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집권적 관료제 강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여 영토와 인구가 크게 확대된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변화를 신라인 스스로는 '일통삼한(一統三韓)'이라고 표현했다. 다시 말해 삼한 땅을 통일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삼국통일의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는 않았으나, 그 대신 무열왕(武烈王)에서 혜공왕(惠恭王)에 이르는 시기를 상대(上代)와 구별하여 중대(中代)라고 불렀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중고(中古)와 구별하여 하고(下古)라고 불렀다. 신라사(新羅史)의 큰 전환기로 본 것은 공통적이다.
그러면 후기 신라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골품제도(骨品制度)의 약화와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강화하고 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 출신 귀족을 포섭해야 할 필요성에서 나온 불가피한 변화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지향하려면 유교적 문민정치 이념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이에 따라 유교교육이 한층 강화되었다.
삼국통일 이전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5년(서기 651년)에 왕명을 집행하던 집사부(執事部)와 그 장관으로 시중(侍中)이 설치되면서 귀족의 대표자인 상대등(上大等)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국왕과 관료의 권한이 신장되었다. 그 다음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최초의 진골 출신 군왕으로서 귀족인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을 진압하고, 또 상대등 알천(閼川)과의 경쟁을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 그의 직계자손의 세습제를 확립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또 왕제(王弟)들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던 갈문왕(葛文王) 제도를 폐지하고, 불교식 왕명을 버리고 중국식 시호를 취했다. 무열왕은 가야 출신의 김씨 가문인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를 왕비로 맞이했으므로, 종전의 왕비족인 박씨의 시대가 끝났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보수세력인 성골(聖骨)이 아니라, 신세력인 진골(眞骨)과 가야계 김씨 일가가 이룩했으나, 왕권강화는 상대적으로 진골의 특권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으며, 진골 다음의 6두품(頭品)이 왕권을 옹호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대왕(文武大王)은 민심(民心)의 성(城)을 쌓아야 나라가 편안해진다는 의상(義湘)의 건의를 받아들여 부드러운 문치를 지향하여 시호에 문(文)이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다음 신문왕(神文王)은 681년 김흠돌(金欽突)의 난을 계기로 귀족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유교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682년에 국학(國學)을 설치했으며, 685년에는 전국에 9주(州)와 5소경(小京)을 두어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했다. 9주는 옛 고구려와 백제 지역에 각각 3주를 설치했고, 5소경은 군사, 행정상의 요지에 설치하여 수도 경주의 지역적 편협성을 보완했는데, 5소경에는 경주 귀족과 지방 귀족의 일부를 옮겨 살게 하여 귀족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요지를 지키도록 했다. 5소경은 경주 다음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 밑에는 117개의 군(郡)과 293개의 현(縣)을 두어 중앙의 관리가 태수(太守)와 현령(縣令)으로 파견되고, 외사정(外司正)이라는 감독관을 보내 감찰의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아니고, 주요 군현에만 선별적으로 파견하여 나머지 군현을 간접적으로 통치했다.
군현 밑에는 촌(村)이 있었는데, 토착세력인 촌주(村主)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자치했다. 또 군현 밑에는 향(鄕), 부곡(部曲)으로 불리는 하급 행정단위가 많았는데 이곳에는 국가의 통치가 직접 미치지 못했다.
한편, 9주에는 장관으로 군주(軍主)를 보냈으나 문무대왕(文武大王)대에 총관(總管)으로 바꾸어 군사적 기능을 약화시키고 행정적 기능을 강화했다. 총관은 원성왕(元聖王) 때 당나라 식으로 도독(都督)으로 개칭했다. 신문왕(神文王)대에는 중앙관제와 군제도 개혁되었다. 통일 이전에 두었던 5부(部)를 중국의 6전제도와 비슷하게 개혁했으며, 통일 이전의 6정(停)이라는 부대를 폐지하고, 그 대신 중앙군을 9서당(誓幢)으로, 지방군을 10정으로 확대 개편했다. 특히 9서당은 고구려, 백제 및 말갈족(靺鞨族)을 포함시켜 개편했다는 점에서 9주의 지방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문왕은 경제개혁을 단행하여 687년에 관료들에게 관료전(官僚田)을 지급하여 조(租)만을 수취하게 하고, 689년에는 조와 노동력을 함께 수취하던 녹읍(祿邑)을 폐지했다. 이는 관료들의 농민에 대한 인신(人身) 지배를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해 경주 부근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는데, 그 후 동해의 용으로부터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신비한 피리를 받았다고 한다. 이 피리를 불면 신라를 침입한 군사는 물러가고, 병이 낫고, 비가 오고, 바람이 가라앉고 파도가 조용해지므로 이 피리를 국보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피리전설은 문무대왕이 죽어서 동해의 호국룡(護國龍)이 되기 위해 대왕암(大王岩)에 장사지냈다는 전설과 아울러 통일 후의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왕권 안정에 대한 염원과 자신감이 반영된 이야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8세기에 들어오면 성덕왕(聖德王)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더욱 안정되고 유교정치는 한층 강화되었다. 717년에는 신문왕 때 설치한 국학에 공자(孔子)와 10철(哲) 그리고 공자의 72제자의 화상(畵像)을 당에서 가져와 안치하여 유교교육기관임을 확실히 했다.
8세기 중엽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국학을 태학감(太學監)으로 바꾸고, 박사와 조교 등을 두어 유교교육을 강화했으며, 교육과목을 삼과(三科)로 나누어 가르쳤는데,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필수과목으로 하고, 오경(五經)과 문선(文選)은 선택과목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유교교육이 전보다 전문화되어 가는 추세를 보여준다. 또 경덕왕 때에는 중앙관료의 칭호와 지방 군현의 이름을 중국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예를 들어 사벌주(沙伐州)를 상주(尙州)로, 완산주(完山州)를 전주(全州)로 바꾼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경덕왕 때에는 동시에 귀족층의 반발로 보수로 돌아가는 모습이 다시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751년에 2천칸이 넘는 거대한 불국사(佛國寺)를 짓는데 국가가 후원한 것이나, 757년에 관료전을 폐지하고 녹읍을 부활한 것이 그것이다.
