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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26.여몽전쟁(麗蒙戰爭) 패배와 삼별초(三別抄)의 항전

개마기사단 |2011.10.11 12:14
조회 1,399 |추천 0

 

북방 몽고족(蒙古族)은 삽시간에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장악하면서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커다란 제국 원(元)을 건설했다. 이런 원나라에 대항하여 고려는 40년 이상을 줄기차게 싸워왔다. 그러나 최씨(崔氏) 무신정권은 몽고와 전면전을 전개하는 대신, 자신들은 몽고군의 말발굽이 미치지 않는 강화도로 천도하고 일반 백성들은 몽고군의 창과 칼 앞에 그대로 노출시켰다. 고려의 끈질긴 항쟁은 원종(元宗)이 원나라의 세력을 이용해 무신정권을 붕괴시키고 친정(親政)을 단행하기 위해 환도하면서 끝나게 된다. 이후 삼별초(三別抄)가 끝까지 대몽항전(對蒙抗戰)을 펼쳤지만 결국 고려는 원나라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

● 몽고(蒙古)와의 첫 접촉

1213년 무렵, 중국 북부지역 유목민족들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중국 북부를 장악했던 여진족의 금나라가 쇠퇴하자 거란족이 자립했으나 이들은 금나라와 몽고제국으로부터 이중 공격을 받았다. 이를 피해 도망가던 거란족은 고종(高宗) 재위 3년(서기 1216년) 9만 병력으로 고려를 침입하였다. 거란족은 평안도 일대를 유린하고 경기도 일대까지 진출하여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고, 개경 주위까지 진입하면서 강원도 원주와 충청도 제천까지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김취려(金就礪)가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군에게 맹공을 퍼부어 타격을 입히고 박달재까지 추격하여 적을 격퇴시켰다. 고려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하고 대관령을 넘어 강릉을 거쳐 함흥으로 달아난 거란족은 다음해에 또 침입해 황해도 일대를 노략질하였다. 이에 서북면 원수 조충(趙沖)과 후군병마사 김취려가 군사를 정비하여 거란군을 황해도 서흥에서 격파하고 대동강 언저리에 있는 강동성(江東城)까지 추격하였다.

이때 몽고의 장수 합진(蛤眞)이 몽고군 1만명과 동진(東眞)의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거란군을 소탕하겠다는 명목으로 고려에 들어왔다. 합진은 강동성을 포위하고 있는 고려군 원수 조충에게 '거란의 군사들이 너희 나라에 도망해온 지 3년이나 되었는데도 소탕하지 못하므로 아국의 황제가 군사를 보내 이를 치노니 너희 나라에서는 군량미를 부족하지 않게 보내야 할 것이다. 황제의 명령으로 적군을 격파한 후에는 형제의 맹약을 맺으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고려에서 요구하지도 않은 파병이었고, 편지의 언사도 완전히 강압적이었다. 그러나 조충은 합진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군량 1천섬을 몽고군 진영에 보냈다.

이렇게 해서 몽고, 동진, 고려 세나라의 연합군은 1219년 2월 강동성을 총공격하여 함락시키고 5만여명의 관인, 군졸, 부녀들을 투항시켰으며 거란족의 우두머리 합사(喊舍)는 성이 점령되기 직전에 자결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몽고 장수 합진은 자신들이 고려를 도와준 은혜를 갚으라고 하면서 조충과 김취려에게 형제의 맹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고려 측은 이에 반발하기보다 매년 동진을 경유해 세공(稅貢)을 바치기로 약정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 조약 이후 고려와 몽고는 세공을 매개로 한 관계로 전환되었으나 몽고에서 요구하는 공물들은 고려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과중한 것이었다. 몽고는 고종(高宗) 재위 8년에만도 무려 여섯차례나 공물을 요구해 왔다. 그 해 8월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 일행이 황태제(皇太弟)의 명령이라며 여구한 물품만 해도 수달피 1만장, 가는 명주 3천필, 가는 모시 2천필. 면자(綿子) 1만근, 용단묵(龍團墨) 1천정, 붓 2백관, 종이 1만장 등이었다.

이외에도 따로 몽고 장수와 사신들에게 바치는 물품을 요구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에는 그 물품을 임금 앞에서도 내던지는 방약무인(傍若無人)한 행위를 일삼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몽고의 황태제에게 "매번 명령을 내려 끝없이 요구하니 우리가 이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한정된 산물로 무한한 요구에 응하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못함을 아실 것입니다."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몽고의 요구는 점점 늘어 청사(靑絲), 능주사(凌走絲) 등 고려에서 생산되지 않는 품목과 심지어 처녀까지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횡포에 대해 고려는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다만 점차 대제국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몽고에 대해 반발하지 못할 뿐이었다. 고종 재위 12년(서기 1225년) 고려에 와서 막대한 공물을 받아가던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은 이런 불만의 표출이었다. 몽고는 진상 파악을 위해 사자를 파견했으나 이 역시 고려인들의 기습공격으로 축출되었다. 정화간 진상이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이 사건은 고려의 중앙 정권이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몽고의 횡포에 불만을 품은 지방 세력의 소행으로 판단된다. 몽고는 이 사건에 분개했지만 곧바로 전쟁으로 확대시키지는 못했다. 아직 금나라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고려로 전선을 확대하기란 몽고로서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몽고가 고려를 침략한 것은 그로부터 6년 후인 고종 재위 18년(서기 1231년) 8월의 일이었다. 몽고군 주수(主帥) 살례탑(撒禮搭)은 요동지방의 화량성(花凉城)과 개주(開州) 등지를 공략해 후방의 위협을 제거한 후 압록강 하구 함신진(咸新鎭)을 경유해 고려 영내로 들어왔다. 살례탑은 거란군을 공격한 강동성전투(江東城戰鬪)에 참전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고려군의 전술에 대해 숙지한 터였다.

이것이 몽고의 본격적인 첫 고려 침략이었다. 이후 1259년에 강화조약(講和條約)이 체결될 때까지 전후 여섯차례에 걸쳐 약 30여년 동안 계속된 여몽전쟁(麗蒙戰爭)에서도 몽고군은 주로 이 통로를 이용해 고려를 공격해 들어왔다.

