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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전기』4.항일무장투쟁의 선두에 서다 ⑶

대모달 |2011.11.24 07:11
조회 33 |추천 0

★ 가족과 재회하다.

 

몇 년간 군대 생활을 하고 다시 고향 근처로 돌아온 양세봉은 마음이 매우 즐거워졌다. 그는 현익철·이웅·고이허 등 국민부의 지도자들에게 왕동헌이 조선인들의 혁명운동을 지원하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 얘기를 듣고 현익철은 감동하여 왕동헌이 교장으로 있는 소학교를 찾아갔다. 왕동헌은 구장(區長)이었지만 늘 학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현익철이 선물을 주었지만 왕동헌은 한사코 사양했다. 양세봉이 “선생님께서도 예전에 저희에게 선물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왕동헌은 “그럼 받아만 놓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차를 대접했다.

 

현익철은 “최근에 듣자니 봉천성청(奉天省廳)에서 또 다시 ‘일본인과 조선인의 토지 차용 금지에 관한 훈령’·‘조선인에 대한 차용 토지 회수령’·‘조선인 이민 단속에 관한 법령’ 등을 발표했다는데, 이는 우리 조선인들에게는 치명적입니다” 하고 말을 꺼냈다.

 

그리고 고이허는 “우리 조선인들은 중국 법령을 지키고 특히 차별적인 각종 특별세도 군말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또 마땅히 지주가 부담해야 할 각종 잡세와 중국인들은 바치지 않는 부가세, 조선인 고용세, 물세 등도 내고 있는데 또 이런 법령을 발표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고 물었다.

 

왕동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국민당 정부가 북벌(北伐) 이후로 동북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장작림(長作霖)이 피살된 후 장학량(張學良)은 남경 정부에 투항했습니다. 그가 육성한 철도나 공업·광업 등 민족자본의 토대는 날로 강화되어 일본이 만주에서 얻어가는 이익과 맞먹을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한국이 일본에 의해 병합된 후 일본 영사관이 조선인을 일본 국민으로 간주하면서 많은 중국인들은 조선 농민의 생활 발전을 곧 일본 영토의 확장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또 매년 증가되는 조선인 이민자가 중국 국민의 생활 권리를 빼앗아간다고 생각하기에 강경한 수단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동북정부가 조선인들을 단속하고 탄압하는 것 또한 실제로는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정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이중의 압박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일본인들의 압박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세력이 만주로 뻗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중국인들의 압박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조선인들의 정치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널리 알리는 한편 중국 동북지역의 주민들이 각성하기를 기대하는 것뿐입니다.”

 

현익철은 “예전에 우리 조선인들과 독립군이 이 고장에 있을 때 선생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국민부가 이곳에 오게 되어 선생님께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정말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왕동헌은 “국민부 이전을 환영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이 작은 도시가 생동감이 넘치니 좋은 일이지요. 상급 관청에서 조사가 엄하지만 않다면 우리 지역은 독립군의 모든 활동을 기꺼이 허락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방문을 마친 현익철과 고이허는 왕동헌에 대해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좋은 친구를 소개해 준 양세봉에게 감사했다.

 

그날 양세봉은 잠시 휴가를 얻어 집을 찾았다. 비록 중대장이기는 하지만 돈이 없었기에 과자 두 봉지와 사탕 한 봉지만을 샀다. 중대에서 군마 한 필을 얻어 타고 달렸지만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곧장 집으로 향했다.

 

무명으로 만드 짧은 흰 저고리에 긴 치마를 입은 젊은 아낙네가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그녀가 머리를 들어 말을 끌고 들어오는 사내를 바라보고 잠시 놀란 눈길을 하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띠고는 소리쳤다.

 

“여보, 돌아왔군요!”

 

그녀는 다듬던 채소를 팽개치고 부리나케 달려와 양세봉을 맞았다. 재순과 세봉은 서로 두 손을 꼭 잡았다. 이윽고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세봉이 말을 끌고 뜰 안으로 들어섰다. 세봉은 뜰 안의 나무에 말을 비끄러매면서 아내 재순을 다정히 바라보았다. 집을 떠나 있던 몇 년 사이에 이미 스물넷이 된 재순은 더 성숙하고 아름다워졌다.

 

집 안으로 들어가 세봉은 어머니와 베를 짜고 있는 숙모, 시봉의 아내 화순을 만났다. 화순은 세봉이 집을 떠난 후에 시집왔다. 당황하여 세봉을 바라보는 화순의 얼굴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어렸다.

 

어머니는 그 사이 많이 늙었다. 넓적하고 둥글한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부기도 약간 있는 듯했다. 시력이 나빠져서 물건을 똑똑히 보지 못했고 검은 머리는 이미 허옇게 셌다.

 

어머니는 세봉의 손을 움켜잡고 말을 잇지 못했다.

 

“내 아들아……! 너 아직 살아 있었냐?”

 

“어머니! 전 괜찮아요.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효도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늘 죄송합니다.”

 

부끄럽고 괴로운 마음에 세봉은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숙모와 재순은 급히 세봉의 밥을 지었다. 숙모는 재순에게 술을 받아오게 했다. 집에 돌아온 세봉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원봉, 시봉, 정봉, 해원과 운도, 운항이 돌아온 뒤에야 온 집안 식구가 한데 모여 오랜만에 즐거운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난 뒤 세봉은 사탕 봉지를 꺼내 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양세봉이 떠날 때만 해도 정봉과 운도, 운항은 아직 어린이였는데 지금 정봉은 이미 17세로 소학교를 마쳤고, 운도는 열다섯살이며 운항은 열세살로 모두 건장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그들 셋은 세봉에게 일본군과의 전투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밤이 되자 재순은 세봉의 가슴에 안겼다. 아내를 꼭 끌어안은 세봉은 마치 신혼 첫날처럼 재순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튿날 원봉은 식구가 너무 많으니 분가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세봉에게 상의했다. 잠시 생각 끝에 세봉은 원봉과 숙모, 운도, 운항이 함께 살고 재순과 정봉, 시봉이 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세봉은 집을 떠나 부대로 돌아왔다. 떠날 무렵 어머니는 얼마나 울었던지 실신한 사람마냥 눈이 퉁퉁 부었고, 재순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양세봉의 눈동자도 젖어들었다. 동생들과 제수, 숙모도 배웅하며 자주 오라고 당부했다.

 

그 후로 양세봉은 매달 시간을 내어 집에서 이틀씩 묵었다. 가을에는 두 칸짜리 초가집을 지어 원봉과 해원이 한 칸을 쓰고 운도와 운항이 숙모와 함께 한 칸을 쓰면서 완전히 분가를 했다. 비록 분가했지만 해원은 맛있는 음식을 할 때마다 시어머니 댁으로 가져왔다.

 

그 해에 재순이 임신했다. 시봉의 아내 화순도 매우 기뻐하며 집안일을 도맡고 나섰다. 세봉도 이미 나이가 적지 않아 아이를 가질 때가 되긴 했다. 재순은 1928년에 딸을 출산했다. 소식을 듣고 집에 온 양세봉이 딸이 커서 신의를 지키고 현숙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의숙(義肅)이라고 이름지었다.

 

어머니는 끝내 실명하고 말았다. 재순은 시어머니의 부담을 덜기 위해 늘 의숙을 업고 밭에 나가 일했다. 양세봉은 고생하는 재순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집에 들를 때마다 농기구를 들고 밭에 나가 시봉과 함께 농사일을 거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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