8세기 말 원성왕(元聖王) 때에는 관료인사제도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앞서 경덕왕 때 태학감에서 삼과를 두어 유교교육을 전문화시킨 것을 토대로 788년에는 이른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국가시험제도를 실시했다. 즉 독서성적을 3등급으로 나누어 관료를 채용했는데 오경(五經), 삼사(三史),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능통한 자는 순서를 뛰어 등용했다. 이는 골품신분이나 무예를 토대로 인재를 등용하던 것에서 벗어나 유교적 교양을 기준으로 한 문치(文治)로 나아가는 큰 변화를 의미한다. 요컨대 7세기 중엽의 삼국통일에서 8세기 말에 이르는 약 150년간 신라는 유교적, 중국식 국가체제로 큰 전환을 이루면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로 탈바꿈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아직도 골품제의 질곡과 불교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런 점에서 귀족사회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 귀족의 생활
원래 신라의 귀족들은 국가로부터 여러가지 경제적 특권을 받고 있었다. 우선 전쟁에서 큰 공훈(功勳)을 세운 이에게는 그 연고지를 식읍(食邑)이라는 형태로 주었다. 식읍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조세와 물품을 수취할 수 있는 권리는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삼국통일에 공이 컸던 김유신(金庾信)은 5백호의 식읍과 5백결의 토지, 그리고 6개소의 목장(牧場)을 받았으며, 김인문(金仁問)은 식읍 3백호를 받았다고 한다.
일반관료들은 녹봉을 받지 않는 대신에 일정한 토지에 대한 수조권(收租權)을 행사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는데, 이를 녹읍(祿邑)이라고 했다.
삼국통일 후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고 관료정치를 지향하는 정치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녹읍도 개혁대상이 되었다. 687년에 관료전(官僚田)을 지급하여 토지에 대한 수조권만을 허용하고, 이어 689년에 녹읍을 폐지한 것은 바로 토지에 대한 노동력징발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만큼 특권이 제한됨을 의미한다.
이어 8세기 초 성덕왕(聖德王) 재위 21년(서기 722년)에는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군역을 지는 장정들에게 군역의 대가로 경작지를 주고 국가에서 조(租)를 받아들이고, 군역의 나이가 지나면 국가에서 다시 회수하는 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전은 백성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땅을 국가가 지급하는 형식을 취하여 재확인해 주고, 토지가 없는 백성들에게는 황무지나 국유지를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관료전과 정전의 지급은 국가의 권력을 매개로 하여 부(富)의 분배를 조정하려는 토지정책으로서 그 성과가 대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다음 고려시대의 전시과(田柴科)와 조선시대의 과전법(科田法)으로 이어지는 토지개혁의 始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신라의 토지개혁은 사상적으로 왕토사상(王土思想)이 뒷받침했다. 왕토사상은 서경(書經)에 근거를 둔 것으로 '천하의 모든 땅은 임금의 땅이요, 천하의 모든 백성은 임금의 신하'라는 뜻이다. 이는 임금이 모든 땅과 백성을 소유한다는 말이 아니라, 임금이 공적(公的)으로 처리할 수 있는 공물(公物)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왕토사상은 역사적으로 토지소유구조가 극도로 편중되었을 때 국가가 토지를 재분배하는 전제개혁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걸쳐 시행된 진보적 토지제도는 오해 유지되지 못하고, 8세기 중엽 경덕왕(景德王) 재위 16년(서기 757년)에 관료전이 폐지되고 녹읍이 부활되었으며, 백성들에게 지급된 정전도 유명무실해졌다. 이것은 귀족들의 반발로 사회가 다시 보수로 회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시대가 내려갈수록 귀족들이 득세하면서 왕경(王京)인 경주(慶州)는 사치와 향락의 도시로 변질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9세기경의 경주는 크기가 55리(里)요, 방(坊)이 1360이며, 인구는 약 18만호였다고 한다. 경주와 그 일대는 이렇게 인구가 밀집되었을뿐 아니라, '하나의 초가집도 없이 지붕과 담이 이어졌으며, 노랫소리가 길에 가득하여 밤낮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재상의 집에는 녹(祿)이 끊이지 않고, 일하는 노동(奴童)이 3천명이요, 갑옷과 무기와 소, 말, 돼지의 수가 이와 비슷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밖에 경주에는 금입택(金入宅)과 절유택(節遊宅) 등이 있었다 하는데, 이런 집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집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자의 뜻으로 보면 금(金)이 들어가는 집, 사계절 노는 집이라고 풀이된다. 이런 기록들은 경주의 귀족들이 얼마나 많은 부를 가지고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가를 말해준다.
귀족만이 아니라 국왕의 생활도 말기에 이를수록 사치에 빠졌다. 지금까지 그 모습을 남기고 있는 포석정(鮑石亭)이나 안압지(雁鴨池) 등에서도 귀족층의 사치를 엿볼수 있다.
● 지방민의 생활
삼국통일 후 일반민중의 생활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에 대한 구체적 자료는 없으나, 신문왕(神文王)대를 전후하여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하려는 정책을 통해서 추측해 보면, 민중의 삶도 상대적으로 개선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방민들은 보통 촌(村)으로 불리는 말단행정구역에 편입되어 살았는데, 대략 10호 가량의 혈연집단이 자연촌을 형성하고 3~4개의 촌에 한 사람의 촌주(村主)가 있어서 이 촌주를 통해 국가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신라 말기 어느 시기에 작성된 서원경(西原京)의 촌락문서(村落文書)가 일본 동대사(東大寺)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우선 이 문서는 지방의 인구와 호수, 전답면적, 과일나무, 가축수 등까지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의 지방사화에 대한 파악이 생각보다 철저했으며 이것들에 대해서도 세금이 부과된 것으로 보인다. 또 이 기록에 의하면 호(戶)는 역(役)을 지는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9등급으로 나누고, 인구는 연령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었다. 이는 역역(力役)징발을 위한 기준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또 촌주와 촌민은 국가로부터 촌주위답(村主位沓)과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을 받았는데, 전자는 일종의 관료전이고, 후자는 성덕왕(聖德王) 때 지급했다는 정전(丁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관모답(官謨沓), 내시령답(內視令畓), 마전(麻田) 등이 있어 촌민들이 경작했는데, 여기서의 수입은 국가의 몫이었던 것 같다.