살례탑의 군대는 8월 말 정주(靜州)와 철주(鐵州) 등을 짓밟고 9월 초에는 귀주(龜州)를 포위하는 등 고려 서북면 일대를 도륙했다. 고려는 9월 초에 삼군의 출전을 결정하고 군사를 출병시켰는데 9월 하순에 고려의 중앙군과 몽고군 8천 병력은 황주의 동선역(洞仙驛)에서 처음으로 교전한다.

'아군이 동선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마침 해가 저물었고 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척후병의 보고가 있었으므로 삼군(三軍)이 안장을 풀고 쉬고 있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 "몽고병(蒙古兵)이 온다!"고 소리치니 군사들이 크게 놀라 다 도망쳤다. 몽고병 8천여명이 돌연 닥치자 이자성(李子晟)과 장군 이승자(李承子), 노탄(盧坦) 등 5, 6인이 죽기를 각오하고 막아 싸우다가 이자성은 유시(流矢)에 맞고 노탄은 창에 찔려 말에서 떨어졌으나 군졸이 이를 구하여 겨우 죽음을 면했다.

고려사(高麗史) 이자성전(李子晟傳)'

'몽고병이 온다.'는 말을 듣고 군사들이 크게 놀라 싸우기도 전에 다 도망쳤다는 이 기사는 고려군이 몽고군에 대해 갖고 있던 두려움의 정도를 보여준다. 고려군은 기마병을 주축으로 하는 몽고군의 기동력에 압도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귀주성에서는 서북면병마사 박서(朴犀)를 중심으로 몽고군에 대항하여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접전(接戰)을 벌이고 있었다.

'몽고군이 사로잡은 위주부사(渭州副使) 박문창(朴文昌)을 성으로 들여보내 항복을 권유하도록 하자 박서는 그의 목을 베었다. 몽고군이 정예기병 3백명을 뽑아 북문을 공격했으나 박서가 이를 격퇴시켰다. 몽고군이 누거(樓車)와 대상(臺床)을 만들어 소가죽으로 덮어씌우고 그 안에 군사를 감추어 성 밑으로 육박, 터널을 뚫자 박서는 성에 구멍을 내어 쇳물을 부어 누거를 불태웠다. 여기에 땅까지 꺼 져 몽고군 압사자가 30여명이나 되었으며 썩은 이엉에 불을 붙여 목상(木床)을 불태우니 적병이 놀라 흩어졌다. 몽고군이 또 대포차 열다섯대로 성 남쪽을 습격하자 박서는 성 위에 대를 쌓고 포차로 돌을 날려 물리쳤다. 몽고군기 기름으로 섶을 적셔 두텁게 쌓아놓고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자 박서가 물을 뿌렸는데 불이 더 치열해졌다. 이에 진흙을 가져오게 해서 물에 섞어 던져 불을 껐다. 몽고군이 또 차에 풀을 싣고 이를 태우면서 초루(樵樓)를 공격하자 박서는 미리 망루 위에 준비해 두었던 물을 쏟아 불을 껐다. 몽고군은 성을 포위한 30일 동안 백가지 계책으로 이를 쳤으나 박서가 임기응변(臨機應變)하여 굳게 지켰으므로 몽고군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고려사(高麗史) 박서전(朴犀傳)'

서북면병마사 박서의 지휘 아래 귀주성 수비군은 결국 몽고군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몽고군은 "하늘이 돕는 바요, 사람의 힘이 아니다."라고 탄식하면서 귀주성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중앙에서 파견된 고려군도 동선역전투(洞仙驛戰鬪)에서 초기의 패배를 딛고 전열을 정비해 몽고군과 맞서 싸웠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는 초적(草賊)들이 고려군에 가담해 몽고군과 싸운 것이 주목된다.

'삼군이 비로소 집결하여 함께 싸우니 몽고군이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다가와 우리 우군(右軍)을 공격했다. 산원(散員) 이지무(李之茂), 이인식(李仁式) 등 4, 5인이 적을 맞아 싸우는데 마산(馬山) 초적(草賊)으로 종군한 자 2인이 몽고병을 쏘자 활시위줄을 따라 엎어졌고 관군이 이긴 기세를 타 쳐서 패주(敗走)시켰다.

고려사(高麗史) 이자성전(李子晟傳)'

무신정권 초기 일반 농민, 노비와 함께 민란의 주체가 되었던 초적들이 몽고가 침략하자 항몽전선(抗蒙戰線)에 적극 나선 것이었다. 몽고의 침략 직후인 고종 재위 18년 9월, 마산(馬山)의 초적 우두머리 2명이 최우(崔瑀)를 찾아와 정병 5천을 거느리고 몽고군을 격퇴시키겠다고 제의하자 최우가 크게 기뻐했는데, 이들이 동선역전투(洞仙驛戰鬪)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마산 초적뿐만 아니라 광주(廣州) 관악산과 안남(安南) 백악(白岳), 그리고 경기의 초적도 관군과 합세해 대몽항전(對蒙抗戰)에 참여했다. 마산 초적이 동선역전투에 참여하고 광주 관악산의 초적들이 삼군의 하나인 우군에 보충된 것처럼 이들은 대몽항전 과정에서 최일선을 담당했다.

무신정권에 반대해 봉기했던 초적들의 가세는 고려 조정으로 하여금 전국민적 총의를 모아 몽고군에 대항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고려 조정은 이런 의지를 결집해 몽고군과 정면에서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집정자인 최우는 이런 총의를 모아 대몽항전에 나서기보다 강화도로 천도(遷都)해 정권의 안전을 도모하는 길을 택했다.

● 무신정권의 강화도 천도

귀주수성전(龜州守城戰) 승리와 동선역전투(洞仙驛戰鬪)에서의 초적들의 활약은 강동성 점령 이후 고려 조정이 몽고와의 전쟁을 예상하고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했더라면 그 양상이 달라질 수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내적으로는 내정을 쇄신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면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외적으로는 금나라 등과 두터운 외교관계를 맺어 대몽연합전선(對蒙聯合戰線)을 구축했으면 몽고가 일방적으로 전쟁에 승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첫번째 침략 때 몽고군은 '지나는 곳마다 잔멸하지 않음이 없었다.'는 표현처럼 잔혹한 약탈을 자행했다. 몽고군은 충주까지 남하하면서 말발굽이 닿는 곳마다 심각한 피해를 입혔던 것이다. 이런 행위는 고려의 상하 백성 모두를 분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사항전(結死抗戰)의 자세를 다지게 했다.

