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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獨島)는 어느 나라의 영토인가?

대모달 |2011.12.02 20:17
조회 157 |추천 3

 

서귀종(徐貴鐘) 전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제1전투분대장 "가늠자가 없었다. 1발 날리고, 2발, 3발, 4발 날린 것이 후미에 떨어지는 것이라... 5발째 때렸는데 그게 일본 경비정 후미에 맞았다."

한반도에서 6.25 전란(戰亂)이 끝날 무렵, 동쪽 땅끝 독도(獨島)에서는 또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은 자주 독도 상륙을 시도했고 독도가 자기들의 땅이라며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행정적, 군사적으로 공백기였던 그때에 독도를 지켜냈던 것은 군인들이 아니었다. 6.25 전란(戰亂)에 참전했던 울릉도 청년들... 바로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였다.

정원도(丁元度) 전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제2전투분대장 "독도가 자구 倭놈들 땅이라고 팻말을 갖다가 꽂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나섰지요."

현재 생존해 있는 대원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 당시 교전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서귀종(徐貴鐘) "그때 후미까지 들어와 도발할 때에는 아, 이거 상륙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래서 우리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제1전투분대장 서귀종(徐貴鐘)씨를 비롯해 제2전투분대장 정원도(丁元度)씨도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정원도(丁元度) "비행기도 뜨고... 그때 순시선이 곁에까지 온 걸가지고 총을 브릿지에다 쏘고 박격포도 배 위에 덜어지고..."

정식 군인들도 아니었고 오로지 내 땅을 지키고자 수행했던 용감한 전투...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들의 터전을 지켰다.

홍순칠(洪順柒) 전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대장의 부인 박영희(朴英喜) "완전히 목숨을 내놓은 싸움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그쪽은 비행기도 뜨지, 군함 같은 것이 와서 각오하라 하고..."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만일 그들이 지켜내지 않았다면 이 땅은 과연 누구의 땅이 됐을까? 그들이 지켜낸 독도는 한점 등대불을 밝히고 온전한 대한민국의 영토로써 동쪽 땅끝 민족의 땅으로 우뚝 솟았다.

도쿄 중심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독도를 다케시마로 알고 있으며 그들의 고유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인 기자 "다케시마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도쿄 시민 1 "네, 요즘 문제가 되고 있지요."

한국인 기자 "어느 나라의 영토로 알고 계십니까?"

도쿄 시민 1 "나는 일본 사람이니까 당연히 일본 것이라고 해야지요.(웃음)"

도쿄 시민 2 "당연히 일본 영토이지요."

한국인 기자 "근거는 뭡니까?"

도쿄 시민 2 "그건 모르지요."

도쿄 시민 3 "매스컴이나 뉴스 보도를 통해서 일본 영토라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패배의 아픔을 씻어내고 지금의 성장을 이룩한 일본. 그러나 독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모습에서 과거 침략과 수탈 및 학살을 일삼았던 일본 제국주의의 모습이 비춰져 있다. 끊임없는 그들의 타국 영토에 대한 야망이 오늘날 독도의 모습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 측 주장 "독도는 일본의 점유가 성립된 적이 한번도 없다."

일본 측 주장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일본이 유리하다."

한국 측 주장 "일본의 영토라는 생각은 억지 주장이다."

일본 측 주장 "한국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다."

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독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독도의 역사는 울릉도를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일찍부터 울릉도는 독도를 품고 섬나라 우산국(于山國)을 건설했다. 이곳에서 발견된 장신구 등이 신라 지배층의 것과 일치하는 것을 볼때 고대 섬 왕국은 신라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512년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夫)에 의해 멸망된 우산국은 한줄의 역사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夫)가 울릉도와 독도를 복속시킨 후 한국의 역사에 나타난 울릉도와 독도) 그러나 이것이 바로 독도가 한국 역사에 나타난 첫번째 기록이다. 울릉도와 독도를 아우른 우산국(于山國)이 512년 신라에 편입되면서 독도는 1500년의 세월을 이어온 우리 고유의 땅이 됐다.

