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문/고려대 문과대 교수·영문학
여러해 전에 학교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사람을,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출세해서 다시는 그런 억울한 일을 안 당하고 살겠다고 결심하는 유형과 사회를 개혁해서 내가 당한 설움을 다른 사람은 안 당하고 살 수 있게 하겠다고 결심하는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전자의 유형은 사회의 불의(不義)를 심화시키고, 후자의 유형은 사회 정의를 진작시켜서 역사의 발전을 돕는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런데 곽노현을 보면서 후자의 유형 역시 사회에 막심한 피해를 끼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교육감이 되자마자 학교에서 체벌을 전면 금지하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아마도 학창 시절에 교사에게 심하게 맞았던 원한이 아직도 가슴에 들끓고 있는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의 그를 보면서 그리 예리한 동정심은 일지 않는다. 그것이 누구든 동심(童心)이 상처받은 것은 측은한 일이고, 우리 가운데 어린 시절의 체벌은 인류사회에서 추방해야 할 악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어른이 되면서 한 교사가 수십 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생활지도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체벌은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여러 교육 여건을 개선하면서 체벌을 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 허용토록 하거나 체벌의 순기능을 대체할 방안을 고안해서 확고히 한 뒤에 전면 금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날 우리 공교육의 현장은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교사들이 수업시간에 소란을 피우고 수업 방해를 하는 학생들을 제재하고 수업 분위기를 통솔하기가 지극히 힘들다. 모든 교사가 모두 성자(聖者)나 현자(賢者)일 수는 없고, 성자나 현자라도 수업을 훼방 놓는 한두 또는 몇몇 학생을 타일러 깨우치기 위해서 나머지 학생들을 무작정 내버려둘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곽노현 체제 아래서는 무수한 아동·청소년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학교폭력에 대해 교사가 손쓸 길이 없다. 반(班) 친구나 하급생을 폭행하고 핍박하는 학생들은 교사들마저도 우습게 보는데 교사가 이 학생들을 제재하고 훈육할 길이 전혀 없다면 학교는 무법천지가 돼서 민주적 공존의 원리 학습장이 아니라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원리를 체득하는 곳이 되지 않겠는가?
곽노현의 ‘학생인권조례’는 더욱 황당하다. 이 인권조례를 보면 곽노현이 ‘인권’의 의미를 모르는 게 너무나 분명하다. 이렇게 학교폭력이 난무하는 오늘의 교육 현장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인권교육이고 인권의식이다. 모든 학생이 인권의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한다면 학교폭력이 사라질 것이고, 그 학생들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은 이상적인 민주국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인권’이라는 게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고 감정을 배려하는 것이란 사실을 깨우쳐주지 않고 내가 어떤 요상한 차림을 하고 다니든, 책가방에 책 대신 흉기와 음란물을 갖고 다니든, 내가 학생들을 집합시켜놓고 무슨 억지 주장을 외치든, 어떤 집단행동을 선동하든, 어떤 성적인 일탈행위를 저지르든 그것이 나의 신성한 권리라고 인식하게 되면 일부 불량학생들의 ‘인권’으로 인해 양순한 학생들의 인권은 잔인하게 짓밟히지 않겠는가. 조례는 학생들에게 이런 개인적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다양한 일탈행위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겨서 실험과 탐닉을 조장하는 일이 될 것이다.
곽노현은 민주주의 선거에서 ‘후보 매수’도 법이 관여할 수 없는 자기의 ‘인권’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후보 매수’ 혐의와 관련해서 카메라 앞에 설 때 늘 비웃음 띤 얼굴로 자신은 결백하고 당당하며 자신이 범법자가 된 것은 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수도 서울 교육 수장(首長)의 정신연령과 도덕 관념 및 수치심이 이 정도이니 그를 보고 자랄 ‘곽노현키드’들의 출현이 공포스럽고 그런 그를 털끝만큼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기부천사’로 추대하려는 ‘진보좌파’가 두렵고 또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