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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내면의 공간
아이가 아이였을 때 흙 마당에 자기만의 방을 그린다.
수줍음이 많은 그 아이는 자신의 방이 누군가에게 들킬세라 이내 지워버린다.
어릴 적부터 자기만의 공간에 대한 수줍은 욕망이 가득했던 최 한나 작가는 디자인을 전공한 후 벨기에에서 의상을 전공하고 지금은 그림을 그리는 아날로그 작가이다.
오랫동안 기하학적인 공간과 구조적인 구성에 집착하다가 오롯한 자기만의 공간(방)을 찾기 위해 세계 3대 패션 디자인 스쿨인 벨기에 왕립 예술 학교(안트워프)에 순수 의상 전공으로 입학하지만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귀국 후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자기만의 공간(방)을 잊어버리고,
뉴욕에서 활동한 한규남 화백의 어시스턴트로도 잠시 활동했다.
20세기 초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00년이 거의 지난 지금도 내면적 공간를 갈망하는 최한나 작가에게도 절실한 문제이다.
그녀에게 자기만의 방이란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환경이 아니라 현실 속에 가려진 내면적 자아 즉 감춰진 내면의 공간을 말한다.
디자인과 의상, 아트북(ARTBOOK)을 경험하고 평면 회화(구상/비구상)에서 발견한 그 내면의 공간을 통하여 그녀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흙으로 그렸던 자기만의 방이 캔버스 위로 다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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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BOOK & CALIGRAPHY & MODERN ART
그녀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아트북(ARTBOOK) 공모전을 통해서였다.
들키고 싶지 않는 자기만의 공간을 스커트라는 오브제를 사용하여 북 커버로 감싸고 은밀한 여성성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책이라는 공간 속에는 작가가 어릴 적부터 애착을 가져온 일상의 오브제(비닐/옷감/갱지)들을 꼴라주하였으며, 겹겹이 쌓이는 질감의 텍스트(캘리그래프)들이 어우러져 내밀한 공간적 균형감을 이루어 냈다.
작가의 개인적인 기록이 키치적 이미지와 어우러져 소통에 대한 묘한 갈등 구조(보여줌/가려줌)를 형성해 낸다. 마치 수줍은 아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 결과로 아트북 금상과 TDC54 CALIGRAPHY 상을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참여한 Vidak 연감에는 디자인과 회화사이의 균형적인 조화가 돋보이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아트 북(art book) 안에서 현대 미술(MODERN ART)의 흐름이 흐르고 있었다.
독특한 패턴의 색감(갱지/가계부)과 글(caligraphy) 그리고 소비 용품(햄버거 종이/옷감/비닐)의 꼴라주는 현대회화, 특히 세잔 이후 큐비즘(입체파)등에서 주제성을 배제하고 물체가 주는 심리적 환기가 중히 여겨지는 시기를 지나서 소비 지향적인 대중문화를 역설하는 팝아트를 나타내기에도 충분하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현대미술의 장르와 흐름보다는 작가 자신이 담고자하는 자기만의 방을 진정성 있게 구현해 나가고 싶을 뿐이다.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는 비구상적이지만 작가의 감성으로 표현되는 낯설음은 어딘가 다른 세계가 있을 법한 호기심을 유발한다. 일상의 이미지를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미적 기호(선/면)로 사용한다.
유학 시절 새로운 이미지(낯 설음)와 자아(공간)를 발견하기 위한 시도로 오브제를 사용하는 작업과 선을 강조하는 드로잉 작업을 해왔다.
21세기 현대 회화가 직면하는 기술과 과학의 만남에 한참이고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그녀의 작품 속에서 전해지는 아날로그적인 유머는 오히려 우리를 유쾌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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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오브제(objet)
최 한나 작가는 예민한 감수성으로 인해 늘 타인과의 소통 부재를 느꼈다.
또한 부조리와 냉소가 가득한 현실세계로부터 소외를 감지한다.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작가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대변하는 소외된 물품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얇지만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있는 비닐(강한 마음)과 쉽게 찢기고 헤질 수 있는 갱지와 옷감들(연약한 마음) 하다못해 햄버거 가게에서 받는 인형들(무표정한 마음)에게서도 작가의 마음을 대입시켜 나간다. 그녀의 연약한 마음이 소통된 대상은 이런 익숙한 사물에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항상 주변에 있지만 존재감이 없는 일상 용품들은 잊혀지고 상처받기 싫어하는 그녀의 마음을 위안하는 마음의 오브제가 되었다.
그녀가 자주 애용하는 반복적인 패턴은 작가가 평소 일상적 물건을 담아두는 종이 상자에서 기인한다. 그 상자의 평면 패턴으로 시작된 선들은 차츰 해체되고 다시 조립되어서 비구상(구조/방)에서 감정을 전달하는 구상회화(마음)로 진화하게 된다.
이미지 체계의 기호(선/면)으로 시작된 진화는 차츰 새로운 감성을 전달한다. 그로 인해 작가의 방에서 사용된 마음의 오브제들이 익숙하거나 독특하게 타인과의 소통을 시작한다.
4.
마음의 진화
진화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을 계속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화를 멈추면 도태되고 만다. 마음의 진화도 어려운 일이고 그것을 멈추면 영혼이 죽는다.
과학과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창의성 너머에는 항상 마음의 진화가 있어왔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마음의 진화이다. 최 한나 작가 자신도 마음의 오브제를 통해 자신을 위안하는데 그치지 않고 소통 부재인 타인의 삶과 부조리하고 냉혹한 현실세계에서 자신을 보여줌/가려줌으로써 독특한 감성을 전달하고 자기만의 공간을 타인과 나누려고 하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마음의 진화가 아닐까 한다.
작품 속에서 유독 유머러스하고 여유로운 최 한 나 작가는 타인에게 손을 먼저 내밀고 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흙 마당에 자기만의 방을 그린다.
수줍음이 많은 그 아이는 자신의 방을 누군가를 위해 남겨둔다.
미술 평론가 (여 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