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는 <52주 평신도 조직신학>이라는 책을 가지고 같이 공부를 하겠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 함께 살펴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이야기만 같이 보면서 개인적으로 자세히 볼 수 있는 계기 마련을 하고자 합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넘겨보시면은 영어로 이렇게 표시돼 있습니다. What a faith is all about? 이렇게 돼 있는데, 뭐 번역하면 믿음이 뭐꼬?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믿는다라는 것이 어떤 내용이냐, 무엇에 관한 것이냐, 이런 원제를 갖고 있는데, 번역된 서적을 읽어볼 때 그 원제목을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책을 샀는데, 똑같은 책을 각각 다르게 번역한 것을 이중으로 사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번역된 제목은 항상 다른 제목을 주로 달고 있기 때문에 책을 번역된 서적은 원제를 한 번 확인해 보는 게 좋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What a faith is all about?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부제가 쬐그만 글씨로 있는데, A study of the basic doctrines of Christianity, 이렇게 돼 있습니다. basic이라는 말은 뭐 기초적이고 기본적이다라는 의미보다는 아주 중요한, 근본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라고 생각합니다. 기초적이라기보다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다, basic doctrine, 아주 중요한 근본적인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엘머 L. 타운스, 이렇게 돼 있는데 그 분의 약력은 표지 왼쪽 부분에 있습니다. 내지에 보면 엘머 L. 타운스 박사는 캐나다에 있는 유니피그 성경 대학의 학장을 지냈으며 린츠버그 침례교 신학교의 공동 창설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에 관한 소개가 있습니다. 자, 이 책 제목을 52주 평신도 조직신학이라 번역한 이유는 그 내용이 52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1년 동안 한 주에 하나씩 공부할 수 있도록 그렇게 짜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저 발행인의 글 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이 책 전체적인 취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발행인의 글 내용을 가지고 이 책이 어떤 취지로 발행이 되었는지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뜻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국교회의 병폐를 한두 가지쯤 집어내고 말하는 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세태가 이즈음이다. 한국교회가 당면한 작금의 현실문제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개교회의 상황을 미루어볼 때, 무엇보다 교회에 속한 지체들의 전임적 성숙을 위한 교육의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일 것으로 생각된다. 전임적 성숙을 위한 교육의 부재가 우리 시대 병폐 중의 하나라고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말은 많은 부분 해당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자기가 믿고 있는 내용을 성경을 가지고 입증할 수 있는 경우가 아주 드뭅니다. “믿는다, 믿습니다.”라는 말은 강조하고 있지만 무엇을 믿고 있는지 그 내용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교육의 부재, 그 원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밑에서 네 번째 줄 보면, 그러나 내용이 없는 외형만으로는 공허해질 수밖에 없고, 내용이 없는 외형만으로는 공허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근본적인 교육체계가 필요하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페이지입니다. 두 번째 줄, 그러나 열심은 있었으나 지혜롭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많은 성도들을 많은 시간 동안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잡아두기만 하면 성숙이란 저절로 되는 것처럼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은 우리에게도 한번쯤 스스로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잡아두기만 하면, 다른 데 시간을 전혀 쓸 수 없도록 교회의 프로그램, 각종 프로그램 안으로 교회 안에 잡아두기만 하면 저절로 성숙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에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단지 성도들을 사회에 노출되는 시간을 줄이고 잡아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교육, 뭔가 얻는 것이 있는 그러한 프로그램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지적은 한번쯤 우리 자신도 되돌아볼 필요를 일깨워준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자신이 설교해온 내용을 주제별로 목록을 한 번 만들어 보십쇼. 만일 비슷한 주제가 반복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만 주로 다루고, 그리고 꼭 가르쳐야 될 핵심적인 내용이 빠져있는 것이 발견된다면 뭔가 전체적인 프로그램의 계획성이 없는 겁니다. 자신이 설교하는 목록의 어떤 1년 치를 예를 들면 분석해 봤을 때, 특정한 주제에 치중돼 있다라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내용, 쉽게 다룰 수 있는 내용만 이야기했다든지, 또는 꼭 가르쳐야 하지만 말하기 좀 껄끄러운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든지 그런 면이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임적 성숙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이라고 그랬는데, 골고루 여러 부분을, 또 설교자로서 얘기하기 어려운 부분까지도 골고루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거는 무계획성에 의해서는 절대로 실현될 수 없고 계획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1년 설교할 계획을 세운다면 골고루 그 주제를 자기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늘 확인하면서 혹 내가 어느 부분은 전혀 거론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4페이지 세 번째 패러그래프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신앙의 성숙은 결코 구체적인 가르침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부분이다.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랬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 어떤 부분적이고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루었던 모든 부분을 우리는 가르쳐 지켜야 되는데, 이 “가르치다”라는 표현 속에서 어떤 체계화돼 있는 전달할 수 있는 자료들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체계화돼 있는, 그리고 “전달할 수 있는”이라는 말은 “가르친다”라는 말이 지식의 전달이죠. 