최우 정권은 그러나 몽고에 대한 결사항전보다는 강화(講和)로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최우에게 최씨 무신정권의 유지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고종 재위 18년(서기 1231년) 8월에 시작된 몽고의 첫번째 침략 때 최우는 몽고에 맞서 싸우기보다 그들과의 화의에 주력했다. 북계 귀주(龜州) 부근의 자주부사(慈州副使) 최춘명(崔椿命)이 조정의 항복 권유를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하자 고종 19년 5월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그의 처형을 결의할 정도였다. 이랬던 최우 정권이 돌연 적극 반몽정책(反蒙政策)으로 전환한 것은 몽고가 최우의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해 직접 지배하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배권만 유지된다면 몽고에 항복하려 했던 최우는 이에 맞서 천도를 결심했다. 최우가 강화도를 천도 대상으로 삼은 것은, 무엇보다 몽고군이 수전(水戰)에 약했고, 강화도의 위치 자세가 개경에 근접한데다 조운(漕運)이 편리해 전국의 조세를 원활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재위 19년 2월 조의 '재추(宰樞)가 전목사(典牧司)에 모여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했다.'는 기록처럼 무신정권이 천도를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몽고의 첫번째 침략 이듬해 초였다. 이후 같은해 5월, 6월 잇따라 천도가 논의되었으나 조정 여론의 대세는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대몽항전(對蒙抗戰)이었다.

천도반대론(遷都反對論)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자 최우는 고종 19년 6월 자신의 집으로 재추대신들을 불러모았다. 자신의 집에서 천도를 결정하려는 의도였다. 고려사는 이때의 일을 '그때 평화가 오래 계속되어 서울(개경)의 호수가 10만에 이르고 단청질한 좋은 집들이 즐비했으므로 정이 들어 사람들이 옮기기를 싫어했다. 그러나 최우를 두려워하여 감히 한마디도 하는 자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대로 최우는 힘으로 천도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주전론(主戰論)도 천도론(遷都論)도 아닌 제3의 길을 주장하는 유승단(兪升旦) 같은 인물도 있었다.

'유승단이 홀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옳은 것인데, 예의로써 섬기고 믿음으로 사귀면 저들이 무슨 명분으로 늘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성곽과 종사를 버리고 섬에 숨어 엎드려 구차스럽게 세월만 보내면서 변방의 백성 중에서 장정들은 다 살상당하고 노약자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 좋은 계책이 아니다."라고 했다.'

고려사(高麗史) 유승단전(兪升旦傳)

유승단의 주장은 몽고와 적극적으로 섬기는 사대관계를 맺어 전쟁을 피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비단 유승단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최우는 고종(高宗) 재위 18년 12월 초, 황족 회안공(淮安公) 정(挺)을 살례탑(撒禮搭)에게 보내 화의를 요청하는 등 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자 몽고는 같은 달 말 1~2만필 분량의 금, 은, 보석 등의 물품과 백만명분의 몽고군 의복, 자색 비단 1만필, 수달피 2만개, 크고 작은 말 1만필 등을 요구하는 첩장을 보내 왔다. 이는 고려의 능력으로는 조달 불가능한 수량이었다. 사대관계를 통한 강화는 이를 유지할 만한 재정이 부족한 고려로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몽고와 전면전(全面戰)을 벌이자는 주장이 등장한 것이다.

'야별초(夜別抄) 지유(指諭)인 김세충(金世沖)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 최우에게 "서울인 개경은 태조(太祖) 때부터 대대로 지켜 내려와 무려 2백여년이 되었습니다. 성은 견고하고 군사와 양식은 풍족하니, 마땅히 힘을 합해 지키면 사직을 지킬 수 있는 곳인데, 이 곳을 버리고 장차 어디에 도읍하겠다는 것입니까?"라고 힐문했다. 최우가 성을 지킬 계책을 물어보니 그가 능히 대답하지 못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종(高宗) 재위 19년 6월 조'

유승단과 김세충의 주장은 둘로 대변된다. 굴욕을 감수하고라도 몽고와 화의하자는 강화론(講和論)과 전쟁을 전제로 천도하기보다는 개경을 중심으로 싸우자는 도성사수론(都城死守論)이었다. 김세충이 구체적인 개경 방어책에 대해서 답변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는 사실 결사항전의 방법 외에 다른 묘안이 있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개경 사수 방법은 야별초 지유가 아닌 집정자 최우가 답변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최우가 그 측근들은 도성사수론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눌러 버렸다.

'어사대부(御史大夫) 대집성(大集成)이 최우에게 "김세충이 아녀자의 말을 본떠 감히 큰 의논을 막으려 했으니 그의 목을 베어 나라 안팎에 보이십시오."라고 말했다. 응양군의 상호군 김현보(金鉉寶)도 대집성의 말에 찬성했다. 드디어 김세충을 끌어내어 목을 베도록 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종(高宗) 재위 19년 6월 조'

무장으로서 당연한 도성사수론을 주장했다가 되려 사형당하는 가치전도(價値顚倒)의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김세충의 목이 날아가자 강화천도(江華遷都)에 반대하는 더 이상의 의견이 없었다. 곧바로 강화천도가 결정되었고 최우는 고종에게 속히 강화도로 행차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임금이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했다.'는 기록은 고종 역시 강화천도에 회의적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무신정권의 실권자는 고려 황제가 아니라 최우였다. 최우는 녹봉을 옮기는 수레 1백여냥을 빼앗아 가재도구를 강화로 옮겼다. 이를 본 도성 백성들의 민심이 흉흉해졌으나 최우는 담당 관리에게 명령을 내려 도성 5부 백성들의 이주 날자를 정해주고, 성 안에 '머뭇거리고 제 때에 출발할 날짜를 지키지 못하는 자는 군법으로 처리하라.'는 방을 붙이도록 했다.

