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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여왕’ 연수영 」7국지전(局地戰) ⑵

개마기사단 |2011.10.15 16:06
조회 107 |추천 0

● 송주를 기습하다

 

647년 2월에 태종 이세민은 다시 고구려를 칠 대규모 원정군을 징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장손무기(長孫無忌)가 태종을 만류하면서 다른 계책을 내놓았다.

 

“고구려는 험한 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아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전에 황상께서 친히 정벌하였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으며, 우리가 이긴 성에서도 그 곡식을 거두어 들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었으므로 백성들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였습니다. 하오니 이제부터는 병력이 적은 군대를 자주 보내 그 강토를 어지럽혀, 그들을 명령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게 해서 피곤하게 하면, 그들은 쟁기를 놓고 보(堡)로 들어가게 될 것이며. 수년 동안 천리가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떠날 것이니, 압록수(鴨綠水)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세민은 그 계책을 채택하여 전략을 바꾸었다. 그 해 3월에는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내주(奈州)에서 바다를 건너 요동반도 남단을 치게 하였다.

 

또 태자첨사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孫貳朗)을 부총관으로 삼아 영주의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신성으로 진격하게 했다. 

 

이세적은 당군이 요동성을 친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후 통정진(通定鎭)을 지나 신성(新城)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신성주(新城主)는 지난 을사년(乙巳年:서기 645년)의 전역(戰役) 초기에 이세적에게 패배를 안겼던 욕살(褥薩) 고두첨(高斗添)이 유임(留任)돼 있었다.

 

“이세적이 지난날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군사들을 거느리고 왔나 본데, 어찌하면 좋겠소?”

 

고두첨이 부장들에게 묻자 말객(末客) 원철(元哲)이 대답한다.

 

“저들은 예전에 우리에게 패배한 이후로 절치부심해 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예봉을 막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단 수성전(守城戰)을 하면서 당군의 기세를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를 옳게 여긴 고두첨은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에만 주력했다.

 

이세적이 거느린 당군 병사들은 여러 차례 신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으나 고구려 군사들의 저항이 완강하여 희생만 치르고 물러났다.

 

영채로 돌아온 이세적은 부총관 손이랑을 불러 말했다.

 

“역시 신성을 함락시키기는 어렵구려.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신성에 집착하지 말고 주변 성들을 섭렵하여 고구려 백성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라 하셨소. 그러니 이제 남소성으로 갑시다.”

 

“고구려군이 언제까지 성만 지키고 있겠습니까? 그들이 우리의 전력을 파악하고 나면 당장 군사를 내어 공격해 올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시오. 우리의 목적은 성을 빼앗는 것이 아니니 고구려군이 나타나면 적당히 싸우다가 후퇴하면 되오.”

 

부하 장수들은 이세적의 말을 듣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만큼 당군에게 있어 고구려군의 전투력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세적은 야음을 틈타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소성으로 내달렸다. 남소성(南蘇城)은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으로 고원부(高元部)와 더불어 청석관전투(靑石關戰鬪)를 승리로 이끌었던 대곤우(大昆羽)가 아들인 대중상(大仲象)과 함께 지키고 있었다. 떠오르는 해와 함께 불쑥 나타난 당군을 보고 남소성의 군사들은 기겁을 했다. 당군이 이곳까지 나타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소성주 대곤우는 동요하는 군사들을 진정시키고 당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했다. 당군은 기세 좋게 남소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남소성의 고구려군은 대곤우와 대중상 부자(父子)의 독전(督戰) 아래 필승의 의지로 항전하여 당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런데 교전 도중 안타깝게도 성주인 대곤우가 운제(雲梯)를 타고 성벽 쪽으로 궁시(弓矢)를 쏘던 당병(唐兵)들의 화살을 맞아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아들인 대중상이 침착하게 아버지 대곤우를 성청(城廳)으로 모시게 한 뒤 대신 전투를 지휘했다. 성주가 부상을 입고 쓰러졌지만 남소성의 군사들은 사기가 꺾이지 않고 대중상의 군령을 받으면서 한몸처럼 움직여 당군의 맹공을 막아냈다.

 

남소성도 여의치 않자 이세적은 다시 군사를 거두어 목저성(木底城)으로 향했다. 이세적이 이끄는 당군은 이처럼 여러 성들을 돌며 공성전(攻城戰)을 벌였지만 고구려 성의 견고함을 새삼 깨닫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세적의 군대가 목저성에 이르렀을 때, 신성과 요동성의 군사들이 남소성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애초에 고구려군과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 없었던 이세적은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도망쳤다. 그들은 개모성 북쪽을 지나 통정진 방면으로 요하를 건너 내뺐다.

