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년 4월의 어느 날, 동부여(東扶餘)의 국왕 해활(解闊)이 잠시 침상에 누워 눈을 붙였는데 비몽사몽간에 난데없이 북부여(北扶餘)의 시조인 해모수(解慕漱)가 나타나 우렁한 목소리로 “우리 해씨(解氏) 가문의 대를 이은 주몽(朱蒙)의 후손인 귀하고 고귀한 영웅이 너희 나라의 근처에 있느니라. 그를 잘 모셔야 한다”고 말하고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오룡거(五龍車)에 오르더니 빠르게 승천하는 것이 아닌가! 때문에 해활은 커다란 감동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분명히 우리 동부여국의 수호신께서 나에게 소명을 전하시기 위해 균천광악(均天光樂)의 아름다운 소리를 울리며 선몽하신 것이다. 지금은 여러 나라와 부족들이 할거해 있는 난세이다. 이 난세를 통일하는 영웅이 나타날 거라는 말씀이신 것 같다.’
동부여의 국왕 해활은 성품이 자애로워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흠이 있다면 대가 약해서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급보가 날아들었다. 말갈족장(靺鞨族長) 설도안(卨度雁)이 1만 5천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침공해 와서 30리 밖에 진을 치고 있다는 보고였다.
‘숙신(肅愼)이나 거란(契丹)이 서남 국경을 넘보고 말갈은 동쪽을 어지럽히는 위험한 무리인데 동부여에게는 지금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라고는 불과 8천여명 정도이다. 적은 1만 5천의 대병력이라니……. 아! 동부여는 이대로 멸망하게 되는 것인가?’
해활이 땅이 꺼지게 걱정하고 있을 즈음, 담덕 왕자의 수하이자 조의선인(早衣先人)의 당주(黨主)인 연살타(淵薩陀)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왕자님, 우리의 동족인 동부여가 말갈족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1만 5천의 대병력으로 동부여의 왕궁 밖 30리 되는 곳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우리가 가서 도와야지. 일단 동부여 왕궁에 가서 해활 임금과 논의해 보는 것이 좋겠다.”
얼마 후, 담덕은 1천여명의 조의선인을 거느리고 동부여 왕궁으로 달려가 해활 임금을 만났다.
“그대들은 뉘신데 우리 동부여를 도와 주시려 하오?”
동부여의 국왕 해활이 크게 반기면서 묻자, 연살타가 담덕 왕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왕이시여, 여기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때 담덕이 연살타의 말을 끊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고구려의 조의선인군으로 미력하나마 동부여의 위급함을 도우려고 달려왔습니다. 저는 조의선인군의 대장 담덕입니다.”
담덕은 동부여 국왕에게 자기 과신을 하지 않기 위해 신분을 숨긴 것이다.
“대왕(大王) 전하(殿下)! 적의 숫자가 아군보다 많긴 하나 소장과 조의선인군이 나서면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니 아무쪼록 우리가 전공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동부여의 국왕으로서 그대의 청을 거부할 이유가 없소. 우리 동부여의 군대 8천과 힘을 합쳐 말갈군의 공격을 막아 주시오!”
“알겠습니다. 그 정도의 병력이면 말갈군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담덕은 조의선인들과 동부여군을 거느리고 말갈족이 숙영하고 있는 곳에서 10여리 밖이 되는 곳에서 진군을 멈추었다.
“모두 잘 들으시오. 이 싸움은 동부여에게는 나라의 존립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일전이 될 것이고, 우리 조의선인군에게는 위엄을 만천하에 떨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전투가 오래 가면 설도안의 말갈군은 다른 부족과 연합하여 우리의 퇴로를 막으려 할 것이오.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기전으로 승부를 내야 하오.”
“예, 대장님!”
담덕 왕자의 지시에 모든 장수들이 수긍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동부여의 대장군 근휘(勤暉)는 담덕이 고구려의 왕자인 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아군의 수가 많은 것처럼 위장전술을 쓰고자 하오. 조의선인의 연살타 당주는 수백필의 말꼬리에 나뭇가지를 묶어 먼지를 일으키며 말갈의 성도 쪽으로 내일 아침 출발하시오. 그럼 그들은 군대를 나누어 연 당주의 뒤를 쫓을 것이오. 맨 앞의 병사들은 모두 고구려의 조의선인군으로 채우되 삼족오(三族烏) 깃발을 나부껴야 하오. 동부여의 위흘(偉訖) 장군은 새벽 미시(未時)에 적의 후미에 매복해 있다가 적의 식량을 모두 불태워 버리시오. 조의선인의 갈요(葛要) 당주와 동부여의 근휘 대장군은 나와 함께 본대를 이끌고 정면 돌파를 시도합시다.”
“그런데 대장님,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을 분산하면 전투력이 너무 뒤질 듯해서 걱정되옵니다.”