한편 지방민들은 촌(村)에만 편입된 것이 아니라, 일부 주민들은 향(鄕), 부곡(部曲) 등으로 불리는 행정구역에도 거주했다. 향과 부곡은 피정복민이나 반역죄인의 집단적 거주지 혹은 현(縣)으로 편입되기에는 규모가 작은 지역으로서, 그 주민은 농업 이외에도 수공업, 목축, 어업 등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촌민보다는 국가나 귀족에 대한 공물부담에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천민집단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렇다고 노비와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매매나 상속의 대상이 아니었고,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양민과 노비의 중간에 있으면서 신분적으로는 양민이고 역(役)은 천한, 이른바 신량역천(身良役賤)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사회에서 최하층에 속한 것은 노비였다. 노비는 왕실이나 관청, 귀족 혹은 사찰에 소속하여 음식이나 옷 등을 만들거나 그밖의 일용잡무를 맡았으며, 주인을 위하여 농장을 관리하거나 땅을 경작하기도 했다. 노비는 공민(公民)의 자격이 없고, 물건처럼 소유되었으며, 자기 재산을 가질 수 없어 부를 축적할 수 없었지만 그 대신 가족전체의 생계를 주인이 보장하므로 실업자(失業者)를 구제하는 의미도 있었다.
● 상공업과 국제무역
통일 후 200년간 외침(外侵)을 받지 않은 관꼐로 신라는 농업, 수공업생산이 향상되고 이에 따라 국내상업 및 해외무역이 크게 발달했다.
삼한시대부터 지금까지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알려진 김제의 벽골제(碧骨堤)는 8세기 말 크게 증축되어 7개 고을의 경작지에 물을 댈 수 있게 되었다. '벽골'이라는 명칭은 '벼가 생산되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비단 벽골제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수리시설이 개선되고 농경지가 개간되면서 농업생산이 높아졌다. 그러나 아직도 시비기술(施肥技術)이 뒤떨어져 토지의 비옥도는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1년이나 몇년을 묵혔다가 경작하는 휴한농업(休閑農業)을 탈피하지 못했다.
수공업분야에서는 국가에 공장부(工匠府)라는 관청을 두어 전국의 수공업을 관장했다. 주요 수공업생산품은 어아주, 조하주, 능라 등의 비단을 비롯하여 왕실에서 쓰는 각종 장신구, 국가의 각종 무기류, 사찰에서 소요되는 부처와 종, 그밖에 도자기 등의 부문에서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8세기 중엽에 만든 황룡사종은 50만근, 분황사 약사부처는 30만근, 8세기 후반의 봉덕사종은 12만근의 구리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큰 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당시의 금속주조기술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말해준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큰 종이나 부처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왕경인 경주에는 전국의 농산물과 수공업제품이 모여들어 여러 시장이 생겨났다. 7세기말에는 종전에 있던 동시(東市) 이외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가 새로 생겨나고 이를 관장하는 관청도 설치되었다. 경주뿐 아니라 지방의 소경(小京)이나 주(州)의 읍치에도 시장이 개설되어 물물교환 형식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다.
신라의 대외무역은 발해, 당과 일본, 그리고 멀리 아라비아 지역과도 이루어졌는데, 공무역과 사무역이 동시에 행해졌다. 수출품은 주로 비단, 베, 금, 은, 인삼, 약제품, 공예품 등이었고, 당에서 들여오는 것은 비단, 서적, 사치품 등이었다.
당시에는 당으로 가는 교역로는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靈巖)에서 상해(上海) 방면으로 가는 해로(海路)와, 경기도 남양(南陽)에서 산동반도로 가는 두 길이 있었고, 경상북도 울산항에는 아라비아 상인들도 출입했다. 당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산동반도와 양자강 연안에는 신라 상인의 거류지인 신라방(新羅坊)이 생겨나고, 신라원(新羅院)으로 불리는 사찰이 세워지기도 했으며, 신라인들을 관리하는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기관도 설치되었다.
당(唐) 및 일본과의 해상무역이 더욱 발달하면서 9세기 전반에는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이라는 군사무역기지가 설치되었다. 이곳은 당과 일본의 무역선이 지나가는 해로의 요지로서, 신라는 이곳에 군사 1만여명과 수백척의 선박을 상주시키고, 당 및 일본과의 국제무역에 종사했다. 당에서 사들인 물건을 일본에 팔고, 당으로 가는 일본인들은 이곳의 배를 이용했다. 이 청해진의 대사(大使)를 맡은 이가 바로 장보고(張保皐)로서 그는 일본에서 해신(海神)으로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으며, 당나라의 산동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는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사찰을 세웠는데, 이곳에 모여드는 신도들이 250여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장보고(張保皐)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무역상인인 동시에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려 해상왕(海上王)으로 불리기도 했다.
신라와 아라비아의 무역에서는 주로 양탄자, 유리그릇, 향료, 귀금속 등이 들어왔는데 모두가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애용되었다. 신라의 유명한 처용가(處容歌)에서 처용의 아내를 겁탈한 사람을 아라비아 상인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처용무(處容舞)의 가면이 매우 이국적인 것도 예사롭지 않다.
● 불교의 융성과 선종의 대두
신라 후기의 지배적인 사상은 불교였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민중에 이르기까지 신라인을 지배한 종교와 철학은 불교였으며, 사회적으로도 불교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그런데 통일 이전의 불교가 주로 왕즉불(王卽佛)이라는 정치이데올로기 기능이 강했다면 후기 불교는 학문적인 불교, 철학적인 불교로 발전한 것이 다르다.
