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해방(民族解放)과 통일정부수립운동(統一政府樹立運動)
1945년 8월 15일에 우리 민족은 36년간의 식민통치라는 일제(日帝)의 사슬에서 벗어나 해방의 감격을 맞이하였다. 끊어진 역사의 맥이 다시 이어지고, 수천년간 축적된 문화민족의 잠재력이 다시금 화산처럼 분출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이미 자주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는 국권피탈(國權被奪) 그 순간부터 시작되어 망명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독립운동과 병행하여 해방 후의 건국강령(建國綱領)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비록 독립운동 단체들이 지역적으로 분산되고 이념상으로 좌, 우의 갈등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좌, 우가 연합하는 추세가 나타나서 통일민족국가 수립이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전망이 보였다.
그런데 해방 후의 국제정세는 우리 민족의 자유스러운 주권국가 건설을 어렵게 만들어 갔다. 일본 군국주의 세력을 패망시키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남, 북을 분할 점령하고, 미국식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식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유교의 오랜 전통 속에서 서양 근대문명을 받아들인 대다수 국민들이 그리고 있는 현대적 국가는 미국식이나 소련식과는 다른 모습의 국가였다. 그것은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국가도 아니고, 무산자들이 주도하는 국가도 아닌 만민협동(萬民協同)의 국가이며,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되 국가의 공권력을 매개로 한 공공성(公共性)이 높은 문화국가였다.
한국인의 평균적인 정서에 가장 가까운 정치단체로 해외에는 중경(重慶)에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광복군(光復軍)을 조직해 항일군사작전(抗日軍事作戰)에 참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국내에는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이 있었다. 특히 1944년 8월에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패망을 예견하고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되어 중도우파 인사와 온건좌파 인사들이 결집된 조선건국동맹은 8·15광복(八一五光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건국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국내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조선치안대(朝鮮治安隊)를 설치되었고, 전국적으로 145개의 지부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좌파의 적극적 개입으로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탈퇴하자 건준위(建準委)는 미국군이 진주하기 이전에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서둘러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을 선포하였다.
우파의 탈퇴로 대표성이 약해진 조선인민공화국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미국에 망명해 있던 이승만(李承晩)을 주석으로,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내각총리에 온건좌파인 허헌(許憲)을 각각 추대하였다. 해방 당시 70세의 이승만은 조선 왕족의 후예로써 일찍이 독립협회에 가담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얻었으며,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우파의 원로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귀국하지 않았으므로 실제 영향력이 없었고 69세의 독립운동가로서 국민의 신망이 높던 임시정부의 수장 김구(金九)가 참여하지 않은 것도 조선인민공화국의 약점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실권은 이미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재건한 박헌영(朴憲永)이 장악하여 실제로는 좌익정부나 다름없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이 단명으로 끝난 이유는 우파지도자의 참여가 미약한데 있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던 날, 남한에 진주한 미국군은 하지(Jphn R. Hodge)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군정부(軍政府)를 설치하였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점령할 것을 제의하여 소련의 동의를 얻었다. 따라서 해방이 되던 바로 그날부터 국토분단의 비극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친미적인 우익정부수립을 후원하기 위해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인사들과 긴밀하게 접촉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주당은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려 한 반면, 미군정은 중국과 친밀하고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닌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주석인 김구의 귀국도 개인자격으로만 허용하였다.
미국은 비밀리에 일본과 체결한 가쓰라-데프트 밀약을 통해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나라이며, 태평양전쟁의 승리로 역시 한국의 해방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나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국이 조선 독립운동 세력의 분립과 소련의 영향을 이유로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한반도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겪고 지금까지 분단 상태를 유지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정부수립운동이 난항을 겪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수많은 정당이 결성되어 다양한 정치이념을 내걸고 활동하였다. 한국민주당이 우파라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극좌정당이 조선공산당이었으며, 그 중간에 김구가 귀국하여 결성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안재홍(安在鴻), 윤보선(尹潽善), 장덕수(張德秀) 등이 주도한 중도우파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여운형이 중심이 된 중도좌파의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 등이 있었다. 특히 한국국민당은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정치이념을 내세워 좌우이념을 통합하고자 하였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좌우합작을 지향하는 중도파 정당이 많고 지식인의 호응이 높아서 한국인의 표준적인 정서를 대표하고 있었다.
