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의 바른 역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올립니다ㅋㅋ
엄청 길지만, 스크롤 그냥 쭉쭉 내리지마요ㅠㅠ
정말 꼭 읽어봐야하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들입니다.
다른 가치 없는 것들에 묻히면 안되는 글입니다!!!!!!!!
(1)역사적 진실
1.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2. 중국의 '중국 고금 지명 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다시 되새김질해보면 상 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4. 삼국지의 위,촉,오 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20만명 안팎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성기 병력은 100만명이었다.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6.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 조선 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한반도에는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할 수 없다.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8.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각종 지리지나 고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종합하여 보면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보다 찾을 수 없는 지명이 더 많다. 각종 문헌에서 나오는 모든 지명이 현재 중국에는 있다.
9. 김부식은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김부식도 모르는 지명이 아무 근거없이 현재 청천강이라고 알려져있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가 발굴되었다.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생긴것부터 풍속이나 문화까지 한국인과 소름끼치도록 닮아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단고기등의 사서를 보면 치우천황은 분명히 한민족의 선조이다. 묘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바이칼 호수 주변엔 고리족이 지금도 살고 있으며 고구려 고려 등이 모두 고리 족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치우를 부정한다.
13. 백제의 유명 8대 성씨는 한반도에는 남아있지 않다. 모두 현 중국대륙에 있다.
14. 박혁거세의 무덤은 중국에서 발굴되었다.
15. 고려, 조선등의 무역 내역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을 수출하고 있다.
16.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삼국사기의 천체관측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17.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닌 일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고문헌이다. 현재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박창범 교수에 의해 한단고기의 천체관측기록이 정확하다고 밝혀졌다.
18. 백제의 인구가 고려나 조선초의 인구보다 많다.
19. 고구려 수도를 묘사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평양으로는 턱없이 작다. 현 중국대륙의 장안(시안)과 소름끼치도록 일치한다.
20. 당 13만 군에 의해 백제 수도가 함락된 후에도 백제 장군 흑치상지는 200여개의 성을 기반으로 당에게 저항해 당은 40만군을 증원한다. 만약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성으로 뒤덮여 있어야 한다.
21. 조선 초 인구가 37만명인데, 1000년전의 국가인 백제나 고구려의 군인만 100만이었다.
22.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과 과거의 요동 요서 개념은 완전히 틀린다. 요동이 고구려 영토라 함은 현재의 요동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 중국 대륙 내륙의 요동을 이야기한다.
23. 18~19c 외국인 선교사 또는 탐험가들이 작성한 지도에는 조선이 만주는 물론 중국대륙의 일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24.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과 산동성 즉묵시의 향토사학자들이나 향토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이 곳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25.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근처에는 성터가 있는데, 이 곳 주민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26. 현 중국 대륙의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있다.
27. 고구려 고씨가 아직도 중국 대륙에 살고있다. 특히 장수왕 후손인 사람은 고구려 유리왕의 묘가 베이징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베이징 근처에 유리왕묘가 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 유리국의 왕의 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28. 중국대륙에 있는 수많은 성들이 현지인들에게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고려성, 또는 고구려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29. 백제의 의자왕, 흑치상지에 관련된 지명들이 중국대륙에만 존재한다.
30. 백제가 패망할 당시 지명이 한반도에는 없다. 그러나 중국대륙에는 모두 있다.
31.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중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이 359개나 된다. 이들 모두가 중국대륙에는 존재한다.
32. 한단고기외에 한민족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는 위서라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규원사화 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33. 중국의 고문헌에 나와있는 발음법으로 정확하게 한자를 읽는 민족은 우리민족밖에 없다.
34. 신라 수도에 있다는 토함산의 이름은 화산이라는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도 토함산의 화산활동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현 경주의 토함산은 공교롭게도 화산이 아니다.
