료에 의해 반박당해 왔다. 이와 관련한 문헌 자료로는 중국 고대 진(晉)나라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璡夷傳) 한조(韓朝)에 위략(魏略)이라고 인용해 놓은 부분이 있다. "연(燕)나라는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해 조선의 서쪽 지역을 침공,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았다."는 구절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요동군(遼東郡) 속현(屬縣) 조에는 문현(文縣)과 번한현(番汗縣)이 기록되어 있는데, 만번한은 여기에 기록된 문현과 번한현의 합칭(合稱)으로 이해되고 있다. 연나라에 2천리의 영토를 빼앗기고도 고조선이 요동현의 속현을 연나라와의 새로운 국경으로 삼았다면 고조선의 영역은 평안남도 일대일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평안남도를 모두 합쳐도 2천리가 안되는데 서쪽 2천리의 땅을 상실하고도 요동현의 속현을 국경으로 삼았다면 고조선의 영역이 대동강 유역에 국한되어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고조선의 도읍지가 요동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이 요동 중심설이다. 이런 견해는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申采浩),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정인보(鄭寅普) 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의 권람(權覽) 역시 응제시주(應製詩註)에서 주장한 것이다. 권람은 낙랑(樂浪)을 압록강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기자(箕子)의 건국지를 청주(靑州)로 비정하여 고조선의 중심지를 요동(遼東) 지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권람 이후에도 조선시대 여러 학자들이 요동 중심설을 주장했다. 조선 중기의 홍여하(洪汝河)는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에서 진번(眞番)을 요양(遼陽)에 비정하고 패수를 요하(遼河)로 비정해 역시 이에 동조했으며, 조선 후기의 이익(李瀷), 박지원(朴趾源), 이규경(李圭景) 같은 실학자들도 요동 중심설에 동조했다.

그러나 요동 중심설은 그 내부에서 고조선의 서쪽 국경선과 남쪽 국경선을 바라보는 견해의 차이로 갈라지고 있다. 고조선의 서쪽 국경인 패수(浿水)를 현재의 대릉하(大陵河)라고 보는 시각이 다수지만 신채호는 그보다 훨씬 서쪽인 난하(欄河)로 바라보았다. 대릉하설은 고조선의 표지유물인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과 미송리형 토기가 함께 출토되는 지역의 서쪽 경계가 대릉하 하류라는 점을 근거로 삼은 주장이고, 난하설은 산해경(山海經)에서 조선의 위치를 열양(列陽)의 동쪽이라고 기록한 것에 근거해 열수(列水)를 난하로 보는 견해이다. 고조선의 남쪽 경계에 대해서도 청천강(淸川江)을 중심으로 보는 견해와 예성강으로 보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요동 중심설을 받아들일 경우, 고조선의 서쪽 강역은 대릉하나 난하가 되고 남쪽 강역은 청천강이나 예성강이 된다. 한국 역사가 광활한 만주 벌판에서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거대한 강역으로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요녕성 중심설을 주장한 이유를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사실은 현재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선행해 이미 존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후대인들이 현재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대동강설 또는 요녕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 곳이 아니었던 고조선의 도읍지가 바뀔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동강 중심설과 요녕성 중심설이 치열하게 맞서다 보니 두 견해를 절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바로 중심지 이동설이다.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녕성 지역이었으나 후기에 중국 세력의 확장에 따라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논리이다.

중심지 이동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중시하는 견해이다. 은(慇)나라 사람 기자(箕子)는 주(周)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하자 이를 인정할 수 없어 자신의 세력과 함께 이동을 했는데 그 정착지가 난하 하류 고죽국(孤竹國) 근처라는 것이다. 고죽국 지역이 바로 고조선으로서 조선왕(朝鮮王)의 옛 수도를 뜻하는 왕검(王儉), 험독(險瀆)도 요서, 요동에 있었고, 기자가 사망한 후에는 그를 따라왔던 나머지 세력이 이동을 계속해 평양 지역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즉 기자동래설은 은나라 기자 일파가 이동을 시작해 마침내 평양 지역에 정착했다는 견해다.