고종(高宗) 재위 19년 7월, 고종과 대신들은 개경을 출발해 강화도로 향했다. '이때 장마가 열흘이나 계속되어 진흙길에 발목까지 빠져 사람과 말이 쓰러져 죽었다. 고관이나 양가의 부녀자들 중에도 맨발로 업고 이고 가는 자들이 있었다.'는 기록처럼 천도길은 고난의 길이었다. 그러나 강화도로 들어갈 수 있는 백성들은 그나마 형편이 좋은 경우였다. '과부나 홀아비, 고아나 혼자 사는 사람으로 갈 곳을 잃고 통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는 기록처럼 조정으로부터 버림받은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천도한 강화도는 이후 원종(元宗) 재위 11년(1270년) 무인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40여년 동안 전시수도(戰時首都)로서 몽고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안전은 황제와 무신정권의 일부 지배층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백성들은 무신정권의 강화천도로 이중의 수탈을 겪어야 했다.

최우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백성들에게 성이나 산성, 또는 섬으로 옮길 것을 내용으로 하는 해도산성입보(海島山城入保)를 지시했다. 해도산성입보책은 최우 정권의 강화도 천도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는 일종의 청야전술(淸野戰術)이었다. 고종 재위 19년 6월, '사자를 여러 도에 보내어 백성을 산성과 해도로 옮기게 했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처럼, 중앙 정부는 강제로 백성들에게 입보를 명령했다. 9월 황주(黃州)와 봉주(鳳州) 수령이 백성들을 거느리고 철도(鐵島)에 입보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지방 수령이나 방호별감이 입보를 추진했음을 말해준다. 지배층은 강화천도, 백성들은 해도, 산성입보가 무신정권의 반몽정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백성들에게 큰 괴로움을 주는 정책이었다. 해도, 산성입보를 명령한 지 20여년이 지난 고종 재위 43년 8월 '여러 도에 사자를 보내어 사람을 모아 모두 섬으로 들어가게 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집과 전곡을 불태우게 했다. (중략) 이 때문에 굶어죽는 자가 10에 8, 9였다.'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은 백성들이 이때까지도 해도, 산성입보를 거부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지배층은 강화로 천도해도 백성들의 세금이 있기에 생활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지만, 백성들은 해도, 산성입보하고 나면 먹고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고가 고려의 해도, 산성입보책에 의해 많은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유목민족의 전술대로 그간 몽고는 침략지를 약탈함으로써 군수품의 많은 부분을 충당해 왔었다. 그러나 고려의 청야전술은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몽고군의 계속되는 침입

몽고군은 고종(高宗) 재위 19년(서기 1232년) 8월, 다시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것이 몽고의 두번째 고려 침공이다. 몽고의 두번째 침입은 그해 12월 원수 살례탑(撒禮搭)이 처인성(處仁城)에서 김윤후(金允侯)라는 승려가 쏜 유엽전(柳葉箭)에 맞아 죽음으로써 전세가 급격히 전환되었다. 살례탑의 예기치 못한 전사(戰死)에 놀란 몽고군이 부장 철가(鐵哥)의 지휘로 철수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현종(顯宗) 때 요여전쟁(遼麗戰爭)의 승리를 기원하며 제작된 대구 부인사(符仁寺) 대장경판(大藏經板)이 불태워진 것을 보더라도, 살례탑이 이끈 몽고군 본대와 다른 선발대는 한반도 내륙 깊숙한 곳까지 내려와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일반 백성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고려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몽고 제국은 세력 확장을 거듭하여 1233년 5월에는 금(金)의 수도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듬해 2월 금황(金皇) 애종(哀宗)은 자살로써 제국의 운명에 종말을 고했다. 한때는 몽고족 내부 싸움에서 도망친 테무진(Temuchin)을 받아주기도 했던 금나라가, 바로 그 몽고에 의해 멸망되고 만 것이다. 금나라는 또한 세계적 제국으로서 송나라와 군신(君臣)관계를 맺고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받아들여, 이에 분개한 주희(朱喜)가 한족(漢族)들의 중세적 세계관인 성리학(性理學)을 성립시키게도 했었다. 몽고는 1233년 9월 동진(東眞)의 수도 남경성을 함락시키고 포선만노(蒲鮮萬奴)를 생포함으로써 동진마저 멸망시켰다. 금과 동진의 멸망은 북방의 위협 요소가 모두 제거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몽고는 기수를 남과 동으로 돌려 남송(南宋) 및 유럽을 공격하는 한편, 고종 재위 22년(서기 1235년)에는 세번째로 고려를 침략했다. 배후의 모든 위협 요소를 제거한 상태에서 전개된 세번째 침입은 그 후로 고종 26년까지 장장 5년 동안 계속되었다. 안북부(安北府)를 비롯한 북계의 여러 성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된 이 때의 침략은 서해도와 경상도 안동, 경주에까지 미쳤다. 몽고군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가는 곳마다 초토화시켰다.

최우 정권은 이에 맞서 결사항전하는 대신 부처의 힘으로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해 고종 재위 23년부터 38년까지 16년에 걸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판각사업(板刻事業)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런 불력(佛力)에 대한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몽고군은 고종 25년 남쪽 깊숙이 옛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까지 남하해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건립된 황룡사(皇龍寺) 9층탑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고종 25년 8월 개경에 진입한 몽고군은 9월에는 강화의 맞은편에 출현해 강도(江都)를 위협한 데 이어 그 본대는 11월 경주에 난입해 황룡사를 불태웠던 것이다.

이에 놀란 최우 정권은 그 해 12월 사신을 몽고에 파견해 철군을 요청했고, 이후 고종 32년까지 두나라는 사신을 교환하면서 종전(終戰)을 위한 신경전을 벌였다. 강화(講和)에 대한 몽고의 요구 조건은 고려 황제의 친조였다. 고려는 이를 거부하는 대신 현종의 8대손인 신안공(新安公)을 파견하거나, 신안공의 종형인 영녕공(永寧公)을 왕자라 하여 보냈다.