● 좌우합작운동(左右合作運動)과 과도정부 수립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건국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1945년 말기에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상들이 모여 삼상회의(三相會議)를 열고 '한국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를 결정했다. 이 방안은 먼저 미국, 소련 공동위원회와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상호 협의하에 최소 5년을 기한으로 하는 신탁통치(信託統治)실시를 논의할 것을 주요골자로 하였다. 이 결의서에 들어 있는 신탁통치안은 이미 연합국이 1943년에 카이로, 1945년에 얄타, 포츠담에서 회담을 열어 전후처리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 '한반도 민중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절차를 밟아서' 독립시키겠다고 결의한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연합국의 신탁통치안은 즉각적인 독립을 희구하던 한국인들에게는 감정상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합리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접한 이승만, 김구 등의 우익세력은 대대적인 반탁운동(反託運動)에 나서 궐기하였다. 그러나 같은 반탁운동이라도 이승만은 남한에서만이라도 빠른 시일 내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함이었고, 김구는 즉각적인 남북한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 한편 좌익세력은 북한 김일성 정권의 지령에 따라 신탁통치에 찬성하고 나섰다. 1946년과 47년은 이 문제로 좌우가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우익의 반대의사와는 관계없이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안을 실천하기 위해 두차례에 걸쳐 미국, 소련 공동위원회를 열었으나, 협의의 대상이 될 정당, 사회단체 선정을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자 회담이 결렬되고 말았다. 소련은 반탁을 주장하는 우익의 참여를 반대하고, 미국은 우익의 참여를 찬성하였기 때문이었다.
신탁통치문제를 계기로 통일정부수립이 늦어지자 일부 우익세력은 남한만이라고 단독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북한에서 김일성(金日成)의 지배권이 빠른 속도로 확립되고 있는 것도 서울의 우익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井邑)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여 큰 파문을 던졌다.
북한은 김일성이 장악하고 남한에서도 단독정부수립운동이 일어나자, 남북분단을 우려한 뜻 있는 인사들은 남북한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우합작운동(左右合作運動)을 벌였다. 미군정은 남한만이라고 좌우합작의 입법기구를 세우기 위해 이를 후원하였다. 그리하여 김규식(金奎植)을 대표로 하는 5명의 우익과 여운형을 대표로 하는 5명의 좌익 인사들은 1946년 7월 하순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를 구성하고, 이해 10월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이 원칙은 그 동안 우파와 좌파간에 이견이 심했던 토지문제와 친일파 처리문제 등이 중도적인 입장에서 조정된 것이 주목된다.
중도정부를 지향하는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자 가장 반대한 측은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이었으나, 당시의 여론은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1946년 12월 12일 좌우합작위원회와 한국민주당계를 주축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을 구성하자 여운형의 중도좌파가 입법기구 조직에 반대하여 합작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미군정은 이어 1947년 2월 5일 민정장관에 안재홍을 임명하고, 5월 17일 남조선과도정부를 설치하였다. 중단되었던 미국, 소련 공동위원회도 1947년 5월에 다시 재개되었다.
● 남북협상(南北協商)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左右合作運動)을 통해 중도적인 통일정부를 세우려는 노력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의 핵심인물인 여운형(呂運亨)이 암살되고, 미국의 정책이 1947년 3월 이후 소련과의 냉전(冷戰)으로 인하여 강경책(强勁策)으로 선회하면서 종전의 좌우합작운동 지원방침을 철회하고 한국문제를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연합(國際聯合; United Nations)으로 끌고 갔다. 이에 따라 미국, 소련 공동위원회는 완전히 결렬되고, 좌우합작위원회도 1947년 12월에 해체되었다. 국제연합은 이보다 앞서 11월 14일 UN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통일안을 가결하였다. 그러나 인구가 남한보다 적은 북한이 총선거에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소련이 이를 반대하자, 1948년 3월 UN소총회는 남한만의 선거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분단은 이제 기정사실화된 것이다.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국내 좌우파의 반대와 미국의 태도 변화로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 되어가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지도자 김구(金九)와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을 결성한 김규식(金奎植) 등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한국문제의 국제연합 이관을 반대하고,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과 김두봉(金枓奉)에게 남북지도자회의를 제안하였다. 북한은 1948년초에 이미 인민군을 창설하고, 헌법초안을 발표하는 등 독자적인 정권수립을 위한 준비를 마쳤지만, 남북회담의 규모를 확대하여 열 것을 수정 제의한 것이다. 즉 남북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대표자들이 평양에 모여 대중적 집회를 열기를 희망하였다. 북한은 남북지도자회의를 공산주의 정권 수립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1948년 4월 하순, 드디어 10일간에 걸친 남북지도자회의가 평양에서 열렸다. 남북의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미국과 소련 양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5월 10일 선거에 불참하고, 7월 21일 통일독립촉성회(統一獨立促成會)를 조직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38선(三八線)를 베고 죽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였던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자택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부대 장교 안두희(安斗熙) 소위(少尉)의 총격으로 살해되었다.