그러니까 가르칠 수 있는 자료들이 준비돼 있어야 된다. 이렇게 체계적인 교육과 전달할 내용의 준비에 대해서 이 책의 취지를 발행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결론적으로 4페이지 마지막째 줄에 보면 신학적 이해를 단순화시키고 어떻게 그것이 실천적 신앙으로 연결될 것인가, 이런 부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복음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또 전달할 수 있는 실제적인 내용을 가지며 그리고 실천적인 신앙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가르쳐야 된다. 이런 부분이 이 책의 발행의 취집니다. 그래서 5페이지 제일 밑에서 두 번째 줄 보면, 이 책의 내용을 의도하고 있는 목적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신학이 있는 교회, 실천적 신앙의 신학, 이것이 이런 책을 발행하는 취지로 제시돼 있습니다. 한 페이지 넘겨보겠습니다. 목차가 있습니다. 52주 평신도 조직신학의 목차, 그랬는데, 조직신학에서 다루고 있는 분야를 제일 큰 제목으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가장 그 basic, 근본적인 교리를 체계화해서 학문이라고 불려질 만큼 체계화돼 있는 내용을 만든 것이 조직신학입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의 핵심적 내용이 제시돼 있는데, 전체적으로 12부까지 되어있고, 그리고 52장의 내용으로 구성이 돼 있습니다. 그것은 공부의 편의를 위해서 52주, 1년 동안 공부할 수 있는 그런 분량을 정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 서론이 있고, 성경에 나타난 교리에 대한 이해, 신론, 기독론, 성경론, 인간론, 구원론, 천사론, 사탄론, 귀신론, 교회론, 종말론, 이와 같이 해서 12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는 조직신학에 공통되는 핵심적 주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 1장, 2장 하면서 소제목을 살펴보았을 때, 소제목에 대한 지식과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을 체계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학습을 통해서 만일 이 목차만 주고 설교를 하라고 이야기했을 때 충분히 설교할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이거는 베이직한 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오후에 성령론 하면 성령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되는가, 성령의 인격과 사역은 성령론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 핵심적인 두 가지 부분을 다루고 있죠? 성령이라는 인격체, 그리고 성령의 사역, 그래서 두 가지를 다루고 있는데 우리가 각각 큰 제목에서 어떤 내용이 핵심적인 것인가를 이 소제목을 살펴봄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기독교는 우리들만의 기독교가 아니라 2,000년이라는 앞서 간 선진들에 의해서 이미 전파되고 체계화됐던 신앙의의 내용입니다. 우리만의 독자적인 거라는 건 틀림없이 잘못된 겁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불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의 진리가 우리 시대에도 동일한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너는 옛길을 살펴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앞서 간 선진들이 이미 다루었고 그들의 삶에 변화가 됐고 중심이 됐던 내용들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독특하고 새로운 것은 대부분은 이단적인 견해일 경우가 아주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책을 공부하다 보면 우리가 그동안에 교회를 통해서 배운 내용들이 얼마나 잘 배웠는가를 이렇게 더욱 느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처음 보는 책인데도 읽어보시면은, 생소한 내용이 별로 없다라고 느껴질 겁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교회 내에서 정상적인 가르침을 계속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늘 상식처럼 또는 식상하게 듣는 수많은 내용들이 아주 핵심적인 내용을 다 다루고 있었다는 걸 이런 책들을 공부할 때마다 느낍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새로운 것은 별로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이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 잘 정리를 했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라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실질적인 교육을 계속 받고 있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체계화되고 정리된 것을 확인하는 그런 느낌을 받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 9페이지 보겠습니다. 저자의 머리말입니다. 이 저자 엘머 L. 타운스는 신학, 조직신학과 관련된 분야를 20년 이상 연구하고 가르쳤댑니다. 그래서 자신이 거의 평생을 연구한 부분을 쉬운 말로 사람들에게 더욱 알려주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 신학을 20년 이상 가르쳐 왔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9페이지 밑에 난화주 쪽에 보면 설명이 돼 있습니다. 요즘 미국 학계에서는 신학의 4대 분야 가운데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의 두 분야를 하나로 묶어 가르칠 때 신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신학이라는 말이 데올로지, 이렇게 돼 있죠? 헬라어에서 나온 영어죠. 헬라어로 하나님이 데오습니다. 그리고 로고스가 진리라는 뜻이죠. 그래서 데오스라는 하나님이라는 말과 로고스라는 진리라는 말의 합성어가 데올로집니다. 그래서 신학이다, 이런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 신학의 4대 분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신학의 4대 분야가 참고로 말씀을 드리면은 성서신학, 역사신학, 그리고 조직신학, 실천신학, 이런 것을 신학의 4대 분야라고 이야기합니다. 신학대 커리큘럼을 보면 이 4대 신학을 가지고 커리큘럼을 짠 겁니다. 다시 한 번 얘기해 보죠.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입니다. 그리고 이런 4대 분야의 구체적인 과목이 있습니다. 성서신학 그러면 구약신학, 신약신학, 또 주경신학. 주경신학이라는 게 뭐죠? 구약과 신약에 대한 각 구절에 대한 본문을 해석하는 연구, 그게 주경신학입니다. 그리고 성서고고학, 성서언어학, 이런 것이 성서신학이구요. 역사신학이라는 건 교회회의, 또는 신학자의 개인적인 진술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신학의 분야에선 교회사, 교리사, 기독교사상사, 선교역사 이런 내용들이 이제 역사신학 부분입니다. 그리고 조직신학이다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의 핵심적인 진술을 주제별로 정리한 것이 조직신학이고 그 외에 변증학, 윤리학 이런 것도 조직신학의 한 분야로 대개 편성을 합니다.