몽고는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고종 재위 34년(서기 1247년) 7월 원수 아모간(阿母侃)이 이끄는 수십만 대군을 파견해 네번째로 고려를 침략했다. 청천강 상류의 희주(熙州), 평노성(平盧城) 등지를 공략하고 남진한 몽고군은 삽시간에 개경 및 강화 연안 염주(鹽州)까지 내려와 강화도의 고려 조정을 압박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듬해 초 구유크[貴由]가 사망하고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자 철수했다. 이것으로 전쟁은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1249년 강화천도(江華遷都)의 장본인이었던 최우(崔瑀)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최항(崔抗) 역시 출륙(出陸)을 거부하고 대몽항전(對蒙抗戰)을 다짐함으로써 전쟁은 계속되었다. 오랜 전쟁에 지친 몽고에서도 1251년 즉위한 몽케[蒙哥]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고종의 친조와 개경환도(開京還都)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런 요구 조건들은 다시 거부되었고, 몽고는 고종 재위 40년(서기 1253년) 7월 원수 야굴(也窟)에게 군사를 주어 다시 고려를 치도록 했다. 다섯번째 침입이었다. 몽고군은 서해안과 동해안의 두 경로를 따라 남하하면서 중로의 여러 성들을 거침없이 도륙했다. 그러나 충주성에서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10일 충주성에 당도해 산성을 포위한 몽고군은 처인성에서 살례탑(撒禮搭)을 사살했던 방호별감(防護別監) 김윤후(金允侯)의 지휘 아래 결사항전하는 충주성민(忠州城民)들에 저지되어 70여일 동안이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충주성에서 거센 저항을 받은 몽고군 내부에서 내분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야굴이 본국의 소환령을 받아 기병 1천명을 데리고 철군한 데 이어, 12월 중신에는 몽고의 주력군이 충주성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이로써 몽고의 다섯번째 침략은 다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몽고는 1254년 7월 차라대(車羅大)의 군대를 보내 고려를 여섯번째로 고려를 침략했다. 차라대가 이끄는 몽고군은 9월 중순 앞선 몽고군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충주산성을 공격했으나 다시 충주성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그러자 차라대는 충주성을 포기하고 산성을 우회해 경상도 지역으로 들어갔다. 10월 상주산성에서 승려 홍지(洪之)가 이끄는 고려 군사들과 교전하여 다시 패배를 당했으나 몽고군은 대구를 거쳐 남진을 계속, 12월 초에는 단계(丹溪)를 거쳐 진주 부근까지 내려갔다. 고종 재위 43년에는 전라도 남부 지역을 공략했는데, 이 과정의 압해도 공략 기사는 주목할 만하다.

'차라대가 일찍이 수군 70척에 깃발을 줄지어 세우고 압해도(押海島)를 치려고 윤춘(尹椿)과 한 관인(官人)을 시켜 배를 타고 독전(督戰)하게 했다. 압해 사람들이 대포 2개를 큰 배에 장치하고 기다리니, 양편 군사가 서로 버티기만 하고 싸우지 않았다. 차라대가 언덕에 임하여 바라보고 윤춘 등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 하고, 다시 배를 옮기어 치게 했으나 압해인들이 곳곳에 대포를 배치했기 때문에 몽고인들이 드디어 수공(水攻)의 장비를 모두 파하고 말았다.

고려사(高麗史) 한흥보열전(韓興輔列傳)'

압해도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이는 몽고군이 수군 전함 70여척을 동원해 해전을 전개할 능력을 갖추게 되었음을 뜻한다. 강도(江都)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시 철수했던 차라대는 고종 재위 45년(서기 1258년) 6월 다시 침략해 개경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승천부, 교하(交河), 동성(童城) 등지로 보내 약탈함으로써 강화도의 고려 조정을 위협하는 한편 태자의 출륙을 철군 조건으로 제시했다.

계속되는 전쟁에 지친 고려 조정에서도 몽고군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고종 재위 44년 7월 최자(崔滋) 등이 황자를 파견해 몽고와 강화를 맺자고 주장했다. 현실화되지는 못했으나 이는 그만큼 고려 내부의 사정이 변화했다는 조짐이었다.

강화(講和) 주장이 공론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신정권 내부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 44년 윤4월 최항이 사망하고 최의(崔竩)가 뒤를 이었으나 그가 이듬해 3월 김준(金俊), 유경(柳儆) 등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최충헌 집권부터 60년간 계속되던 최씨 정권이 붕괴되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최씨 정권의 붕괴는 고려 내부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에 집단적, 지역적으로 몽고에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고종 45년(서기 1258년) 12월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고려를 버리고 몽고에 붙었는데 이로써 동계(東界)의 화북 15주가 몽고에 소속되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사 수립되었다. 이는 자칫하면 강화도의 고려 조정이 내륙의 고려인들에 의해 고립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급해진 고려 조정은 고종 45년 12월 장군 박희실(朴希實) 등을 몽고에 파견했다. 이에 따라 몽고군의 약탈 행위가 자제되자 이듬해 3월 주현의 수령들에게 해도입보한 피난민들을 데리고 출륙해서 농사지을 것을 명령했다. 몽고와 고려간의 긴 전쟁이 끝날 조짐이었다. 고종 46년까지 계속된 몽고의 여섯번째 침략은 고려사(高麗史)에서 고종 41년 한해 동안에만 몽고군의 포로가 된 자가 20만 6천 800여명이고, 살육된 자는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기록한 대로, 고려에 큰 화를 끼쳤다.

몽고와 화의를 결심한 고려에서는 1259년 4월 태자 전(傳)이 몽고로 출발했다.

고려팔만대장경(高麗八萬大藏經)

대장경이란 불교 교리를 종합 편찬한 것으로서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으로 구성된다. 삼장이란 고대 인도 언어인 산스크리트어[梵語] 'Tripitaka'의 한역(漢譯)으로, '세개의 광주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송(宋) 태조(太祖) 재위 4년(서기 972년)에 어명으로 판각을 시작해 태종(太宗) 8년(서기 983년)에 북송칙판대장경(北宋勅板大藏經)을 완성했는데, 총 13만매에 달하는 이 대장경은 송(宋) 휘종(徽宗) 때 금나라의 침입으로 모두 사라져 현전하지 않는다. 고려(高麗) 성종(成宗) 재위 10년(서기 991년)에 사신 한언공(韓彦恭), 현종(顯宗) 13년(서기 1022년)에 역시 사신이었던 한조(韓祚)가 이 칙판대장경의 인쇄본을 가져오면서 이에 고무된 고려 조정에서도 판각사업(板刻事業)을 시작한다. 현종은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하고 대장경 간행관서인 반야경보(般若經寶)를 설치해 칙판대장경을 바탕으로 각판을 시작한다. 그 후 현종 20년(서기 1029년) 거의 완성을 보았는데, 보완을 계속해 선종(宣宗) 4년(서기 1087년)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것이 초조고려대장경(初潮高麗大藏經)이다.

