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집은 나 혼자 사니까 그다지 별로 하는 건 없을 거야."
"저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아, 조카 못 알아듣네. 가정부 몰라?가정부?"
"가정부??????????"
"여기 써져 있잖아, 여기. 단, 매일 집주인의 집에서 일을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그러면서 아까 도장 찍은 계약서 귀퉁이의 조그만 글씨를 가리키며 말하는 거다.
"이건 사기야!!그게 글씨냐?워드로 치면 5 포인트도 안되겠다!!형, 나가자."
"앉아. 얘긴 끝까지 들어야지."
"형, 뭐해?나가자니까?"
"남아일언 천만원."
"뭔 개소리야??"
"여기 보여?6개월 내 계약 위반시에는 위약금 천만원. 난 분명 적었어.
그러니까 계약을 할 때는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봐야 되는 거야. You know what I'm saying?"
2.
“우리 그만 헤어져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의 눈이 커진다. 화려한 샤넬 연두색 투피스 정장에 묵직한 다이아반지를 낀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조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버릇처럼 눈가를 꾹꾹 누른다. 준수는 덤덤한 얼굴로 앞에 있던 핫초코를 단숨에 마셨다. 시간이 오래 지난 탓에 다 식어버려 미지근하다. 맛없다.
“뭐, 뭐가 문제니? 응? 요, 용돈이 부족해? 그런 거야?”
3.
“개가 왜 강아지 취급 받는 줄 알아?!!”
낮은 목소리가 음습한 창고 안을 울렸다. 하얀 얼굴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녀석을 보았다. 녀석은 곧은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런 객기는 어디서 나올까? 조약한 몸뚱어리가 살아있다는 듯 숨을 내쉬고 있는데 선배는 그것을 무시하듯 녀석의 뺨을 때렸다. 둔탁한 살의 마찰음이 다시 한 번 창고를 울렸다. 셋밖에 없는 창고였으나, 밖에는 시시껄렁한 녀석들이 문을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덫에 걸린 생쥐 꼴인데도 당당한 녀석의 모습에 경이로움까지 느껴졌다.
“개는 정도를 모르거든!! 너무 주인에게 맹신해. 그리고!! 너도 그래!! 알아?”
4.
오랜만에 듣는 그의 특유의 또라이말투로 장난이라며 내 위에서 내려왔다. 이제야 정윤호
답다. 처음만난 모습, 학교 담넘다 만났을때. 날개를 펴고 날으라며 내 등을 떠밀던 그 알
수 없이 아리송하던 모습. 그 사람이 지금 이렇게 내 옆에 누워있구나. 내가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구나. 어쩐지 서글퍼졌다. 평생일줄 알았던 사람은 오간데 없고, 안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내 볼을 쓰다듬는다.
" 아프지마.. 몸 버리잖아. " " 응... 그럴게요. "
고마워요, 너무. 차마 입밖으로 내뱉기엔 쑥쓰러운 한마디를 삼킨채, 내 머리칼을 만지작
거리는 ○○○의 손길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늘도 '그'가 없는 하루를 잘 버텼습니다.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만큼인가요.
5.
술잔을 기울인다. 동그란 이마를 보고 동그란 콧망울에 동그란 입술도 본다. 그리고 눈, 마주치는 눈에 ○○이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잔에 채워진 술을 한 번 보고 털어 마신다. 혀를 내어 입술을 한 번 훑은 ○○가 ○○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선배, 애인 말인데요.”“……….”“선배 그러는 거 별로 안좋아할 것 같습니다.”“헛소리 마.”“헛소리 아니고 진심.”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반짝,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이 제 손가락을 한 번 내려본다. 아직도 빼지 못한 반지라니 분위기 돋네. 픽, ○○이 웃고 잔을 비운다. 윤세영, ○○의 연인. 그게 벌써 몇 년전인가. ○○이 작게 숨을 뱉는다. 그녀는, 무참히 살해당했었다. 범인을 제 손으로 검거했다. 어쩌면, 죽일지도 몰랐다. 그걸 막은 게 ○○다. 정신 차리라고, 똑같이 살인범이 될거냐며 무지막지하게 주먹을 날렸었다. 생각하니 괘씸하지만, 고마운 건 맞다.