그리고 실천신학이라는 것은 성경의 진리가 생활 속에서 전달되기 위해서 필요한 학문들입니다. 설교학, 전도학, 목회학, 교회행정학, 기독교교육학, 요런 것들이 이제 실천신학의 분야들입니다. 그래서 이 커리큘럼을 가만히 보면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분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은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 책은 어떻게 쓰여졌냐면 저자의 말을 빌려보면 9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 먼저, 이렇게 첫 번째 거론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필자는 이 책을 신학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날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학도들을 위하여 기록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신학자만의 전유물이 된 신학이 아니라 일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기준으로 이 책을 썼다라고 이야기합니다. 10페이지 네 번째 줄입니다. 심오한 진리는 단순한 표현 속에서 발견된다라는 사실은 여전히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록을 했다라는 겁니다. 진리는 심플하고 이지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진리 자체는 단순성을 갖고 있다라는 거죠. 그리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진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는 단순한 표현 속에서 발견된다”라는 명언처럼 이 책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표현으로 다루고 있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신학적 용어들을 엄선해서 사용하고 있고 그리고 그 용어들을 쓸 때는 성경적 배경을 제시하는 정의를 내림으로써 해설하려고 노력하였다. 자, 믿는 사람 세계 속에서만 쓰는 특별한 용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학문적인 내용으로 정리해서 쓰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성화, 영화, 칭의, 이런 표현들은 신학적 용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신학적 용어를 남발한다면은 기독교를 처음 접하거나 익숙지 않은 분들에게는 외국어처럼 들릴 겁니다. 우리가 교제한다라는 말도 우리끼리 정의돼서 사용되는 말이지, 만일 교회를 모르는 아버지한테 늦게 들어온 딸이 어디 갔다왔냐 그러니까 교제하고 왔다 그러면 무슨 남녀 교제 했다고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러니까 용어를 쓸 때는 반드시 성경적 배경을 제시하고 명확하게 정의된 상태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 책은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용어를 썼을 때는 성경적 배경과 정의를 했다는 겁니다. 또 세 번째는 실천적인 내용이 되도록 노력하면서 썼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세 가지 이와 같이 이 책에 기록된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설교에 있어서도 적용해야 될 도움이 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설교를 구성하고 설교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정말 소수의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의 남발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하고 정말 심플하고 이지한 그런 표현을 사용해야 되고 그리고 신학적 용어, 성경적 용어를 사용할 때는 반드시 설명하고 사용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설교는 실천적인 내용이 되도록, 실제 생활에 연결시켜서 행동에 동기를 제시하는 내용으로 연결시켜야 된다, 이렇게 이 책에 쓰여진 방법을 설교하는 방법에 적용시켜서 우리가 교훈을 얻게 되면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설교도 이와 같이 단순한 진리를 분명하고 명료한 표현으로 전달하며 신학적 용어, 성경적 용어는 반드시 설명하고 사용하며 실천적인 내용으로 연결시켜야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설교를 구성하고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자, 10페이지 네 번째 줄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책에 나와있는 내용들인데 대개 어떤 책이 쓰여지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도움을 준 사람에 대해서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읽어보면, 예를 들면, 빌립보 성도들이 자기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바울은 그 빌립보서에 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감사의 표현을 한 거죠. 우리가 감사하는 데 그 말을 표현하지 않으면 인간관계에 많은 오해가 생깁니다. 그래서 감사는 표현하는 것이 옳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육체를 갖고 있는 사람의 관계를 원만하게 해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도 고마운 성도들에 대해서 그 감사를 서신서에 표현을 했습니다. 이 책도 자기에게 도움을 준 분들을 이렇게 일일이 거론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때로는 육체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됐던 분들에 대해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저도 자꾸 잊어버리는데, 예를 들면 새해에 혹 연하장을 보내주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어떡하다 보면 한 달, 시간이 죽 지나가면 연하장을 받았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그 분을 만났을 때 뭐 연하장을 잘 받았느니 그런 얘기조차 꺼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근데 내 입장에서 만약에 보냈다면, 아 그거 잘 받았다 그러면 아 전달이 잘 됐구나 하고 느끼고 또 마음에 어떤 그 느낌이 있잖아요. 그래서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니까 반드시 감사하다는 표현을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연하장 같은 것을 받으면은 반드시 메모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이렇게 다이어리에다가 연하장을 누구에게 받았는지 죽 써 놓습니다. 그러니까 다이어리를 죽 펼칠 때마다 그 이름을 보거든요? 그러니까 그 분을 더 생각하고 기억하게 되구요, 그리고 또 하나는 만났을 때 아, 연하장 잘 받았다고 인사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 그 감사를 표현한 것들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내용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결실은 절대로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축구시합에서 골을 넣었다면 골을 넣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같이 뛰어준 수많은 사람들이 골을 넣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얻게 되는 결실들은 절대로 홀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연합체 속에서 얻어졌고 수많은 동역자들 속에서 얻어졌다라는 것을 기억할 때 또한 감사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수많은 골을 넣을 수 있는 동역자들이 있음을 감사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1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 보면, 마리 체크먼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부인은 원고를 어떻게 읽어줬다 그랬죠? 비판적으로 읽어줌으로써 이 책의 내용을 보다 알차게 해 주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 이거 좋은데요.” “완벽한데요?”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한 재능을 가지셨습니다.” 라는 말의 연속보다는 “이거는 좀 이상한데요.” “여기는 좀 논리가 비약되지 않았나요?” “이거는 남들이 읽으면 못 알아듣겠네요.” 이런 식으로 비판적인 비평을 해줄 때 더 세련되고 다듬어진 결실이 나올 수 있는 거죠. 우리에게 있어서도 그런 비판적인 비평을 해 주는 분들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사랑이 가득한 마음 가운데서 비판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내려가니까 그 부인이 “여보, 오늘 설교준비 안 했죠?!” 그러더래요. 아, 그거 어떻게 알았냐고 그랬더니, 오늘이 다른 때보다 당신 목소리가 더 크더래요. 그러니까 자기가 준비 안 했다는 걸 감추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인 겁니다. 그리고 또 오늘 설교가 긴 거니까 준비 안 한 게 확실하대요. 왜냐하면 준비가 잘 돼 있다면 시간을 맞춰서 할 얘기를 딱 전달했을 텐데 준비가 안 돼 있으면 자기도 뭔가 미진하거든요, 얘기를 계속하면서? 그러니까 거기에 사족이 붙고 또 사족이 붙고 그러니까 장황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그렇게 딱 찝어가지고 비평을 해 주니까 설교자한테는 큰 도움이 됐다고 이야기하는데, 우리에게도 그렇게 사랑이 가득한 비평을 해 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생활 하면서 느끼는 것은 내게 잘 하는 사람, 있을 수 있죠? 그런데 내게 잘 하는 사람이 결코 하나님께 잘 하는 사람은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잘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이 필요한데, 잘못하면 내게 잘 하는 사람, 내게 잘 맞는 사람,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하게 되면 스스로 올무에 빠진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내게 너무 잘 했던 사람이 교회를 대적하고 떠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내게 잘 한다고 하나님께 잘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기억하고 정말 신앙 안에서 서로를 받아주고 가까이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 1부 서론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 서론 부분에는 두 가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첫 번째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 그리고 믿음에 대한 이해, 기독교-믿음, 이런 중요한 근본적인 부분을 서론 부분에 다루고 있습니다. 15페이집니다. 