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몇 초간 천장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상체를 일으켜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묶인 곳은 없었다. 잠들었던 곳은 소파 위. 장소도 변하지 않았다. 알람을 끄고 시계를 확인했다. 6시 1분. 머리는 지끈거리고 팔다리에 힘이 없었다. 잠시 멍하니 앉아 리모컨을 들어 티비 전원을 켰다. 어제 일이 꿈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음과 함께 화면이 송출됐다. 상단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연두색 숫자 428. 그 숫자가 사라지기 전에 티비를 꺼버렸다. 마음에 갈등이 일었지만 오후에 잠들었던 이성이 깨어나 이내 감성을 누르고 만다. 해옥은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해옥이 정문을 나섰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에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용변이 급한 사람처럼 문을 잠갔다.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하는데 하얀 연기가 얼굴에 닿아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불이라도 난거 아닌가, 아래를 보니 왠 처음 보는 남자 셋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다는듯 혀를 찬 해옥이 코와 입을 막고 계단을 내려갔다. 방역 가스 같은 연기를 뚫고 2층 계단으로 향할때 즈음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가 "저기요"하고 해옥을 불렀다.
"말씀 좀 물읍시다."
해옥은 대꾸 없이 걸음만 멈췄다. 남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옆 집 양반 언제쯤 들어오는지 아시나요?"
순간, 어제의 방송이 떠오른 해옥이 말을 더듬었다.
"여, 옆 집 남자 말씀이신가요?"
"네, 그 사람이요."
해옥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 글쎄요. 제가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마주치는 일이 별로 없었거든요."
"한 번도 없었습니까?"
"평일에는 정말 한 번도 없었고요. 주말에는 가끔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통 보이질 않네요. 4층이 집주인 사는데니까 한 번 물어보시겠어요? 저는 늦어서 이만."
해옥이 다시 코와 입을 감싸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쉽게 잠잠해질 것 같지 않았다. 건물 정문을 나섰다. 입구 앞을 막아놓은 불법 주차 차량들을 피해 본격적인 출근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제까지의 출근길과는 확실히 달랐다. 음침하고 추레한 사람들이 전봇대 근처 혹은 주차장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는데 해옥을 발견하자마자 일제히 시선을 모았다. 거미줄처럼 질긴 시선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고 해옥은 뭐라고 훔친 사람처럼 불안한 표정이었다.
"분명히 남자라고 했어. 사진이랑도 많이 다르잖아."
"얼굴도 길쭉한게 아니라 동그란 편이네."
해옥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이 대화를 엿들었다. 추측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그 방송을 본 사람들이 옆 집 남자를 찾으러 온 것이다. 아마도 '민폐'의 죗값을 묻기 위해서. 해옥은 최대한 걸음을 빨리했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아무 버스에나 올라타고 지뢰밭을 빠져나온 군인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옥은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를 묻는것은 나중 일이었다. 우선 저들에게 잡히면 훈계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다만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저들이 노리는 사람은 옆 집 남자가 분명했다. 진행자가 마지막으로 알려 준 주소와 이름도 옆 집 남자의 것이었다. 비회원인 해옥이 티비를 시청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태연하게 행동하면 된다. 해옥이 숨을 골랐다.
퇴근길, 해옥은 또 한 번 당혹스러운 일을 겪고 말았다. 이번엔 스스로 자처한 일이었다. 핸드폰 주소록을 보다가 '바보똥개'라는 이름에 무심코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어제 이름을 바꾼 남자친구의 번호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것도 여보세요, 가 나온 후에. 벙어리 상태로 인관하며 해옥은 결국 전화를 끊고 말았다. 얼마 안 있어 문자가 왔다.
[스토커처럼 굴지 마라. 짜증나니까.]
해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씩씩거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해옥.
"야, 조인희. 어디서 뭐하냐."
"이년이 여보세요도 안 하고. 예의 없는 년."
"너 내 여보 아니잖아. 어디서 뭐하냐고."
"그러면 나는 여보가 대체 몇 명이냐? 집이야."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니네 집 가는 길에 잠들겠다. 아서라."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제발."
"조를 걸 졸라, 이년아. 내일이 휴일도 아니고, 우리가 가까이 사는것도 아니고!"
"아, 진짜 심각해서 그래."
"전 남자친구한테 이상한 얘기라도 들었냐? 왜 자꾸 진지드립이야."
"어, 맞아. 걔가 나보고 스토커래. 그런데 그거 말고 더 심각한 이야기야."
"뭐, 어제 본 홈쇼핑에서 남자 빤스보다 쇼킹한거라도 팔디?"
"어, 맞아. 그거 때문이야."
"얘가 날 점쟁이로 만드네. 아무튼 주말에 만나서 얘기하든지 하자."
