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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여왕’ 연수영 」3제1차 여당전쟁의 개전 ⑵

개마기사단 |2011.09.27 22:46
조회 63 |추천 0

●  비사성(卑沙城)이 함락되다!

 

이세적이 이끄는 당의 6만 병사는 영주에 도착하여 며칠 쉰 다음 이곳에서 군사 3만을 다시 차출하여 3월 24일 영주를 출발해서 회원진에서 백리 떨어진 곳에 영채를 세웠다.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세적은 부총관인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과 장사귀(張士貴)·장검(張儉)·집실사력(執失思力) 등 부하 장수들을 전부 다 불러 모아놓고 지시를 내렸다.

 

“장검 장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는 것처럼 회원진으로 나아가서 요하 앞에 영채를 세우시오. 그러면 연개소문은 틀림없이 우리가 회원진으로 해서 요동을 도모하리라고 생각할 것이요. 그는 틀림없이 요하 건너편에 고구려 주력군을 포진시킬 것이오. 나는 통정진으로 올라가서 요하를 도하하겠소. 이는 곧 동(東)을 치는 듯이 하다가 서(西)를 치는 성동격서의 병법이니 우리는 아무런 문제없이 요하를 건널 수 있을 것이오. 요하를 건넌 다음 기별을 해줄 터이니 군사를 다시 돌려서 요하 하류로 내려가 고구려의 건안성(建安城)을 공격하시오.”

 

이에 장검은 영주성의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매복병들의 기습공격에 숱한 어려움을 겪으며 하류로 나아갔다. 장검은 간신히 요하 강가에 영채를 세우고 요하 도하를 준비하는 척 뗏목을 만들면서 부교설치를 준비했다.

 

첩보를 받은 요동성주(遼東城主) 대형(大兄) 고지순(高支純)은 즉시 인근 성에 파발을 띄워 지원군 2만을 얻어 요하 언덕에 궁노수(弓弩手)를 배치했다. 그러나 강 건너편의 당병(唐兵)들은 계속 뗏목과 부교를 만들 뿐 이미 열흘이나 지났는데도 강을 건너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신성(新城)에서 전령이 왔다.

 

“장군님, 적군이 통정진을 경유해서 요하를 건넜습니다! 아마 지금쯤 현도성(玄兎城)이나 신성을 공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령의 보고를 들은 요동성주 고지순은 깜짝 놀랐다.

 

“이거 완전히 당나라 놈들의 계략에 빠졌구나! 요동성을 노리는 듯하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신성을 치는구나.”

 

고지순은 즉시 부관들과 상의했다.

 

“우리가 이세적의 계략에 넘어간 것 같소. 저들이 회원진을 넘어 저 요수 앞에서 도하 준비를 하니 나도 저놈들이 이 요동성을 노리는 줄 알았지 뭐요? 그런데 이세적이 이끈 당의 주력군이 통정진을 거쳐 요하 상류를 넘었다고 하오.”

 

소형(小兄) 계무서(桂茂瑞)가 묻는다.

 

“그러면 저 앞에 있는 놈들도 결국 요하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 신성 공격에 합류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고지순이 대답했다.

 

“아마도 그럴 것 같소.”

 

모달(模達) 복전악(卜全岳)이 성주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놈들이 만드는 뗏목은 당주 이세민의 친정군이 올 때 사용하려는 것이겠군요. 이럴 바에야 우리가 먼저 요하를 건너 선제공격을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고지순이 고개를 젓는다.

 

“도하작전에는 숱한 희생이 따릅니다. 공연히 요하를 건너다 적군의 역습을 받으면 아까운 군사들만 다칩니다. 어차피 우리는 저놈들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에 빠졌소. 여기에는 한 부대만 남기고 모든 군사를 각 성으로 돌려보내어 성을 사수하는 것이 좋겠소.”

 

이에 따라 건안성·안시성·신성·비사성에서 지원차 파견되었던 군사들은 다시 각자의 성으로 돌아갔다.