자, 인용된 본문은 사도행전 11장 26절이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초대교회 역사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곧 읽다보면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그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이방전도가 시작되는 걸 알 수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중심지가 옮겨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바로 그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라는 말처럼 좀더 이방전도가 체계화되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자, 서론 부분을 제가 읽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표현은 유치해 보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정확한 서술이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돕니다. 선다 싱에게 이방종교에 심취했던 선다 싱이 기독교로 개종했죠. 그래서 한 종교학자가 물어봤죠. 당신이 갖고 있던 수많은 그 종교적 체계와 당신이 개종한 기독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선다 싱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 의지했던 내 민족들의 토속적인 신앙에는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표현을 했는데, 아주 핵심을 잘 다룬 겁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돕니다.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죠. 그런데 문제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으며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의미는 무엇이며 예수님과의 개인적 인격적 관계는 어떻게 갖는가, 이것이 인제 믿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는 God Man,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십니다. 신성이 있고 인성이 있습니다. Jesus is true God,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and perfect man, 완전한 사람이다라는 말은 신앙고백의 베이직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의 기본이에요. 그래서 기독문을 배워보면 예수님의 신성이 나오고 인성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사역이죠?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한 사역이 있습니다. 속죄를 완성하셨다라는 거구요, 그리고 그분과의 개인적, 인격적 관계는 어떻게 맺는가. 영접함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영접함으로 그 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런 내용들이 기독문의 핵심인데,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중요한 지식을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정리해 보면, 예수님의 신성, 그리고 인성, 예수님의 사역, 하신 일이죠? 우리가 전도집회에서 강조하는 하신 일, 그리고 예수님와의 인격적 관계, 그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불행한 것은 우리 시대에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단 겁니다. 그리고 예를 든 그 사건으로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습니다. 그 두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가고 있죠? 그러니까 낙향하고 있는 겁니다.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몸은 예수님을 떠나서 엠마오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이 그렇다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보와 지식도 있고 교회생활도 하고 있고 그렇지만, 실제 삶의 모습은 낙향이죠.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그 지식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돼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에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어떻게 하셨죠? 찾아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입니다.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6 ~ 27
성경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증거를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교리의 전달입니다.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내용을 전달을 해 준 거죠.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그리고 그 후의 영광, 그와 같은 핵심적인 내용을 성경을 가지고 그들에게 전달해 줬는데, 그 자세히 설명하셨다는 가르침이 바로 교립니다. 그래서 가르침에 해당하는 단어가 교리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teaching과 doctrine이라는 말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적인 빈곤을 채워주셨다는 겁니다. 이 교리는 신학자들에 의해서나 거론되고 또 시대에 뒤떨어지고 우리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교리는 방금 중생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처럼 살아있는 것이고, 그리고 주일학교 교육처럼 실제적인 것이며, 좋아하는 성경본문을 읽는 것만큼 유쾌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조직신학 그러면 지루하고 졸립니까? 아닙니다. 이 조직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면은요, 정말 기쁨을 맛봅니다. 내가 믿고 있는 그분을 더 자세히 알아가는 기쁨을 맛보게 돼 있습니다. 절대로 지루한 학문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핵심적인 주제를 체계적으로 다루는 것이 바로 교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교리는 실제 생활 속에 적용이 돼야 되는데, 성경의 모든 교리는 실천적인 기독교와 병행해야 한다, 그런 내용들이 설명이 돼 있습니다. 자, 17페이지 굵게 인쇄한 부분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필요의 순간에 대해 말한다. 자, 언제? 우리에게 이 생명적인 교훈, 교리,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가 언제 필요한가. 그 필요의 순간이 언제인가. 이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것은 영적 형상에 있다는 뜻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은 사유할 능력이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이 사유의 능력이라는 것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겁니다. 사유하는 능력이 있고 그리고 지적인 능력이 있으며 표현되는 감정이 있고 그리고 자기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의지적 존재다라는 내용이 17페이지 밑에 설명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인 위치를 갖고 있고 영적인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그로 인해서 인간은 만물 가운데서 다른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유할 능력, 지적인 능력, 감정적인 능력, 자기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의지적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특별한 존재인 사람은 그 특별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단절이 생겼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교리의 필요성이 생긴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적 존재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고, 그 타락이라는 죄로 인해서 성경의 교리라고 얘기하는 핵심적 진리의 필요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배워야 하는가, 하는 이유와 같은 내용입니다. 필요의 순간, 언제 기독교의 교리가 필요하게 되는가, 그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여기 굵은 글자로 제시되고 있는데, 일단 굵은 글자를 제가 한 번 읽어볼까요, 18페이지부터?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인간이 자신의 평가의 기준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소외와 고립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인간은 고뇌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몇 가지 제시가 돼 있는데요. 자, 이러한 내용이 우리에게 언제 도움이 되냐면요. 왜 성경을 배워야 하고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를 이유를 설명해 나갈 때 필요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전도집회 할 때에 도대체 왜 믿습니까?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 필요성을 제시해 줘야지만 믿을려고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 날 복음을 제시하기 전에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하는 이야기는 필요성에 대한 걸 일깨워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필요성을 일깨워줄 때 마지막날 제시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돼 있는데 그 필요성을 제시할 때 무슨 내용을 목표로 이야기합니까? 바로 여기 제시된 내용이에요. 그래서 잘 정리해 보면 자기가 얘기하고자 하는 목표를 분명하게 정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돼 있다는 겁니다. 죄로 인해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죽음은 분리를 나타내며, 소멸이 아닌 분리를 나타내며 인간의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가져왔다, 이런 내용을 설명을 하는 거죠. 죄가 무엇입니까? 여기 죄가 세 가지로 정의돼 있습니다.