신라 불교가 심오한 철학이론으로 발전한 것은 신라 승려들이 당나라와 인도 혹은 서역으로 직접 가서 수준 높은 불교이론을 직접 배우고 돌아온 유학승이 많아진 까닭이었다. 통일 전부터 원광(圓光), 자장(慈藏), 원측(圓測), 의상(義湘) 등 명승(名僧)들이 당나라에 유학했는데, 특히 원측은 귀국하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불경번역과 저술로서 중국 불교발전에 기여했다.
통일 직전 의상은 문무대왕(文武大王) 즉위 원년(서기 661년)에 당나라 종남산에 가서 화엄종(華嚴宗)의 시조인 지엄(智儼)으로부터 화엄학을 배우고 670년에 귀국하여 영주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해동화엄종의 시조가 되었으며, 문무대왕의 정치적 자문도 맡았다.
그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등 많은 저술을 냈다. 화엄사상은 모든 우주만물이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조화하고 포용하는 관계를 지녔다고 주장해 유명한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라는 독특한 논리를 폈다. 즉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라는 것이다. 이는 다른말로 일체불리(一體不離) 혹은 원융(圓融)이라고도 한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현실적으로 통일 직후의 신라 사회를 통합하는데 기여했다. 원융사상은 모든 주민의 일체감을 높이는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의상은 왕실과 귀족층의 사치와 탐욕을 억제하는 일에도 공헌했다. 문무대왕이 경주에 도성(都城)을 쌓으려고 할 때 민심(民心)의 성(城)을 강조하면서 이를 만류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국가는 화엄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에 10개의 큰 사찰을 세웠는데 이를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고 한다.
의상과 비슷한 시기에 법성종(法性宗)과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여기에 교학불교의 여러 종파를 통합하여 해동종(海東宗)이라는 독자의 불교사상체계를 세우고 불교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한 승려는 7세기의 원효(元曉)였다. 지금의 경북 경산 출신의 낭도(郎徒)였던 원효는 34세 때에 의상과 함께 당에 가던 도중 어둠 속에서 시원하게 마신 물이 해골 속에 담긴 것이었음을 뒤늦게 알고, 진리는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원효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비롯한 수많은 불교경전에 주소(註疏)를 달아 국내는 물론 중국 불교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여러 종파의 갈등을 한층 높은 수준에서 융화시키기 위해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썼는데, 이 책은 범어(梵語)로 번역되어 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가 고려 숙종(肅宗) 때에 화정국사(和靜國師)로 추앙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원효의 사상은 모든 만물의 시초가 일심(一心)에서 발생하여 일심으로 돌아온다고 보아 마음이 순수해야 함을 강조하고, 모든 불교교리상의 논쟁을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라는 논리로 극복하려고 했으며, 모든 일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숨에 생사를 초월한다는 무애(無碍)의 자유정신을 강조했다.
원효는 무열왕(武烈王)의 딸 요석공주(搖石公主)를 사랑하여 설총(薛聰)을 낳았는데, 그로부터 승복을 벗고 광대 옷차림으로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무식한 대중들을 교화시켰다. 그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만 염불하면 누구나 아미타불이 사는 서방정토(西方淨土), 즉 극락세계로 가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설교하여 신라인의 대부분이 정토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70세를 사는 동안 240여권의 저술을 냈으나 지금은 22권만이 전해지고 있다.
의상과 원효의 뒤를 이어, 통일 후 해외에서 크게 활약한 승려는 8세기 전반기의 혜초(慧超)였다. 그는 성덕왕(聖德王) 재위 18년(서기 719년)에 당에 들어갔다가, 다시 인도와 페르시아, 아라비아 등 서역까지 가서 수십국의 성지를 순례하고 727년에 당나라로 돌아와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썼다. 이 책은 중국과 인도 등지의 교통로 등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혜초와 같은 시기 신라 왕손 출신 승려 김교각(金喬覺)은 719년에 중국 안휘성 구화산(九華山)에 가서 75년간 고행과 포교활동을 전개하다가 입적하여 지장보살(地藏菩薩)의 화신이 되었는데, 지금가지도 지장보살과 김교각은 중국인의 높은 숭앙을 받고 있다.
신라 승려들의 활발한 국제교류 활동으로 당나라의 불교 수준이 높아지고, 신라 불교의 수준도 높은 단계로 올라섰으며, 이에 따라 여러 교종종파가 형성되었다. 그 중 보덕(普德)에 의한 열반종(涅槃宗), 자장(慈藏)에 의한 계율종(戒律宗), 원효(元曉)에 의한 법성종(法性宗), 의상(義湘)에 의한 화엄종(華嚴宗), 진표(眞表)에 의한 법상종(法相宗) 등 5개 종파를 흔히 오교(五敎)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영향력이 컸던 것은 옛 신라 지역에서는 화엄종이, 옛 백제 지역에서는 법상종이었다.
법상종은 미래부처인 미륵불이 먼 훗날 지상에 와서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믿음을 중요시했는데, 이 신앙을 크게 퍼뜨린 이는 백제의 유민이던 진표(眞表)였다. 그는 경덕왕(景德王) 때 김제의 금산사(金山寺)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백제 유민들에게 미래의 꿈을 심어 주었는데, 그 전통이 후백제를 세운 견훤(甄萱)에게까지 이어졌다.
법상종은 옛 고구려 유민 사이에서도 크게 영합되어 결국 신라 후기의 불교는 옛 신라 지역의 교학불교와 옛 고구려 및 백제 지역의 미륵신앙으로 양분되는 형세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전통 속에서 신라 말기에는 이론불교인 교종(敎宗)에 대항하면서 체제비판적인 성격의 선종(禪宗)이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의 호족사회에서 대두하여 교종과 경쟁하는 관계를 형성했다.
선종은 중국에서 달마(達摩)를 개조로 하여 이미 통일 이전에 한반도에 들어왔는데, 신라 말기 6두품 이하의 호족층에서 큰 호응을 얻어 뚜렷한 종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선종관련 종파 중에서 아홉개의 산문(山門)을 대표로 치며, 이를 선종 9산문이라고 한다. 선종 9산문은 대부분 백두대간 바깥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선종은 이론중심의 교종과 달리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표방하면서 개인의 실존과 자각을 강조하여 소외되고 배움이 부족한 호족층 이하 서민층에서 큰 호응을 얻었으며,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서 특히 성행했다.