시모조 마사오 일본 타쿠쇼쿠대학 교수 "실제로 한국의 문헌을 읽어보면 한국 측의 주장대로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가장 명확한 문헌으로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꼽을 수 있다. '동쪽 바다 한가운데 우산, 무릉 두 섬이 있으며... 날씨가 청명하면 서로 볼 수 있다.'는 기록이다.

임영정 동국대학 교수 "일설에 일본인 학자들은 그것이 바로 울릉도(鬱陵島) 옆에 붙어있는 죽도(竹島)가 아니냐 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아니다. 청명한 날씨 뿐만이 아니라 안개 끼는 날, 비오는 날에도 죽도는 언제든지 보인다. 청명한 날씨에 울릉도에서 보이는 섬이라 하면 독도 밖에는 없다. 그 독도를 우산도(于山島)라고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측의 논리는 문헌에 나오는 독도(獨島), 즉 우산도(于山島)에 관한 기록을 부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시모조 마사오 교수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속의 우산도(于山島)를 모두 다케시마(독도)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것은 울릉도의 속도(屬島)라는 것에서 울릉도가 신라의 영토가 됐을 때부터 다케시마는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우산도는 울릉도이다. (우산도(독도)를 부정하며 한국은 독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는 주장)'

일본은 우리 문헌에 나오는 기록을 왜곡 해석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 주장의 핵심은 우산도(于山島) 비존재설.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규정하고 독도의 존재는 원래 없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 교수 (일본계 귀화인) "자기들이 갖고 싶은 것이 뭔가 있을 때에 자료를 왜곡하고 논리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 일본 특유의 논지 전개 방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왜곡해서 일본 학자들은 우산도와 울릉도가 나란히 적혀있고 본일도(本一島)라 했기 때문에 하나의 섬이라 해석했다.

임영정 교수 "그것은 하나의 부속된 섬이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해석하는데 자기들이 편의한 쪽으로 해석해서 울릉도와 우산도가 한 섬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지만 우산도와 울릉도는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하나의 영역에 속하는 섬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한문 해석을 제대로 해야 한다."

풍일청명(豊日淸明)한 날에 보인다는 의미도 육지에서 울릉도가 보인다는 것으로 일본 측의 문헌 해석의 오류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지도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보충하기 위해 제작된 팔도총도(八道總圖)에는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鬱陵島)가 따로 그려져 있다. 만일 한 섬이라고 인식했다면 이렇게 두개로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

한상복 국회도서관 독도자료실 연구위원 "팔도총도(八道總圖)에 나오는 지도에는 분명히 울릉도가 밖에 있고 우산도가 안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비록 잘못 그려진 것이지만 동해(東海) 멀리 있는 두 개의 섬으로 인식했다고 이해한다면 정확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만족할만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지도의 크기와 위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우산도(于山島)를 독도가 아니라고 평가하지만 문헌에 나와있는 대로 우산도와 울릉도는 분명 동해에 있는 두개의 섬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나카무라 아키라 일본 도쿄대학 교수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가 양국 모두의 고유 영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유의 영토라고 말하려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 어느 나라 쪽이 더 가까울까? 양국 본토에서 독도와의 거리를 비교해보면 일본이 조금 더 가깝다. 그런데 거리상의 문제라면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울릉도를 주목해야 한다. 우산국 시대부터 독도는 울릉도의 생활권에 존재했다. 그 이유는 두 섬이 서로 보일 정도로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측은 거리상의 문제를 들어서 독도와 울릉도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의 외무성 관리인 가와카미 겐죠는 둥근 지구에서 두 물체가 서로 보일 수 있는 거리 계산법을 인용하며 울릉도와 독도가 서로 볼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높은 곳에 올라가면 그만큼 더 멀리 보일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를 그는 계산에 넣지 않았다. 해발 594m의 독도 전망대. 과연 독도를 볼수 없는 걸까? 평소에는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구름 없고 바람 한점 없는 날, 1년에 65일을 가려서 어김없이 한점의 섬 독도가 보인다.