18페이지 보면 인간의 죄는 세 가지 모습으로 분류된다, 그랬죠? 죄가 무엇인지 세 가지를 제시하는데 첫 번째,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미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이게 헬라어 원어에 표적을 빗나가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잖아요. 표적을 맞춰야 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완전한 표준에 맞춰야 되는데, 우리가 그 완전한 표준으로부터 미달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족한 거죠. 그래서 죄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죄다. 마치 과녁에 미치지 못하고 떨어지는 화살과 같다, 이렇게 죄에 대한 정의를 할 수 있구요. 두 번째는 죄는 반역의 모습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요한일서 3장 4절에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뭐라 그랬죠? 불법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죄의 내용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법을 깨는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는 것, 그것이 죄다, 이렇게 두 번째 정의할 수 있구요. 세 번째는 밑에서부터 여섯 번째 줄에 설명돼 있죠? 죄의 세 번째 모습은 내적인 사악함이나 혹은 도덕적 불순을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거는 내적인 사악함, 도덕적 불결함 같은 거예요. 내적인 사악함이라 그랬죠? 자, 마가복음 7장을 보시겠습니다.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막 7:21
행동이 아니라 생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내적인 불순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음란한 행동이 아니라 음란한 생각도 죄라는 거죠. 도적질하려는 생각, 살인! 누굴 죽이고자 하는 생각, 그런 것들이 죄라고 이야기하는데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내적인 사악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 간단하게 정리돼 있지만 죄에 대한 세 가지 분명한 개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미치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맞추지 못하는 거죠. 또한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깨는 것, 불법, 그리고 세 번째는 내적인 악함입니다. 이런 것들이 죄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설명하겠다라고 생각하면 바로 그 세 가지 표준에 맞춰서 죄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을 얘기하는 건 그 하나님이 요구하는 표준이 있는데 그 표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얘길 하는 거구요. 그 다음에 그 법을 우리가 어기고 있다는 걸 나타내주고 그 다음에 내적인 악을 지적해내죠. 음욕을 품으면 간음했다, 미워한 자는 살인한 자라. 그런 그 내적인 죄를 지적해냅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해서 인간의 눈은 멀게 되었다. 눈이 멀었다는 건 삶의 방향과 의미와 목적이 없어지는 거죠.
기독교의 이해 4자, 이와 같이 복음을 믿어야 되는 기독교의 교리를 받아들여야 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를 일깨워줘야 되는데 그 첫 번째는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걸 일깨워주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죄를 깨닫게 해 주는 두 번쨉니다. 인간이 자신의 평가기준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재판은 법으로 받는 거지, 내 기준으로 받는 게 아니죠. 나는 좌회전해도 되는 줄 알고 했다, 나는 유턴해도 되는 줄 알고 했다! 그래서 무죄가 되는 게 아니라 유턴금지면 법을 어긴 겁니다. 좌회전 금지면 법을 어긴 거죠. 우리는 교통법규에 있어서도 자기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표준을 따라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 기준으로 자기가 옳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나는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 했다, 그렇다고 정당화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를 깨닫는 것은 자기 기준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옮겨갈 때 죄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칠 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라는 부분을 잘 설명을 하면 복음을 받아들여야 되는 필요성을 깨닫습니다. 미국 사람이 죽으면 미국 법으로 심판 받는 게 아니죠? 한국 사람이 한국 법으로 심판 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우리는 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게 죄예요. 자기 삶의 방향, 자기 기준으로 인생을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내가 생각하기엔 문제가 없죠.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을 깨닫게 해 주면 복음을 믿어야 된다는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자신이 평가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평가기준이라는 걸 가르쳐 줄 때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을 갖습니다. 세 번째는요, 인간은 소외와 고립으로 고통당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수많은 고통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벌의 그림자라는 거예요.