 

당군은 이렇게 물러갔지만 남소성을 지키며 적군의 공격을 막다가 화살에 맞은 대곤우는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요동성에서 파견된 군의(軍醫)가 최선을 다해 대곤우의 상세를 살폈지만 급소가 명중된 대곤우의 목숨을 건질 수는 없었다. 대중상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딛고 조정의 명령에 따라 대곤우의 뒤를 이어 남소성주의 직책을 맡았다.

 

그 해 7월에는 청구도행군대총관 우진달이 부총관 이해안과 함께 군사 1만여명과 전함 2백여척을 거느리고 요동반도로 침공해 들어왔다. 우진달의 함대는 연수영이 지키고 있는 비사성(卑沙城)을 멀리 우회하여 요동반도 남단을 경유해 석성으로 올라갔다. 연수영이 처음 수군에 복무했을 때 부임지였던 석성은 규모가 작고 지키는 군사도 많지 않아 당의 대군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석성 수비는 연수영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고 봉래포해전(峰崍浦海戰)에 참전했었던 유도려(柳道餘)가 맡고 있었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주민들까지 동원하여 항전에 나섰다. 그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당병들에게 화살 세례와 함께 바위와 통나무를 던져 물리쳤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당군이 영채로 물러나면 야음을 틈타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했다. 이처럼 한나절이 지나도 아무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우진달은 모든 전력을 기울여 총공세에 나섰다. 우진달의 당군이 남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자 유도려는 병사들을 독려하여 악착같이 당군을 활로 쏘아 죽이며 분전했지만 잔뜩 독이 오른 당군의 총공세를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당병들은 하나둘씩 성벽을 타고 올라왔다. 유도려와 그의 수하들은 칼을 휘둘러 당병들이 성벽 위에 오르는 족족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당병들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성을 빼앗기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유도려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칼을 높이 쳐들더니 군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유도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병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가 앞으로 나아가자, 수십명의 당병이 쓰러졌다. 하지만 이미 지친 상태로 많은 적병들과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칼날이 무뎌지더니 결국 사방에서 날아오는 창과 칼을 맞고 쓰러졌다. 유도려가 죽는 것을 본 고구려 군사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떨리는 몸을 주체해야만 했다. 고구려 군사들은 목숨 따위는 연연해하지 않겠다는 듯 있는 힘을 다해 당병들과 맞서 싸웠다.

 

성벽에서의 백병전은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석성의 고구려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전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멸되었다. 그러나 악전고투(惡戰苦鬪)를 벌인 당군 역시 1만 군사의 절반이 전사하는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우진달은 이를 갈며 주먹을 쥐고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까짓 작은 성 하나를 함락시키는 데에 군사의 절반이 희생됐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결과요. 곧 고구려의 지원군이 당도할텐데 병력을 많이 잃은 아군이 그들과 전면전을 벌인다는 것은 무리요.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은 고구려의 내지를 교란시키는 것이니 석성 인근의 수군 기지를 전부 파괴한 뒤 미처 대피하지 못한 고구려 백성들의 마을을 습격하여 그들을 포로로 끌고 가야 폐하께 뵐 면목이 설 것이오.” 

 

당군은 석성 인근의 항구를 전부 휩쓸며 해안의 마을을 불태우고 미처 피신하지 못한 고구려 백성들을 포로로 삼아 서둘러 전함을 움직여 내주로 돌아갔다.

 

석성이 일시적으로 당군에게 함락당하고 고구려 백성 수만명이 포로로 끌려갔다는 소식은 연수영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연수영은 천하의 중심 국가를 자처하는 당나라의 정규군이 마치 거란이나 돌궐 같은 유목민들처럼 마을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죽이거나 곡식을 노략질해가는 소모전(消耗戰)을 펼치며 고구려의 국력을 갉아먹는 전법으로 나오자 크게 분개하였다. 그녀는 이대로 당하며 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군사를 점고하고 함대를 정비하여 다시 출전 준비를 갖추었다. 도전에는 응전이 있을 뿐이다. 당나라에게 한 대를 맞으면 열 대로 보복하리라! 석성 기습에 대한 보복적 타격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인 반격을 가할 수 있을까? 연수영은 당의 수군기지로 눈을 돌렸다.