L1^2=((6370 + X)^2-6370^2)=(6370 + X)^2-40576900
L2^2=2165.82

(L1^2+L2^2)^1/2>89.49km

(6370 + X)^2 - 40576900 + 2165.82 >89.49^2

(6370 +X )^2- 40576900 + 2165.82 >8008.46

(6370 +X)^2>40582742.64
(6370 + X) > 6370.458

X >0.458KM

풍일청명(豊日淸明). 맑은 아침 오전 햇살에 모습을 드러낸 독도. 과연 우리의 선조들은 가장 정확한 조경(潮境)으로 우리의 땅 독도와 마주하고 있었다.

일본 남서부에 있는 시마네현. 동해를 사이에 두고 한국에서 가장 가가운 일본 땅이다. 일본에서 독도가 다케시마로 소속돼 있는 현청 소재지. 그만큼 독도 반환을 요구하는 운동이 활발하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가 이곳 민주당 대표 하마구치. 최근 하마구치의 일가족 네명이 모두 독도로 호적을 옮겨서 화제가 됐다. 한국의 불법적 독도 점령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는데.....

하마구치 가즈히사 시마네현 민주당 대표 "호적은 일본 국내 어디라도 옮길 수가 있다.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도 마찬가지다."

독도를 자신들의 땅으로 인식하고 호적을 자유자재로 옮기는 일본인들. 하마구치처럼 독도로 호적을 옮긴 일본인의 수가 적지 않다. 정치인이나 언론인과 같이 여론을 선동하는 일본인들은 독도가 일본의 역사였다고 주장한다.

하마구치 가즈히사 시마네현 민주당 대표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는 에도시대에 마츠시마[松島]라고 불렸다. 그때 에도막부의 허가를 받아 돗또리현의 오끼번에 있는 오오타니와 무라카와 가문이 다케시마와 울릉도를 포함해서 강치잡이 등 어업 활동을 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시마네현 현청 소재지에서 차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요나고시. 이곳 산음역사관(山陰歷史館)에는 일본이 울릉도와 주변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근거 자료가 있다. 17세기 초 요나고 사람 오오타니가 동료 무라카와와 함께 면허를 신청했다. 그래서 특이하게도 이곳 박물관에는 울릉도 지도가 걸려있는 것이다.

일본 막부로부터 받은 도해(渡海) 면허가 바로 울릉도를 경영했다고 주장하는 결정적인 근거라는 것이다.

후쿠하라 노리아키 산닌 역사관장 "저 소장품은 1618년 오오야진기치가 에도막부에게 다케시마(울릉도)에 가도 되는지를 신청해서 가도 된다는 허가를 받은 허가서이다."

오오타니와 무라카와 가문의 어부들은 에도막부의 허가를 상징하는 막부의 문장을 달고 울릉도 어장 주변에서 어업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조선은 왜구와 해적들의 침입으로부터 섬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섬을 비우고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해금정책을 펴고 있었다.

임영정 교수 "그 일본의 막부가 울릉도를 경영했다는 논리가 잘 맞지 않다. 도해 면허라는 것은 일본의 막부에서 필리핀의 루손이라든지 또는 베트남의 안남이라든지 또는 버마와 같은 곳에 갈 때도 역시 도해 면허를 주었다. 그것은 막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채 외국에 나가는 선박은 위법적인 항해를 한 것이 된다."

외국으로 나가도 좋다는 단순한 허가증이 그 땅을 경영했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남의 나라 땅임을 분명히 한 증거가 된다.