수술을 하는 어떤 분이 사람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있다라는 것을 몰랐었다라는 그 간증하는 걸 들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수술을 했는데 어떻게 사람에게 이런 고통이 있는가, 아주 그전에는 생각도 못했대요. 고통이라는 거 자체가. 그런데 하나님의 형벌은 죽음 이후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갈등, 고민, 고통, 그런 것들은 형벌의 예고편과 그림자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아주 가족을 잃어버리는 큰 슬픔이 있죠? 남편을 잃어버린 젊은 아내,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부부, 이런 삶의 큰 슬픔과 고통은 지옥 형벌의 그림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없는 세계를 사모할 수 있는 마음을 배우게 한다는 겁니다. 슬픔을 느낄 때 슬픔이 없는 세상을 사모하죠. 고통을 느낄 때 고통이 없는 세상을 사모하게 되죠? 그러면서 복음의 필요성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죄로 인한 이 세상의 모든 삶의 고통들, 또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와 고립을 초래했고 그러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소외와 고립으로 인한 고통들은 바로 복음의 교리에 절대적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20페이지, 인간은 고뇌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돼서 닻 없는 배와 같이 표류하게 되었다. 우리의 마음에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있는데, 그 공백은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부재라고 시인하지는 않지만 그 실제적인 공백의 이유는 하나님의 부재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공백을 가졌고 채워지지 않는 그런 그 빈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고뇌는 두려움과 우울과 질투와 또는 감정적인 불안한 상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의 고뇌 어린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결과고 그것이 복음을 믿어야 된다는 필요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크리스천 학자죠? 파스칼. 사람의 마음속에는 큰 허공이 있다. 그 허공은 물질, 쾌락, 권력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이런 거 외워두는 게 좋을 것 같애요. 물질, 쾌락, 권력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 허공은 하나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같은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21페이지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인간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소외되고 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삶 가운데 의미의 부재가 절실히 느껴지게 마련이다.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느냐 하는 삶의 의미의 부재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마치 자동차가 잘 닦여지고 기름도 가득 넣어놓고 준비돼 있는데 자동차에 딱 탔는데! 갈 데가 없어요! 그거 좀, 황당하잖아요? 그 좋은 자동차에 기름도 잔뜩 넣었는데 이거 갈 데가 없으면은 운전대 안에 앉아서 망연자실할 겁니다. 인생이 그과 같다는 거죠. 그래서 삶의 의미의 부재는 복음을 믿어야 될 필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 자체가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이렇게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목적을 제공해 주는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죠? 21페이지 마지막 부분.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죽음은 필연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반드시 죽는다는 거죠. 한 번 죽는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죽음은 필연성을 갖고 있는데 우리 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그 운명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적이 비로소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망은 우리의 원수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사망이라는 원수를 이기신 겁니다. 그래서 자, 여기 설명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기독교의 교리는 필요의 순간에 대해 말한다 그랬습니다. 지금 이야기했던 이런 내용들을 우리가 이게 인제 목표거든요? 이 목표를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인제 중요한데, 이 목표를 분명히 해야지만 설교도 설명이 되는 겁니다. 내가 도대체 예수님 믿으세요라는 필요성을 어떻게 제시할 것이냐 이거죠. 그 필요성을 지금 이렇게 정리한 겁니다. 그래서 이런 그 핵심적인 내용이 설교의 목표로 되어있을 때 그 목표에 맞는 부제목을 잘 선택해서 분명한 그 메시지의 전달력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를 죽 들으면 아, 그래서 믿어야 되는 거구나라는 필요성을 느끼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에서 제시한 내용은 신학의 필요성이죠. 기독교 교리의 필요성인데 좀 더 쉽게 바꾸면 왜 예수를 믿어야 되고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가에 대한 필요성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22페이집니다. 기독교 교리의 목적은 의사전달이다. 전달하다라는 커뮤니케이트라는 단어는 실제로는 공통으로 가지는 것, two have in commit.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 사람을 알게 하는 것, 그게 전달이죠. 그래서 교리는 반드시 전달되어야 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핵심적 내용을 전달하는 방법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은 말씀이 육체가 된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체가 메시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경 말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또 성경 말씀, 이런 것 자체가 전달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방법이고 전달을 위해서 주셨기 때문에 성경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겁니다.
