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Written by S
박유천아, 오랜만이다. 형님이다. 너한테 마지막으로 편지를 쓴 게 벌써 몇 년 전 일이 됐다. 제대한 후론 아마 처음이지? 너 강원도 전방으로 배치 받고 가기 싫다고 징징 짜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결혼한다고 청첩장 돌리는 날이 오다니, 시간 참 빠르다. 밤톨 머리 하고 콧물 훌쩍이던 유천이가 아직도 눈에 선한데 형님이 감회가 엄청 새로워. 연필을 너무 오랜만에 잡았더니 글씨가 엉망이다. 그래도 이 글씨 질리도록 봐온 넌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읽도록 해. 아무한테나 써주는 편지 아닌 거 알잖아. 코팅하고 가보로 삼아 고이고이 간직해도 이 형님은 말리지 않는다. 아, 악필이라고 놀릴 생각은 행여 하지도 마라. 너 콧물 주렁주렁 달고 훈련소 앞에서 질질 짜던 사진 아줌마가 현상해서 나도 줬거든. 그거 500장 카피해서 한남동 근처에 쫙 뿌린다. 난 한다면 하는 남자다.
사실 나 아직 술이 안 깼다. 알딸딸하고 딸꾹질도 나. 그래서 글씨가 더 괴발개발인가보다. 행위 예술의 경지군. 넌 나보다 배는 마신 것 같은데 어떻게 집엔 두 발로 잘 들어갔을지 걱정도 된다. 아직도 아줌마가 술 먹고 들어오면 팬티만 입혀놓고 때리시냐? 낼 모레면 결혼하는 새신랑 밤새도록 술 먹여서 미안한 마음을 바란다면 넌 아직도 날 모르는군. 유부남 딱지 달면 넌 자동으로 일체의 총각 모임 강제 탈퇴다. 마지막으로 데리고 놀아준 거야. 애들이 너 빼고 우리끼리 마시자고 했는데 내가 꼬셨어. 잘했지?
박유천. 유천아. 내 십년지기 친구야. 우리 유천이가 결혼을 한다니까 사실 형님 기분이 많이 이상해. 실은 집에 오는 길에 캔 맥주 몇 개 더 샀어. 그거 다 마셨는데 그래도 잠이 안 온다. 시계 보니까 좀 있으면 네 시다. 해 뜨려면 두 시간은 더 있어야겠군. 잠도 안 오고 내 베스트 프렌드(원랜 꼬붕이지만 오늘 하루만은 특별히 진급시켜주지) 박유천은 이제 장가가고. 아무래도 앞으로는 예전 같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 동안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십년, 짧지만은 않은 시간인데 어떻게 보니까 금방이야. 그동안 유치한 거 가지고도 엄청 싸우고 별의 별 일이 다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돌이켜보니까 그마저도 다 좋았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몇 가지 너한테 얘기하고 싶은 게 있더라고. 오늘은 특별히 형님이 고해성사의 시간을 가질게.
우리 고등학교 이학년 때 말이야. 너 체육시간에 교복 입고 나갔다가 미친개한테 된통 걸린 적 있었잖아. 엉덩이 다 터져서 이주동안 어기적거리고 다녔을 때. 멀쩡한 체육복 갑자기 없어졌다가 다음날 뿅 하고 나타나서 네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억울해 죽을 뻔 했는데. 사실 그거 너 자고 있던 쉬는 시간에 내가 빌려갔거든. 근데 음료수 사러 매점 갔다가 까먹고 너한테 못 갖다 줬어. 말하면 네가 나 죽일 거 같아서 끝까지 시침 떼고 이주 내내 고래 잡은 것 같다고 놀린 거 미안해.
너 고삼 때 담배 피다 하필 학주한테 딱 걸려서 한 달 동안 화장실 청소하던 건 기억나? 미안. 사실 그거 내가 꼬질렀어. 내가 담배 좀 끊으라고 아무리 말해도 네가 안 들어 처먹어서 좀 당해봐라 싶었거든. 그래서 선생님한테 화장실에서 누가 담배 핀다고 일렀다. 그래도 그 덕에 수능 때까지 너 담배 끊었었잖아. 뭐 대학은 나랑 같은데 갔지만. 여하튼 미안.