"야, 그러지 말고 제발."
"그럼 네가 우리 집으로 오든가. 왜 멀쩡히 집에서 쉬고있는 사람을 오라 마라야!"
"야, 거기서 우리 회사까지 얼마나 먼지 알잖아. 나 어제도 거의 밤 샜단 말이야!"
"그럼 일찍 들어가서 잠이나 쳐 자, 이년아!"
"이 매정한 년, 진짜 이럴래?"
"우리 집으로 오라했는데 분명히 네가 싫다 했어. 드라마 봐야 하니까 이제 끊는다."
"야, 조인희. 야! 야! 너, 진짜…"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한숨을 쉬는 해옥. 그 때 마침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집 앞에서 잠깐 보자 아까 문자는 미안]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헤어진 남자친구를 다시 보는 거북함보다 지켜줄 사람이 생긴다는 든든함이 더 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해옥은 주변을 살폈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었다. 대로변을 지나 삼거리에서 자신의 집이 있는 샛길로 방향을 틀었다. 아침에 봤던 사람들이 그대로 있었다. 태연한척 걸어가며 해옥은 귀를 쫑긋 세웠다.
"장석윤은 어디 가고 저 여자만 보여."
"잡아서 족쳐볼까?"
"슬슬 짜증나는데 아무나 붙잡고 시비 걸고 싶어."
아침보다 훨씬 과격해진 그들의 대화에 해옥은 소름이 끼쳤다. 역시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김해옥!"
집 앞에 다다르자 누군가 해옥을 불렀다.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상우야."
눈물이 왈칵 나오려는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상우라고 불린 남자는 해옥의 전 남자친구였다. 머리카락이 짧고 목과 다리가 굵어 강한 인상을 자아냈는데 면도를 걸렀는지 수염까지 삐죽삐죽 솟아 영락없는 산적 두목이었다. 해옥이 ㅣㅁ을 삼키며 감정을 추스르는 사이 상우가 말했다.
"여전히 늦게 끝나네. 일은 좀 어때?"
투박한 말투였지만 해옥은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당황하던 상우가 해옥의 어깨를 감싸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 어제 엄청난 걸 보고 말았어."
해옥이 상우의 품에서 벗어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게 뭐냐고 상우가 묻자 해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들어가서 얘기하겠다고 말했다. 해옥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상우가 그 뒤를 따랐다. 계단 곳곳으로 담배 꽁초들이 보였다. 2층 계단부터는 스멀스멀 연기까지 다가왔다. 지켜줄 사람도 있겠다, 해옥은 이번에야말로 으름장을 놓겠다고 생각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자는 상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 안 있어 연기의 원흉들이 나타났다.
"이봐요, 당신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남자가 해옥의 말을 끊었다.
"장석윤씨 이사 갔다대요? 2주가 넘었다는데. 아가씨 모르고 있었어요?"
해옥은 갑자기 말문이 막혀 어, 어, 하고 말을 흘렸다. 그 때 갑자기 상우가 해옥의 옆으로 다가왔다. 힘을 얻은 해옥이 참아왔던 말을 퍼부었다.
"그런건 모르겠고요.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우면 어떡해요. 하다못해 창문 열고 환기라도 시키든가. 꽁초랑 재는 바닥에 다 버리고. 지금…"
"여전히 코빼기도 안 보여?"
상우가 해옥의 말을 끊고 말했다. 말 상대는 해옥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던 남자였다. 남자가 대답했다.
"어. 주인 말로는 이사 간 지 2주가 넘었다던데? 열쇠도 반납했고 물건들도 싹 뺐대. 문 앞에 우편물 쌓인것 봐. 그 새끼 잡기 힘들 것 같은데."
태연하게 남자와 대화하는 상우의 모습을 보며 해옥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 여기는 내 여자친구야. 안 그래도 어제 주소 보다가 깜짝 놀랐어."
급기야 상우는 해옥을 남자들에게 소개시켜 주기까지 하는게 아닌가. 첫 인사가 "오랜만이네" 혹은 "여긴 어쩐 일이야"로 시작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우연히 만난 지인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친구는 아니고 그냥 아는 사람들이야. 해옥아, 인사 해."
상우가 해옥에게 말했다. 해옥이 멍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남자들도 인사를 했다. 그다시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해옥은 숨 쉬기가 곤란하다는 듯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상우와 남자의 대화 소리가 담배 연기처럼 해옥의 뒤를 따라왔다. 카세트 테이프를 감을 때처럼 위잉, 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해옥이 문을 열자 그제야 상우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해옥으로서는 선택의 기로였다. 하지만 이대로 모른 척한다면 아예 이실직고하는 꼴이라는 생각해 해옥은 상우를 집으로 들였다.