또 하나는 요동 지역 청동기문화의 담당자인 조선족(朝鮮族)의 이동에 주목하는 견해다. 요동 지역에는 고조선을 맹주로 하는 읍락 국가들이 있었는데, 연(燕)의 동방 침략으로 그 세력이 약화되어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한 결과, 기원전 4~3세기경에는 요동에서 한반도 서북부에 이르는 영역을 갖게 되었다는 견해다. 이 때 고조선을 공격한 연나라 장수가 진개(秦開)라는 것이다.

중심지 이동설은 그 절충적 성격으로 인해 대동강 중심설과 요녕성 중심설에서 각각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기 때문에 점차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추세지만 보다 많은 검토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고조선 멸망 때의 수도가 어디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연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과 중국의 고대 문헌 자료들은 물론 고고학의 발굴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단, 현재 고조선의 도읍지를 비정할 때 가장 널리 사용되는 중국 문헌들을 검토할 때에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사항들이 몇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고조선의 위치에 관한 서술들이 어느 시대의 역사지리 지식에 근거한 것인가를 검토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현재 '요동(遼東)'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현재의 요하(遼河) 동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고대 중국에서 요하는 먼 강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지 현재의 요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 註; 현재의 '요하(遼河)'라는 이름은 요(遼) 성종(聖宗)대인 1345년부터 불리기 시작한 이름이다. 그 이전에는 구려하(句麗河), 구류하(枸柳河), 거류하(巨流河)라 불렸으니, '고구려의 물'이라는 뜻이다 고대 사서에 나타난 요하는 현재의 난하를 가리키는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중심지 이동설의 가장 큰 쟁점은 고조선 멸망 당시의 도읍지가 현재의 평양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초기에 만주 지역에 있던 고조선의 도읍지가 후기에 한반도의 평양 지역으로 이동했다가 그 곳에서 한나라에게 멸망했다는 이 이론은, 어떤 측면에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대동강 중심설의 아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세심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수많은 유적이 발굴됨에 따라 고조선의 초기 도읍지가 만주 유역임이 분명해지자 대신 고조선 멸망시의 도읍지를 평양으로 비정해 대동강 중심설도 생명력을 유지하게 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 고조선 멸망 때의 도읍지

고조선 멸망 당시의 도읍지는 과연 평양이었을가?

이 문제를 검토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는 조선왕(朝鮮王) 준왕(準王)의 도주로가 기록된 후한서(後漢書) 한(韓)조의 "옛날에 조선왕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경유해[走入海] 마한(馬韓)을 공격해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라는 부분이다. 이 기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삼국지(三國志)' 한(韓)조도 "(준왕은) 그의 근신(近臣)과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해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칭했다"라고 거의 비슷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기록은 그간 두가지 고정관념 속에서 읽혀 왔다. 그 하나는 준왕의 망명 전 도읍지가 평양(平壤)이라는 고정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준왕이 도주한 마한(馬韓) 지역이 현재의 충남이나 호남 지역이라는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도주 전 준왕의 거주지가 평양이고 도주한 마한이 충남이나 호남 지역이라면 준왕은 굳이 '바다를 경유해[走入海]' 도주할 필요가 없었다. 간편한 육로를 두고 굳이 많은 준비와 위험이 따르는 해로를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이 가리키는 '해(海)'는 대개 오늘날의 발해(渤海)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난하를 중심으로 갈라져 있었으니 이 때의 '해(海)'도 역시 발해다.

따라서 준왕(準王)이 '비다를 경유해' 도주했다면 그것은 준왕의 도주 전 도읍지가 육로보다는 해로가 훨씬 유용성을 갖고 있는 지역이어야 한다. 이 경우 바다를 경유해서 도주하는 것이 유용성을 가지려면 최소한 배를 타는 것이 유리한 요동반도 지역이어야 한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이 '삼국유사(三國遺事)' 마한(馬韓)조의 기록이다.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을 치니 조선왕 준(準)이 궁인(宮人)들과 좌우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越海] 남쪽의 한(韓) 지역에 이르러 개국(開國)하고 이름을 마한이라고 했다."고 했으며 (중략) 최치원(崔致遠)은 말하기를 '마한(馬韓)은 고구려이고 진한(辰韓)은 신라이다.(후략)'라고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마한은 고구려'라는 최치원의 말은 준왕이 도주한 지역이 현재의 평양 지역임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이는 다시 말해 준왕이 위만에게 내준 고조선의 도읍지가 평양이 아니라 요동 지역에 있었던 것이고, 바로 이 지역이 고조선 멸망시의 도읍지인 것이다.