35. 한국 국사에서는 고조선이 망한 후 漢나라에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다가 고구려 동명왕에게 참패해서 漢군의 수장들이 모두 육시(몸을 6등분하는 참형) 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36.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인 애신각라 는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37.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 라고 발음된다.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의미한다. 신라의 왕족은 금(金)씨이다. 청나라의 원래 이름은 금(金)나라 이다.
38. 임진왜란 때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조선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다.
3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 를 보면 금 태조는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있다.
40. 청나라 황실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금 태조가 나라 이름을 신라의 왕의 성씨에서 따왔다고 기록되어있다.
41.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 건국직전에 여진족이 부족국가 형태일때의 추장이 신라인이라고 기록되어있다.
42. 현재 우리나라 부안 김씨의 족보에 금 태조의 이름이 나와있다.
43. 백제 온조왕 13년 (BC 6),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편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였다. 지금 국사에서 배우는 상식으로는 백제 북쪽은 고구려로 막혀 있어야한다.
44.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 (보정부, 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 (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 (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북경일대를 말한다.
45.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에는 북위가 백제를 치려고 수십만의 기병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북위에서 백제를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한다. 기병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
46.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강역은 동서 너비가 2천여 리, 남북 길이 1천 5백여리, 신라, 백제를 병합하니 고려의 동북(東北)쪽이 넓어졌다' 라고 쓰고 있다. 송사(宋史),.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들을 보더라도 역사서 원전에 의한 조선의 선조 국가들이 존재했던 곳은 모두 동서(東西)가 넓고 남북이 짧은 지역을 통치 영역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북송인이자 외국(外國)인 서긍이 직접 고려로 가서 보고 온 고려의 통치 영역의 지형구조가 동서(東西)가 넓은 구조였다고 했다. 현재의 한반도는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지형이다.
47. 몽고에서는 징기츠칸의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고구려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48.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명사, 선조실록, 난중일기, 이순신전서, 임진전란사, 은봉야사별록 등) 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명, 상황전개, 위치, 방위, 거리 및 전후사정이 한반도에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49.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에 나오는 지명들은 중국에는 모두 존재한다.
50. 난중일기의 원문을 직접 번역한 현역 해군 중령 최두환씨(해군본부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는 난중일기 번역을 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지명을 추적하여 임진왜란의 무대를 중국 본토로 옮겨놓자 쉽게 풀려나갔다고 한다.
51. 임진왜란 당시 기록을 보면 왜가 침입해오자 조선의 왕은 서쪽으로 피신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상식적으로는 북쪽으로 피신해야 옳다.
52. 어제신도비명 에 보면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여러길로 나눠 서쪽으로 진출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한반도라면 당연히 북상 하는 것이 옳다.
53. 지도는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 등을 두루섭렵하고 있어야 제대로 만들 수있다. 한반도 전역을 3차례 둘러보고 정교한 대동여지도를 김정호가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54. 김정호는 일제시대에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동여지도가 공개된 것 역시 일제시대이다.
55. 대동여지도에 씌여있는 글에는 분명 조선의 강역이 1만 9백리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글 옆의 지도, 즉 한반도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56. 조선의 중심지는 낙양이라고 쓰고있다. 한반도에는 낙양이라는 지명은 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낙양은 중국의 천년고도의 도시이다.
57. 세스페데스라는 포르투갈 신부가 16c 에 쓴 책에 의하면 꼬라이 또는 꼬리아라는 왕국은 일본에서 10일정도 걸리며 왕국의 끝은 티벳까지 달한다고 씌여있다. 또한 조선의 북쪽에 타타르가 있었는데 그것도 조선땅이다 라고 씌여있다. 타타르는 내몽고에서 활동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조선대륙의 강들은 수량이 풍부한데, 강의 폭이 3레구아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58. 루이스 프로이스 라는 신부가 쓴 조선의 강역에 대한 글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과 거대한 사막이 존재한다고 씌여있다.