"담배 때문에 그랬어?"
상우가 신발을 벗으며 물었다. 그러자 먼저 들어가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은 해옥이 대답했다.
"난 화생방 훈련은 받아본 적이 없거든."
상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거실로 들어왔다.
"이제 얘기해 봐. 어제 봤다는게 뭐야?"
"너부터 얘기해 봐. 왜 갑자기 만나자고 한거야? 커피? 녹차?"
상우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커피. 그냥 잘 살고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아직 나를 못 잊었나 싶기도 하고. 뭐, 그래서 그냥."
해옥은 잠시 말 없이 커피를 타는 데 집중했다. 태연한 척했지만 가슴을 터질듯이 쿵쾅거리는 중이었다. 불편하니까 이만 나가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랑은 무슨 관계야?"
상우가 소파 곳곳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아, 그냥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야. 옳지, 찾았다."
"같이 일을 한다고? 글은 이제 안 쓰기로 한거야?"
"써야지, 왜 안 써. 그런데 글만 써서 먹고 살기가 쉽지 않더라고."
상우의 손이 자신의 정면을 향했다. 손 바깥으로 시커멓고 길쭉한 물체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해옥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해옥이 들고있던 티스푼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티비에서 딸칵, 하는 효과음이 났다. 해옥은 뛰었다. 개구리처럼 펄쩍 펄쩍. 상우는 그런 해옥을 이상하다는듯이 쳐다보았다.
"고장 나서 시끄럽단 말이야."
채널 숫자가 송출되기 전에 해옥은 전원을 누르는데 성공했다. 낙하하는 롤러코스터 안에서 억지로 입을 가린 여자처럼 티비는 짧은 비명을 내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해옥은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비록 마음 뿐이지만.
"예민한 건 여전하네."
심드렁하게 말을 던지고 상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식탁으로 다가가 해옥이 타 놓은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시작했다. 해옥은 상우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무슨 일하는데?"
해옥이 상우 앞에 앉아 커피 잔을 들었다.
"수전증 있었어? 커피 쏟겠다. 그냥 뭐, 쇼핑몰 같은 거. 야, 진짜 쏟겠다."
상우가 손을 뻗어 해옥의 커피 잔을 잡았다. 해옥은 억지로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상우의 손을 빌려 잔을 내려놓았다. 머릿속이 수많은 파편들로 핑핑 돌았는데 대부분 어떻게 하면 이 자식을 내보낼까 하는 것들이었다.
"무, 무슨 쇼핑몰인데?"
"그냥 조금 마니악한 물건들 파는 덴데 깊이 알 필요 없어."
상우가 해옥의 눈을 피했다.
"넌 꼭 그러더라. 새벽 두 시에 노래방 가서 여자 끼고 술 먹은것도 내가 알 필요 없는 거였겠지."
"그 얘기를 왜 지금…"
해옥이 손바닥으로 식탁을 치며 일어났다.
"됐어. 너랑 길게 얘기해 봐야 좋을 거 없을 것 같다. 이만 가 줬으면 하는데."
"항상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여자 끼고 놀았던 건 내 친구들이었다고 몇 번을 얘기해?"
"그래, 새벽 두 시에 노래방 간 건 잘한 거지."
상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해옥은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 커피잔을 들고 등을 돌렸다. 속으로는 잘 풀려 간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성격 하나는 진짜 뭐 같다. 헤어지길 잘했지."
상우의 빈정거림에도 해옥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대꾸했다.
"그래. 다음엔 뭐 같지 않은 년 만나길 빌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확히 말하면 상우의 짧은 한숨이 서너 번 흘렀다. 이윽고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고 해옥은 곁눈질로 뒤를 보았다.
"하나만 물어보자. 전화는 왜 걸었어?"
해옥이 뒤로 돌아 팔짱을 꼈다.
"삭제 하려다가 잘못 누른거야."
상우가 표정 없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대단한데? 너 조금 생뚱맞은거 알아? 아무튼 갈게. 나중에 얘기하자."
그러면서 상우가 몸을 돌렸다. 해옥은 말없이 상우의 뒷모습만 쳐다보았다. 진동 장치 스위치라도 올라간 듯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상우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발 끈을 묶던 상우가 문득 옆의 수납 통을 바라보며 동작을 멈추더니 손을 뻗어 낚싯바늘이 생선 올리듯 종이 한 장을 꺼내 올렸다. 분홍색 종이였다. 동시에 해옥은 팔짱을 풀었다. 상우는 되감기를 하듯 종이를 수납 통에 넣고 신발 끈을 풀었다. 해옥의 입에서는 이가 부딪치며 타자기 소리를 내었다. 상우가 신발을 벗다 말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답신 메시지를 작성하며 상우가 나직이 말했다.