고조선의 도읍지가 평남 일대라는 대동강 중심설은 이미 그 논거를 상실했지만 고조선 멸망시의 도읍지가 평양이라는 중심지 이동설도 후한서(後漢書)의 기록과 삼국유사에 인용된 최치원의 '마한은 고구려'라는 인식에 의해 설득력을 상실했다. 이는 고조선의 도읍지가 이동했을지라도 요동에서 한반도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만주 지역 안에서 서로 이동한 것이 된다. 고조선(古朝鮮)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의 유물이 한반도 내에는 전혀 출토되지 않고 만주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평양 지역에서 다수 출토되는 중국계 유물들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전한(前漢) 때의 유물이 아니라 고구려가 존재했던 후한(後漢) 때의 유물이다. 이 부분은 열국시대의 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에 대한 기술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 지역을 아우르던 우리 민족 최초의 고대 국가 고조선의 도읍지는 시작은 물론 최후의 도읍지도 만주 지역에 존재했던 것이다.

이런 강역 문제에 대한 북한 학계의 논리 변화는 흥미롭다. 북한 학계는 1960년대 초반에는 평양 지역의 중국계 유적, 유물을 토대로 대동강 중심설을 주장하다가 그 후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요동 중심설로 정리했다. 그러나 최근 조선사(朝鮮史) 전체를 평양을 중심으로 기술하려는 주체사관(主體史觀)을 공식화시키면서 다시 대동강 중심설로 선회했는데, 여기에는 최근 발굴했다는 단군릉(檀君陵)이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실체

기자조선도 후대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인정과 부인이 반복되었다. 문헌 기록상 기자(箕子)를 섬긴 최초의 국가는 고구려다. '구당서(舊唐書)' 고구려(高句麗)조의 "영성신(靈星神), 일신(日神), 가한신(可汗神), 기자신(箕子神)을 섬긴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고구려는 가한신, 즉 단군과 함께 기자신을 섬긴 것이다. 이후 기자는 우리 역사에서 실존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신라 후기 당나라에 유학했던 최치원(崔致遠)은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인정했으며, 고려 숙종(肅宗) 7년(1102년)에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지고, 명종(明宗) 8년(1178년)에 기자 묘에 유향전(油香田) 50결이 배당된 것은 기자 존승이 국가적 행사가 되었음을 뜻한다. 대몽항쟁(對蒙抗爭) 이후 이승휴(李承休)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전조선(前朝鮮)의 시조로 단군(檀君)을, 후조선(後朝鮮)의 시조로 기자(箕子)를 노래했다. 그리고 충숙왕(忠肅王) 12년(1325년)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지고, 공민왕(恭愍王) 5년(1356년) 이를 다시 중수했다.

조선은 국호 자체가 기자 존숭을 의미했다. 정도전(鄭道傳)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태종(太宗) 3년(1403년)에 편찬된 동국사략(東國史略) 이후 국가에서 편찬한 역사서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 이어지는 상고사 체계가 확립되었다.

