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둥지둥 버지니아를 떠났다.
이슬비가 내리는 페어팩스의 밤길을 정찰한답시고 성급하게 자전거의 방향을 돌려 팽하니 버지니아를 벗어났던 날이 먼 과거가 되었다.
찬바람과 칼바람 무성한 밤길을 달려서 켄터키를 지나고 테네시를 가로질렀다.
테네시의 외곽을 돌아서 체타누가의 밤길에선 아슬아슬한 위태로움도 만났다.
체타누가의 밤길을 스파이처럼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체타누가에서 헌트빌을 향하는 72번 도로상에서 아프리칸 아메리칸들과 두어차례 조우하였다.
심상치가 않았던 밤이었다.
약물 복용자들로 보이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몇명이서 가는 마음 졸이게 하였다.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담배가 있냐고 물어왔다.
이전에 남미에서 당하였던 유사한 케이스였다.
자정이 가까왔었다.
결국 밤행군을 단념하고 근처의 조명밝은 곳 주변에서 머물렀다.
월마트, 주유소, 윈디, 와플하우스, 호텔들이 모여있고 인적이 많은 곳에서 머물면 안심이었다.
피로를 줄이기 위하여 일단 와플하우스를 택하고 들어갔다.
체타누가의 한밤은 겨울의 한밤임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차갑고 추웠다.
당초의 야간 행군이 잠시 연기되었다.
도둑들이나 강도들이 잠들만한 시간인 새벽 3시정도까지 일단 체력을 보강하는 휴식이 최선이었다.
무리하여 행군하다가 저들의 타겟이 돼고 싶지 않았다.
겨울의 차가운 하늘아래에서 와플하우스는 바닷가의 커다란 등대처럼 든든한 안식이 되어주었다.
24시간 레스토랑인 와플하우스는 버거킹이나 맥도날드에 비하여 다소 비싼편이지만 그런대로 이용할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한밤의 위험을 벗어났으며 새벽도 아직 멀기만 한 새벽 3시경에 도로에서 자전거를 지쳐나갔다.
서리와 안개가 호수의 물안개처럼 공기커튼을 만들어 축축하고도 무겁다는 느낌을 들게하였다.
보이지 않지만 얼굴을 덮었던 마스크의 상태를 알수있었다.
서리같은 하얗고 얇은 레이가 소매주변에 보였다.
눈썹과 가려지지 않은 얼굴에도 성애가 낀듯한 그런 차갑고 촉촉함이 마음까지 껄끄럽게 만들었다.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과 입술 주변은 입김으로 축축하여져 찝찝하여 질때까지는 그런대로 제 역할을 하는 듯 뵤였다.
하얀 서리가 깔린 대지와 산길의 계곡나무들은 유령처럼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이런 고달픈 행군도 언젠가 멈추리라..
어떤때는 죽음의 '찬가'라도 부르고 싶은 막판 심정까지 다다랐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어쩌다 한밤의 적막을 찢어대는 개짖는 소리나 폭주족같은 차량소음에 정신이 번쩍 번쩍 들곤 하였다.
손끝과 발끝은 마비가 깊어지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별달리 방도가 없다는 자조적인 마음으로 묵과하기 일수였다.
밤은 새벽으로 이어져갔으며 달은 작아졌다가 다시 아주 자취를 감추었었다.
차타누가를 지나 20여마일정도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개들이 어디선가 짖으며 달려오다가는 멈추었다.
새벽이 옷을 벗듯이 여명이 밝아 오곤하였다.
얼마나를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질주 내리칠라 하면 손가락과 발들이 얼어 들어오며 신음을 뱉어내게 만들곤 하였다.
조명이 켜져있는 집들을 지날라치면 더욱 걷잡기 힘들었던 날들....
그러나 이제 단련에 단련, 수련에 수련을 거친 단계를 넘어섰다고 하지 않는가?
마스크 주변의 노출된 피부와 소매와 장갑사이 틈으로 얼음이 느껴졌었다.
이것은 필경 꿈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눈으로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곤하였다.
'인생은 꿈'
'인생은 소꿉장난'
읆조리기를 수도없이 하면서 대륙들을 통과하였었다.
그래도 디캐토르라는 곳에서 하루밤 따뜻하고 편안하게 잠다운 잠을 한번 잤었다.
타코벨, 윈디, 버거킹도 모두 지나치며 관찰하곤 하였다.
알라바마에 들어서니 다시 계절이 바뀐 대지였다.
겨울이 얼씬할 수 없는 그런 땅으로 보였다.
봄 기온이었다.
아지랑이라도 보일듯한 그런 노근한 봄날씨였다.
산나물 들나물들이 금방이라도 돋아날것같은 그런 완연한 봄 기후였다.
플로렌스를 지나고 다시 밤이 되었고 어둠속에 서쪽으로 난 도로에서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크리스탈처럼 투명하기만 하였다.
달빛이 다시 자라나면서 대지를 비추었다.
멤피스에 도착하면서 2011년이 작별을 고하였고 2012년이 막을 올렸다.
자정이 넘어선 멤피스의 타운은 적막하기만한데 바람은 강하여 토네이도급으로 불었다.
도로와 주유소 주변에 경찰차라도 있으면 다소 안심이 되었다.
멤피스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생가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보이는 사람의 거의 대개가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이었다.
다시 마음이 긴장으로 가득찼다.
술취하였거나 드럭을 한 친구들이라도 부딪히면 애써 대담하게 행동하였다.
음악을 크게 틀고 지나가는 차내부로부터의 시선들을 일일이 점검하면서 다가올 공격이나 위험에 대비하였다.
나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나는 이런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부터 멸시와 차별을 받곤하였다.
수도없이 차별을 받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은사람들이라고 말들하였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었고 믿음을 지금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아름답지 않은 기억들을 너무 많이 가지게 되었다.
나는 혼자였으며 이곳은 미국인지라 저들의 홈이었던 것이다.
저들은 맘대로 행동하였고 조롱하였으며 멸시하곤 하였다.
생명의 위협도 받은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가슴 한편에는 아직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가 아름답게 남아있었다.
멤피스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금새라도 다시 나타나 노래를 부르기라도 할것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오클라호마로 가는길은 평지의 연속이었다.
멤피스에서 64번 도로를 타기위하여 아주 커다란 다리를 하나 건넜는데 그야말로 목숨을 건 모혐이었다.
40번 하이웨이가 겹치는 곳이었는데 미시시피를 건너도록 건설하여 놓은 다리가 자전거가 지나갈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멀고 긴 다리위를 자전거를 끌고 달려 건넜는데 아무리 생각하여도 영화장면 같았다.
고속으로 달려 지나가는 차량들 그들은 이런 나의 긴장감과는 관계없이 어느정도는 즐겼으리라.
거의 정신이 나간 경황으로 혼이 빠져나간것과 마찬가지 상태로 다리를 건넜던 것이었다.
다리를 건너서 생각하여보니 아직도 삶에 집착때문이었던가 하는 자문을 스스로 하였으나 답은 내리지 못하였다.
그래, 그토록 절망적으로 살려고 달렸고 달렸던 것이었다.
죽음과 삶간의 간격은 10센티 사이에서 늘 그렇듯 기회를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