59.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불태운 우리 역사서가 약 20만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딱 두 권만 남겨두었다.
60. 한국의 국사의 기초와 체계는 모두 일제시대때 일본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 역시 일제시대에 일본에 의해 씌어진 '조선사' 라는 책과 내용이 거의 똑같다.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의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라는 고문헌의 한 구절
"슬프다!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나 죽어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
(2) 역사 왜곡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한 세 가지 해독
불과 수년 전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단군상 훼손사건 은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0여 년 전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단군신화를 「근거있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32%(1992년 10월6일자 세계일보)였는데, 그렇다면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뿌리를 알지 못하고 역사의식을 잃어버리면 그 나라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10월 3일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있으면서도 국조 단군의 역사성 을 확신하지 못하는 나라,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安浩相) 박사는 10여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지식인들이 중독(중국의 해독)과 왜독(일본의 해독)과 양독(서양의 해독) 등 3독에 빠져 있으며, 이 3독을 치유하려면 특히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학자들이 반성하고, 민족주체성에 입각해 바른 역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동 신문기사)
민족사학자들은 이 삼독의 피해에 대해 대동소이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위 중독과 왜독과 양독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 민족 역사의 뿌리를 잃어버리게 한 그 사례를 찾아본다.
중독(中毒): 사대주의 역사관
서기 650년부터 신라는 당나라 고종의 연호를 빌어다 썼다. 통일신라 때에도 당나라의 연호를 썼음은 물론이다. 그후 고려시대는 송나라의 연호를, 조선시대에 와서는 명나라, 청나라의 연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 국시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역사를 쓰는 학자들이 아(我)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중국의 입장에서 역사를 썼다.
중국을 대중화로 삼고 우리나라를 스스로 소중화로 비하시켜 보는 것이 바로 사대주의 역사관 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역사서로서 삼국시대의 정사를 기록한 「삼국사기」(1145년)가 역대 최고의 사대주의 사서로 꼽힌다.
고려 중기때 사람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으며 그후 삼국사기를 쓰게 되는데,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을 한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불손하여, 임금께서 장차 토벌하려고 했다.
이 부분은 누가 보아도 중국에 편중된 역사 서술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중국의 임금이 치려고 했다… 는 식으로 쓸 수가 있을까. 지금 읽어보면 참으로 황당한 내용인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삼국사기에 보면 “진덕왕 3년(649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쓰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부터 모든 관직이나 명칭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모든 복장제도를 중국같이 바꿔 버렸다.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때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한국인의 가치관과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고, 오직 중국에서 뿌리와 사상을 찾으려는 정신의 식민지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고려 후기 때 편찬된 일연의 『삼국유사』(1281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고조선조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한 구절에 ‘석유환국’(昔有桓L: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의 환국에 대해 주를 달면서 환국과 불교의 환인이 글자가 비슷해 보이므로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환인천제의 환국을 국가가 아닌 불교의 수호신 제석천(帝釋天, 釋帝桓因陀羅, Sakra-Devendra)으로 바꿔놓았다. 다시 말해서 고려의 강산을 불국토로 만들려고 「고기(古記)」 원문에 없는 말을 제멋대로 갖다붙인 것이다.
또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지금의 백두산)을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였고, 단군왕검의 도읍지 아사달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는 등, 배달국과 고조선의 광활한 영역을 반도 안으로 축소해버렸다는 점에서 민족사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위서」와 「고기」(단군고기)에 나와 있는 기록들을 인용하여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또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고려시대 때 이러했다면,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시대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서거정의 『동국통감』도 단군조선을 정통으로 다루지 못했으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우리나라 역사를 ‘기자’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당시에는 유림들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릴 것이 두려워 감히 드러내놓고 주체적인 역사를 논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왜독(倭毒): 식민주의 역사관
일제 식민주의자에 의한 역사왜곡을 왜독이라고 한다. 토인비는 “어떤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나라의 역사를 말살하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의 철학이다”라고 했다. 일제는 36년 동안의 식민통치 시절 우리나라 역사를 철저히 파괴했다.