● 풍수지리사상의 보급
선종을 믿는 호족층은 또한 풍수지리(風水地理)에도 관심을 두었다. 이를 크게 진흥시킨 이는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선승(禪僧)인 도선(道詵)이다. 그는 한반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전국토의 인문지리적 특성을 경험적으로 파악하여 민족지리학인 한국적 풍수지리학의 토대를 놓았다.
풍수지리학은 땅에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이 서로 작용하여 생명의 기(氣)를 탄생시킨다고 보고, 생명의 기가 많이 모인 곳을 명당으로 파악하여 명당에 마을이나 무덤을 조성해야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명당이 아닌 곳에는 사람의 몸에 뜸을 뜨듯이 비보사찰(裨補寺刹)을 세우면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비보사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풍수지리는 일종의 생명지리학이요, 환경지리학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도선은 한반도 전체를 풍수적 관점에서 관찰하여 백두산이 나무의 뿌리에 해당하고, 거기서 뻗어내린 백두대간과 작은 산맥들을 가지에 비유했다. 이를 인체(人體)에 비유한다면 백두산이 머리요, 백두대간이 척추가 되며, 작은 산맥들은 갈비뼈에 해당한다. 또 그는 한반도를 배와 저울에 비유하기도 하여 배가 균형을 잡아야 안전하듯이 그리고 저울이 수평을 이루어야 하듯이, 한반도도 지역적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런 입장에서 도선은 어디가 수도로서 적합한가를 밝히는 국도(國都) 풍수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결과 경주는 기운이 쇠하고, 앞으로는 개성, 평양, 한양이 국가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는 경주에 편중된 국토개발을 극복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기도 했다.
풍수지리사상은 신라시대보다도 고려와 조선시대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고려를 건국한 왕건 일가도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 왕건의 조상은 송악산에 나무를 심어 이를 푸르게 하고, 그 남족으로 집을 옮기면 자손 중에 삼한을 통일한 영웅이 나온다는 풍수지리설을 깊이 믿고 그대로 실천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예언이 맞았다. 그래서 왕건은 풍수지리사상을 깊이 신봉하고 이를 훈요십조(訓要十條)에도 넣어 후손들이 지킬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고려시대 풍수사상의 영향은 절대적이어서 고려의 수도를 개성으로 정하고, 평양과 한양을 각각 서경(西京)과 남경(南京)으로 키우고 국토를 진취적으로 재편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 효공왕(孝恭王)은 도선이 죽은 후,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제자들은 그가 머물렀던 광양 옥룡사(玉龍寺)에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는 탑을 세웠으며, 고려 숙종(肅宗)은 왕사(王師)의 호를 추증하고 인종(仁宗)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했다.
풍수사상은 산과 강의 배합이 잘 이루어진 한국의 국토에는 합리적으로 잘 들어맞아 국가발전과 읍락발전에 기여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때때로 지나치게 정치적 목적이나 명당 무덤자리에 이용하여 여러가지 폐단을 일으키기도 했다.
● 유교의 진흥
신라 후기 불교가 종교와 철학을 지배했으나, 불교는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경영하는데 필요한 정치이념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더욱이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하고 세련된 유교적 관료정치를 운영하고 있던 당나라와 경쟁해야 하는 신라의 입장에서는 유교진흥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했다. 여기에 삼국통일 후 받아들인 고구려와 백제의 유교문화도 큰 자극을 주었다.
7세기말 682년에 유교교육기관으로 국학(國學)을 세우고, 12등급에 해당되는 대사(大舍) 이하의 하급귀족에게 입학자격을 주었다. 그 후 8세기 초 717년에는 당으로부터 공자와 그 제자들의 화상(畵像)을 들여와 국학에 안치하고, 8세기 중엽 경덕왕(景德王) 재위기에는 국학을 태학감(太學監)으로 고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본격적으로 유학교육을 실시했다. 태학감에서는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좌전(左傳), 예기(禮記) 등 5경과 문선(文選)을 선택과목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선택과목에 따라 과(科)를 셋으로 나누었는데, 예기와 주역을 전공하는 과, 좌전과 시경을 전공하는 과, 서경과 문선을 전공하는 과가 그것이다. 이렇게 과를 나눈 것은 유교교육을 한층 전문화시키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말하자면 제1과는 철학전공, 제2과는 역사전공, 제3과는 문학전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8세기 말 788년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유교경전의 이해수준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의 과목은 시경, 서경, 주역이 빠지고 곡례(曲禮)가 추가된 것이 태학의 과목과 다르다. 즉 논어와 효경을 최우선으로 하고 좌전, 예기, 문선, 곡례를 읽었는가를 평가대상으로 삼았다. 독서삼품과는 태학교육보다는 한층 완화된 평가라고 할 수 있는데, 태학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논어와 효경이 가장 중요시된 것이 눈길을 끈다. 독서삼품과는 골품제도 때문에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으나 무치(武治)를 문치(文治)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유교이념 중에서도 충효(忠孝)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통일 전부터 내려오던 화랑도정신을 유교와 접목시켜 이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국왕과 가부장의 권위를 확립시켜 주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밖의 유교경전을 선택적으로 읽게 한 것은 유교를 한문학 수준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말해준다.