 

한편, 이세적이 무사히 요하를 건넜다는 보고를 받은 장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요하 상류로 이동하여 무사히 강을 건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전해들은 고지순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별 수가 없었다. 고구려의 첩자들과 매복병들은 주로 회원진 쪽에 치중되어 있었기에 이런 일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요하에 설치된 제1차 방어선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은 요하를 건넌 즉시 현도성을 공격하여 3일만에 함락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신성으로 진격하였다. 신성은 3세기 말에 축조된 요새인데 그간 선비족과 돌궐족의 침입을 여러 번 받았었다. 신성은 고구려가 유목세계로 나가는 관문이며, 요동벌과 옛 부여 땅을 잇는 교통의 요충이어서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높이 90~140m쯤 되는 야산 3개를 한데 묶은 환성(環城)으로 남으로는 혼하(渾河) 동쪽으로 그 지류가 흘러 천연의 해자로 축성(築城)되었다. 성의 총 외곽 길이가 십 리가 넘었다. 성문은 북문과 동문, 남문이 있었는데, 특히 남쪽 성벽은 가파르고 높아 성문을 통하지 않고는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세적이 신성을 한 바퀴 둘러보니 함락시키기가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포기하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도종을 선봉장으로 삼아 신성 공격에 나서게 했다. 이도종이 수만의 정병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신성을 공략하였으나 신성주(新城主)인 욕살(褥薩) 고두첨(高斗添)과 1만 5천여명의 성병(城兵)들은 필사적으로 항전하여 당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10~12일간 계속된 소모전(消耗戰)에 지친 이세적은 부하 장수들을 모아 대책을 의논하였다.

 

“열흘이 넘게 공격했지만 신성은 천혜의 요지에 쌓은 성이라서 그런지 끄덕도 안 하오.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소?”

 

강하왕 이도종이 대답한다.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성에서 군사들이 나오면 맞붙어 싸우겠는데 꼼짝도 안 하지 않습니까? 그간 무모한 공격으로 인해 아군 사상자만 크게 늘었습니다.”

 

행군총관 강확이 제안한다.

 

“신성은 공략하기가 어렵고 방어하기만 쉬운 성입니다. 포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최고 정예병으로 편성된 우리 선봉부대가 이깟 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만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오.”

 

“우리가 그냥 후퇴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길에도 돌이 박혀있으면 피해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방향을 틀어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키고 요동성으로 나아갑시다. 그곳에서 폐하의 주력군과 합류한다면 폐하를 대할 낯도 서게 됩니다.”

 

이세적은 이도종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군을 이끌고 개모성 밑으로 내려가 영채를 세웠다.

 

개모성은 신성이나 요동성에 비해서 성 둘레가 4리쯤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성이었다. 그러나 개모성의 욕살(褥薩) 해원위(解元偉)는 그리 녹록한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성벽 곳곳에 쇠뇌와 포노를 설치하고 마름쇠를 성벽 밑에 깔아놓아 성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드는 당군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당군은 작은 성이라고 깔보고 무섭게 달려들었으나 사상자만 무수히 늘어났고, 선봉장이 되어 공성전(攻城戰)을 지휘하던 행군총관 강확마저 고구려 군사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세적이 보검(寶劍)을 빼어들고 군사들에게 외쳤다.

 

“강확 장군이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 너희들도 목숨을 초개(草芥) 같이 생각하고 성을 공격하라! 우물쭈물하는 놈이 있으면 내가 당장 목을 베겠다!”

 

이에 당나라의 군사들은 다시 분발하여 개모성을 공격했다. 적장을 죽여 잠시 사기가 올랐던 고구려군은 다시 달려드는 당군과 싸워야 했다. 개모성주인 해원위는 직접 장창(長槍)을 꼬나잡고 성벽으로 기어 올라오는 당나라 군사를 보는 대로 찔러 죽이며 처절하게 싸웠다. 때마침 포차(砲車)가 도착했기에 당군은 포차를 이용해서 성벽을 깨뜨리기로 하였다. 당시 당나라의 포차는 3백근이나 되는 바위를 4백보까지 날릴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섯대의 포차를 이끌고 성벽에 3백보 가까이 진출해서 바위를 쏘아 날리니, 견고했던 개모성의 성벽은 균열이 가면서 곧 무너지고 말았다. 당군의 거센 맹공에 조그만 성인 개모성은 이내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신세가 되었다. 개모성을 지키는 고구려 군사들과 성주인 해원위는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하다가 끝내 중과부적(衆寡不敵)을 극복하지 못하고 전몰(戰歿)하였다.

 

그리하여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은 개모성 공략을 시작한 지 닷새만에 성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때가 645년 4월 26일이었다.

