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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있는 섬뜩한 이야기 1. 채널 428번 홈쇼핑上

힣ㅋ |2012.03.11 18:22
조회 2,490 |추천 6

"주소 이전 신고도 안 했나. 해도 해도 너무하네."

 

 

옆집 바닥은 항상 지저분했다. 식당 전단지와 각종 우편물들이 범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던 종이와 비닐들은 어느새 계단까지 내려와 해옥의 통행을 방해했다. 마치 점점 번져가는 습진처럼.

 

위의 두 층만 주거용으로 쓰이는 4층짜리 건물에는 우편함이 없었다. 집주인에게 몇번이나 건의를 했지만 홀로 사는 젊은 여자의 말이라 그런지 대답이 늘 건성이었다. 어차피 해옥 앞으로 오는 우편물이라고 해봐야 핸드폰, 인터넷, 신용카드등의 청구서가 대부분이었다. 괜히 집주인의 심기를 건드려서 모처럼 저렴한 보증금으로 들어온 월세집을 나가고싶진 않았다. 문제는 옆집이었다.

 

3층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두 집이 나란히 위치했다. 그 중 왼쪽이 해옥의 집이었다. 현관문 상단에는 유성매직으로 휘갈겨 쓴 30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집으로 향하던 해옥은 전단지와 우편물들이 계단을 세 칸이나 차지한 것을 보고 못 참겠다는듯 한숨을 쉬었다. 한쪽 발로 전단지를 밀어내고 자신의 집을 지나 4층까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4층은 전체가 건물 주인의 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해옥은 팔짱을 꼈다. 가래 끓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뉘쇼? 이 시간에."

"301호예요."

 

 

찰칵,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앞머리가 훤한 50대 초반의 남자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 아가씨가 시간이 몇신데. 날 밝을때 놔두고 왜 매번 이러는지 몰라."

"날 밝을땐 항상 밖에 있는걸요. 집세 낼 돈을 벌어야죠."

 

 

집주인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해옥도 따라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저씨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보시잖아요. 저 쓰레기들 좀 어떻게 해주세요. 그냥 갖다 버릴수도 없고 어두울때 미끄러지기라도 할까 겁난다고요."

"이사한지 2주가 넘었는데 코빼기도 안보이는거 보면, 그냥 버려도 상관없는 것들일게 뻔하지. 내가 날밝으면 싹 갖다 버릴테니까 들어가기 전에 아가씨거 섞여있는지 확인해 봐. 됐지?"

 

 

해옥은 됐다며 고개를 끄억이고는 3층으로 몸을 돌렸다. 몇 계단 내려가기도 전에 집주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참, 구정 지났으니까 다음 달부터는 약속대로 5만원 오르는거 알지?"

 

 

해옥의 볼이 한순간 씰룩하고 움직였다.

 

 

"네, 알아요."

 

 

집주인은 대답없이 문을 닫았다. 찰칵, 자물쇠 잠기는 소리가 났다. 해옥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아랫입술로 바람을 뿜어 올렸다. 그러고는 물이라도 쏟은듯 어지러운 3층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의 우편물이 있나 찾기 시작했다.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몇개의 우편물을 건져낸 후 해옥은 손바닥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마자 해옥은 현관등부터 켰다. 가방을 벗고 실내등을 켜며 우편물들의 겉봉을 살폈다. 네 개의 우편물 중 세 개는 각각 신용카드, 핸드폰, 인터넷의 요금 청구서였다. 소파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나머지 한 개를 보았다. 청구서와 같은 크기의 우편물이었다.

 

 

'302호 장석윤 귀하'

 

 

장성윤은 옆집 남자의 이름이었다. 즉 이 우편물은 해옥의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몽땅 쓰레기통 행일테니 굳이 밖에 둘 필요도 없겠지."