자, 이게 아주 중요해요. 성경은 어떤 분은 설교의 논리에 대해서 비방합니다. 그냥 성령을 의지해서 막 설교한다는 게 횡설수설하는 건줄 알아요. 그런데 성령을 의지해서 설교하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 됩니다. 왜냐하면 논리와 이성도 하나님께 속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횡설수설합니까? 기가 막히게 논리가 있습니다. 핵심적인 내용이 있고 예화가 있고 관련이 있고 적용이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처음부터 전달을 위해서 기록된 거기 때문에 이성적, 논리적으로 기록되었고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때 이성과 논리를 무시하면 안 된다라는 겁니다. 25페이지입니다. 네 번째 줄,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될 때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의미가 전달되어야 한다.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돼야 되는 겁니다. 이 말은 그 내용이 변화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내용을 표현하는 방법이 개정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진리는 불변하되 전달하는 방법이 바뀔 수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의 이해 5그리고 성경 자체가 알기 쉬운 말로 기록됐고 또 이성적, 논리적으로 기록됐기 때문에 우리도 당연히 설교에 있어서 전달하기 위해서 알기 쉬운 말, 이성적, 논리적인 말을 사용해야 된다는 겁니다. 자, 그리고 25페이지 밑에 굵은 글자 있죠? 기독교 교리의 내용은 그 내용이 곧 하나님의 복음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적 내용이 뭐냐, 그 자체가 복음이라는 건데요. 이 복음은 두 가지 면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 중요한 정의인데요. 복음은 첫 번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소식, 그 제안이라는 거구요. 두 번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을 이야기하는 그 내용일 뿐만 아니라, 이게 중요한 거예요. 복음은 하나의 인격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의 개인적인 관계, 인격적인 사귐, 그 분을 마음에 모셔드리는 것, 이 두 가지를 다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기독교의 내용을 알아야 되구요, 그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와 바른 관계를 가져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쑵니다! 그러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고 개인적인 사귐과 동행이 없다면 그 믿음은 지적 동의라는 거죠. 그러니까 기독교의 내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는 내용 자체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자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분을 마음에 모셔드린다든지 그런 내용들을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결론적으로요, 머리와 마음을 향해서 기록된 것이다, 이렇게 제시해 줍니다. 머리와 마음을 향했다는 건 머리는 복음의 내용에 대한 이해죠? 마음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는 머리와 마음을 향한 것이다, 단순한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닌 인격체인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다. 이렇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자, 이 첫 장이기 때문에 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봤는데 앞으로는 쪼끔 진도 위주로 나가도록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다음에 이어서 29페이지부터 이어서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자, 이와 같이 복음을 믿어야 되는 기독교의 교리를 받아들여야 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를 일깨워줘야 되는데 그 첫 번째는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걸 일깨워주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죄를 깨닫게 해 주는 두 번쨉니다. 인간이 자신의 평가기준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재판은 법으로 받는 거지, 내 기준으로 받는 게 아니죠. 나는 좌회전해도 되는 줄 알고 했다, 나는 유턴해도 되는 줄 알고 했다! 그래서 무죄가 되는 게 아니라 유턴금지면 법을 어긴 겁니다. 좌회전 금지면 법을 어긴 거죠. 우리는 교통법규에 있어서도 자기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표준을 따라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 기준으로 자기가 옳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나는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 했다, 그렇다고 정당화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를 깨닫는 것은 자기 기준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옮겨갈 때 죄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칠 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라는 부분을 잘 설명을 하면 복음을 받아들여야 되는 필요성을 깨닫습니다. 미국 사람이 죽으면 미국 법으로 심판 받는 게 아니죠? 한국 사람이 한국 법으로 심판 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우리는 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게 죄예요. 자기 삶의 방향, 자기 기준으로 인생을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내가 생각하기엔 문제가 없죠.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을 깨닫게 해 주면 복음을 믿어야 된다는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자신이 평가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평가기준이라는 걸 가르쳐 줄 때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을 갖습니다. 세 번째는요, 인간은 소외와 고립으로 고통당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수많은 고통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벌의 그림자라는 거예요.
수술을 하는 어떤 분이 사람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있다라는 것을 몰랐었다라는 그 간증하는 걸 들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수술을 했는데 어떻게 사람에게 이런 고통이 있는가, 아주 그전에는 생각도 못했대요. 고통이라는 거 자체가. 그런데 하나님의 형벌은 죽음 이후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갈등, 고민, 고통, 그런 것들은 형벌의 예고편과 그림자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아주 가족을 잃어버리는 큰 슬픔이 있죠? 남편을 잃어버린 젊은 아내,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부부, 이런 삶의 큰 슬픔과 고통은 지옥 형벌의 그림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없는 세계를 사모할 수 있는 마음을 배우게 한다는 겁니다. 슬픔을 느낄 때 슬픔이 없는 세상을 사모하죠. 고통을 느낄 때 고통이 없는 세상을 사모하게 되죠? 그러면서 복음의 필요성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죄로 인한 이 세상의 모든 삶의 고통들, 또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와 고립을 초래했고 그러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소외와 고립으로 인한 고통들은 바로 복음의 교리에 절대적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20페이지, 인간은 고뇌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돼서 닻 없는 배와 같이 표류하게 되었다. 우리의 마음에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있는데, 그 공백은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부재라고 시인하지는 않지만 그 실제적인 공백의 이유는 하나님의 부재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공백을 가졌고 채워지지 않는 그런 그 빈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고뇌는 두려움과 우울과 질투와 또는 감정적인 불안한 상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의 고뇌 어린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결과고 그것이 복음을 믿어야 된다는 필요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크리스천 학자죠? 파스칼. 사람의 마음속에는 큰 허공이 있다. 그 허공은 물질, 쾌락, 권력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이런 거 외워두는 게 좋을 것 같애요. 물질, 쾌락, 권력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 허공은 하나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같은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21페이지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인간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소외되고 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삶 가운데 의미의 부재가 절실히 느껴지게 마련이다.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느냐 하는 삶의 의미의 부재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마치 자동차가 잘 닦여지고 기름도 가득 넣어놓고 준비돼 있는데 자동차에 딱 탔는데! 갈 데가 없어요! 그거 좀, 황당하잖아요? 그 좋은 자동차에 기름도 잔뜩 넣었는데 이거 갈 데가 없으면은 운전대 안에 앉아서 망연자실할 겁니다. 인생이 그과 같다는 거죠. 그래서 삶의 의미의 부재는 복음을 믿어야 될 필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 자체가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이렇게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목적을 제공해 주는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죠? 21페이지 마지막 부분.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죽음은 필연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반드시 죽는다는 거죠. 한 번 죽는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죽음은 필연성을 갖고 있는데 우리 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그 운명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적이 비로소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망은 우리의 원수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사망이라는 원수를 이기신 겁니다. 그래서 자, 여기 설명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기독교의 교리는 필요의 순간에 대해 말한다 그랬습니다. 지금 이야기했던 이런 내용들을 우리가 이게 인제 목표거든요? 이 목표를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인제 중요한데, 이 목표를 분명히 해야지만 설교도 설명이 되는 겁니다. 내가 도대체 예수님 믿으세요라는 필요성을 어떻게 제시할 것이냐 이거죠. 그 필요성을 지금 이렇게 정리한 겁니다. 그래서 이런 그 핵심적인 내용이 설교의 목표로 되어있을 때 그 목표에 맞는 부제목을 잘 선택해서 분명한 그 메시지의 전달력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를 죽 들으면 아, 그래서 믿어야 되는 거구나라는 필요성을 느끼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에서 제시한 내용은 신학의 필요성이죠. 기독교 교리의 필요성인데 좀 더 쉽게 바꾸면 왜 예수를 믿어야 되고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가에 대한 필요성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22페이집니다. 기독교 교리의 목적은 의사전달이다. 전달하다라는 커뮤니케이트라는 단어는 실제로는 공통으로 가지는 것, two have in commit.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 사람을 알게 하는 것, 그게 전달이죠. 그래서 교리는 반드시 전달되어야 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핵심적 내용을 전달하는 방법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은 말씀이 육체가 된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체가 메시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경 말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또 성경 말씀, 이런 것 자체가 전달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방법이고 전달을 위해서 주셨기 때문에 성경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겁니다.