나이토 세우츄우 시마네대학 명예교수 "막부의 지배 하에 있는 땅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막부의 땅이라면 당시 다케시마(울릉도) 도해를 특별히 허가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영토권의 포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17세기 이후 일본인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드나들면서 그 존재를 알게 됐고 비로소 독도에 대한 기록도 일본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본 측은 독도에 관한 일본의 최초 문헌으로 '은주시청합기(殷州視聽合紀)'를 들고 있다. 은주시청합기(殷州視聽合紀)란 은주의 한 관리가 오끼섬을 관찰하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로서 바다를 표류하다가 보고 들은 내용을 말한다.

신용하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1952년부터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도발을 해왔는데 한국 외무부가 독도를 최초로 거론한 일본의 고문헌을 보내오라는 요구를 했다. 그랬더니 책 이름만 적어서 보내온 것이 1667년에 편찬된 은주시청합기(殷州視聽合紀)란 책이다."

은주시청합기(殷州視聽合紀)의 내용을 보면 '오끼섬에서 1박 2일을 가면 송도(독도의 옛 이름)가 있고 하루를 더 가면 죽도(울릉도의 옛 이름)가 있다. 이 두섬은 무인도인데 고래를 보는 것이 마치 은주에서 오끼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즉 일본의 경계를 은주로 삼는다.' 결국 이 보고서는 일본 서북 경계를 오끼로 기록하고 있다.

신용하 교수 "독도와 울릉도는 조선 영토이고 일본의 서북 경계는 은기도에서 끝난다는 것을 기록한 귀중한 역사 문헌이고 이 자료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료하게 증명해주는 일본 최초의 기록이다."

도해 면허를 받도 울릉도에 출몰해 고기잡이를 하던 일본인들은 조선 어민 안용복(安龍福)을 만나게 된다.

박상규 독도박물관 학예사 "남의 땅에 들어와서 조선 정부 몰래 신나게 고기잡이를 한 것이다. 그러다가 1693년에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터진다."

일본의 어부들과 실랑이를 벌였던 안용복 일행은 붙잡혀서 일본 땅에 끌려간다.

박상규 학예사 "여기서 안용복은 울릉도는 조선 땅이다. 조선인이 조선 땅에 들어와 고기잡이를 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되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가. 이런 내용의 반박을 하게 된다. 그 논리가 정연했고 위압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측은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며 이 내용이 에도막부에 보고가 된다."

안용복이 강제 연행됐던 돗또리현. 그는 이곳 태수에게 남의 땅에 들어가 불법 조업을 하는 일본 어부들을 단속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안용복이 다녀간 후 막부는 조선과의 마찰을 우려해 울릉도가 막부의 땅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이곳 돗또리현 박물관에는 막부와 돗또리현 태수가 울릉도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죽도 즉 울릉도가 누구의 영토인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으며 이때 독도도 거론되어 있다.

사카모토 게이지 돗또리현 박물관 학예원 "이것은 돗또리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데 울릉도가 이 안에 나온다. 1694년 에도막부는 다시 한번 돗또리 번주에게 마츠시마(松島)라는 섬은 어떤 섬인지 묻는다. 그때 돗또리번은 울릉도에 가는 도중에 있는 섬이며 마츠시마(松島)는 어느 나라의 섬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막부는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규정하고 일본인들의 도해를 금지시키기에 이른다.

후쿠하라 노리아키 관장 "약 80년간 어업을 했는데 여러가지 문제가 생겨 그후 에도막부는 다케시마(울릉도)에 가서는 안된다는 금지의 문서이다."

이로써 오오타니 가문에 내려진 도해 면허도 자동적으로 취소되고 일본인들은 울릉도와 독도에서 물러난다. 안용복을 통해서 우리가 한가지 더 짚어볼 문제가 있다.