 

 

그러면서 해옥은 현관 근처의 폐지통 앞으로 다가갔다. 버리기 전에 다시 한 번 겉봉을 확인하는 해옥. 이름 밑으로 아래 3분의 1정도가 잘린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초특급 할인'

 

 

해옥은 '할인'이라는 말에 약했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갈등에 빠졌다. 남의 우편물을 함부로 뜯어도 되나 싶은 죄책감,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그냥 버리든 보고 버리든 어차피 버리는것은 똑같으니까. 해옥이 소파에 앉아 우편물을 개봉했다. 세 번 접힌 분홍생 a4용지가 내용물의 전부였다. 그 안에는 안내 사항이 담겨 있었다.

 

 

'초특급 할인! 이번 주는 30회 특집입니다. 변함없이 오전 두 시 428번에서 만나요.'

 

 

그리고 발신인은 <리얼 홈쇼핑>이었다.

 

 

"홈쇼핑이라는 걸 보니까 428번은 채널인 모양인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 아니, 그런데 428번에 방송이 나왔었나?

 

 

해옥이 소파 팔걸이에 올려둔 리모컨을 집었다. 티브의 전원을 켜고 채널을 428번으로 돌렸다. 예상대로 벌들의 향연과도 같은 흑백 화면이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나타났다. 생각해보니 유선 방송의 채널은 기껏해야 95개 정도였고 100번 이상으로 채널을 옮긴 적은 거의 없었다. 처음 티브이를 샀을때 호기심에 나오지도 않는 채널을 마구 돌린 기억은 있으나 428번까지 갔을리는 만무했다.

 

이쯤되자 마약같은 호기심이 해옥을 자극했다. 요즘 즐겨보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초특급 할인', '30회 특집', '오전 두 시', '428번' 등의 토막난 문구들이 제멋대로 부유하는 중이었다.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스프링이라도 달린듯 눈커풀은 반항했고 안대를 착용하든 양을 세든 허사였다.

 

 

"짜증나. 여섯 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두어 번을 더 뒤척였지만 잠은 저 멀리로 달아나 버린지 오래였다. 시계는 12시 30분. 해옥은 다시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켰다. 심드렁한 얼굴로 리모콘을 조작하다가 문득 428번으로 채널을 맞추었다. 화면은 여전히 흑백. 해옥은 앞의 채널로 돌아왔다. 영화 채널들은 일제히 연소자 관람 불가의 영화들을 방영하고 있었다. 해옥은 그 중 하나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미남 배우들이 금지된 사랑에 빠져 파국을 맞는 동성애 영화였다. 이러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지만 결국 서로를 찾아 탐닉하고야 마는 주인공들. 그들은 아내와 아이가 있는 가장이었다.

 

 

"내가 왜 이 시간에 이딴 영화를 보고 있는거야. 나도 이러면 안 되는데. 양키들은 왜 대머리어도 멋있을까."

 

 

1시 15분. 시간은 지독하게 안갔다. 해옥은 핸드폰을 잡아 주소록을 천천히 살폈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연락처가 보였다. 저장된 이름은 여전히 '여보'였다. 순간 홍삼처럼 얼굴이 벌개진 해옥이 전화번호 삭제를 눌렀다가 '정말 삭제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나오자 '아니오'를 선택했다. 대신 이름을 바꾸었다.

 

주소록을 다시 열었다. 전화번호가 이렇게나 많은데 연락하는 사람은 10명 안팎이었다. 나머지는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고 문자한 뒤 감감무소식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해옥은 자주 연락하는 10명 중 하나를 골라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덟 번의 신호음 끝에 잠에 취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희쓰! 자고 있었어?"

"너… 지금 몇 시야."

 

 

해옥이 시계를 봤다.

 

 

"1시 30분 조금 안 됐네. 자고 있었구나. 미안해. 나는 네가 밤일하니까 지금쯤 깨어있을 줄 알고."

"작년에 그만뒀거든? 6시에 일어나야 되는데. 아, 진짜."

"야, 나도 6시에 일어나야돼. 피곤한척은 혼자 다 하네, 기지배가."

 

 

마침 티브이에서는 남자들의 격렬한 베드신이 시작되었다. 해옥은 눈쌀을 찌푸렸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야야. 그런데 너 혹시 리얼 홈쇼핑이라고 들어봤냐?"