16세기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기자 존숭은 한층 강화되어 윤두수(尹斗壽)는 기자지(箕子志)를 기술했고, 이율곡(李栗谷)은 기자실기(箕子實記), 한백겸(韓百謙)은 기자유제설(箕子遺制說)을 저술했다. 조선 후기 여진족(女眞族) 왕조인 청(淸)나라가 중원대륙을 지배하면서 중국에서는 중화국(中華國)이 사라진 반면, 조선이 소중화국(小中華國)이 되었다는 사상이 확산되면서 기자조선은 더욱 존숭되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까지 기자조선의 실체를 부정하는 의견은 없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재를 부정하는 '기자 부정론(箕子不定論)'이 통설을 이루고 있다. 이는 기자조선에 대한 엄밀한 학문적 연구 성과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민족인 중국인이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감정적 차원에서였다. 또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부정하는 것이 중화 사대주의(中華事大主義), 친일 식민사관(親日植民史觀)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 때문인데 역사가 실재가 아닌 후대의 감정에 의해 부정된다는 것은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부정할 경우, 기자(箕子)라는 은나라 사람이 고조선을 통치했다는 이민족 지배의 논리도 부정되지만 단군조선(檀君朝鮮)도 부정될 위험성을 지니게 된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렇다. 국내 학계는 청동기시대에 국가가 태동했다고 설명하면서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시작을 현재 기원전 10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그것도 그간에는 기원전 8세기로 한정하다가 최근에 올린 연대다. 앞서 기원전 8세기에 최초의 국가가 창립되었다고 산정하다 보니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서로 부딪치게 되었다. 즉, 기자조선의 성립 시기를 기원전 12세기경으로 보기 때문에 기자조선을 인정하게 되면 단군조선이 허구가 되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식민사관의 잔재로 비판하면서 부정하다 보니 이는 자연히 단군조선의 부인으로 이어졌다. 기자조선을 역사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연장선상에서 단군조선도 자연스레 부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자조선은 막연한 허구로 치부하기에는 관련 문헌은 물론 고고학 유물들도 상당하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자동래설은 전한(前漢) 때에 편찬된 상서대전(尙書大全)에 처음 나타난다. 기자동래설이 선진시대(先秦時代) 문헌에는 보이지 않다가 한대(漢代)에 와서야 보이는 것을 부정의 근거로 삼기도 하지만, 어쨌든 상서대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은(殷) 주왕(紂王)의 비정을 간하다가 옥에 갇힌 기자(箕子)는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周) 무왕(武王)에 의해 해방된다. 기자는 비록 주왕에게 간쟁하다가 투옥되었지만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의 무왕을 섬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조선(朝鮮)'으로 망명한다. 무왕은 그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의 제후(帝侯)로 잭봉했다. 주나라의 책봉을 받은 기자는 신하의 예를 행하지 않을 수 없어서 무왕(武王) 8년에 주 왕실에 조근(朝覲)가서 무왕에게 홍범(洪範)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기록이다. 이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기자의 망명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조선'은 당연히 단군조선이다. 상서대전의 내용은 기자가 동쪽으로 망명했다는 사실보다 그 동쪽에 이미 '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기자조선(箕子朝鮮)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실재를 입증하는 물증일 수도 있다. 상서대전(尙書大全) 외에 사기(史記)도 기자조선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상서대전이 기자가 나중에 봉함을 받았다고 기술한 반면, 사기는 그가 봉함을 받은 뒤 나라를 열었다고 적어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 요녕성과 산동성에서 기자 관련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점도 기자를 무작정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1973년 중국 요녕성(遼寧省) 객좌현(喀左縣)에서 '기후(箕候)'와 '고죽(孤竹)'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방정(方鼎) 등 청동 예기(禮器) 6점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의 제작 시기는 은나라 말기이므로 기자(箕子)의 생존 시기와 일치한다. 기자가 자신의 족속들을 데리고 피신했다고 알려진 지역은 난하(爛河)와 대릉하(大陵河) 사이의 고죽국(孤竹國)인데 객좌현은 하북성(河北省) 노룡현(盧龍縣)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다. 그런데 이런 유물들이 무덤이 아니라 지하의 임시 유물저장소인 교장갱(喬藏坑)에서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는 기자족속이 이 지역에 오래 거주하지 않고 곧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출토 유물로 볼 때 기자족(箕子族)이 오래 거주한 지역은 산동성(山東省)으로 보인다. 1951년 산동성 황현(黃縣) 남부촌(南埠村)에서 8점의 기기(箕器)가 출토되었고, 1969년에는 산동성 연대시(烟臺市) 남쪽 교외에서 기후정(箕候鼎)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들 청동 예기는 교장갱이 아닌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서주(西周) 후기부터 춘추시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서 이 시기에 기자족속이 이 지역에 거주했음을 말해준다.

