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군사들은 묵묵히 초원을 가로질러갔다. 광개한 그곳은 쉽사리 끝을 드러내지 않았다. 태왕은 막리지(莫離支) 하무지(河茂祉)와 함께 선두에 서서 지친 군사들을 독려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날이 어두워지자 태왕은 군사들에게 행군을 멈추고 진을 치게 했다. 두세 시간이 지나자 휑한 초원 위에 거대한 요새가 만들어졌다.
파수병을 빼고 모두가 잠든 시간, 태왕은 막사를 나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광막한 초원과 하늘 사이에 수많은 별들이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문득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무시지 않고 왜 나와 계시옵니까? 밤바람이 매우 찹니다.”
뒤를 돌아보니 하무지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태왕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는 막리지야말로 왜 잠을 청하지 않는 것입니까?”
“허허… 군주가 쉽게 잠에 이르지 못하는데 신하 된 자로서 어찌 마음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어제 행군이 좀 고되어 병사들에게 피로가 많이 쌓였습니다. 아마 짐에게 자만심이 생기는 것을 훈계하는 하늘의 뜻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은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태왕은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저 하늘에 뜬 수많은 별들을 보십시오. 광막한 초원과 하늘 사이에 환한 빛을 뿜어내는 저 별들은 너무 크고 환해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아요. 혹시 짐이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을 쫓고 있는지도 모르겠소.”
하무지는 태왕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행동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폐하께서는 저 별들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니 꼭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만 자기가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손으로 잡을 수 없다면 자신의 마음에 품고 사십시오. 그래야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무지는 태왕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아들에게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는 자상한 아버지 같았다.
동이 트고 아침 식사를 마친 고구려 군사들이 막 행군 준비를 하려는데, 갑자기 전고(戰鼓)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광개토호태왕은 하무지와 함께 전략을 의논하다가 북 치는 소리를 듣고 막사 밖으로 뛰어나갔다. 고타하(高他荷)가 태왕에게 달려와서 아뢰었다.
“이곳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거란 군사가 나타났다고 하옵니다!”
태왕이 전방을 주시하니 멀리서 한 떼의 군마가 고구려군 진영을 살피고 있었다.
고타하가 태왕에게 청했다.
“소장이 당장 달려가서 저들을 생포해 오겠사옵니다.”
태왕 곁에 시립하고 있던 하무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들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좋겠소. 저들이 본격적인 교전 태세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도 거란의 정찰대일 것이오. 분명 저들 뒤에 많은 수의 병사들이 따르고 있을 것이오.”
고타하는 당장이라도 달려나가고 싶었지만 군령도 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거란의 정찰대가 사라지고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거란 군사들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아군의 총병력이 1만 5천인데, 적군은 1만도 안 되어 보입니다. 지금 군사들에게 명령해서 들이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철기군주(鐵騎軍主) 모두루(牟頭婁)가 선제 공격을 건의했으나 태왕은 침착하게 기다리라고 일렀다.
“아직 적군의 병력이 모두 나타난 것이 아니다. 아군에게 아무리 최정예 부대인 개마기사단(鎧馬騎士團)이 있다고는 하지만 거란의 기마전(騎馬戰)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함부로 싸움을 걸면 도리어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상황을 침착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잠시 거란족의 진영을 살펴보던 하무지가 태왕에게 말했다.
“지금 거란군의 형세를 보아하니 아마 차륜전법(車輪戰法)을 활용한 기마궁술(騎馬弓術)로 싸울 태세인 듯하옵니다. 우리가 힘들이지 않고 저들의 대열를 무너뜨리려면 첨자방진(尖字方陣)을 형성해서 정면과 좌·후 측면 방향으로 동시에 돌격해야 하옵니다.”
“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소.”
태왕은 모두루를 돌아보며 지시했다.
“모두루 장군, 들었는가? 지금 말한 진형으로 대오를 형성하게.”
“예, 폐하!”