"몰라. 홈쇼핑에 관심 없어."

"오늘 4시에 428번에서 30회 특집으로 방영한대. 초특급 할인이래."

"뭐 파는데?"

"그건 봐야 알지."

"너 지금 그거 기다린다고 깨어있는 거냐? 남자 빤쓰 팔면 가관이겠다."

"30회 특집인데 속옷을 팔겠냐? 생각 좀 해라."

"생각은 너나 실컷 하고 이제 끊자. 제발, 응?"

 

 

베드신이 절정에 달할때 화면 속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한 여자가 들이닥쳤다.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여자의 오른손에는 팔뚝의 반쯤 되는 길이의 과도가 있었다.

 

 

"야, 428번 한 번 틀어봐. 밑져야 본전이잖아."

"밑지면 손해지, 어떻게 본전이야 멍청아. 우리집은 100번까지 밖에 안 나와. 나 이제 끊는다. 안녕."

"야, 기다려봐. 야…"

 

 

통화가 끊겼다. 해옥은 성깔 더러운 년이라고 구시렁거리며 시계를 쳐다봤다. 1시 45분. 이래저래 시간은 흘렀다. 영화는 클라이막스였다. 피투성이가 된 여자 밑으로 힘 빠진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남자들이 보였다.

 

영화가 끝나고 스탭롤이 올라올 때 시간이 1시 58분이었다. 해옥은 지체 없이 428번으로 채널을 돌렸다. 여전히 흑백 화면. 해옥은 소리를 줄이고 냉장고에서 350ml 캔맥주를 하나 꺼냈다. 꼭지를 따고 한 모금을 막 목에 적실 무렵, 티비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먼저 지지직거리던 소음이 뚝 끊겼다. 해옥은 볼륨을 원상태로 돌렸다. 곧 있어 합창 교향곡의 후렴과 함께 90년대 초가 연상되는 알록달록한 프로그램명이 나타났다. 리얼 홈쇼핑.

 

 

"내가 파워 포인트로 만들어도 저거보단 낫겠다."

 

 

해옥이 중얼거렸다. 1분여의 오프닝이 끝나고 광거 없이 진행자가 나타났다. 이런 게릴라 식 프로그램에 광고가 붙는게 더 웃기겠다고 생각하며 해옥은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진행자는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으로 정장 차림의 깔끔한 모습이었다. 둘 다 미남, 미녀는아니었지만 아나운서를 연상케 하는 호감 가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리얼 홈쇼핑 진행을 맡은 손영호."

"황경은 입니다."

 

 

진행자 뒤편에는 새하얀 천으로 덮어놓은 길쭉한 탁자가 있었고, 그 옆에는 역시 하얀 천으로 덮어놓은 세로로 길쭉한 물체가 있었다. 길쭉한 물체는 어쩐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바로 리얼 홈쇼핑이 30회를 맞은 날입니다! 매회 완판 신화를 이룩하던 리얼 홈쇼핑, 이 모든게 회원 여러분의 덕입니다."

 

 

남자에 이어 여자가 말했다.

 

 

"오늘은 여러분의 은헤에 보답하고자 조금 특별한 물건을가져왔어요. 금방 소진될 우려가 있으니까요, 주저하지 말고 전화 주세요."

 

 

스튜디오 환경은 별로였다. 중앙 조명 하나에 사이드 조명 넷, 홈쇼핑 로고도 없었고 외벽이나 바닥도 오래된 건물의 흔적이 역력했다. 화면 하단에 나타난 전화번호는 대표 번호가 아닌 일반 번호였는데 지역 번호로 볼 때 서울이었다.

 

그 밖에 사람을 현혹시키는 자막은 일절 없었다. 방송 환경이 이렇게 열악한데 좋은 물건이 나올까? 해옥은 점점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부터 물건을 공개하겠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남자가 말했다. 그러면서 남자와 여자는 탁자의 양 끝에 서서 천을 붙잡았다. 카메라를 주시하며 잠시 빙긋 웃던 둘은 "짜자잔!"을 외치며 손을 움직였다.