박상규 학예사 "일본은 조선의 해금정책에 위해서 울릉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조선의 어부들은 1천여년동안 자기들이 그렇게 해 왔듯이 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계속 꾸준히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갔었고 또 울릉도에 머물러 있었고 울릉도는 한번도 우리 역사와 단절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인 없는 땅을 경영했다는 일본 측의 논리. 그러나 안용복의 활약으로 이 땅이 늘 우리 민족의 품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용복(安龍福) 사건 이후 조선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에 자주 조사단을 보냈고, 그 결과 17세기 이후의 지도에는 우산(于山) 즉 독도가 울릉도의 오른편에 정확하게 표기된다. 이것은 일본의 지도에서도 마찬가지. 1873년 조선국 세견전도(朝鮮國歲遣全圖)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강원도와 같은 색으로 칠하고 명백히 조선 땅임을 표시하고 있다.

박상규 학예사 "17세기에 안용복 사건이 터지고 난 후부터는 독도는 울릉도의 동쪽에 있다는 인식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17세기 이후의 지도에는 반드시 울릉도 동쪽에 독도를 표기한다."

그런데 천하도 강원도편에 보면 우산도, 즉 독도의 위치가 조금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울릉도 아래쪽에 독도가 그려져 있는 것. 이것은 다른 천하도를 살펴봐도 마찬가지인데, 당시 지도는 판각으로 인쇄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판각에 여유가 없으면 아래쪽에 그려넣을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유무(有無). 그 위치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태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해좌전도(海左全圖)는 김정호(金正浩) 선생이 판각을 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대강 19세기 중엽 정도에 판각을 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거기에는 울릉도와 울릉도의 우측... 동쪽에 독도... 우산도다. 우산도를 정확하게 표기를 하고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조선 최고의 지도 제작자였던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독도가 빠져 있다는 사실. 그것은 일본 측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뜻밖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발견됐다. 울릉도 옆에 판각의 범위를 벗어난 곳. 바로 그곳에 우산도(于山島)가 분명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틀림없이 한사람이 제작한 것으로 볼수 있는 동일한 필체와 그림이다.

육지와도 멀리 떨이진 곳.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지도를 만들 때 독도를 잊지 않았다. 동해 바다. 우리의 영토 끝에는 언제나 우산(于山), 즉 독도(獨島)가 새겨져 있다.

일본 최고의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 그는 1785년 중국, 한국, 일본을 아우르는 삼국접양지도(三國接洋地圖)를 제작했는데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과 같은 색으로 칠하고 '조선의 것'이라며 보충설명을 덧붙였다. 이러한 일본 지도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일본 자료가 된다.

지도 뿐만 아니라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에서는 독도와 관련해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나이토 세이츄우 시마네대학 명예교수 "메이지시대[明治時代]가 되고 일본과 독도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는 메이지 10년 태정관(太政官)에서 나온 유명한 문장이 있다.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다케시마도 울릉도도 일본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결론이 된다."

일본 국가 최고 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의 결정은 1882년 이노우에 문서에 잘 나타난다. 울릉도와 독도에 진입하는 일본 어민은 처벌한다는 내용. 일본은 지금까지 이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다.

나이토 세이츄우 교수 "그러나 지금까지 일본이 숨기고 있었다. 이걸 찾아내 세상에 알린 것은 한국인 학자이다."

독도와 가장 가까운 일본의 오끼섬. 독도를 다케시마, 즉 죽도(竹島)라 부르며 독도 반환운동이 가장 거세게 일어나는 곳이다. 곳곳에 새겨진 섬과 바다가 함께 돌아오라는 문구가 이곳의 분위기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독도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일본 땅 오끼섬. 그만큼 이곳은 독도와 아주 관련이 많다.

오끼섬에서의 독도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오끼섬 향토 역사박물관. 향토역사박물관에는 독도관을 따로 마련해둘 정도로 독도가 한때 자신들의 영토였음을 잊지 않고 있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 즉 죽도(竹島)로 이름하고 이곳 오끼섬 관할의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병합하고 난 후에는 오끼 사람들의 어업 근거지가 독도라고 말할 정도로 독도아말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가장 먼저 희생된 한(恨)의 땅이다.