 

그때 당의 송주 어양포에 있는 조선소에서는 태종의 특명을 받은 송주자사(宋州刺史) 왕파리(王波利)가 수만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대규모로 전함 건조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 작업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었는데 그 노역이 고달파 원성이 드높았다. 하지만 태종은 이를 들은 체 만 체하고 작업을 감행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분노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자 태종은 군사들을 보내 무력으로 진압하고 주동자를 참수하도록 했다. 이처럼 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배한 이후 마음의 여유를 잃어가고 있었다.

 

10월 15일 아침, 연수영은 2만여명의 군사와 3백여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비사성을 출발하여 바다를 건넜다. 봉래포해전 이후 두번째 중국 본토 진공작전이었다. 똑바로 남진하여 산동반도를 멀리 오른쪽으로 끼고 계속 남하하더니 사흘 뒤에는 마침내 어양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송주는 이세민이 다시 고구려를 치기 위해 대규모 선박을 건조하는 작업을 벌이는 곳이오! 우리가 여기를 쳐서 그 선박들을 모조리 불태운다면 이세민은 다시 화병이 도져 드러눕게 될 것이오.”

 

대장선의 장대에 선 연수영이 장수들에게 말했다.

 

“적장은 송주자사 왕파리라고 하오!”

 

척항문 고성운(高成雲)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참좌 온사문(溫沙門)이 재치로 고성운의 말을 받았다.

 

“왕파리든 똥파리든 오늘을 그놈의 제삿날로 만들어줍시다.”

 

“와핫핫핫!”

 

전위장 장운형이 주먹을 쥐고 호기롭게 외쳤다.

 

“우리 고구려를 건드리면 어떤 대가를 받게 되는지 저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 합니다.”

 

그날 밤, 장운형(張熉炯)이 이끄는 돌격함대의 날랜 중·협선 20척이 선봉으로 나서고, 그 뒤를 담열(曇烈)의 좌군, 고도형(高道炯)의 우군, 연수영과 온사문이 직접 지휘하는 중군, 안고(安固)와 고성운이 이끄는 후군 등의 순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어둠 속으로 어양포 조선소의 불빛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당 수군의 초계선이 고구려의 함선들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당선에서 요란한 경보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바다 상공으로 찢어질듯 쇠북소리와 고각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당선의 경보음이 곧 접전의 신호가 되었다.

 

“돌격하라!”

 

연수영은 몸소 북채를 잡고 전고(戰鼓)를 울렸으며, 온사문은 군령기(軍令)를 흔들어 함대를 움직였다. 어느새 먼동이 희부옇게 터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싸움은 격렬해졌다. 일사불란하게 포구 안으로 짓쳐 들어간 고구려의 함선들은 닥치는 대로 당군 전함을 격침시켰다. 불화살이 소낙비같이 날아가고, 돌덩이와 창뢰가 무서운 파공음을 남기며 적선들을 덮쳤다. 비명과 함성이 막 잠에서 깨어나던 어양포 앞바다를 흔들었다.

 

기습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날 온종일 이어진 해전에서 어양포 조선소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3백여척의 당군 전함과 수송선이 격파, 침몰되고 2만여명의 군사가 사살, 수장되었다. 당 수군의 사령관격인 왕파리도 고구려군의 쇠뇌에 집중사격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다. 연수영은 대승을 거두었지만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언제 당의 대군이 배후를 차단할지 알 수 없었고, 또 요동의 바다를 오래 비워둘 수 없었으므로 속히 회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 고구려 수군의 어양포해전 승리로 송주자사 왕파리가 책임지고 만들던 수백척의 군선은 바다 위에 뜨기도 전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그런데, 있어서는 안 될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양포해전 뒤인 그 해 12월에 보장태왕(寶藏太王)이 둘째 왕자 임무(任武)를 당에 사신으로 보낸 것이었다. 당에 보내는 국서 내용은 당분간 적대행위를 중지하자는 것인데, 거기에는 어양포 조선소를 공격하고 왕파리를 죽인 데 대한 사과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고구려 수군의 장수들은 펄펄 뛰며 분노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원수님께서 전에 말씀하셨던대로 이번 송주에 대한 기습작전은 당의 수군이 석성을 습격해서 많은 백성을 죽이거나 포로로 끌고 갔던 군사행동에 대한 보복공격이었습니다. 사과를 하자면 먼저 당 조정이 그것부터 우리에게 사과를 하는 게 올바른 순서입니다. 그런데 왜 고구려가 당에 사신을 보내서 사과를 한단 말입니까?”