우리 대학교 일학년 때 너 여장대회 나갔다가 재수 없게 게이 꼬여서 군대 갈 때까지 고생했잖아. 네가 눈을 떴을 땐 이미 다수결은 끝나있었지. 나는 원래 세상은 그런 거라고 너를 토닥거렸어. 근데 있잖아…… 사실 그거 내가 나갔어야 됐다? 근데 나 진짜 너무 너무 너무 하기 싫어서 너 술 먹고 뻗어있을 때 선배들 매수 좀 했어. 그래 유천아. 원래 세상은 그런 거야. 근데 아직도 종종 다리털 밀고 겨털 뽑히면서 울던 네가 꿈에 나온다. 미안해.
네가 자기 빼고 미팅 나가면 배신이라고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배신 셀 수도 없게 때려서 미안하다. 대학교 일학년 때 돌이켜보면 너랑 숨바꼭질 하던 것 밖에 기억 안 난다. 나는 미팅하러 다니고 너는 나 잡으러 다니고. 하루는 네가 자기랑 쇼핑 가자고 내 바지자락 붙잡고 우리 우정이 어쩌고저쩌고 운운하는데 깔끔하게 널 차버리고 소개팅 하러 나갔지. 넌 충격 먹고 삼일 동안 잠적을 했어. 근데 임마, 너랑 같이 나가면 자꾸 여자들이 너만 찍잖아. 나는 단지 커플이 되고 싶었어, 미안해.
네가 게임하자고 할 때는 게임의 신은 널 버렸다며 거들떠도 안보다가 나 용돈 떨어졌을 때만 돈 걸고 게임해서 미안. 너 알잖아. 내 용돈 한 달에 삼십 만원이었던 거. 내가 고등학생도 아니고 우리 엄만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짜도 그렇게 짤 수가 없었다. 만원도 가불 안 해줘. 그래도 너라는 부수입원이 있어서 내가 나름 유복하게 대학을 다녔던 거 같아. 어쨌든 사과할게. 미안해.
너 군대 갔을 때 멀다고 한 번도 면회 안 간 거 미안. 휴가 나왔을 때도 만날 너보다 바쁜 척 했던 거 미안. 그래도 편지는 이틀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보냈잖아. 난 초등학교 때도 일기 안 썼어. 내 인생에 그렇게 성실했던 적은 처음이었다고. 어쨌든 네가 전화로 너무 서운하다고 펑펑 울 때 나도 속으로 많이 울었어. 미안해 유천아. 사실 네 얼굴 보면 TPO 무시하고 부둥키고 울어버릴 것 같아서 그랬다. 정말 미안해.
너 술 먹고 우리 자취방으로 자러 오면 다음 날 해장국 안 끓여줘서 미안. 입에선 술 냄새 나지 애가 정신은 없지 근데 밤새 엉겨 붙어서 잠도 못 자게 하는 네가 너무 짜증나서 그랬다. 그래도 술 먹은 다음 날 볶음밥에 카레는 악질이었다고 생각해. 진짜 미안해.
네가 아줌마랑 싸웠다고 한 달 반 동안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았을 때 있잖아. 집세 안 낸다고 쫓아냈던 거 미안. 사실 내가 아줌마한테 전화해봤는데 너랑 싸운 일 없다는 거야. 그 때 한참 내가 아팠을 때였잖아. 나 밥 먹인다고 우리 집 가있겠다고 했다면서. 난 그 때 좀 많이 화가 났어. 편한 집 놔두고 우리 집에서 고생하는 게 짜증났어. 발로 차서 쫓아내고 구두 집어던진 거 미안해. 열 받아서 있는 힘껏 던졌는데 하필 네 얼굴로 날아갈 게 뭐냐. 미안하다.