독도가 오끼섬으로 편입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오끼섬의 자민당 사무실에서 우연히 듣게 됐다.

하시모토 이세코 오끼섬 자민당 지방의원 "나카이 요사부로가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에 숙박할 생각으로 텐트를 치고 고기잡이를 했다. 당시 다케시마에서 잡은 강치로 가방을 만들어 영국 런던 박람회에 출품해서 상도 받고..."

강치는 물개의 일종으로 독도 주변에 무리를 지어 살았다고 전해진다. 나카이 요사부로는 이 독도의 강치를 잡기 위해서 정부에 어업권을 요청했다. 일본의 독도 침탈에 빌미를 제공한 오끼섬의 수산업자 나카이 요시부로. 독도의 물개잡이 독점권을 얻은 그는 본격적으로 물개 사냥에 나선다. 그로 인해 독도에 살고있던 수많은 강치들은 나카이 요사부로에 의해 철저하게 멸종당했고, 한해에 잡은 강치의 양만 해도 수천마리. 지금은 독도에서 단 한마리도 볼수 없는 강치. 독도의 주인이었던 물개는 주권을 잃은 나라의 땅에서 멸절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1910년 한반도의 주권이 일본에게 빼앗기기 전, 이미 독도는 일본 땅에 편입되기 사작한다. 그 증거를 이곳 시마네현 현청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1905년 2월 28일 내각회의를 통해서 시마네현에 거주하는 나카이 요사부로의 독도 어업권을 승인하는 형식을 취해 독도를 '주인 없는 땅'으로 몰아서 일본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 내무부는 이러한 일본 내각회의 결정을 시마네현에 통보한다.

그리고 시마네현은 일주일 후 시마네현 고시를 발하게 되는데 이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결정적인 근거로 사용된다.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끼섬으로부터 85해리 떨어진 무인도를 다케시마로 정하고 시마네현 소속 오끼도사의 소관으로 정한다. 시마네현 오끼섬 고카무라촌. 그때부터 독도는 이중국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야와타 쇼자 고카무라촌 어업협동조합장 "다케시마(독도)의 어업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1928년 당시 일본돈 20엔으로 국가와 현에 신청을 해서 어업 허가를 받았다."

독도에서 강치가 멸종될때까지 철저하게 수탈해간 일본 제국주의자들. 시마네현 고시야말로 남의 나라 땅을 집어삼킨 제국주의의 야욕을 그대로 드러낸 증거물이다.

이상태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독도를 일본의 영토에 편입시키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한국 정부에 통보한 사실이 없다."

시마네현 고시가 있기 1년 전, 일본 정부는 서구열강으로부터 한국을 지켜준다는 거짓말로 명분을 만들어 독도에 망루를 세우며 대륙침탈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한상복 국회도서관 독도자료실 운영위원 "한일의정서의 기본 명제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대한제국의 영토를 보전해준다고 하면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영토를 빼앗아가는 몰염치한 행동을 한 것이 바로 독도 문제를 부각시킨 것이다."

나카무라 아키라 일본 도쿄대학 교수 "한국 측은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것이 불법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전에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에 어떠한 통치행위를 했는지 밝혀야 한다."

시마네현 고시를 발할 때 독도를 '주인 없는 땅'이라 했지만 이미 대한제국 정부는 시마네현 고시보다 5년이나 앞서 독도에 대해 행정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대한제국 정부 칙령 제41호 행정개편을 통해서 울릉도와 그에 딸린 섬들을 하나의 군(郡)으로 통합, 울릉도주를 군수로 승격시켰다. 여기에 독도가 분명히 울릉도에 속한 섬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상태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석도(石島)에 관해 해석이 분분한데, 석도는 곧 독도를 가리키지만 일본 학자들은 이 석도를 문제삼고 있다."