유교진흥정책에 따라 유학과 한문학 소양이 높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특히 골품제도의 폐쇄성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6두품 출신 가운데 저명한 학자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6두품으로 중원경(中原京) 출신의 강수(强首)는 해박한 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외교문서를 잘 지어 무열왕(武烈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삼한통일사업(三韓統一事業)을 도왔으며, 불교를 세외교(世外敎)라고 비판하면서 유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청렴하게 일생을 보냈고, 젊었을 때에는 대장장이 딸을 사랑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경주 귀족에 대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국학 출신으로 명성을 날린 유학자는 원효(元曉)의 아들 설총(薛聰)이다. 역시 6두품의 후예로서 경산(慶山)에 고향을 둔 그는 신문왕(神文王)에게 화왕계(花王戒)라는 글을 바쳐 임금이 간신을 멀리하고 정직한 신하를 가까이 할 것을 강조하여 신문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또 전부터 써오던 이두(吏讀)를 집대성하여 한문교육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설총은 신라 10대 선각자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11세기 초 고려 현종(顯宗) 때에는 유학을 널리 전파했다 하여 홍유후(弘儒侯)로 추증되어 문묘에 제사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고승의 아들이 유학자로 변신한 것은 신라 사회가 불교시대에서 유교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신라 후기에는 이밖에도 제문(帝文), 수진(守眞), 양도(良圖), 풍훈(風訓) 등이 유학자로 이름을 전하고 있다.
한편, 당과의 활발한 문화교류에 따라 진골자제와 6두품 출신 가운데에는 당에 가서 유학하고 돌아오는 것이 유행이 되었는데, 이들을 당시 숙위학생(宿衛學生)이라고 불렀다. 그들 가운데 신라 말기의 김운경(金雲卿), 김가기(金可紀), 최치원(崔致遠)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9세기 후반의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 당에 가서 17세 때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를 하면서 황소(黃巢)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는 격문을 지어 명성을 떨쳤다. 그는 28세 되던 884년에 귀국하여 894년에는 유명한 시무상소(時務上疎)를 올려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아찬(阿贊)의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6두품의 신분적 한계를 느끼고 세상이 어지러운데 실망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국 각지를 유람하면서 풍월을 읊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그는 유학자인 동시에 도교와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후세에는 유(儒), 불(佛), 도(道) 삼교(三敎)를 회통한 사상가로 추앙받았다. 그는 불우한 생애를 보냈으나, 그의 내제자들이 고려 건국에 참여하여 왕조건설에 적지않은 도움을 주었다. 그가 고려 초기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작호를 추증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계원필경(桂苑筆耕), 사륙집(四六集), 중산복궤집(中山覆潰集) 등의 저서를 남겼으나, 지금은 계원필경과 여러 사찰의 비문(碑文)만이 전한다.
한편 신라 최고의 문장가로서 많은 저술을 남긴 이는 8세기 초 704년에 한산주총관(漢山州摠管)을 지낸 김대문(金大問)이다. 그의 저서로는 신라 역사를 야사로 기록한 계림잡전(鷄林雜傳)을 비롯하여 화랑들의 전기를 모은 화랑세기(花郞世記), 고승들의 전기를 모은 고승전(高僧傳), 한산(漢山) 지방의 지리지에 해당하는 한산기(漢山記) 그리고 음악에 관한 악본(樂本) 등을 지었다고 하나 지금 전하는 것은 없다. 그는 당에 유학하고 돌아왔으나 진골귀족으로서의 보수성 때문에 유교보다는 오히려 전통문화와 불교를 지키려는데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뒷날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편찬에 큰 참고자료가 되었다.
● 과학기술
신라의 과학기술은 어떠했을까? 유학은 국학에서 가르쳤으나 천문학, 수학, 의학, 법률학 등의 과학기술교육은 따로 학교를 세워 가르쳤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 수준도 매우 높았는데, 8세기 후반 혜공왕(惠恭王) 때의 김암(金巖) 같은 이는 김유신의 후손으로 당나라에 가서 음양가의 법술을 배우고 돌아와 사천대박사(司天臺博士)가 되어 천문관측의 책임을 맡고,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또 그는 병법에도 능해 육진병법(六陳兵法)을 가르치기도 했다.
신라의 천문학은 7세기 전반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첨성대(瞻星臺)를 세워 천문관측을 행한 것에서도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에는 일식, 월식, 지진, 혜성의 출현, 그밖의 기상이변에 대한 기록이 매우 많고 내용이 정확하다. 이로써 신라의 천문학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천문학은 농업과 깊은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천재지변은 민심을 반영한다는 믿음이 있어서 천문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신라의 수학 수준은 보여주는 문헌자료는 없으나 석굴암(石窟庵)의 설계나 석가탑(釋迦塔), 다보탑(多寶塔) 등 여러 불탑의 균형잡힌 비례구성 등을 통해서 신라인들의 수학지식이 매우 높았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한편 시간을 재는 기구로서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물시계가 중요시되어 성덕왕(聖德王) 때에는 누각전(漏刻典)이라는 관청이 설치되기도 했다.
신라의 의학은 전통적인 경험의학을 토대로 중국, 인도계통의 불교의학의 영향을 받아서 학문적 체계를 세워갔다. 당시 의학서는 중국에서 들여온 본초경(本草經), 갑을경(甲乙經), 내경(內經) 등이 있었다. 이밖에도 석굴암의 습기제거를 위한 통풍장치는 아직도 우리가 풀지 못하는 숙제이며, 수십만근의 구리와 아연을 합급하여 만든 황룡사종(皇龍寺鐘)과 성덕왕신종(聖德王神鐘)에 기포(氣泡)가 극히 적고 신비한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한 것도 금속공학의 놀라운 수준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금속공학 기술로도 이런 종을 만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신라의 기술문화에서 또 하나 특기할 것은 목판인쇄술과 제지술이다. 종이제조와 인쇄술은 불경(佛經)을 보급하기 위한 필요에서 발달하게 되었는데, 이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이는 목판으로 직은 두루말이 불경으로, 종이는 닥나무로 되어 있고 전체 길이는 7미터 가량 된다. 이 목판본이 인쇄된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석가탑을 세운 것이 751년이므로, 아무리 늦어도 이 해에 만들었거나, 아니면 그 이전에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으로 알려진 일본 법륭사(法隆寺)의 다라니경(陀羅尼經)이 770년에 만들어졌으므로, 그보다 20년 혹은 그 이상 앞서는 셈이다.
신라의 제지술과 인쇄술은 고려시대로 그대로 이어져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드는 토대가 되었으며, 아시아 최고품질의 종이와 책 생산국이 되었던 것이다.