■민족사서 20만권 강탈
1910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모든 서적을 일제히 수색했으며, 다음해 1911년말까지 1년 남짓동안 무려 20만권의 서적을 강탈해갔다. 그러니 한민족의 역사책 같은 것이 최우선적으로 압수되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51종 20만권 정도를 가져갔다”고 얘기하고 있다. 사료수집가 이상시 씨는, 한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단군관련 기록을 중점적으로 약탈해 갔다는 사실을 신문지상에 발표하여 일제의 무도함을 다시 한번 세상에 드러낸 바 있었다(1985년 10월 4일자 조선일보).
■조선총독부의 교육시책 - 조상을 멸시하게 하라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제2대 조선총독으로 사이토(齊藤實)가 와서 문화정치를 표방한다. 이때 발표한 ‘교육시책’에서 사이토는 이렇게 발표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아버지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跡)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일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이 내용을 잘 읽어보면, 새삼 우리 한국인들의 사고 속에 우리 나라와 민족에 대한 허무의식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키도록 교묘하게 술책을 꾸민 것이 바로 일제 때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금도 일반인들의 의식 깊은 곳에는 “조선은 안돼…” “맨날 싸움박질만 하고…” “조선인은 맞아야 돼”라는 식의 깊은 허무의식이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은가.
■역사의 조작 및 날조의 산실 - 조선사편수회
이러한 근본정신 속에서 일제는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약칭 조선사편수회)를 만들고 1938년까지 35권에 달하는 『조선사』를 편찬했다. 그러나 조선사 편찬의 진짜 목적은 조선사의 뿌리를 없애는 데에 있었다. 일본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유구한 조선의 고대사를 통째로 말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된 조선의 역사는 처음에는 상고,삼한시대부터 다룰 듯 거론하다가, 차츰 연대가 낮춰지고 다시 삼국 이전이 됐다가 결국은 통일신라 이전부터 다루는 것으로 결정되기에 이른다.
일제는 이 조선사 편찬을 위해서 당시 돈으로 쌀 10만 가마니 이상을 썼다고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조선의 역사를 조작, 개작하였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운, 우리 민족 우리 조상의 역사는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되었다. 해방 이전의 역사가 완전 날조된 것이라니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예로 2003년 8월 7일자로 발간된 「주간조선」에는 ‘ 구한말 지도 ’라는 게 실렸다. 1999년 6월 26일 국정홍보처가 영국과 공동으로 벌인 조사 결과 조선의 영역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와 사할린 일대까지 그려진 지도가 대량 발견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사에 의하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로마 교황청 등지에서도 조선의 영역이 만주와 흑룡강성 일대를 포함한 지역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제가 1909(순종3)년 9월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만주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일대를 만주국 영토로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이마니시 류가 환국(桓f)을 환인(桓因)으로 왜곡하다
일제의 뜻대로 한국 고대사를 주물렀던 주모자였던 당시 교토대 강사 이마니시 류(今西龍:후일 경성제대 교수)는 이병도 등과 더불어 신라부터 고려 때까지의 조선사를 뜻대로 왜곡한 장본인이다.
‘조선사편수회 회의록’을 통해,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삼국유사’의 단군고기 중에 ‘昔有桓L’(석유환국)이라고 되어 있던 것을 ‘昔有桓因’(석유환인)이라고 고친 사실이 드러났다.
이마니시 류가 소장하고 있던 1512년의 삼국유사 정덕본에는, 일연이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 그 나라에 높은 서자 벼슬을 하는 환웅이 있었고 마지막 환웅대에 단군이 나타나 조선을 세웠다’라고 되어 있었다(현재 일본 천리대 소재, 국내에서는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그러나 이마니시 류는 변조된 내용을 경도제대 (경성제대를 뜻함) 영인본이라고 하여 발표한다. 그리하여 현재 전해지는 ‘삼국유사’의 판본에는 환국(桓L)이 환인(桓因)으로 변조되었고, 환인-환웅-단군 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뿌리 역사를 송두리째 뽑아버렸던 것이다.