 

도성인 평양성을 지키고 있던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당군이 요하를 건너 개모성을 점령했다는 급보를 받자 대성인 요동성을 거점으로 삼아 침략군을 격퇴할 전략을 세웠다. 그는 국내성에서 보병 3만, 신성에서 기병 1만, 도합 4만 병력을 출동시켜 급히 요동성을 구원하도록 했다.

 

그때 혁명 이후 조정에서 병마원수를 맡았던 고량(高量)은 지난해에 노환으로 죽고, 연개소문의 장인인 고정의(高正義)가 병마원수 직책을 대신 맡았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이 지원군의 총수로 자신도 아니고 고정의도 아닌 자신의 이복동생 연정토(淵淨土)를 발탁했다. 연개소문의 의도는 군권은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겠다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실책이었다. 군사적 재능이라고는 거의 없는 연정토가 고구려의 정예군 4만을 이끌고도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이세적에게 패배하여 1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자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국내성 쪽으로 퇴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나라의 육군 총대장인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세적이 이렇게 현도성과 개모성을 함락시키고 사실상 고구려의 중앙군인 연정토의 군대마저 격파하여 요동성 공략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동안 당나라의 수군을 이끄는 평양도행군대총관 장량은 3월 중순 전함 1천여척을 이끌고 내주를 출발해 묘도군도를 거쳐 해안을 끼고 발해만을 돌아 요동반도 남단의 전략적 요충 비사성(卑沙城)으로 육박했다.

 

비사성의 성주는 고구려 수군의 군주(軍主)이기도 한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우소(于炤)였다. 그는 장량의 당나라 수군이 비사성 해안에 상륙하기 전에 묘도 근해로 항진하여 바다 한가운데서 일전을 벌이겠다는 뜻을 내세우며 휘하 장졸들에게 출정을 명령하였다. 이 때 우소의 무모함을 충고하면서 출정을 만류했던 사람이 바로 석성도사인 연수영이었다.

 

우소가 묘도열도로 출전하기 전 비사성에서 대책회의를 할 때 연수영(淵秀英)은 직속상관인 우소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군주! 적의 기세가 강할 때는 나가서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지키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오랑캐의 군세가 우리보다 훨씬 우세하고, 초전의 기세도 흉맹하니 정면대결을 하기보다는 굳게 지키다가 적이 피로하여 지칠 때에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우소는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까짓 거지발싸개 같은 서토 오랑캐들이 열 배 아니라 백 배라 해도 대수겠는가? 내가 한 차례 출전하여 서토 놈들을 모조리 바다에 처넣어 고기밥과 물귀신을 만들어 버리고 말갔어!”

 

“군주! 외람되오나 경적필패(輕敵必敗)란 말도 있지 않사옵니까? 아무리 허약한 적이라도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될 줄 아옵니다. 하물며 지금 당구(唐寇)들은 우리 고구려를 정벌하겠다고 기세등등하게 진격해오고 있는 수십만 대군이 아닙니까? 군주께서는 부디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어허, 연 도사는 오랑캐 숫자가 많은 것에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은 기야? 흥, 역시 여자는 어쩔 수 없구먼기래!”

 

마침내 우소는 여자라서 어쩔 수 없다는 경솔한 말까지 내뱉었다. 연수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치뜨고 우소를 노려보았지만 곧 마음을 돌려 참기로 했다. 적군을 눈앞에 두고 자중지란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노기를 꾹 눌러 참고 다시 한번 우소를 만류했다.

 

“군주께서는 소관의 충정을 깊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자칫 잘못하여 초전에 낭패라고 보게 된다면 우리 바다를 오랑캐에게 내주는 결과를 가져올까 두렵습니다.”  

 

그러자 우소는 버럭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만 하라우! 자네가 대막리지의 누이동생만 아니었다면 본관이 벌써 군율을 시행하고 말았을 기야! 본관이 이래뵈도 20년 동안이나 이 바다를 지키며 수적(隨敵)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역전의 용사가 아닌가 그 말이야! 자네가 언제부터 군문에 들어왔다고 감히 본관에게 훈계야, 훈계가! 듣기 싫으니 그만 물러가라우! 따라오라고 하지 않을 테니 돌아가서 석성이나 잘 지키라 그 기야!”

 

연수영도 더는 참을 수 없어 마주 소리쳤다.