“그만 가자.”“내 말 흘려듣지 마요.”“그거 아냐?”“………….”“나는, 매일 꿈을 꿔. 세영이가 날 원망하는 꿈.”“………….”
의자에 걸어 두었던 겉옷을 집어 들고 일어선다. 역시 센치해지는 게 맞다. 하지만, 원인은 저 놈이지 사건이 아니다. ○○이 긴 숨을 토하고 머릴 쓸어 올렸다. 술집을 나서니 비가 온다. 일기예보 좀 진작 챙겨볼걸, 비 맞고 가야하나. ○○이 그런 고민을 하고, 안에서 음영이 진 ○○의 기다란 그림자를 보고 선 ○○는 씁쓸하다. 아직, 멀었나.
6.
○○이의 왼손. 정확히 말하자면 다섯 손가락 손톱에 둘둘 말려져 있는 비닐들. 발갛게 물들어 있는 비닐. 노란 고무줄. 봉숭아 물. 들였구나 봉숭아 물.
“야…너…그……손….”
할 말이 없어서 말을 중간 중간 멈춘 게 아니다. 웃겨서, 미칠 듯이 우스워서 멈춘 것이다. 말을 더 이어나가다간 교실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면서 뒤집어 질 것 같아서. ○○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불만에 찬 목소리로 답지 않은 변명을 해댔다.
“이딴 거 한다고 사랑이 이루어지면 솔로 같은 건 없을 거야.”
“그런데 넌 했네.”
“…….”
웃음을 참느라고 쓸개부터 맹장이 팽팽하게 당겨왔다. 아야야야, 내 갈비야. 그 와중에 수학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수업을 하시고 계셨다. 흑, 나는 고인 눈물을 훔치었다. 지금 수업이 문제냐 이렇게 웃긴 일이 생겼는데. 근 십 분 동안 ○○이의 눈총을 받으면서 웃음만 꿀럭이며 삼켰다. 겨우 진정된 내가 왼손을 턱짓으로 가리키면서 이쯤하면 물든 거 아니냐고 하니까 ○○이가 시끄럽다고 말하면서도 주섬주섬 고무줄을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또 웃겨서 큭큭거리고. 선생님이 이쪽을 보면서 찌릿거리는 눈빛을 쏘았지만, 진짜 웃긴 걸 어떡하냐. 비닐이랑 고무줄을 한데 돌돌 뭉친 ○○이가 교실 바닥에다 아무렇게나 버렸다. 주홍빛으로 옅게 물든 ○○이의 왼손을 보니 이상하게 가슴 한 구석이 애잔했다. 너 이 자식 나이가 열일곱인데 이런 거나 물들이고…힘내라 임마. 오늘따라 유독 만만해 보이는 ○○이의 어깨를 토닥거려주었다.
“너 걔 엄청 좋아하나봐.”
“……어.”
“차라리 이럴 바엔 꽃 한 송이 들고 고백하는 게 더 낫겠다.”
“…….”
○○인 대답 않고 딴 짓하는 척 했다. 나는 센서티브한 남자니까 더 이상 ○○이를 놀린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뭐, ○○이의 굳은 눈매에 쫀 건 아니고. 그래도 머릿속으론 계속 ○○이의 원러브를 생각했다. 누굴까 그 얘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으면 ○○이가 말 같지도 않은 짓을 할 정도로 좋아하지. 얼굴이 예쁘나 몸매가 섹시하나 성격이 착하나 아니면 셋 다? 쿨쩍,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지는 바람에 코를 훌쩍였다. 찡하네. 와사비를 먹은 것처럼 코끝에 매운 내가 핑 돌았다. 아까 너무 웃음을 참아서 그런가. 역시 웃을 때는 요란하게 소리 내면서 웃어줘야 하는 건데. 매운 코를 슥슥 문지르면서 뒤늦게 수업을 들었다.
야동 하나, 수열 하나, 윤재하나, 아키였나? 하나, 유수 하나, 뇽토리 하나.
나는 센스 있는 여자니까 이름따위 지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