시모조 마사오 일본 타쿠쇼쿠대학 교수 "한국이 독도라고 말하는 것은 1904년 전후이다. 따라서 석도(石島)가 독도(獨島)일 리는 없다.

나이토 세이츄우 일본 시마네현 대학 명예교수 "돌[石]이라고 하는 것은 전라도 방언의 발음으로 '독'이라고 발음하는데 실제 울릉도 사람들은 '독도(獨島)'로 부르고 있었다. 이것을 일본의 군(郡) 공무원이 확인했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참고 자료로 알려진 동여비고(東如備考)에는 독도의 명칭에 대한 열쇠가 있다. 전라도 지방의 섬 지역에서 '독도(獨島)'라는 명칭이 발견된다. 울릉도 사람들은 '돌섬'을 전라도 방언 그대로 독도라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어떻게 해서 독도(獨島)를 죽도(竹島), 즉 다케시마라 부르게 된 것일까? 그런데 이상한 점은 1800년대에 제작된 지도를 보면 을릉도(鬱陵島)가 다케시마, 즉 죽도(竹島)로 표기되어 있고 독도(獨島)가 마츠시마, 즉 송도(松島)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또한 그 당시에도 한반도와 같은 색으로 칠해서 두 섬이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오랜 세월 다케시마, 즉 죽도(竹島)라는 명칭은 울릉도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죽도(竹島)가 독도의 일본식 명칭으로 굳어진 것일까?

17세기 울릉도와 독도를 표기한 일본의 옛 문헌에서도 죽도(竹島), 즉 다케시마는 울릉도의 일본식 명칭이었다. 1808년 조선왕조 정부가 편찬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을릉도와 우산도(于山島)는 우산국 땅이며 이 우산을 倭 人들은 송도(松島)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죽도(竹島)와 송도(松島). 일본인들은 왜 이 두 명칭을 뒤바꾼 것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국회도서관의 독도자료실을 찾았다. 독도와 울릉도를 기록하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지도를 살펴보면서 일본 지도에서 일어난 섬 이름의 혼란을 정리해 보았다.

한상복 국회도서관 독도자료실 운영위원 "우리 명칭은 당연히 우리의 영토이니까 변하지 않고 독도는 울릉도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서양 지도에는 우리 고지도와는 다르게 울릉도의 북서쪽에 아르고노트라는 섬이 표기되고 있다. 이 아르고노트라는 섬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1787년 울릉도를 발견했던 프랑스 선박은 그 섬의 이름을 다줄레(Dagelet)섬으로 명명했다. 그런데 1797년 영국 어선이 측량을 잘못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섬 아르고노트(Argonaut)가 지도에 표기됐다. 이후 1849년 프랑스 어선이 독도를 발견하면서 리앙고르트 락스(Liancourt Rocks)로 명명됐고, 서양인들의 지도에는 리앙고르트(Liancourt), 다줄레(Dagelet), 아르고노트(Argonaut) 이렇게 세개의 섬이 동해상에 그려졌다.

그러나 실제 측량 결과 그 존재가 의심스러워진 아르고노트(Argonaut)섬은 점선으로 표기됐다. 이후 일본은 잘못된 서양의 지도 표기를 비판없이 받아들이면서 독도 위치에 울릉도 모양을 한 송도(松島)와 아르고노트(Argonaut)섬 위치에 점선으로 죽도(竹島)를 그리는 등 일대 섬 이름에 혼동이 일어난다. 섬 명칭에 혼란을 가중시킨 것은 독일인 시볼트가 1840년에 제작한 일본 지도. 시볼트의 지도에 보면 일본의 전통적인 송도(松島)와 죽도(竹島)의 표기를 서양의 지도에 표기된 아르고노트(Argonaut)와 다줄레(Dagelet)에 대입하면서 아르고노트(Argonaut)는 죽도(竹島) 즉, 다케시마가 되고 다줄레(Dagelet)는 송도(松島) 즉 마츠시마가 된다.