요녕성과 산동성 출토 유물들의 제작 시기로 보면 요녕성 지역에 갔던 기자족속이 산동 지역으로 재차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요녕성 지역에서 한 갈래는 산동 지역으로 이동하고 한 갈래는 동쪽으로 이동을 계속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동쪽으로 계속 이동한 세력이 기자조선의 실체일 가능성이 있게 되지만 이를 입증할 유물은 아직 촐토되지 않고 있다.

'위략(魏略)'에 기원전 4세기 말~ 기원전 3세기 초에 왕(王)을 칭했던 고조선의 최고 지배자가 '기자의 후손 조선후(朝鮮候)'라는 기록이 나오는 점이나 삼국지(三國志)에서 위만(衛滿)에 의해 축출된 준왕(準王)을 '기자의 4-여세손'이라고 한 기록들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상관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기자조선은 비교적 풍부한 문헌상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 실재를 의심하는 견해가 과거부터 있어 왔다. 이규경(李圭景; 1788~?)은 중국에만 기자 묘가 세 군데나 존재한다며 평양 기자 묘의 실재를 의심했다. 그는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 에서 치밀한 고증을 통해 기자조선은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씨조선(韓氏朝鮮)을 뜻한다며 기자조선의 성격을 고조선 내부의 왕실 교체라고 규정짓기도 했다.

천관우(千寬宇)는 기자족속을 동이족(東夷族) 안에 있었던 하나의 씨족 단위로 파악했다. 글나 중국 산서상 태곡현(太谷縣) 일대를 시 발점으로 이동을 시작해 난하 유역에 일시 정착했다가 요서와 요동을 거쳐 평양 지역에 정착한 것이라며 기자동래설 자체는 긍정했다.

윤내현(尹乃鉉)은 기자국(箕子國)은 중국 변방에 있었던 소국(小國)이었는데, 그 말기에 고조선의 변경에 위치하게 되었지만 고조선 사회의 주도적인 세력은 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즉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인정했지만 기자조선이 고조선의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기자조선의 서쪽 경계인 패수(浿水)는 난하이고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하 일대임이 전제된 것으로서, 고조선의 후기 중심지를 평양이라 비정하고 있는 기존 학설과도 대치되고 있다.


● 위만(衛滿)의 계통

반면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그 실재에 대한 이론 대신에 위만이 조선인인지 연나라 사람인지에 대한 논의가 더 많다는 특징이 있다.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璡夷傳) 등의 사료에 따르면, 위만은 기원전 194년에 고조선을 장악했고 그 손자 우거왕(右渠王) 재위기인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에 멸망한다.

'삼국지'에 '위략(魏略)'으로 인용된 내용을 보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준(準)에게 항복했다. (위만이) 서쪽 변경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서 조선의 번병(蕃屛)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했다.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해 규(圭)를 하사하고, 백리의 당을 주어서 서쪽 변경을 지키게 했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파견해 속여셔 말하기를, "한(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하고는 드디더 되돌아서서 준을 공격했다. 준은 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한 것은 중국 내부의 정세와 관련이 있다. 기원전 206년 한나라 초대 황제인 고조(高祖)가 천하를 통일하고 노관(盧館)을 연왕(燕王)에 봉했으나 노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도망갔고 연국(燕國)은 혼란에 빠졌다. 위만은 이 틈을 타서 연나라의 망명자 1000여명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항복하는 것이다.