 

“말을 삼가시오! 이토록 바른 소리를 듣기 싫어하니 어찌 그대가 수만 군사를 거느린 군주 자격이 있단 말이오? 뭐, 내가 여자라서 겁이 많다고? 대막리지의 여동생만 아니면 군법을 시행한다고? 그래, 내가 여자고 대막리지의 누이동생이라고 석성 도사와 수군을 맡았단 말이오? 나도 태왕 폐하의 명을 받든 장수요! 그대는 사내로 태어나고 싶어서 사내가 됐고, 나는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여자가 됐소이까? 어디, 그대가 여자보다 더 나은 게 뭐가 있는지 한 번 봅시다!”

 

“아니, 이것이 뭐가 어째?”

 

우소가 허리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연수영도 칼을 빼들고 맞섰다. 그러자 좌우의 부장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두 사람을 떼어놓으며 만류했다.

 

그것이 우소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렇게 우소는 연수영의 건의를 묵살한 채 출전했던 것이다. 우소의 함대는 묘도열도까지 이르렀다가 급격한 역풍과 격랑에 변변한 해전도 벌여보지 못한 채 자멸하고 말았다. 고구려 수군은 거센 풍랑에 휩쓸려 2만여명의 병사와 5백여척의 전함이 순식간에 무너졌고, 우소 본인도 숱한 장졸과 더불어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화살 한 대도 날리지 않고 비사성의 고구려 수군을 전멸시킨 장량의 평양도행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비사성을 공격했다. 비사성은 사면이 깎아 세운 듯 까마득한 절벽 위헤 세워진 천험의 요새였다. 성벽에 접근하는 길은 오로지 서문밖에 없었다. 장량은 2만여명의 당나라 군사는 해안에서 함대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절반인 2만여명을 상륙시켜 비사성을 철통같이 포위했다.

 

비사성은 비록 총사령관 우소가 전사한 직후라 성주 자리는 공석이지만 처려근지(處閭近支) 고회수(高廻洙)가 대신 수성군(守城軍)을 지휘해 장량이 이끄는 당군에게 대항했다.

 

당군은 한달 가까이 성을 공격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비사성은 누가 봐도 난공불락의 요새인지라 당군이 성벽까지 접근하기도 힘겨웠다. 워낙 가파른 절벽 위에 성을 쌓았으므로 가장 위협적인 공성구인 발석차(發石車)는 접근할 수도 없었고, 가까스로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를 밀고 올라갔으나 성에 접근하기가 무섭게 성벽 위에서 화살과 돌덩이가 우박처럼 쏟아졌고, 심지어는 불덩이와 끓는 물에 똥오줌까지 사정없이 쏟아졌다. 그렇게 무모한 공격만 되풀이하다 보니 열흘도 못 되어 당군은 사상자가 1만명에 육박했다.

 

장량은 묘계를 짜내어 부총관 정명진(程名瑨)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야습을 가하도록 명령하고, 정명진이 서문을 맹렬히 공격하는 틈을 타서 부관인 왕대도(王大度)로 하여금 100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북쪽 성벽을 타넘어 잠입하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양동작전(陽動作戰)을 구사하겠다는 의도였다.

 

한달 동안의 수성전(守城戰)에 고구려군도 많이 지쳐 있었다. 수적 열세에다가 군량이 이미 바닥났고, 피로도 누적됐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교대조차 못하니 자연히 경계 태세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군은 바로 그 허점, 고구려군의 쌓이고 쌓인 피로를 노렸던 것이다.

 

사타구니만 가리고 벌거벗은 채 단도(短刀) 한 자루씩만 입에 물고 성벽을 기어오른 왕대도의 결사대는 마침내 성 안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고구려군을 배후에서 기습하여 성문을 열었다. 성문이 열리자 기다리고 있던 당군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렇게 하여 천험의 요새 비사성은 삽시간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성주인 우소를 대신해 비사성의 고구려군을 독전했던 고회수는 패배의 절망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사성을 장악한 장량은 전에 여수전쟁(麗隨戰爭)에서 전사한 수나라 군사들의 원수를 갚는다면서 고구려 군사와 성민(城民) 8천여명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그리고 군졸들에게는 마음껏 약탈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비사성은 순식간에 무자비한 강간·살인·약탈·파괴·방화가 난무하는 지상의 생지옥으로 변해버렸다.

 

고구려는 서해방어의 요충 비사성을 당군에게 빼앗김으로써 서부전선 방어 전체에 큰 구멍이 뚫린 셈이 되었다. 이제 당군이 마음만 먹는다면 수륙양면작전을 펼쳐 요하 동부 요동반도 전체를 장악하고,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의 도성인 평양성까지 일사천리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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