이는 원래의 환국시대가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것임에 반해, ‘桓因’이나 ‘帝釋’으로 바뀐 것은 불교적이고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이며,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은 명백한 조작이다. 지금으로부터 4336년 전에 세워진 단군의 고조선이 3000년 전의 불교의 부처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이전의 사실이라는 점, 환국은 불교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점 등이 맞지 않다.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회개
그리고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의 수서관보가 되어 ‘조선사 편찬’이라는 거대한 역사왜곡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 문교부 장관까지 지냈다. 그는 『조선사』 편집에 참여하여 일제의 식민사관 수립 사업에 직접 기여하였고, 일제가 유포시킨 식민사관을 해방 후까지 이어주는 중대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한국사학계에는 직접간접으로 이병도의 제자 아닌 사람이 드물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는 주체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요지의 이른바 반도사관론을 대량 유포시켰으며, 우리 역사 사료들을 전부 빼앗아가고 불태우고서는 증거가 있어야만 인정한다는 식의 소위 실증주의 역사방법론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병도는 나중에 고대사 연구에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고 스스로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병도는 죽기 직전,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국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반성문을 발표한다. 그간 최태영 박사, 송지영 KBS 이사장, 국문학자 이희승 박사 등의 설득으로 과거 자신의 역사관을 크게 수정하여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에 논설을 게재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를 바라보던 제자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어떤 이는 ‘노망 드셨네’ 하며 비웃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때 그와 더불어 『한국상고사입문』(1989년)을 발간했던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한민족이면 누구나 어린아이 때부터 배웠던 ‘동몽선습’이나 ‘세종실록’ 등 각 고전에도 단군기록이 나옵니다. 수백년전 기록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기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판소리할 때도 그 긴 내용을 한자도 바꾸지 않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기록은 더욱 정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서울대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 2000년 1월3일자 문화일보 특별대담)
양독(洋毒): 실증주의 역사관
양독은 서양에서 들어온 실증주의 역사학의 해독을 말한다.
이는 “주관적인 판단 없이 역사적 사실을 원래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의 관점을 밑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 계열의 역사학자들은, 오직 유적과 유물에 의해 실증된 역사적 사실만을 인정하는 반면, 문헌을 연구하는 사학은 비판한다. 그래서 대표적인 고대사 자료인 『환단고기』 등의 서적을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눈으로 보아야만 믿는다는 식의 고증이 중요하다면서, 왜 그들은 중국과 러시아 땅에 묻혀 있는 고조선의 유적과 유물들은 확인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해방 후 국사학계는 1930∼40년대 초기의 학풍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더욱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납북되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다양한 국사연구 학풍이 실증주의 학풍으로 단일화되면서 실증주의 사학자들이 우리 나라 국사학계의 핵심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주류에 역사학자 이병도의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었음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그는 역사학계의 대부로서 해방 후 1955∼1982년까지 ‘국사편찬위워회’ 위원으로 재직하였다. 그러니 일제시대의 식민주의 역사관이 국사책에 반영되었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 역사가 왜 왜곡되었는가? 왜적이 침범해서 역사책을 불태우고, 내란이 일어나서 우리 역사책을 불태워서 왜곡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왜곡되었다”고 하였다.
앞서 소개했던 안호상 박사는, 고대 역사서들이 입증하고 있던 사실을 후대에서 중국과 일본의 사가들이 이 사실을 왜곡 변조했으며, 식민사관에 물든 우리의 역사학자들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여기에 기초해 국정교과서들이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지적했었다(1999년 3월 1일자 세계일보).
역사가 단지 흘러가버렸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잊혀지고 마는 것일까?