 

 

"뭐야 저게!"

 

 

해옥이 소리를 질렀다. 탁자 위에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곰인형이었다. 양손을 나란히 했을때와 비슷한 크기에 '푸우'를 따라한게 분명한 빨간색 배꼽티를 입은 모습이었다. 해옥은 당장이라도 티브이를 꺼버릴 심산으로 리모컨을 들었다.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요청이 쇄도한 상품이지만 워낙 고가라 엄두를 못 냈던 바로 그 상품입니다. 루마니아 현지에서 저희 담당자가 극적으로 계약을 체결했는데요, 자그마치 50프로나 할인된 가격으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 여자가 인형을 들어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네, 오늘의 상품은 바로 저주의 인형입니다."

 

 

해옥은 리모컨을 다시 내려놓았다. 저런 조악한 인형을 루마니아에서 직접 가져왔다는 것도 이해 불가였는데, '저주의 인형'이라는 이름은 더욱 어이가 없었다. 조금 있자 전화번호 옆으로 7자리의 숫자가 떴는데 아무래도 인형의 가격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일십백천만심만백만… 미친, 250만원?!"

 

 

해옥은 혹시 0을 하나 더 세진 않았나, 다시 한 번 헤아려 봤다. 25만원 이라 해도 도둑놈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두번, 세 번 헤아려도 마찬가지였다. 자막 실수가 아니라면 저 인형의 가격은 250만원이 분명했다. 해옥의 두 달치 월급에 육박하는 액수였다.

 

 

"그 돈이면 루이비통을 사고 말지.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인형을 사나. 진짜 막장이네. 아, 시간 아까워."

 

 

해옥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진행자는 떳떳이 상품을 설명했다.

 

 

"이 인형의 최대 장점은 바로 저주의 인형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유명한 캐릭터 디자이너를 납치해서 개발에 참여시켰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회명적인 퀄리티를 높였는데요, 너무 흉측하게 생겨서 집에서만 쓸 수 있던 기존 저주의 인형들과는 확실히 차별성이 있습니다. 누가 이 인형을 보고 저주의 인형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곰돌이 푸우구나, 하지. 안 그렇습니까 경은 씨?"

"맞습니다. 그리고 디자인의 우수성뿐만 아닙니다. 기존 저우의 인형과 비교했을 때 성능에도 확실한 차이가 나는데요. 목숨까지 빼앗으려면 워낙 고가이고, 그렇다고 싸구려 인형을 사자니 이건 저주인지 축복인지 모를 미미한 효과만 내고. 하지만 이 인형은 다릅니다. 가격은 보급형 수준으로 내리고 성능은 거의 최고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해옥은 도무지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형의 기능적인 측면을 자꾸 강조하는걸로 보아 아동용은 아닌 듯했다.

 

 

"자, 이 놀라운 성능을 한 번 보실까요? 벌써부터 주문 전화가 오고 있네요. 잠시 후부터 주문 폭주가 예상되오니 갈등늘 안드로메다에 잠시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호 씨 어서 벗겨볼까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옆의 물건으로 다가갔다. "짜자잔." 하며 천을 벗겨내자, 놀랍게도 의자가 하나 나타났다. 정확히는 의자에 사람이 앉아 있다는것이 놀라웠다. 더 정확히는 그 사람이 재갈을 물고 묶여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때부터 해옥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24회 때 민폐를 끼쳤던 곽태동 회원입니다."