결국 1948년 서울에서는 5월 10일에 총선거가 실시되고, 평양에서는 6월 하순부터 제2차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를 열어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였다. 좌우합작운동에 의한 통일정부 구성은 강대국의 냉전구도와 권력장악에 급급한 정치인들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그것은 먼 훗날의 과제로 넘겨지게 되었다.
●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
1948년은 1천년간 통일된 국가를 이어온 우리 민족이 다시금 남북극시대로 되돌아간 비극의 해였다. 이 해 8월 15일 38선(三八線) 이남에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가 수립되고, 9월 9일 38선 이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公和國)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1948년 5월 10일에 남한에서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좌익은 격렬한 선거반대투쟁을 벌이고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등이 이끄는 중도우파에서는 선거불참을 선언하였다. 북한은 선거에 대한 보복으로 전기공급을 중단하여 공장의 조업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 선거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서구식 보통선거로서 21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졌다.
5·10선거로 선출된 총198명의 제헌국회 의원들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시절부터 써오던 대한민국(大韓民國)을 국호로 결정하고,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 헌법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3·1운동의 민족정신을 계승하는 민주국가로서 정부조직은 대통령중심제를 골간으로 하되,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하는 내각제 요소를 담고 있었다. 국회는 단원제로 하였으며, 국회에서 대통령에 이승만(李承萬), 부통령에 이시영(李始榮)을 각각 선출하였고 국회의장에는 신익희(申翼熙)가 선임되었다. 이승만은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참전해 전공(戰功)을 세웠고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光復軍)의 참모장을 역임했던 이범석(李範奭)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여 내각을 구성하였다. 대법원장에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출신으로 국내에서 신간회(新幹會)의 배일민족운동(排日民族運動)에 참여했고, 한국민주당의 총무위원을 역임했던 김병로(金炳魯)가 임명되었다. 한편 5·10선거에 참여한 한국민주당은 내각조직과정에서 야당으로 밀려났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고, 옛 총독부 건물을 정부청사로 사용하여 중앙청(中央廳)이라고 불렀다. 이 해 12월 12일 UN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의 유일한 정부로 승인하고, 그 후 소련과 그 동맹국들을 제외한, 미국 및 자유진영 50여개국의 개별적인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자유진영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公和國) 건국
북한의 건국과정은 남한과는 다른 모습으로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미국군이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기 이전인 8월 9일 소련군은 이미 두만강을 건너 북한에 진주하였고, 8월 24일 평양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군정을 통한 직접통치를 피하고, 각 지방별로 좌우합작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자치를 하게 함으로써 간접통치방식을 썼다.
그러나 9월 중순 소련군의 영향하에서 조선공작단을 지휘하던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유격대(抗日遊擊隊) 세력이 들어오면서 국내좌익을 누르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평양의 주민들은 30대 초반의 젊은 김일성을 보고 놀랐지만 그는 빠른 속도로 권력을 장악해갔다. 1945년 10월 중순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성립되어 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되고, 11월 중순에는 '북조선 5도 행정국'이 설치되어 기초적인 행정부가 수립되었다. 1946년 4월 중순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하여 서울에 본부를 둔 '조선공산당'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김일성의 주도권 장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된 것은 소련군의 지원이 있은 데다, 기독교도가 많은 우파 세력이 지속적으로 남한으로 내려와 저항세력이 미약하고, 김일성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서 수적으로 우세한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과 그 산하 군대인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이 무장해제를 당한 가운데 1946년 뒤늦게 귀국하여 주도권을 발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멀리 중국 서쪽의 연안(延安) 지방에서 독립을 맞이한 데다, 중국 공산당과 가까워서 소련의 신임을 얻지 못하였다.
이밖에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이 해방 후 북한에 들어 왔으나, 토착적 기반이 미약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북한 지역의 우파 지도자는 조만식(曺晩植)이었으나 신탁통치를 반대하다가 반동으로 규탄받아 제거되었으며, 농민 중심의 천도교 청우당(靑友黨)이 있었지만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좌익이 우세한 와중에도 1945년 11월 함흥과 신의주 등지에서 학생들의 반공궐기가 있었던 것은 기억해 둘 만하다.