자, 이게 아주 중요해요. 성경은 어떤 분은 설교의 논리에 대해서 비방합니다. 그냥 성령을 의지해서 막 설교한다는 게 횡설수설하는 건줄 알아요. 그런데 성령을 의지해서 설교하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 됩니다. 왜냐하면 논리와 이성도 하나님께 속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횡설수설합니까? 기가 막히게 논리가 있습니다. 핵심적인 내용이 있고 예화가 있고 관련이 있고 적용이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처음부터 전달을 위해서 기록된 거기 때문에 이성적, 논리적으로 기록되었고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때 이성과 논리를 무시하면 안 된다라는 겁니다. 25페이지입니다. 네 번째 줄,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될 때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의미가 전달되어야 한다.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돼야 되는 겁니다. 이 말은 그 내용이 변화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내용을 표현하는 방법이 개정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진리는 불변하되 전달하는 방법이 바뀔 수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의 이해 5그리고 성경 자체가 알기 쉬운 말로 기록됐고 또 이성적, 논리적으로 기록됐기 때문에 우리도 당연히 설교에 있어서 전달하기 위해서 알기 쉬운 말, 이성적, 논리적인 말을 사용해야 된다는 겁니다. 자, 그리고 25페이지 밑에 굵은 글자 있죠? 기독교 교리의 내용은 그 내용이 곧 하나님의 복음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적 내용이 뭐냐, 그 자체가 복음이라는 건데요. 이 복음은 두 가지 면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 중요한 정의인데요. 복음은 첫 번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소식, 그 제안이라는 거구요. 두 번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을 이야기하는 그 내용일 뿐만 아니라, 이게 중요한 거예요. 복음은 하나의 인격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의 개인적인 관계, 인격적인 사귐, 그 분을 마음에 모셔드리는 것, 이 두 가지를 다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기독교의 내용을 알아야 되구요, 그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와 바른 관계를 가져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쑵니다! 그러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고 개인적인 사귐과 동행이 없다면 그 믿음은 지적 동의라는 거죠. 그러니까 기독교의 내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는 내용 자체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자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분을 마음에 모셔드린다든지 그런 내용들을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결론적으로요, 머리와 마음을 향해서 기록된 것이다, 이렇게 제시해 줍니다. 머리와 마음을 향했다는 건 머리는 복음의 내용에 대한 이해죠? 마음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는 머리와 마음을 향한 것이다, 단순한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닌 인격체인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다. 이렇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자, 이 첫 장이기 때문에 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봤는데 앞으로는 쪼끔 진도 위주로 나가도록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다음에 이어서 29페이지부터 이어서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알기 쉬운 말로 기록됐고 또 이성적, 논리적으로 기록됐기 때문에 우리도 당연히 설교에 있어서 전달하기 위해서 알기 쉬운 말, 이성적, 논리적인 말을 사용해야 된다는 겁니다. 자, 그리고 25페이지 밑에 굵은 글자 있죠? 기독교 교리의 내용은 그 내용이 곧 하나님의 복음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적 내용이 뭐냐, 그 자체가 복음이라는 건데요. 이 복음은 두 가지 면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 중요한 정의인데요. 복음은 첫 번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소식, 그 제안이라는 거구요. 두 번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을 이야기하는 그 내용일 뿐만 아니라, 이게 중요한 거예요. 복음은 하나의 인격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의 개인적인 관계, 인격적인 사귐, 그 분을 마음에 모셔드리는 것, 이 두 가지를 다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기독교의 내용을 알아야 되구요, 그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와 바른 관계를 가져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쑵니다! 그러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고 개인적인 사귐과 동행이 없다면 그 믿음은 지적 동의라는 거죠. 그러니까 기독교의 내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는 내용 자체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자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분을 마음에 모셔드린다든지 그런 내용들을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결론적으로요, 머리와 마음을 향해서 기록된 것이다, 이렇게 제시해 줍니다. 머리와 마음을 향했다는 건 머리는 복음의 내용에 대한 이해죠? 마음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는 머리와 마음을 향한 것이다, 단순한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닌 인격체인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다. 이렇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자, 이 첫 장이기 때문에 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봤는데 앞으로는 쪼끔 진도 위주로 나가도록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다음에 이어서 29페이지부터 이어서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