문종(文宗) 때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국내는 물론 일본, 송, 요나라에 있는 대장경을 광범위하게 수집한 후 흥왕사(興王寺)에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고 각판했다. 이를 속장경(續藏經)이라고 한다. 이 장경들은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고종(高宗) 19년(서기 1232년) 몽고의 두번째 침략 때 불타고, 초조대장경 1715권이 일본 교토[京都]의 남선사(南禪寺)에 남아 있고, 속장경은 순천 송광사(松廣寺)와 고려대학교 도서관 및 일본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 나고야[名古屋]의 진복사(眞福寺) 등에 47권이 흩어져 남아 있다.

몽고에 맞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고려 무신정권은 불력의 가호와 무신정권 수립 이후 벌어진 불교계의 지지 확보를 위해,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고종 23년(서기 1236년)부터 고종 38년(서기 1251년)까지 각판해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을 완성했다. 이는 당초 강화도 서문(西門) 밖의 대장경판당에 소장되어 있다가 강화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겨졌고, 그 후 조선 초기에 서울의 서대문 밖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다시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로 옮겨져 현전하고 있다. 663함 1562부 6778권(혹은 6783권)으로서 경판의 수가 81258판이어서, 세칭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 부른다.

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저본으로 했으나, 송(宋), 요(遼)의 대장경을 비롯해 다른 여러 자료를 참고해 보관함으로써 가장 정확한 대장경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그 재질은 최근까지 자작나무로 알려져 있었으나, 전자현미경을 이용해 조사한 결과 자작나무는 거의 없고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었다. 원목을 벌채하여 바닷물에 담구어 두고 필요할 때 제재한 후 찌거나 그대로 옮겨 건조하여 표면을 대패질하고 글자를 새겨 넣은 것으로 추측된다. 초조대장경부터 액 240여년이라는 장구한 시일에 걸쳐 실시한 대장경 조판은 국가적 대사업으로서 고려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였으며, 인쇄술과 출판술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했다.

● 강도(江都) 조정의 출륙환도(出陸還都)와 삼별초(三別抄)의 항몽투쟁(抗蒙鬪爭)

태자가 몽고로 떠난 직후인 고종(高宗) 재위 46년 6월에 고종이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다음 달에 몽고 제국의 카간[可汗] 몽케[蒙哥]도 세상을 떠났다. 몽케는 남송 정벌 중에 사천성의 합주성(合州城) 진중에서 사망했다. 당초 몽케를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갔던 고려의 황태자는 개봉 근처에서 황위계승 예정자였던 쿠빌라이[忽必烈]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쿠빌라이는 동생 아리부카[阿里不可]와 황위 경쟁 중이었다. 이 만남으로 쿠빌라이는 고려 태자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이후 고려 태자는 곧 제위를 계승했으며 쿠빌라이도 즉위하는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고려 제24대 황제로 등극한 원종(元宗)은 이후 대몽항전책(對蒙抗戰策)을 포기하고 원나라와 화친을 추구하게 되었다. 1260년 4월 원종은 영안공(永安公)을 몽고에 파견해 세조(世祖)의 즉위를 축하하고 그 연호 중통(中統)을 사용함으로써 몽고에 복속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듬해 4월에는 태자 심(諶)을 몽고에 파견한 데 이어 1264년에는 자신이 직접 몽고에 가는 친조(親朝) 의사를 밝혔다. 황제 친조에는 무신 집정자 김준(金俊)을 비롯해 대다수가 반대했으나 같은 해 8월 원종은 직접 몽고에 행차함으로써 친조를 단행했다.

원종이 친조를 단행한 것은 몽고의 군사력에 기대어 무신정권을 무력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태자로 입조하다가 부황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할 당시 원종은 몽고가 "다시 감히 난동을 계속하여 위를 범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곧 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조서를 내려주었던 사실에 고무되었었다. 이는 원나라 황제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왕권을 강화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종은 무신 집정자 김준의 반대를 무릅쓰고 친조를 단행했던 것이다. 원종의 친조는 국가 전체로 보면 몽고에 대한 고려의 예속성 강화였지만, 고려 내부로 보면 무신들에게 눌렸던 국왕의 권위가 몽고 세력의 비호로 강화된다는 이중성이 있었다.

원종의 친몽(親蒙) 성향을 확인한 원황(元皇)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는 김준 부자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이를 곧 정권 상실로 여긴 김준은 원나라의 사신을 죽이고 더 깊은 해중(海中)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원종이 이를 거부하자 김준은 원종 폐위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인 원종 재위 9년(서기 1268년) 12월, 김준은 평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던 임연(林衍)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 정변에는 평소 몽고어에 능해 원종의 신임을 받았던 낭장 강윤소(康允紹)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는 원종이 임연과 모의해 김준을 제거했음으 뜻한다. 환자(宦者) 김자정(金子廷) 등이 어명이라며 김준을 궁궐 안으로 끌여들였고 환자들이 직접 김준 형제를 살해했음은 원종이 정변의 주역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곧 원종과 임연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임연은 원종 재위 10년(서기 1269년) 6월 김경(金鏡) 등을 죽이고 대장군 기온(奇蘊)을 유배보내면서 이들이 원종과 결탁해 자신을 살해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임연은 곧장 원종의 폐위를 제추에 요구했고, 3일 뒤에는 삼별초(三別抄)와 도방(都房)을 동원해 상왕(上王)으로 추대하는 형식을 빌려 원종을 내쫓고 원종의 아우 안경공(安慶公)을 옹립했다.