최남선(崔南善)은 위만을 연나라 사람으로 보아 이를 '위만의 도둑질'이라고 했으나 이병도(李丙燾)가 위만을 패수 이북 요동지방에 토착한 조선인 계통 유민으로 보면서 그가 조선 유민이라는 것이 통설이 되었다. 위만을 조선인 계통 유민으로 보는 근거로는 '사기(史記)'에 그가 '추결(趨結)에 만이복(蠻夷服)을 입었다'는 사실과 준왕이 요지인 국경수비대장을 맡길 정도로 신임했다는 점, 그리고 나라를 차지한 후에도 조선이라는 국호를 유지했다는 점 등이 제시된다. 그러나 '사기'나 '삼국지'에서 분명히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된 위만을 '북상투[趨結]'와 '오랑캐 복장[蠻夷服]'이라는 것만으로 조선인으로 볼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고조선의 도읍지를 장악한 위만은 기원전 193년~ 기원전 192년 경 한(漢)의 외신(外臣)이 되어 한나라와 외교관계를 정상화시킨 후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켜 나갔다. '사기'에 "위만(衛滿)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小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眞番)과 임둔(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기록한 대로, 주변 소국들과 진번, 임둔까지 복속시켜 강대한 국가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 때의 '사방 수천리'는 고조선 전체 강역이 아니라 위만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제한된 강역을 의미한다. 위만이 진번, 임둔 등지를 복속시킨 것은 그가 동쪽보다는 자신이 원래 살았던 서쪽 지향성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이런 확장 방향은 중원의 통일제국 한나라에 위협이 되었다. 한(漢)의 다섯번째 황제인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장군 진무(陳武) 등이 "남월(南越)과 조선(朝鮮)은 진(秦)의 전성기에 내속하여 신하가 되었으나 그 후에 병력을 갖추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중원을 엿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이런 사정을 말해준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나갔다. 한의 망명자들을 적극 받아들이고 한나라 황제에 대한 입견(入見)을 거부했으며,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한나라에 조공하려는 것을 막았다. 우거왕의 이런 정책은 한나라를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고조선 내부에도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예(濊)조의 "원삭(元朔) 1년(기원전 128년)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우거를 배신하고 28만명을 데리고 요동으로 갔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우거를 배신한 남려가 예'군(君)'이었다는 사실은 고조선도 한나라처럼 여러 속국들을 거느리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런 속국이 적어도 28만명 이상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고조선의 인구 규모가 이보다 훨씬 컸음을 추측하게 해 준다. 우거왕에 대한 반발은 예군 남려만이 아니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璡夷傳) 한(韓)조는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 반(反)하여 2000여호의 백성을 데리고 진국(辰國)으로 망명했다."고 적고 있는데 지배층의 잇따른 망명은 우거왕의 왕권 강화책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이다.

우거왕은 이런 반발에도 굴하지 않고 왕권 강화책을 계속 펼쳤고, 이는 이 지역을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두려는 한나라와의 충돌을 낳았다. 특히 우거왕이 주변 국가들의 한나라에 대한 조공과 무역을 통제한 것은 한나라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漢)의 일곱번째 황제인 세종(世宗)은 기원전 109년 섭하(涉何)를 사신으로 보내 협박과 회유를 병행했다. 우거왕은 한나라의 세계체제 속에 편입하라는 섭하의 제의를 거부했고, 아무 성과없이 귀국할 수 없었던 섭하는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강을 건너 도주했다.

우거왕에게 모역을 당했다는 섭하의 말을 들은 한나라의 황제 세종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며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라는 벼슬을 내렸다. 섭하가 조선의 비왕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한 우거왕은 패수를 건너가 섭하를 참살했다. 그러자 세종은 조선 정벌을 결심하고 군사를 일으켜 고조선 침공을 감행하게 된다.

● 한(漢)은 과연 승전국(勝戰國)인가.

고조선을 방치할 경우 이민족에 대한 통치체제가 붕괴할 것을 두려워한 한나라는 기원전 110년 흉노(匈奴)와 남월(南越)에 대한 정벌이 일단락되자 이듬해인 기원전 109년 가을 수륙 양군을 동원해 조선을 침공했다. 누선장군 양복(楊僕)은 제병(齊兵) 7천여명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발해를 건너 왕검성(王儉城)을 공격했으나 우거왕(右渠王)이 직접 지휘하는 조선군에게 참패를 당해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있어야 했다. 좌장군 순체(荀遞)는 요동 지역의 병사 5만명을 거느리고 고조선의 패수(浿水) 서군(西郡)을 공격했으나 역시 패배하고 말았다. 고조선은 한나라의 수륙 양군을 모두 패퇴(敗退)시킬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한나라의 황제인 세종(世宗)은 사자(使者) 위산(衛山)을 보내 강화회담에 임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고조선의 강화 대표는 우거왕의 태자였는데 그는 1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패수를 건너 강화회담에 임하려 했다. 그러나 위산과 순체는 태자에게 무장을 해제한 후 패수를 건널 것을 요구해 왔고, 이에 태자는 패수를 뒤로 한 채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세종에게 강화 결렬을 보고하자 화가 난 세종은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강화(講和)가 결렬되었으니 전투가 재개될 수밖에 없었다. 순체는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하고 양복은 성의 남쪽에 주둔해 공격했으나 우거왕이 수성전(守城戰)을 펼치자 몇달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 때 한나라 군대 내부에 분열이 발생했다. 좌장군 순체는 맹렬한 공격을 주장한 반면 누선장군 양복이 이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세종(世宗)은 제남태수(齊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파견해 전쟁을 지휘하게 했다.