이후 아르고노트(Argonaut)가 존재하지 않는 섬으로 밝혀지면서 울릉도는 마츠시마, 즉 송도(松島)로 불리게 되며 독도는 리앙고르트(Liancourt)라 불리게 된다. 다케시마의 명칭은 지도에서 없어져 버렸다.

시모조 마사오 일본 타쿠쇼쿠대학 교수 "시볼트가 제작한 일본 지도가 있는데 마츠시마와 다케시마가 혼동되고 있다."

임영정 동국대학 교수 "일본 측은 송도(松島)와 죽도(竹島) 명칭 혼란의 모든 원죄를 시볼트에게 돌리고 있다. 시볼트가 일본을 살펴보고 본국에 돌아가서 지도를 제작할 때 임의로 제작하면서 서양의 잘못된 지식이 다줄레(Dagelet)와 아르고노트(Argonaut)를 거기에다 첨가시켰기 때문에 그만큼 명칭에 혼란이 왔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시볼트의 일본에 그려진 지도는 바로 일본의 뎃몬강가에서 만들어진 지도다. 그 사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의 지리적인 지식이 그 당시에 그 정도 수준밖에 안됐다는 것이다. 저들의 명칭의 혼란이 이어져서 그것이 20세기 초반까지 그대로 이어져왔다는 것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지리적인 지식이 우리보다 훨씬 결여됐다는 사실의 근거가 된다."

섬 명칭을 혼동한 것은 그만큼 두 섬에 대한 인식이 떨어짐을 증명하는 좋은 예이고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섬의 명칭의 혼란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지금 일본이 말하는 다케시마는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서 독도를 강제 편입할때 처음 사용했던 명칭이다. 결국 안용복 사건 이후 울릉도와 독도에 갈수 없었던 일본인들은 섬에 대한 지식이 점점 희박해져 갔다. 그 결과 일본은 그들이 일본의 고유영토라 주장했던 두 섬의 위치와 이름조차 혼동한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일본은 지금도 독도에 대한 영토확장의 야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일장기를 앞세우며 독도를 강탈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반도를 점령한 후 대륙으로 그 침략의 야망을 넓혀 나갔다. 그 침략의 총구 앞에서 무수히 수탈당한 민족수난의 상징 독도. 독도의 운명은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했다. 대한민국 동쪽 땅끝으로 온전히 지키게 해준 자랑스러운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홍순칠(洪順柒) 전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대장의 부인 박영희(朴英喜) "독도는 우리 땅이니까 더 가까이 오면 안된다고 하고 훈계를 해서 몇차례 보냈다. 그 다음에는 정식으로 군함을 갖추고 비행기도 띄우고 이러니까 여기도 전투준비를 해야 할것 아닌가."

정원도(丁元度) 전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제2전투분대장 "만약에 상륙한다고 하면 우리는 꼭대기에 섬이 아주 가파르게 돼 있으니가 요소요소에 배치를 하고 사격훈련도 하고 그랬다, 그 당시에..."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 울릉도에 돌아온 이 젊은이들은 다시 독도로 떠났다.

서귀종(徐貴鐘) 전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제1전투분대장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독도를 우리가 지켜애 되겠다는 생각으로 여기를 만약에 뺏겨서 倭놈들이 들어오게 되면 옛날 일제강점기에 우리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는데 만약 독도가 일본령으로 넘어간다고 한다면..."

그들이 생존권을 위해서 떨쳐 일어났던 홍순칠 의용수비대장과 36명의 독도의용수비대원들. 이들이 바로 독도를 지켜낸 것이다.

동해의 작은 섬 독도. 울릉도와 어우러지며 수천년을 살아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한 섬. 독도의 운명은 바로 우리의 운명이다. 다시는 이 땅에 침략의 고통이 스며들지 않도록 우리는 온전히 이 땅을 지켜가야 할 것이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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