임연은 안경공에 의해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임명되어 무신정권 집정자의 위치를 굳혔다. 그러나 원종 폐위는 몽고의 개입을 토래했다. 마침 몽고에서 귀환하던 길에 이 소식을 접한 태자가 다시 몽고로 돌아가 군사 개입을 호소했던 것이다. 몽고는 원종의 복위와 원종과 임연의 입조를 요구하는 조서를 보내는 한편, 군사 개입을 준비했다. 임연은 결국 폐위 5개월 만에 원종을 복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고의 적극적 지원에 힘을 얻은 원종은 임연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재위 10년 12월 몽고의 입조 요구에 응한다는 명분을 들어 몽고로 떠났다. 몽고에 기대는 것만이 자신의 왕위와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라 판단한 원종은 세조에게 고려 세자와 몽고 제국 황녀의 국혼과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고려 국왕의 군사 지원 요청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던 세조는 원종에게 군사를 주어 귀국하게 했다.

이 와중에 임연은 근심과 번민 끝에 등창으로 돌연 사망하고 그 아들 임유무(林維茂)가 권력을 계승했다. 재위 11년 5월 몽고군과 함께 귀국하던 원종은 몽고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무신정권에 개경으로 출륙환도(出陸還都)할 것을 명령했으나, 환도가 곧 권력 상실이라고 판단한 임유무는 이를 거부하고 항전을 결의했다. 그러자 원종과 연결된 어사중승 홍규(洪奎), 직문하 송송례(宋松禮) 등이 삼별초를 회유해 임유무 등을 살해했다.

삼별초(三別抄)는 이처럼 임유무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가담했지만 막상 출륙(出陸)과 개경환도(開京還都)가 결정되자 크게 동요했다. 개경에 도착한 원종은 삼별초의 이런 동요를 무릅쓰고 재위 11년 5월 장군 김지저(金之低)를 강화에 보내 삼별초를 혁파해 버리고 명부를 거두어 갔다. 삼별초는 이 조치에 크게 반발했다.

장군 배중손(裵仲孫), 야별초 지유 노영희(盧永禧) 등이 출륙을 거부하며 항전 의사를 밝히자 삼별초 군인들이 대거 가담함으로써 삼별초의 항몽투쟁(抗蒙鬪爭)이 시작되었다. 과거의 항전이 조정과 손잡고 대몽항전(對蒙抗戰)에 나선 것이라면 이번 항전은 몽고는 물론 몽고와 결탁한 조정에 대항하는 것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삼별초는 야별초(夜別抄)에서 시작되었다. 야별초는 이제현(李薺賢)이 역옹패설(櫟翁稗說)에서 "처음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염려하여 용사를 모아 매일 밤 순행하여 폭행을 막게 했다. 그 까닭으로 야별초라 불렀다."라고 기록한 대로, 도적을 방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그러다 도적이 여러 도에서 일어나자 야별초를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로 나누고, 또 몽고에 갔다가 도망해 온 고려인으로 신의군(神義軍)을 편성해 좌, 우별초와 함께 삼별초가 된 것이다.

별초는 원래 별동대, 유격대 등의 뜻으로서 비상시국 때 임시적으로 선발한 군사를 말한다. 숙종(肅宗) 때의 별무반(別武班)이 이런 예이고, 명종(明宗) 재위 4년 조위총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전봉별초(戰鋒別抄)를 특별히 모집한 것도 이런 예다. 조위총의 반란을 진압할 당시 최충헌은 별초도령으로서 전투에 참가해 출세의 실마리를 잡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햔이 "권신(權臣)이 정권을 잡자 삼별초는 그 앞잡이가 되었다. 권신은 녹봉을 후히 주고 또 사사로운 혜택을 베풀었다."고 말한 대로, 삼별초는 최씨 정권을 비롯한 무인집권자들의 권력을 유지, 강화시켜주는 핵심 세력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고종(高宗) 16년 11월 '최우가 가병, 도방, 마별초를 사열했는데, 안마와 의복, 궁시(弓矢), 병갑(兵甲)이 매우 사치스럽고 아름다웠다."는 기록은 삼별초와 최씨 정권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삼별초는 최씨 정권에 충성하는 군대로서 최씨 정권의 심복들이 그 주요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삼별초가 단순한 사병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즉 도성 수비, 반란 진압, 도둑 체포, 형옥(刑獄)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국가의 재정에 의해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전의 사병과는 다른 조직이었다.

삼별초의 봉기는 단순히 어명(御命)에 불복한 반란군의 봉기가 아니라 대몽항전(對蒙抗戰) 중추 부대의 항전을 뜻했다. "군왕이 장군 김지저를 강화에 보내 삼별초를 해산시키고 그 명부를 거두어 오게 하니, 삼별초는 명부가 몽고에 전해질까 두려워 반심(反心)을 품게 되었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은 원종에 대한 삼별초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삼별초를 비롯한 고려 군사들은 원종을 몽고의 앞잡이로 본 것이고, 원종의 행위는 객관적으로도 그러했다.

원종의 명령에 의한 출륙환도 때 '배중손과 노영희 등이, 몽고병이 대거 쳐들어 와서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있으니 무릇 국가를 지키는 자는 모두 격구장에 모이라고 외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기록이나 '한편으로는 분주하게 사방으로 흩어져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고 서로 다투다가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는 기록은, 국민적 합의 없이 원종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강요된 출륙환도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배중손 등이 이끄는 삼별초는 강화도가 수성(守城)에 어렵다고 판단해 남쪽으로의 이주를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배를 모아 공사의 재물과 자녀를 모두 싣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 때 구포(仇浦)로부터 항파강(缸破江)까지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접해 무려 1천여척이나 되었다.'는 기록처럼 삼별초는 내외의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삼별초는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임금으로 옹립하고 대장군 유존혁(劉存奕)과 상서좌승 이신손(李信孫)을 각각 좌, 우승선으로 임명해 행정체제를 갖추었다.

강도(江都) 이주 약 70일 후인 1270년 8월 삼별초는 진도(珍島) 용장성(龍藏城)을 거점으로 삼아 항몽투쟁(抗蒙鬪爭)에 나서는 한편, 일본에 사신을 보내 연합전선 구축을 제의했다.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승화후는 황제를 자칭했다. 이는 고려가 원(元)과 동격인 황제국(皇帝國)이라는 의미이자 개경의 원종(元宗) 행정부를 원나라의 꼭두각시로 격하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진도의 삼별초 정부가 체계를 갖추어 가자 호응이 잇따랐다. 밀성군의 방보(方甫), 박경순(朴慶純) 등이 군인(郡人)을 불러모아 부사(副使) 이이를 살해하고 진도 조정에 호응했으며, 일선현령(一善縣令) 조천(趙阡)도 여기에 따랐다. 진도의 삼별초 정부는 진도를 중심으로 인근의 완도 및 남해도 등 여러 섬을 전략적 거점으로 연결해 남해안 일대를 아우르는 일종의 해상왕국을 건설했다.