"장석윤 일주일 전 자살."
'살'소리와 핸드폰 폴더가 닫히는 '탁' 소리가 겹쳤다. 해옥은 상우가 손을 넣었던 수납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온갖 자책과 후회와 절규가 머릿속을 휘감았고 한편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상우가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고개만 돌려 해옥을 쳐다봤다. 아무 표정도 없이.
"너였냐?"
-
얘는 불도 켜 놓고 어딜 간 거야."
트레이닝복 차림의 인희가 현관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갔다. 다음 날 입고 갈 평상복과 핸드폰 충전기 등이 담긴 쇼핑백을 소파 위에 던져두고, 겉옷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었다. 냉장고를 열어 마실 음료를 찾던 인희가 중얼거렸다.
"물 아니면 맥주네. 먹다 남았으면 좀 버릴 것이지. 하여튼 궁상맞은 년."
캔 맥주를 꺼내들고 식탁 앞에 앉은 인희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전화기 모양의 아이콘을 누르자 '해옥이년'으로 도배된 최근 통화 목록이 나타났다. 가장 위의 '해옥이년'을 선택하고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어깨를 이용해 핸드폰을 귀에 고정시키고 양손으로 맥주 캔을 땄다. 한 모금으로 가글하듯 입 안 전체를 차갑게 식힌 다음 목구멍으로 넘겼다. "카아." 하고 탄성을 낸 후 인희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당장 뒤질 것처럼 닦달해서 왔더니. 썩을 년, 진짜."
당장 전화 안 하면 죽인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인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앉아 맥주 몇 모금을 더 마셨다. 시계 바늘은 둘 다 '12'에 아주 가까웠다. 문이라도 열려 있던게 어디냐는 생각을 하며 인희는 소파에 발을 뻗었다. 발에 부딪혀 뭔가 툭, 하고 떨어졌다. 리모컨이었다. 재빨리 리모컨을 집은 인희가 티비의 전원을 올렸다.
"기존의 인형들이 찌르고 베는 위주였다면, 이번 루마니아 저주의 인형은 타격용으로도 쓸만 합니다. 감쪽같다는 얘기죠. 어릴 때, 친구 머리 때리고 시치미 뚝 뗐던 경험 다들 한 번씩은 있으실 겁니다. 루마니아 저주의 인형은 이런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는 기능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점은, 친구가 아닌 누구에게라도 할 수 있다는 점이죠."
티비에서는 웬 남자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코미디 프론가? 근데 뭐야. 428번? 어제 해옥이 년이 얘기했던 그건가."
인희가 중얼거리며 티비의 볼륨을 올렸다. 그러자 남자 소리 외의 주변 잡음이 귀에 들어왔다. 그 중 하나는 흐느낌이었다. 여자의 흐느낌. 카메라가 옆으로 돌아가고 이번엔 검은색 정장 차림의 여자가 화면에 잡혔다.
"특별 편성으로 함께하고 있는 리얼 홈쇼핑. 아무래도 시간대가 좋지 않기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방송을 마쳐야 할 것 같은데요. 앞으로 15분만 더 주문 받도록 하겠습니다. 30회 특집 루마니아 저주의 인형! 구매하신 모든 분들께 저주의 종이 두 세트를 무료로 드리고 있습니다."
여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면이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랍어 보컬이 섞인 기묘한 디스코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 동안 남자와 여자는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흔들고, 때리고, 던지고, 밟고, 찔렀다. 음악 중간중간 박자를 무시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오히려 인형의 움직임과 박자가 맞았다. 심장 박동기의 화면처럼 흔들리던 카메라가 남자와 여자를 떠나 새로운 사람을 잡았다. 의자에 앉은 그 사람은 온 몸에 봉선화 물을 들인 것처럼 빨갰다.
인희는 리모컨을 떨어뜨렸다. 화면이 흔들렸지만, 알아보기 힘들 만큼 신체가 훼손됐지만, 목걸이와 신발 정도로도 누군지 알아보기에 충분했다.
그저 입만 벌어질 뿐, 이름을 부를 정신도 없었다. 인형이 움직일 때마다 친구의 몸도 따라 움직였다. 피와 살점이 뻥튀기처럼 튀어 올랐다. 인희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았다. 번호를 누르고 귀에 가져갔다. 신호음이 울리자 춤추전 티비 화면이 정지했다. 몇 번 더 울리자 남자와 여자의 표정이 달라졌고, 통화가 시작되느 화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인희가 핸드폰을 떨어뜨렸을 때 남자의 입이 열렸다.
"주소는 어제와 같습니다."
티비 화면이 흑백으로 바뀌었다. 현관 너머가 시끄러웠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完
<출처: 네이버 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