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비준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는 우리에게 큰 숙제를 남겼다. 대통령이 야권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FTA 발효 후 90일 이내에 재협상을 약속한 터라 조만간 우리 정부는 ISD(투자자·국가 소송제) 조항 수정 등을 두고 미국과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나라 통상협상 역사상 한·미 FTA만큼 타결된 내용을 여러 차례 고친 경우가 없다. 협상 타결 직후 노동·환경 관련 조항을 추가하느라 새로 협상했고, 광우병 촛불시위로 소고기 수입 합의를 수정했으며, 작년 말엔 자동차 수입 관세를 재조정했다.
최근의 ISD 광풍(狂風)은 81개국과의 기존 ISD들이 문제를 야기한 적이 없던 점을 감안할 때, 분명 야권에서 극단적인 법적 가능성을 근거로 과도하게 분란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 우리 정부는 WTO(세계무역기구)에서 29건의 분쟁해결 절차를 거치면서 국제규범을 기반으로 국내제도를 상당히 개선했다. 하지만 정부는 ISD 논란이 제기한 본질적인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항간에 제기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더욱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정책을 시행하고, 제도 마련에 있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제도 자체의 문제점만으로도 소송을 할 수 있는 WTO 분쟁해결 제도와 달리, ISD는 실제 투자한 기업이 피해를 입어야 한다. 기업들이 정책을 예측할 수 있도록 일관성을 유지하고, 돌발적으로 제도를 고치지만 않으면 ISD의 가능성은 최소화될 수 있다.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이 장관과 시장이 바뀔 때마다 내용과 방향이 바뀌는 행태는 ISD 논란을 부추기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당파와 시류적 이해를 자제하고 중장기적 관점에서 신중하게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한다. 국회 역시 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논란이 되는 분야의 제도 개선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1990년대에 규제개혁을 한다며 허가제를 신고제로 개선했지만 정부는 신고 접수를 안 받는 식으로 여전히 규제 권한을 놓지 않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와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이런 구태의연한 관행은 정책의 절차적 정당성을 해치기만 할 뿐이다. 정책적 판단이라는 명분으로 남용되는 정부의 재량권 행사는 이번 기회에 대폭 축소돼야 한다.
한·미 FTA 비준을 위해 정치권이 정부에 떠넘긴 ISD 재협상 과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이미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한국이 ISD를 체결한 21개 유럽 국가들에 진출한 터라, 아무 제한 없이 한국에 ISD를 제기할 수 있다. 게다가 한·미 FTA의 ISD 조항은 변호사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각별한 관심을 갖고 특별대책반까지 꾸린 덕택에 다른 ISD 조항들보다 우리에게 훨씬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유럽과의 ISD는 한·미 FTA처럼 광범위한 공공성 예외뿐 아니라 외환위기 상황에서 외국환 거래 통제를 허용하지 않으며, 공식 중재언어로서 한국어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ISD에 의한 경제주권 침해를 염려한다면 한·미 FTA를 오히려 모델로 삼아야 한다.
괴담으로 얼룩진 ISD 논란은 정작 절실한 FTA 대책 논의를 희생시키면서 엄청난 국력 낭비를 초래했다. 그동안의 국론분열로 인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국회와 정부는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정책 제정과 시행을 통해 우리의 경제·산업 환경을 보다 선진화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