우리의 민족혼 속에는 서양식의 근대적인 과학주의 역사관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깊은 잠재적 사상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유적과 유물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의식 무의식 속에 살아숨쉬는 민족혼이야말로 역사의 실체를 찾아가는 단초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문화의 정신사 속에는 상제문화와 제사문화, 그리고 풍류신도가 면면히 전승되어 오고 있다 잃어버린 고대사의 복원을 통해서만 이러한 민족문화의 정수를 되살려 낼 수 있다.
매년 설, 추석만 되면 수천만 명이 모든 일을 제쳐놓고 오직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을 찾아나선다. 이는 뿌리를 찾아가는 원시반본 문화의 표상이다. 또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 당시 한반도를 붉게 수놓은 인간꽃, 태극 물결을 보라. 이것은 풍류신도의 저력이 아닌가.
전 인류의 종주국이며 찬란한 9,000년 역사의 주인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조선의 역사는 무정신의 역사다] 라고 부르짖은 단재 신채호선생
(3) 이하 뉴스 내용
< 8뉴스 >
< 앵커 >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알고 있는 단군신화가 신화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역사라는 사실을 입증한 책이 나왔습니다. 일제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조선 관련 기술을 변조했다는 겁니다.
우상욱 기자입니다.
< 기자 >
고려의 승려 일연이 쓴 역사책 삼국유사입니다.
현재 출간된 대부분은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환인의 서자'인 것으로 기술돼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인'자는 간자체 '국'자에 가필된 흔적이 역력합니다.
일제시대 이마니시라는 일본 사학자가 변조한 것입니다.
변조 이전의 삼국유사를 보고 정리한 동경제대 발간본에는 '국'자로 분명히 기술돼 있습니다.
한민족이 단군 조선 전에 이미 '환국'이란 나라를 형성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일제가 왜곡했다는 분석입니다.
이런 주장을 책에 담은 저자는 사학자가 아닌 현직 교육과학기술부 과장입니다.
[성삼제/교과부 학교제도기획과장 : 그때 일본역사교과서 왜곡 사건 났을 때 그때 제가 실무반장을 맡았습니다. 한일 관계 역사뿐 아니라 고조선 역사가 왜곡됐다는 걸 알고 그때 대책반에서 이 관련자료를 조사했습니다.]
성 과장은 4년동안 방대한 사료를 모아 단군 조선이 허구적 신화가 아니라 실제 역사임을 조목조목 증명해 사학계에 큰 파장을 불렀습니다.
[성삼제/교과부 학교제도기획과장 : 학문적으로 한번 굳어지고 나면 이것이 회복되는 데 100년, 20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도그마에 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 고조선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고 봅니다.]
비단 역사학자 뿐 아니라 일반인도 바른 역사에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성 과장은 강조합니다.
(4)학자 증언
일본학자 고꾜 야스히꼬(吾鄕淸彦) :
일본 학자 고꾜 야스히꼬(오향청언, 吾鄕淸彦, こきょうきやひこ)는 이렇게 썼다.
“사마천의《사기(史記)》25권은, 단군 조선
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
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 :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고조선(古朝鮮)》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 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며,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10) 소련의 역사학자 시로코고르프 :
소련의 역사학자요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シロコゴルフ)는《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 양자강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의 중간 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
다 읽어보신분들은 느끼셨겠지만, 대한민국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처음 알게 된 내용들이 많을껍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대한민국이 이렇게 위대하고 찬란한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는것도 잘 느끼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문화와 유산이 소중하고 보존해야될 가치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정도일줄은 몰랐죠.. 일본은 이렇게 우리의 혼과 얼을 앗아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바른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추천 많이 해주셔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주세요ㅠㅠ 많은 분들이 보신다면!!!!!! 저는 한국의 핵개발을 위해 죽음을 감수하셨던 이휘소 박사님의 대한 글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