 

 

진행자들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반면 포박당한 남자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질려버린 표정이었다. 얼굴 곳곳에 핏자국이 있었고, 눈과 뺨에 붓기가 있었으며, 옷 여기저기에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제 발로 걸어온 손님의 모습이 아니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인형과 대상이 가까울수록 위력이 강해집니다. 이 정도면 지하철에서 서로 마주보는 거리 정도는 될 텐데요. 차근차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남자 진행자가 네 발자국 정도 뒷걸음을 치며 말했다. 그러고는 인형이 있던 선반 밑에 손을 넣어 포스트잇 같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우선 저주가 걸린 종이에 정보를 넣어야겠죠? 아, 안심하세요. 오늘 주문하시는 고객님들 전원에게 저주의 종이 두 세트를 무료로 드리고 있습니다. 신상 정보를 넣으실 때 포인트는 최대한 상세히 기록해야 위력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그냥 이름만 쓰면 동명이ㅏ인들 모두에게 저주가 분산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력이 약하죠. 기왕이면 겹치는 사람이 없도록 이름, 생년월일, 핸드폰 번호, 집 주소 등등 아는 번위 내에서 상세하게 적어주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곽태동… 공일공칠일일…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천구백칠십구년…… 자, 이 정도만 적어도 저주가 분산될 일은 없겠죠? 이제 붙이는 일만 남았는데요. 포스트잇처럼 접착 처리가 되어 있으니 그냥 툭, 떼어 붙여주시면 됩니다. 여기서 또 루마니어 저주의 인형의 장점이 드러나는데요."

 

 

남자가 인형의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렇게 남들 눈에 안 띄게 붙일 수가 있습니다. 인형에 옷을 입힌 이유가 이것 때문이거든요."

"와, 정말 감쪽같에요. 누가 저주의 종이를 인형에 붙였다고 생각하겠어요."

 

 

여자가 맞장구를 쳤다. 그 순간 옆에 포박당한 남자가 온몸을 흔들면서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카악, 칵칵." 하는 비명 아닌 비명이 흘러나왔다. 진행자들의 웃는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자, 움직여 볼까요?"

 

 

여자가 남자 진행자를 향해 말했다. 남자 진행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형의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포박된 남자의 얼굴 또한 거의 동시에 돌아갔다. 이번엔 인형의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포박된 남자의 고개 또한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해옥의 머릿속에 '설마' 두 글자가 풍선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남자 진행자가 인형의 머리를 마구 돌렸다. 포박된 남자가 정신없이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반응 속도 보이시죠? 실제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위력이 느껴지십니까? 저가의 인형들은 상상도 못 할 움직임이죠. 자, 이번엔 못을 박아보겠습니다."

 

 

남자 진행자가 눈짓을 하자 여자가 탁자 밑에 손을 넣어 못과 망치를 꺼냈다. 건네면서 여자가 말했다.

 

 

"저주의 인형 전용 미니 망치와 미니 못입니다. 상품 가격에 1만원 만 추가하시면 직접 보내드리고 있고요. 시중보다 절반 정도 저렴한 가격이니까 필요하신 분들은 함께 주문하셔서 더 큰 할인 혜택 누리시면 어떨까요."

 

 

남자가 망치와 못을 받았다. 그리고 인형의 어깨 부근에 못을 대고 망치질을 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소리가 끝나자 포박된 남자의 신음이 이어졌다. 어깨에는 전에 없던 검은 구멍이 하나 보였다. 그 구멍은 금세 빨갛게 물들었고, 얼마 안 있어 폭죽같은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해옥의 머릿속에 둥둥 떠 있던 풍선이 펑, 하고 터지는 순간이었다.

 

 

"허억!"

 

 

숨을 들이쉬며 양 손으로 입을 막는 해옥. 얼굴에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사이 남자 진행자는 다음 망치질을 시작했다. 반대편 어깨였다. 핏줄기가 멎기도 전에 포박된 남자의 다른쪽 어깨에서 핏물이 터져나왔다.

 

여자는 포박된 남자의 뒤편에 서서 화사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망치질은 멈추지 않고 인형의 양다디를 향했다. 포박된 남자의 다리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해옥은 티비에 시선을 떼지 못한채 소파를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어찌느 손을 떠는지 핸드폰을 세 번이나 떨어뜨린 끝에 겨우 잡아 올릴 수 있었다. 주소록을 열 필요도 없었다. 숫자 세 개와 통화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그런데 남자 진행자는 다리를 끝으로 더 이상 망치질을 하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변다른 멘트조차 없었다. 포박된 남자가 신음이라도 내지 않았으면 정지 화면으로 착각할 만큼 적만한 화면이었다.