북한은 1946년에 들어서자 재빠르게 개혁사업에 들어갔다. 이 해 2월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인민민주주의 독재정권을 세우고, 이른바 반제반봉건(反帝反封建) 민주혁명(民主革命)을 실행에 옮겼다. 민주혁명의 중심사업은 토지개혁과 중요산업 국유화였다.
1946년 3월에 단행된 토지개혁은 4%의 지주가 전체농지의 58%를 소유하고 소작농이 전체농민의 73%를 차지하고 있던 북한의 농촌경제를 개조하기 위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토지개혁의 결과 지주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으나, 소작빈농이 하층 중농의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토지개혁에서 혜택을 입은 이들이 공산당에 대거 입당하여 처음에 4천 5백여명의 당원으로 출발한 공산당원이 토지개혁 직후에는 27만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1946년 8월에 단행된 중요산업 국유화는 일본인 혹은 민족반역자가 소유하던 기업소, 광산, 산림, 어장, 발전소, 철도, 운수 체신, 츤행, 상업, 문화관계산업 등을 국유화시킨 것으로, 이는 전체산업의 90%를 차지했다. 나머지 소규모의 개인 수공업과 상업은 자유로운 소유와 기업 활동이 허용되었다. 그 결과 국영기업이 전체 공업의 72.4%를 차지하게 되고, 개인기업은 23.2%로 줄어들었다.
토지개혁과 중요산업 국유화는 노동자, 농민에게 한동안 유리한 경제환경을 만들어 주고 농업 및 공업 생산력을 높이는데 기여하였으며, 공산당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 지나치게 급속한 사회개혁은 민족반역자뿐 아니라 양심적인 지주, 자본가, 종교인, 지식인들에게도 큰 타격을 주어 이들은 38선을 넘어 대거 남한으로 도주했다.
그리하여 1947년말에 이미 월남민이 80만명을 넘어섰으며, 그 뒤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중에 월남한 수를 합하여 월남민의 총수는 2백만을 넘어섰다. 개혁의 피해자들이 고향을 떠난 것은 인구가 증가하여 실업자가 더욱 늘어나고, 이들이 남한의 반공세력으로 굳게 뭉쳐 반공정책을 강화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북한은 '민주개혁'을 하는 이유로써 이른바 '민주기지론'을 들고 나왔다. 즉 북한에 튼튼한 민주기지를 쌀고, 이를 바탕으로 남한을 해방하여 통일로 밀고 가겠다는 전략이었다. 북한은 '민주개혁'과 병행하여 공산당을 보다 대중적인 조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연안파의 김두봉이 주축이 된 '북조선신민당'을 통합하여 '북조선노동당'을 창당하였다. 이 해 11월 남한에서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여 공산당과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이 창설되었는데, 남북 노동당의 당원수가 거의 1백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북한은 이보다 앞서 7월에 '북조선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였는데, 이 또한 '일체의 애국적 민족역량을 결집하여' 인민민주주의 독재정치로 나가기 위한 전략을 담고 있었다.
1946년에 이미 경제개혁을 통해 지지기반을 확대한 북한은 1947년 2월에 최고행정기관으로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1948년 2월 8일 인민군을 창설하였다. 이제 남은 일은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여 정부를 선포하는 일이었다. 이 해 5월 10일 남한에서 단독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북한은 8월 25일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고, 8월 8일 인민민주주의 헌법을 통과시켰으며,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를 독자적으로 제정하였으며, 수도는 서울로 하고, 평양을 임시수도로 정하였다.
북한 정권은 지역정권이 아니라 남북한을 망라하는 대표국가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1948년 6월 하순에서 7월 초순에 걸쳐 남한의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 1천여명을 월북시켜 해주에서 '제2차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를 열어 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할 것을 결의하고, 360명의 남한 대의원을 212명의 북한 대의원과 함께 최고인민회의에 참여시켰다.
소련은 1948년 10월에 북한 정권을 승인한 후 12월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1949년 6월에는 북노당과 남노당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이 되어 남한 좌익의 대부분이 북으로 올라가게 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통일기구로서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였다. 이리하여 해방 후 3년간 민족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분단국가의 비극적 역사가 시작되었다. 북한 우익은 남한으로, 남한 좌익은 북한으로 이동하여 각각 국가건설에 협조하였다. 이 부자연스러운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은 우리 민족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터를 다지고, 미국과 소련이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갈라놓은 비극이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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