모두루는 군마에 올라 장검(長劍)을 빼어들고 군사를 지휘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란족 병사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목책에 있던 기수(旗手)가 모두루의 명령에 따라 군기(軍旗)를 흔들자 고구려군 병사들은 능숙하게 진을 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거란군은 부대별로 공격대열을 갖추고 다섯 방향에서 군마를 몰아 공격해 들어왔다. 거란군의 전술은 단순하지만 위협적이었다. 갑주조차 입지 않은 경기병(輕騎兵)들이 빠른 속도로 고구려군 진영에 접근해서 활을 쏘고 지나갔다. 선두에 서 있던 고구려군 보병 수십명이 거란군의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모두루는 궁수(弓手)들로 하여금 즉각 응사하도록 했다. 하지만 거란군 경기병들의 움직임이 워낙 빨라 쉽게 맞히지 못했다. 거란군의 민첩한 움직임에 당황한 고구려 군사들은 제대로 반격을 못하고 크게 겁을 먹은 듯했다.
고구려군의 소극적인 대응에 자신감을 얻은 거란군은 보다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적군의 예기가 꺾였다. 더욱 몰아부쳐라!”
거란족 장수 소손형거(蕭遜兄渠)는 생각했던 것보다 고구려군의 전투력이 별로라고 얕잡아보면서 일격에 고구려군의 진영을 격파하기 위해 좌우의 병력으로 하여금 고구려군의 양쪽 측면을 공략하게 하고, 스스로 중군을 거느리고 정면으로 쳐들어갔다.
거란군이 고구려군의 진영으로 접근하는 순간, 고구려군이 매우 신속하게 대오를 방진(方陣) 형태로 바꾸었다. 진형의 측면에 포진한 고구려군의 궁수들은 접근해 온 거란족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금방이라도 도륙할 기세로 달려들던 거란 군사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화살을 맞아 숨을 거두었다.
정면에 서 있던 보병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는가 싶더니 그 사이에서 중장기병(重裝騎兵)들이 장창(長槍)을 하늘로 치켜세우고 뛰쳐나갔다. 소손형거는 고구려군의 진법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미치자 상대를 가볍게 본 자신의 실책을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되돌리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고구려의 개마기사단(鎧馬騎士團)은 철갑을 둘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렵하게 움직이며 거란 군사들을 무찔렀다. 거란 군사들도 이를 악물고 대적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소손형거는 고구려군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절망했다. 아무리 달아나려고 발버둥쳐봐도 호랑이의 날카로운 송곳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소손형거는 속수무책으로 부하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공포와 무기력감을 느껴야 했다.
이때 누군가 고각함성을 내지르면서 소손형거의 목숨을 노리는 인물이 있었다.
“고구려의 신성에서 온 고타하가 거란 장수의 목을 가져간다!”
고타하(高他荷)가 날카로운 기창(旗槍)을 앞세우며 소손형거에게 달려들었다. 소손형거는 황급히 칼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고타하의 무예가 한 수 위라 대적하기 어려웠다.
소손형거는 채 10여합도 버티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고타하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소손형거는 고타하의 창 끝에 등을 찔리며 마상(馬上)에서 떨어졌다.
거란 군사들의 주검으로 가득한 초원 위로 독수리 한 무리가 날고 있었다. 새카맣게 시체를 덮고 있던 까마귀 떼들이 독수리의 출현에 놀라서 일제히 날아올랐다. 세상은 온통 검은 날갯짓으로 뒤덮였다.
초원에서의 전투는 고구려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고구려 군사들은 거란 군사들의 주검을 뒤로 하고 포식한 호랑이처럼 여유 있게 새로운 땅을 향해 나아갔다.
저녁 무렵 모두루가 이끄는 선봉 부대가 행군을 멈추고 진영을 세우고 있는데 한 떼의 인마가 나타났다. 모두루는 다시 거란족이 쳐들어 온 줄 알고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그들이 눈으로 명확하게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모두루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들의 행색은 거란족이 아닌 고구려인에 가까웠고, 고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겨운 얼굴들이었다.
모두루는 앞으로 나서며 그들을 맞이했다.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자가 모두루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저희는 지난날 손성자성과 요하 인근에 살던 고구려의 양민입니다. 거란족에 의해 강제로 이곳까지 끌려왔지만 한시도 조국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이처럼 거란족을 응징하시고 저희를 구원하러 오셨다 하니 망극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모두루는 사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간 얼마나 고초가 많았소? 내 폐하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그대들을 돌보지 못한 죄책감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소. 이제 폐하께서 오셨으니 그대들을 무사히 고향으로 데려다주실 것이오.”