 

 

"경찰서죠? 지금…"

 

 

숨이 덜컥 막혀 말을 멈춘 해옥. 진행자들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미간에 주름이 진 것으로 보아 인상을 쓰고 있는게 분명했다. 시선은 카메라 정면. 해옥과 브라운관을 사이에 두고 눈을 마주치고 있는 셈이었다. 핏물이 튀고 사방에 비명에 울려 퍼져도 사람 좋은 인상을 잃지 않았던 진행자들이 급변하자 해옥은 당혹스러웠다.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이 신고하는 타이밍에.

 

 

"네,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생방송인 것 같은데 티비에서 살인이 일어나고 있어요. 아니예요. 홈쇼핑 채널이예요. 네? 제가 처음 신고한게 중요한가요? 틀어 보시면 알거 아니예요. 몇 번이냐면…"

 

 

해옥이 말을 멈췄다. 진행자들이 정면을 주시하며 점점 다가오는 탓이었다. 해옥은 이대로 저들이 앞으로 나와 티비를 뚫고 자신의 앞에 설 것만 같았다. 29인치 화면이 본인들의 얼굴로 꽉 차자 진행자들은 멈췄다. 해옥은 어서 신고를 접수하고 티비를 끄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428번이요. 28번이 아니고 428이요. 잘 안들리세요? 사, 백, 이, 십, 팔 번이요. 네? 채널이 거기까지 안 넘어간다고요? 티비가 후졌네. 다른걸로 해……"

 

 

그 때 남자 진행자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감정이 전혀 안 느껴지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해옥이 또 한 번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남자 진행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민폐를 끼친 회원이 나타났군요. 다른 날도 아니고 30회 특집인데 정말 화가 납니다. 서약서를 쓰고 특별 회원제로 운영을 하는데도 불량 회원은 반드시 생기더라고요. 방송은 이쯤에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민폐를 끼친 회원에게 우리의 분노를 보여줘야겠죠?

 

 

그러면서 남자와 여자는 탁자 쪽으로 돌아갔다. 여자가 인형을 눕혀 고정시키고 남자는 아까보다 훨씬 강도 높은 망치질을 시작했다. 정확히 인형의 이마 한 가운데였다.

 

 

"네, 네? 지, 지, 지금 엄청난…"

 

 

해옥이 말을 더듬었다. 포박된 남자의 이마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그리고 길고 긴 절규가 이어졌다. 핏줄기가 약해질수록 남자의 소리도 작아졌다. 여자의 한쪽 뺨으로 반죽처럼 들러붙은 핏덩이가 목덜미로 흘렀다.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던 여자가 화면 가까이로 다가오며 말했다.

 

 

"민폐의 끝은 사망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계신 서약서에 분명히 적혀 있어요. 자, 그럼 오늘의 민폐 회원 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해옥은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여보세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백칠십삼 다시 삼십육."

 

 

해옥의 동공이 팽창했다. 지금 여자가 읊는 주소는……

 

 

"송양 빌딩."

 

 

해옥이 사는 곳이었다.

 

 

"302호 장석윤."

 

 

해옥이 거친 숨을 뱉어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호흡이 가빴다. 해옥의 집은 301호, 302호는 바로 옆집이었다.

 

 

"회원 여러분 모두 협조하셔서 빠른 시일 안에 방송이 재개되길 염원합니다. 오늘 상품 저주의 인형은 현재 시간까지 주문한 고객에 한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자와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하자 서서히 화면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소음과 함께 늘 그랬듯 흑백 화면으로 돌아갔다. 핸드폰 액정 위로 통화 종료 문구가 네온 사인처럼 껌쩍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2시 20분. 겨우 20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해옥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대로 잠시 들면 처음 보는 장소에서 꽁꽁 묶인 채 깨어날것 같았다. 1분이 참 길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10초가 참 길었다.

 

 

 

-下에 계속

 

<출처: 네이버 캐스트>

추천수6
반대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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