전선(戰線)에 온 공손수에게 순체는 양복이 고조선 측과 내통하고 있다며 그를 체포하지 않으면 조선군과 합세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을 들은 공손수는 양복을 체포하고 수륙 양군을 통합한 후 이 사실을 세종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군사체제의 변경에 분개한 세종은 앞서 위산을 죽인 것처럼 공손수도 죽여 버렸다. 할 수 없이 한나라 군사들은 다시 왕검성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우거왕의 강력한 저항으로 사상자만 속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자 조선군 내부에도 분열이 발생했다.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한음(韓陰)과 니계상(尼谿相) 참(參), 장군 왕겹(王鉗) 등이 오랜 전쟁에 지쳐 강화(講和)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들이 강화로 돌아선 데에는 한나라의 이간책(離間策)과 우거왕의 왕권 강화책에 대한 반발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고, 더 이상의 전쟁에 반대한 한음, 왕겹, 노인은 한나라로 도망갔다. 참은 성문을 열어 항복하려 했으나 대신 성기(成己)가 우거왕을 대신해 굳게 지키는 바람에 실패했다.

강공보다는 회유책이 효과적임을 확인한 한나라는 다시 고조선 내부 분열책을 시도했다. 좌장군 순체는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과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고조선의 백성들을 회유하게 하면서 끝까지 저항하고 있는 대신(大臣) 성기(成己)를 죽일 것을 지시했다. 드디어 대신 성기까지 살해되면서 성은 함락되었다. 기원전 108년 여름, 1년 이상을 끌어온 위만조선(衛滿朝鮮)과 한나라 간의 전쟁은 고조선 지배층의 내부 분열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결과는 외형상 한나라의 승리였으나 내용적으로는 고조선의 자멸(自滅)이었다. 이는 '사기(史記)' 조선(朝鮮)조의 전쟁 관련자 상벌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고조선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 좌장군 순체(荀遞)는 포상을 받기는커녕 "공(功)을 다투고 시기해 계획이 어긋나게 했다."는 이유로 참형(斬刑)을 당했으며, 누선장군 양복(楊僕)은 "많은 병사를 잃었다."는 이유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는데, "주살함이 마땅하나 속전(贖錢)을 바쳤다."는 이유로 겨우 목숨만 부지한 것이었다. 앞서 위산(衛山)과 공손수(公孫遂)는 전쟁 과정에서 이미 처형된 뒤였다. 사마천(司馬遷)의 평대로 "양군(兩軍)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후(侯)에 봉해진 자가 아무도 없다."는 엄중한 문책을 당한 것이다.

반면 고조선 지배층으로 공을 세운 니계상(尼谿相) 참(參), 상(相) 한음(韓陰), 장군 왕겹(王鉗),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는 모두 후(侯)에 봉해졌다. 이는 고조선의 멸망이 한나라의 승리가 아니라 고조선의 자멸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공격으로 이렇게 멸망했다. 한나라는 고조선 옛 영토에 자신들의 행정 구역인 군(郡)을 설치해 통치했으나 이는 일부에 그쳤고, 고조선의 옛 강역에서는 부여와 고구려를 비롯해 많은 국가들이 분립하여 일어났다. 이렇게 열국시대(列國時代)가 시작되고 있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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