● 건축, 조각, 공예
후기 신라의 미술문화재는 거의 대부분 불교와 관련된 사찰, 불탑, 범종, 불상, 석등 등이다. 따라서 불교를 떠나서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미술을 표현하는 양식과 재료는 어디까지나 민족적인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의 불교미술은 다른 나라의 불교미술과 구별된다. 불교미술 말고도 궁궐건축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후기 신라의 불교미술으 대표하는 것은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751년에 재상 김대성(金大城)이 전세와 현세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국가에서 경비를 지원했다. 불국사는 원래 2천칸이 넘는 거찰이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 없어진 목조건물들을 해방 후 다시 중창했다.
불국사의 구조는 불국토(佛國土)의 이상을 균형잡힌 미적 감각으로 표현한 것으로, 정문으로 올라가는 하단의 백운교(白雲橋)와 상단의 청운교(靑雲橋)는 천국(天國)으로 올라가는 구름다리를 의미하는데, 직선과 곡선을 배합시킨 미적 감각이 뛰어나다. 이 두 다리를 올라서면 정문인 자하문(紫霞文)이 나오고 정문을 넘어서면 대웅전(大雄殿) 앞마당에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이 좌우로 마주 서 있다. 이 두 탑은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땅에서 솟아났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표현한 것인데, 다보탑은 극히 복잡하고 정교하며, 석가탑은 간결하고 단순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다. 그 아름다운 조형미는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4사자 3층석탑과 감은사지(感恩寺址) 3층석탑과 아울러 신라 후기 석탑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감은사지 3층석탑은 신문왕(神文王)이 부왕인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해 동해의 대왕암을 굽어보는 바닷가에 682년에 지은 것인데, 사찰은 없어지고 법당 앞에 세운 두개의 석탑만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탑은 층수가 낮은 3층탑이면서도 웅대하게 크고 높으며 뛰어난 균형미를 갖추고 있다. 이밖에도 신라 말기에는 진골귀족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하여 원탑(願塔)을 세우는 일이 유행했다.
신라 말기에 오면 석탑의 기단과 탑신부분에 조각이 등장하는 등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데, 양양 진전사지(陳田寺址) 3층석탑은 그 좋은 예이다.
국내의 붙탑은 처음에는 목탑을 세우다가 뒤에는 화강암 석탑으로 바뀌어 중국의 전탑이나 일본의 목탑과 다른 한국형 불탑으로 정형화되었다. 이는 화강암이 많은 국내의 자연환경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목탑이 석탑으로 바뀌면서 자연히 높이는 낮아지게 된 것이다.
불국사 미술문화재 가운데에는 석등(石燈)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법주사(法住寺) 쌍사자 석등과 아울러 그 단아함과 균형미에서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석굴암은 인공으로 축조한 석굴사원으로 중국의 돈황이나 서역의 석굴사원 양식을 받아들였으면서도 중국처럼 거대한 자연암벽이 없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인조석굴을 만든 것이다. 그 양식은 무덤양식과 사찰양식을 합친 것으로 전실(前室)은 땅을 상징하며 네모나게 만들고, 후실(後室)은 하늘을 상징하여 둥근 방에 둥근 돔을 얹었다. 전실에는 부처님의 권속인 팔부신상(八部神像)과 인왕(仁王)을 조각하고, 하늘나라인 후실에는 한가운데에 부처님상을 안치하고, 그 둘레의 벽에는 11면관음을 비롯하여 대범천(大梵天), 10나한 그리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등을 부조로 조각하여 부처님을 에워싸는 형태를 이루었다. 또 전실과 후실을 연결하는 연도에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사천왕(四天王)을 조각하여 잡귀들이 후실에 들어오는 것을 막도록 배려했다.
석굴암은 건축적인 측면과 미술적인 측면에서 세계적 걸작으로 꼽힌다. 방의 너비와 천장의 높이, 그리고 조각의 크기 등이 거의 완벽한 균형과 비례를 이루고 있어서 신라인의 수학적 설계기술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말해준다. 또 단단한 화강암을 망치로 쪼아서 정교하게 다듬은 조각기술도 놀랍다. 한 부처의 드높은 정신세계를 거의 완벽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일본의 광륭사(廣隆寺) 소장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을 보고, 인간 최고의 이상을 표현한 세계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하여 화제가 되었으나, 그가 만약 석굴암을 보았다면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하다.
그런데 석굴암을 왜구를 막는 국방요지인 토함산 동편에 세운 것도 음미할 가치가 있다. 이는 아침햇살을 받아 석굴암 내부를 조명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으나, 동시에 부처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는 호국정신도 길들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분황사(芬皇寺)의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은 무게가 30만근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현존하는 약사여래상 중에서는 경주 백률사(柏栗寺)의 것이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신라 불상과 관련하여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이 크게 유행한 것도 주목된다. 특히 이 불상은 철불(鐵佛)인 경우가 많은데, 장흥 보림사(寶林寺)와 철원 도피안사(到彼岸寺)의 철불이 유명하다.
신라미술에서 또 하나의 세계적 자랑거리는 범종(梵鐘)이다. 50만근의 황룡사종(皇龍寺鐘)과 12만근의 성덕왕신종(聖德王神鐘)이 주조돤 사실은 앞에서 설명했지만, 그 중에 황룡사종은 지금 없고, 성덕왕신종은 현재 경주국립박물관 마당에 옮겨져 걸려 있다. 이 종은 그 신비스런 음색으로 유명하지만, 표면에 새긴 비천상(飛天像)과 연화문(連花文)의 조각도 일품이다. 피리를 입에 문 여인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은 아마도 이 종소리를 들으며 부처님이 계신 하늘로 승천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을 것이다. 비천상은 평창 오대산 상원사종(上院寺鐘)에도 조각되어 있는데, 제작시기는 상원사종이 지금 남아 있는 종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신라의 종은 꼭대기 걸개 옆에 음관(音管)이 붙어 있는 것이 독특한데,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중국이나 일본 종과 다른 한국 종의 특색을 보여준다. 한국 종(鐘)이 독특한 음색을 내는 것은 이런 장치와도 관련이 있다.