모두루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평소 냉철하기로 소문난 모두루였기에 가까이에서 받드는 군사들조차 눈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고초를 겪은 백성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이었다. 모두루는 그만큼 백성들을 제 몸처럼 사랑했다.
숙연한 분위기가 되자, 모두루는 감정을 추슬렀다.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되오?”
“거란족이 우리를 이곳으로 무작정 끌고와 무리를 나누고 영자(營子)를 이루어 살게 했습니다. 지금 북쪽으로 보이는 초원에서 약 사오십개의 영(營)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일만 정도는 될 것입니다.”
“우리 군사가 이곳에 온 것은 어찌 알았소?”
“저들은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방에 군막을 설치하고 감시해 왔는데, 얼마 전부터 군막의 거란 군사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분명 큰 싸움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청년들을 보내어 주변을 살폈습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이렇게 태왕(太王) 폐하(陛下)의 군대를 만나게 되다니 꿈을 꾸고 있는 듯합니다.”
“곧 폐하께서 당도하실 것이니 기다려보시오.”
모두루는 고구려 유민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면서 태왕의 본대가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수많은 횃불의 물결이 초원의 밤길을 대낮처럼 밝히며 밀려왔다. 태왕의 서방 정벌을 상징하는 백호기(白虎旗)가 거센 바람에 흔들리자 깃발 속의 백호는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태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짐의 불찰로 너희들이 고통을 당했구나. 짐을 용서하거라.”
태왕의 사과 한마디에 그동안 겪었던 고초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가까운 곳에 저희들이 만든 마을이 있사오니 그곳으로 가시옵소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폐하를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사옵니다.”
태왕은 기꺼이 그들을 따라나섰다.
광개토호태왕이 사내들을 따라 마을에 도착해보니 가옥들은 비록 초원 위에 세워졌지만 고구려식 건물을 많이 닮아 있었고, 백성들이 입은 옷 역시 양털로 짠 옷감으로 고구려식의 폭이 넓은 윗도리와 통이 큰 아랫도리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마을에는 온통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태왕이 온다는 말에 주변에 있는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이 몰려온 탓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태왕을 직접 보기 위해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태왕의 행차가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일제히 엎드려 태왕을 맞이했다.
태왕은 그 동안 많은 역경을 이겨내며 이곳까지 온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파의 팥뿌리같은 흰 머리와 손바닥만한 아이들의 등, 신산(辛酸)한 초원의 바람을 맞아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사내들의 어깨, 그리고 새카맣게 탄 아낙들의 목덜미를 보고 있노라니 그들이 겪었을 고초가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마을의 회합장에는 태왕을 위한 연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통으로 구운 돼지와 양고기를 비롯해서 고구려의 전통음식인 멧돼지를 불에 구운 맥적(貊炙)과 강정 안주, 고구려식 명주인 곡아주(曲阿酒)가 사람들의 회를 동하게 했다.
장수들과 더불어 자리에 앉은 태왕은 몇 달만에 제대로 차려진 고구려 음식들을 보고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짐이 국내성을 떠난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여기는 거란 땅이 아니라 마치 도성에라도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드는구려.”
하무지가 태왕의 술잔에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이제 곧 여기도 우리 고구려의 땅이 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아직은 거란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연회는 오랜 행군과 접전으로 지친 군사들을 위로하는 자리가 될 것이옵니다.”
촌장이 술잔을 들어 태왕의 만수(萬壽)를 빌고, 고구려 군사들의 승전(勝戰)을 기원하고 나자 흥겨운 술판이 벌어졌다. 태왕과 장수들은 이날만은 마음 놓고 백성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그동안 피로가 쌓였던 병사들도 마음껏 먹고 마시며 흥을 즐겼다.
앞으로 어떤 강적을 만나게 될지, 무슨 고초를 겪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태왕과 고구려군 장수들, 병사들에게 있어 이 시간만큼은 고향에 있는 듯했다.
마을 사람들은 위명이 온 천하를 뒤덮고 있는 광개토호태왕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에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마을 사람들은 병사들과 어울려 한잔 술에 그동안의 시름과 고통, 그리고 그리움을 타서 단숨에 들이켰다. 모닥불도 연신 타오르며 화려하게 춤을 추었다. 초원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