삼별초가 조운로의 길목인 진도를 장악함에 따라 전라, 경상도의 조세 운송은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었다. 진도의 삼별초 정부는 개경으로 향하는 조세를 차지했는데 이는 진도 조정에는 커다란 도움이 된 반면 개경 조정에는 심대한 타격이 되었다. 여기에 삼별초 정부는 주현에 격문을 보내 백성들에게 진도로 들어올 것을 호소하면서 개경 조정의 정통성을 흔들었다.

개경 조정은 김방경(金方慶)을 추포사로 삼아 송만호(宋萬戶)가 거느린 원나라 군사 1천명과 함께 진도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은 삼별초에 위축되어 교전을 피할 정도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전라도 토적사인 참지정사(參知政事) 신사전(申思佺)은 삼별초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나주에서 개경으로 달아나 버리기도 했다.

개경 조정은 다시 김방경을 전라도 추토사로 임명해 원나라의 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삼별초를 치도록 했다. 그러나 진도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는 삼별초의 대승으로 끝났다. 아해는 패전(敗戰)의 책임을 지고 파직당하고 그 자리가 흔도(炘都)로 교체된 것은 이 패전에 대한 원나라의 당혹감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원나라는 삼별초 진압에 실패하자 사신 두원외(杜員外)를 보내 원황(元皇) 세조(世祖)의 조서(詔書)와 원종(元宗)의 유지(諭旨)를 전하며 진도 조정을 회유했다. 삼별초 측은 이 회유를 거절했다. 이에 원나라와 개경 조정은 대군을 동원해 토벌하기로 결정, 1271년 4월 병력 6천과 진도 부근의 군선 260척 외에 140척을 추가 증원해 대규모 진압군을 결성했다. 그 해 5월 원나라와 개경 조정의 삼군(三軍)은 삼별초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삼별초는 김방경과 흔도가 지휘하는 중군 쪽으로 군사력을 집중해 중심을 흐뜨려 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사이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의 우군과 좌군에게 용장성의 배후와 측면을 기습공격당해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이 전투에서 배중손이 전사하고 승화후는 원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참살되었으며, 삼별초의 대다수 병사와 백성들이 죽거나 포로가 된 가운데 일부만이 김통정(金通精)의 지휘로 제주도로 건너가 항전을 이었다.

이로써 삼별초의 세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에 입거한 삼별초는 1272년 3월에서 5월까지 조운선(漕運船) 20척, 곡미(穀米) 3천여석을 빼앗아 항전의지를 불태웠다. '적이 이미 제주에 들어가서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쌓고는 그 성이 험준하고 견고한 것을 믿고 날로 더욱 창궐하여 수시로 나와 노략질을 하니 해안지방이 숙연해졌다.'는 고려사의 기록처럼 삼별초는 계속해서 기세를 올렸고, 같은 해 8월에도 전라도의 공미(貢米) 8백석을 빼앗았다.

한편, 일본 정벌에 앞서 제주의 삼별초 정부를 붕괴시키는 것이 당면과제였던 원나라 조정에서는 원종에게 삼별초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욕했다. 원종은 김통정의 조카 김찬(金贊)과 오인절(吳仁節) 등 6명을 보내어 귀순을 종용했으나 김통정은 김찬을 머무르게 하고 나머지는 다 죽임으로써 항전의지를 더욱 굳혔다. 이에 다시 대군으로 진압을 결정한 원나라와 개경 조정은 1273년 봄 김방경과 흔도가 이끄는 1만여명의 연합군을 제주도로 보냈다. 이 전투에서 대패한 김통정은 70여명의 휘하 부장과 함께 산 속으로 도망갔다가 추격병이 쫓아오자 자결하고 말았다. 이로써 삼별초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제주도가 함락되었으며, 40년에 걸쳐 전개되어 왔던 고려인들의 대몽항전도 막을 내렸다. 삼별초의 붕괴는 고려의 항몽세력을 거의 소멸시킨 셈이 되어 고려에는 이제 원나라에 대한 예속화를 막을 세력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고려는 황제국(皇帝國)에서 후왕국(侯王國)으로 그 위치가 격하되었고, 모든 저항 수단을 잃은 채 정치적으로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고 경제적으로는 많은 물품과 인력까지 수탈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세계대제국 원나라에 40년 이상 항전했던 결과치고는 허망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중국과 유럽 등 다른 나라와 달리 국체(國體)가 보존된 것 자체가 지난한 투쟁의 결과이긴 했지만 말이다.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의 일본 원정(遠征)

원나라는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초유(招諭)를 거부하자 일본 정벌을 결심하고 고려에 군사를 요구했다. 삼별초(三別抄)의 항몽투쟁(抗蒙鬪爭)을 진압한 이듬해(서기 1274년) 10월,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은 합포(合浦)에서 출정식을 갖고 일본 열도로 진군했다. 여기에는 원나라 장수 홀돈(忽敦)이 지휘하는 몽한군(蒙漢軍) 25000명과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고려군 8000여명 등에 전함 900여척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대마도(對馬島)와 이키[壹岐] 섬을 점령하고 본토에 상륙해 일본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으로 13500여명이 귀환하지 못하는 희생을 치렀다.

원황(元皇) 세조(世祖)는 몽한군 3만명과 송인(宋人) 범문호(范文虎)가 인솔하는 강남군(江南軍) 10만을 더 출전시켰다. 고려는 정군(正軍) 10000명과 초병, 수수 15000명, 그리고 식량과 전함 9백척을 동원해 일본 원정에 참여했다. 1281년 5월 고려군과 몽한군으로 구성된 동로군(東路軍)과 강남군은 이키 섬에서 합세할 것을 약속하고 각각 출진했다. 그러나 강남군의 도착이 지연되는데다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차질을 빚었고 태풍 또한 불어 원정군은 10만의 병사가 희생되었다.

원은 이후에도 여러번 원정 준비를 했으나 1294년에 세조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완전 중단되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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