 

장운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분통을 터뜨리자 고성운도 맞장구를 쳤다.

 

“당은 송주의 어양포에서 대대적으로 군선을 건조하여 우리 나라를 재침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 수군이 멋지게 쳐부쉈는데 어째서 대막리지께서는 수군의 전공을 평가절하하는 국서를 당주에게 바치려 하시는 겁니까?”

 

온사문이 고성운을 노려보며 꾸짖었다.

 

“고 장군은 말씀을 제대로 하시오. 이번에 당에 가는 사신은 태왕의 명령으로 보내지는 것입니다. 결코 대막리지의 뜻이 아니외다!”

 

“지금 이 나라 고구려의 군사와 외교는 모두 대막리지가 관장하시고 태왕 폐하는 내정만 살피시는 중인데, 대막리지의 동의 없이 어찌 태왕이 마음대로 적국인 당에 사신을 보내실 수 있습니까?”

 

고성운이 목소리를 높여 반박하자 온사문은 입을 다물었다.

 

장운형이 연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장수가 전장에 나가 있을 때는 임금의 명령도 듣지 않는 법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병법의 기본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수가 승리한 싸움의 결과를 두고 적국에게 사과를 하다니,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대막리지 합하든 태왕 폐하든 평양성의 조정에 계시는 높으신 분들에게 항의 정도는 하셔야 합니다.”

 

연수영은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대답했다.

 

“화가 나기는 내가 제장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소. 그러나 아무리 대막리지 합하라 해도 조정의 대신들이 어떤 여론을 조성하면 그것을 억누르기는 힘들 것이오. 분명 이번 일을 배후에서 꾸며낸 자가 있을 것이오. 지금은 한순간의 분노로 들고 일어날 때가 아니니 일단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봅시다.”

 

다시 해가 바뀌었다. 당나라는 648년 무진년(戊辰年) 봄에 다시 침공을 시작했다. 4월에 오호진(五鎬鎭)의 수장 고신감(古神感)이 군사 2만여명에 전함 2백여척을 거느리고 오호도 기지를 출발하여 비사성을 공격했다. 오호도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중간지점에 위치한 묘도열도에 속한 섬으로 당군의 가장 중요한 보급기지였다.

 

연수영은 고신감이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오자 즉각 응전에 나섰다. 연수영은 장운형으로 하여금 함대를 거느리고 일단 적군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장산군도 쪽으로 후퇴하도록 하였다. 유인작전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은 온사문과 함께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비사성으로 오르는 산속에 매복했다.

 

고신감은 예상과는 달리 고구려의 수비군이 보이지 않자 오히려 당황했다. 덜컥 의심이 든 그는 탐망선들을 풀어 근해를 수색토록 했다. 그래도 고구려군이 보이지 않자 고신감은 안심하고 병력의 절반인 1만여명을 상륙시켰다. 자신은 대장선인 누선에 그대로 남아서 작전을 지휘했다.

 

그날 밤 상륙부대로부터 급보가 왔다. 복병을 만나 군사 1만명의 대부분이 전멸했다는 것이었다. 연수영의 전략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고신감은 위기를 감지하고 즉각 함대를 돌리라고 명령했다. 그 다음 순간이었다.

 

“적군이 나타났다!”

 

“고구려의 선단이다!”

 

군사들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아우성쳤다. 어느새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백척의 고구려 함선들이 어두운 바다에서 퇴로를 가로막은 채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쏴라!”

 

“뚫고 나가야 한다!”

 

“살고 싶으면 싸워야 한다!”

 

고신감과 그의 부장들은 잇달이 소리쳤다.

 

그날 밤 고신감은 2백여척의 군선을 잃고 간신히 오호도까지 달아날 수 있었다. 연수영이 보복전을 감행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군사 2만명에 군선 3백여척으로 구성된 고구려 수군은 쏜살같이 항진하여 묘도열도를 기습했다. 그리하여 오호도에서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고신감의 남은 전함 50여척과 패잔병들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이 오호진해전 이후 오호진장 고신감의 이름은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황제인 이세민에게 패전 책임을 추궁당해 처형된 것도 아니고 유배형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싸움에서 연수영의 부장인 장운형이 쏜 화살을 맞고 심장이 관통당해 전사해 버렸기 때문이다.

 

연수영은 적장 고신감의 수급(首級)을 대장선 주 돛대에 높이 매달고 비사성으로 개선했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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