그리고 유천아. 너무 놀라진 말았으면 해. 나 여자 친구랑 깨져서 우리 호프집에서 술 마시던 날, 마시지도 못하는 술 먹다 테이블에 뻗었잖아. 기절한 나 업고 너 죽을힘 다해서 우리 집까지 업고 갔잖아. 등치도 비슷한데. 그 때 사실, 나 깨어있었어. 미안하다 자는 척 해서. 근데 일어날 수가 없더라고. 물론 처음엔 좀 걸어가기도 싫었고 네 등하고 어깨가 너무 편하고 좋기도 했어. 하지만, 너 울고 있었잖아. 네가 내 이름 부르면서 우는데 나 도저히 일어날 자신이 없었어. 그 때 들었던 말, 들으면 안 될 말이라고 생각했거든. 앞으로도 평생 들으면 안 될 말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날 밤에 너 나한테 키스하더라. 예전에 술 먹고 뽀뽀할 때는 강아지가 취하려면 곱게 취하라고 매타작이라도 했겠는데 내 얼굴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난 끝까지 자는 척 할 수밖에 없었어. 내가 병신도 아니고 그게 장난이 아니라는 건 알았어. 야…… 장난이면 그렇게 찐하게 못하지. 돌이켜 생각해봐도 내 평생 그 날만큼 인내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자는 척 하느라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네가 잠들고 나서 나 많이 생각했어. 넌 자면서도 울더라. 거기다 가끔 내 이름까지 불러. 나 죄 지은 거 하나 있다. 오늘은 모든 걸 말하기로 했으니까 고백할게. 그 때 사실 나도 너한테 키스했다. 나만 당한 거 아니야. 내가 언제 지고 사는 거 봤냐, 쌤쌤이지 우리. 근데 몇 번이나 확실히 자는 거 확인하고 한 거니까 아마 넌 전혀 몰랐을 거야. 자꾸 딸꾹질 나와서 간 떨려 죽을 뻔했다. 어쨌든 그날은, 나도 좀, 취해있었으니까. 키스해서 미안하다 유천아.
다음날 근육통으로 끙끙거리는 너한테 인스턴트 북어 국 끓여주면서 다짐했다. 다신 너를 이 집에서 재우는 일은 없을 거라고. 이렇게 너에게 인스턴트지만 해장국 끓여주는 일도 없을 거라고. 그래서 네가 술 먹고 문 쾅쾅 두드려도 문짝 반을 부숴놔도 옆집에서 쫓아 나와서 소리 지르고 싸울 때도 불 끄고 없는 척 했다. 그래도 그 동안의 정이 있어서 경찰한테 신고는 안 했어. 생각해보면 이웃집에서 신고 안 한 것도 용하네. 어쨌든 미안해.
미진이 좋은 여자야.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 네가 나한테 소리쳤었지. 나 많이 나쁜 놈이었나? 근데 그 여자는 좋은 여자야. 그래서 그랬어. 좋은 여자니까. 그 날 얼굴 때려서 미안하다. 너 봐줄만한 건 얼굴 밖에 없다고 놀리던 거 농담 반 진담 반이었는데 열 받으니까 주먹이 먼저 나갔다. 근데 독한 새끼, 너는 나 안 때리더라? 차라리 날 때리지. 때리기라도 하지. 사람 더 미안하게.
몇 달 전에 너한테 전화 왔을 때, 할 말도 들을 말도 없다고 끊으라고 했던 거 미안해. 결국 네가 하고 싶었던 그 말, 십년 동안 단 한 번도 들어준 적 없어서 미안해. 하지만 있잖아. 난 잠든 척 했던 그 날 밤 다 들었어. 그리고…… 언제나 마음으로 듣고 있었어. 그래서 더 들을 말 없었던 거야. 미안해.
아, 날 샜나보다. 이제 해가 뜨려나봐. 나 이제 출근해야 되는데 좀 걱정되네. 요즘 사내 아이돌인 내 꼴이 말이 아니거든. 사람들이 커피 엄청 사줘. 얼굴이 퀭하대. 하루하루가 조금만 더 길었으면 했는데 어째 점점 짧아지는 것 같다. 유천아. 박유천. 미안했고, 미안하다. 그리고 늘…… 내 마음도 너와 같았다. 잡지 못해서…… 마지막까지 난 아무 말도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이 편지, 너한텐 못 부칠 것 같아. 글씨가 번져서 엉망이거든. 이건 아무리 너라도 못 알아볼 것 같다. 그래서 안 부칠래, 유천아. 미안. 정말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