근휘가 자신의 염려스러운 점을 말하자 담덕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나의 계책대로 따르시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조의선인군이 선봉에 서서 돌진할 테니까요.”
“아닙니다. 대장님, 우리 동부여의 싸움이니 소장이 선봉이 되겠습니다.”
“근휘 장군이 원하면 그리 하셔도 좋겠지요. 그럼 주력군은 모두 쉬도록 하고 연살타 당주는 병사들과 함께 나뭇가지를 작전대로 준비토록 하시오.”
작전은 바로 실행으로 옮겨졌다. 새벽녘이 되자 연살타의 부하들은 먼지를 일으키며 말갈의 성도 쪽으로 진군해갔다.
“족장님, 동부여군이 고구려의 조의선인 일부와 함께 삼족오 깃발을 펄럭이면서 우리의 성도 쪽으로 진격해 가고 있나이다.”
정탐병 하나가 급히 들어와 보고하자 설도안은 부하 장수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적이 우리의 반도 되지 않는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니 이건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다! 청율(淸栗) 장군은 병사 칠천을 거느리고 성도로 출격한 고구려와 동부여 연합군을 추격해 격퇴하라! 나는 나머지 병력으로 적의 중앙군을 몰살시키겠다.”
“알겠습니다. 소장 청율 즉시 출병하겠나이다.”
잠시 후, 청율이 거느린 말갈군 7천이 조의선인과 동부여 연합군을 추격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설도안이 이끄는 말갈군도 개전(開戰)을 알렸다. 꽹과리와 징 소리를 요란히 내면서 공격을 개시했다.
“적의 숫자는 우리의 절반도 못된다. 저들을 모두 쳐죽이고 동부여의 왕성으로 진격해 산해진미와 고운 자태의 여자들을 얻어야 한다. 얻은 여자와 재물은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겠노라!”
말갈족들은 재물과 여자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 고무되어 숫자가 적은 적군을 가볍게 보고 공격을 가했다.
담덕 왕자가 패검(佩劍)을 빼어들며 고함을 쳤다.
“미개한 오랑캐들에게 쓴 맛을 보여주자! 궁노수들은 앞으로 나가 화살을 날려라!”
동부여와 조의선인 연합군은 함성을 지르며 쉴새없이 적군을 향해 활을 쏘아댔다. 말갈의 병사들도 함성을 높이 지르며 맞섰다. 하지만 담덕 왕자와 동부여의 근휘 대장군이 이끄는 본대, 그리고 갈요가 이끄는 조의선인 좌군이 말갈족을 중앙으로 몰면서 세차게 공격하자 적군은 몹시 당황해서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평소 농민들을 살해하고 가축을 약탈하는 노략질에만 익숙해져 있던 말갈족인지라 전면전(全面戰)에서는 군사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에 더 이상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며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사태가 어려워졌음을 깨달은 설도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맹수가 날뛰듯 좌충우돌(左衝右突)했다. 하지만 전세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누가 저 말갈족장 설도안의 목을 베겠는가!”
담덕 왕자가 소리치자 조의선인의 당주인 갈요가 나섰다.
“말갈족장 설도안은 칼을 버리고 항복하라!”
갈요가 호통을 치면서 기창(旗槍)을 비껴들고 설도안에게 달려들었다. 설도안은 보기에도 위세가 넘치는 팔색도(八色刀)를 치켜들고 갈요를 맞아 싸웠다. 두 장수는 서로 어울려 무려 50합을 싸웠으나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 때 말갈족 진영의 후방에서 갑자기 검은 연기가 뭉클거리면서 치솟았다. 말갈족들이 어리둥절해 하자 담덕 왕자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말갈족장 설도안은 그만 싸우고 너희 진영을 보아라. 너희들의 군량이 재로 변하고 있구나!”
“뭐라고?”
깜짝 놀란 설도안이 본진 쪽을 돌아보는 순간 갈요의 기창이 허공을 가르며 그의 가슴을 궤뚫어 버렸다. 담덕 왕자는 갈요의 절륜한 무예에 깊은 신뢰를 보내며 빙긋이 웃었다.
졸지에 대장과 군량미를 잃은 말갈족들은 속속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4천여명의 말갈족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고, 2천여명이 동부여군의 포로가 되었다. 한편 연살타를 추격하던 7천의 말갈 병사들은 수백명에 불과한 연합군이 먼지를 일으켜 그들을 따라오게 만들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본대의 대장은 죽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모두 항복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청율 이하 모든 병사들은 싸울 의욕을 잃었으며 그들도 역시 투항하고 말았다.
담덕 왕자는 청율 이하 모든 말갈 병사들에게 “다시 동부여를 공격하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 뒤 모두에게 자유를 주었다. 전리품으로 얻은 군마는 3천여필이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2백명에 불과했으니 실로 거짓말 같은 놀라운 전과를 올린 싸움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