후기 신라를 대표하는 왕실과 귀족들의 정원으로 안압지(雁鴨池)가 있다. 자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연못을 만들고, 연못 안에 섬을 조성하고, 연못 족으로 정자건물을 돌출시킨 것이 안압지의 특색이다. 이 연못이 몇년전에 발굴되어 귀면와와 가위를 비롯한 귀중한 유물들이 발견되어 귀족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신라의 무덤도 신라 미술의 특색을 보여준다. 통일 전에는 돌무지덧널무덤에다 높은 봉분을 덮어 미술적 장식이 없었으나, 통일 후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무덤양식을 받아들여 횡혈식 돌방무덤으로 바귀고, 봉분 주변에 호석(護石)을 두르기 시작했다. 호석은 쥐, 소, 호랑이 등 12지신상(支神像)을 조각한 것이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특색인데, 김유신묘(金庾信墓)와 괘릉(掛陵)의 조각이 가장 우수하다.
특히 괘릉은 12지신상 이외에도 문인석과 무인석 그리고 돌사자 등을 무덤 앞에 설치하여 완벽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이런 양식이 조금 변형되어 고려, 조선시대 왕릉에 이어졌다. 신라 왕릉 중에서 무열왕릉(武烈王陵) 앞에 세운 능비(陵碑)가 또한 유명하다. 즉 비문을 떠받치는 거북이받침돌 조각이 매우 힘차고 아름답다.
신라의 공예미술 가운데 만불산(萬佛山)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지금 전하지 않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경덕왕(景德王)이 당황(唐皇) 대종(代宗)에게 선사했는데, 대종이 이를 보고 "신라인의 재주는 하늘이 낸 것이지 사람의 재주가 아니다."라고 탄복하면서 승려들을 불러 경축행사를 벌였다고 한다. 만불산은 나무와 오색 비단으로 만든 가산(假山)으로서 높이가 사람키를 넘으며, 몇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여러 나라의 산천을 조각하고, 그 속에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과 벌, 나비, 제비, 참새들이 바람결에 춤을 추도록 만들었다. 또 산 가운데 크고 작은 만불(萬佛)을 안치해 놓고, 금과 옥으로 누각과 정자와 각종 의장(儀仗)을 조각하여 놓고, 그 아래에는 천여명의 중들이 돌아다니다가 바람이 불어 종이 울리면 모두 엎드려 절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만불산은 신라인의 공예기술과 미술적 감각을 살린 최고의 걸작으로 보이는데, 실물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신라 후기에는 호족층 사이에서 선종(禪宗)이 유행하면서, 선사(禪師)들의 묘탑(墓塔)으로 조성된 부도(浮屠) 중에 아름다운 것이 적지 않다.
● 문학, 그림, 글씨
후기 신라의 문학은 역시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통일 전에 이미 향가(鄕歌) 혹은 사뇌가(詞腦歌)로 불리는 문학이 생겨났지만, 통일 후에는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승려나 화랑들의 중교적 문학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향가도 더욱 일반화되었다.
신라 말기인 888년 진성여왕(眞聖女王)은 각간 위홍(魏弘)과 승려 대구(大矩)에게 명하여 역대 향가들을 모아 삼대목(三代目)이란 향가집을 편찬하게 했는데, 지금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히 삼국유사에 14수의 향가가 수록되어 있어서 향가문학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낭도 득오곡(得烏谷)의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는 효소왕(孝昭王) 때 죽지랑이라는 화랑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노래이고 승려 월명사(月明師)의 도솔가(兜率歌)는 경덕왕(景德王) 때 해가 둘이 나타나 없어지지 않으므로 군왕이 이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니 이변이 없어졌다고 한다. 월명사는 또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었는데, 이는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경덕왕(景德王) 때의 승려 충담사(忠談師)도 이름난 향가작가였다. 그는 화랑 기파랑을 찬양한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와 백성의 평안함을 기원하는 안민가(安民歌)를 지었다. 향가의 주제는 대체로 부처님의 찬양, 동료간의 의리,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 기원, 그리고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들이다.
향가가 지식층의 문학이라면, 일반 서민층은 이야기식 설화문학을 구전(口傳)으로 즐겼다. 삼국유사에는 이런 설화(說話)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에밀레종', '효녀 지은', '효자 손순' 등의 이야기이다. 이 설화들은 대개 충효를 주제로 한 것으로 '효녀 지은' 이야기는 지은이라는 가난한 처녀가 자신을 종으로 팔아 온갖 정성으로 눈먼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이야기로서 마치 후대의 심청전(沈淸傳)을 연상시킨다. '효자 손순' 이야기는 손순이라는 가난한 농민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음식을 축내는 아들을 산채로 산에다 매장하다가 종(鐘)을 발견하여 국왕의 포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다음에 후기 신라의 그림은 어떠했는가.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의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불교와 관련된 우수한 종교 화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솔거(率居)라는 유명한 화가가 황룡사(皇龍寺) 벽화를 비롯하여 분황사(芬皇寺)의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斷俗寺)의 유마상(維摩像) 등을 그렸다고 하며, 그가 벽에 그린 소나무가 얼마나 사실적이었던지 날아가던 새가 앉으려다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이밖에도 10세기 초의 신라 말기에는 정화(靖和), 홍계(弘繼)라는 유명한 승려 화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문학이 발달하면서 글씨를 잘하는 명필(名筆)도 등장했다. 특히 김생(金生)은 중국의 왕희지(王羲之)와 비슷하면서도 그보다 더욱 활달한 필력을 보여 신품(神品)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金仁問)은 학자이면서도 글씨도 뛰어났는데, 그가 쓴 글과 비문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이밖에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요극일(姚克一)은 당의 구양순체를 체득한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필체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했다.
신라의 높은 문화수준은 당에도 널리 알려져, 당은 신라를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으로 부르고, 신라에서 온 사신은 다른 여러 나라 사신보다 항상 가장 높은 자리에 배정하여 우대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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