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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 정신대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히스토피아 |2012.05.29 21:52
조회 551 |추천 4

 

 

 

 

얼마 전 ,

 

 

 

김구라씨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한 과거의 발언으로 인터넷을 달구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위안부는 근로 정신대라고도 불리는데요.

 

 

 

 

사전적인 의미로는 일본 제국주의 점령기에 일본에 의해 군위안소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이라고 표시하고 있어요.

 

 

 

일본인들이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여성들을 자신들의 성 노리개로 쓰려고 끌고 간 것입니다.

 

 

 

근로 정신대를 모집해간 이유는 전쟁에 지친 일본군들의 스트레스와 성욕을 해소시키기 위해 일본인들이 서로 강간을 해서 성병에 많이 걸려서 그런 사건을 예방하려고 힘이 없던 우리나라의 젊은 여성들을 데리고 가기 위해 정신대를 만들었습니다.

 

 

 

일본군은 우리나라 여자들에게 일자리로 속이거나 아니면 공부를 하게해준다거나 납치를 해서 강제적으로 위안부에 데려갔다고 해요.

 

 

 

↑김순덕할머니의 끌려감

 

위안부로 갔던 여성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알지 못 했죠.

 

 

하지만 전쟁이 끝나도 정신대로 가셨던 분들은 정신적 신체적인 상처로 인해 고향에도 못 돌아오지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살고 계셔요.

 

 

현재 그 분들은 할머니가 되셨어요.

 

 

이런 만행을 저지른 일본인들은 정식적인 사과와 보상을 할머니들께 제대로 하지 않았고 일본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걸었지만 패소하면서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수요 집회)를 하셔요.

 

 

 

얼마 전인 2011년 12월 14일 수요집회의 1000회를 맞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할머니들께서는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그들에게 사과와 보상을 받으려 노력하고 계십니다.

 

 

 

 

 

 

 

 

위안부 할머니의 삶(증언)

 

▪ 1940년에 나는 만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해 늦가을쯤의 어느 날 나는 하루코네 집에 가서 놀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자 나는 하루코네 집을 나서 우리 집으로 향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였다. 일본 군복을 입고 기다란 칼을 차고 왼쪽 어깨에 빨간 완장을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갑자기 내 팔을 끌며 일본말로 무어라고 하였다. 당시는 순사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하던 때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끄는 대로 끌려갔다.

(정신대 연구소,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 위안부들}

 

▪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한 박두리 할머니는 17살(1940년) 되던 해에 마을을 찾아온 일본인 모집업자의 “일본 공장에 넣어준다.”는 말에 속아 대만으로 끌려와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위안소에서는 20여명의 한국인 여성들과 함께 5년 정도 생활했습니다. 거기서는 ‘후지코’라고 불렸으며, 하루에 10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일본말을 쓰라고 강요당했으며,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아 굶기 일쑤였습니다. 월경을 할 때도 쉬지 못했습니다. 위안소에서 오른쪽 허벅지가 심하게 부어오르는 일종의 성병에 걸려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위안소 주인과 관리인에게 심하게 구타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귀도 멀었습니다.

(박두리 할머니의 사례)


∙열다섯 살 때 일본인 형사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했다 반항을 하자 양팔과 양다리를 벌리게 하고 묶더니 전기고문을 하는데 세 번쯤 고문하더니 뜨개질 할때 쓰는 대나무 바늘을 손톱사이에 찔러 넣고 붉게 달군 인두로 어깨와 목을 지졌다. 살타는 냄새를 맡고 혼절해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본 후쿠오카위안소였는데 이 부대는 보충부대 같은 곳으로 150명 정도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부대 막사는 10동도 안됐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위안소로 사용되었다. 막사를 위안소로 쓴 것이 아니라 절반을 칸막이해서 다른 한쪽은 군인들이 사용했다. 위안소 입구에는 위안부실이라고 쓴 조그마한 나무 현판을 매달아 놓았다. 그 내부는 건물 한가운데에 복도를 냈고 복도 양쪽에 다다미 두장 반 정도의 방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 이동하는 군인들이 있을 때에는 적으면 하루에 20-30명씩, 많을 때는 40명 정도를 상대해야 했다. 병사들은 오전 11-12시부터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오후 3-5시가 가장 바쁜 때였다. 줄지어 서있는 군인들 중에는 안에서 일을 치르고 있는 동료에게 빨리, 빨리해라 하면서 개머리판으로 벽을 딱딱 치면서 독촉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들은 의사의 검진을 전혀 받지 못했으며 ..... 이동하는 군인들은 방에 총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 뿐 아니라 어떤 군인은 대검으로 위안부의 유방을 도려냈다. 그리고 유방이 잘린 위안부가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도 않았는데 커튼으로 싸서 어디론가 업고 가버렸다. 위안부 생활 6년 동안 일본인 위안부는 한 사람도 본적이 없다... 열여섯 살 처녀의 청춘과 꿈은 한없이 짓밟혔다. 아직도 고문과 매독의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심미자할머니)


∙열두 살 때 면장에게 불려가 보니 친구 세 사람이 와 있었다. 우리는 긴 칼을 찬 무서운 남자 세 사람에게 끌려갔다. 기차에 태워져 해도 뜨기 전에 자동차로 바꿔 태워져 경남 창원의 공장에 도착했다. 비밀 군수공장이었다. 그들은 “너희들은 지금부터 조선인이 아니다. 대일본제국 천황폐하를 위해 공헌하라”고 을러댔다. 어느 날 그들은 우리를 공장 마당에 집합시켰는데 거기에는 나보다 먼저 온 조선 소녀 20명이 있었다. 우리를 한 줄로 세우더니 우리 앞에 장교들도 한 줄로 섰다. 어깨에 별이 네 개 있는 장교가 내손을 끌어 앞으로 나오게 했다. 다른 장교들도 그렇게 했다. 밤이 되자 그 장교가 내방에 들어왔다. 다른 방에서도 비명이 들렸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안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옆방의 윤춘선은 소리를 너무 크게 지른다고 목을 졸라 죽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경북 안동에서 온 18세 여자가 상대를 물어뜯고 때리자 장교는 그 애를 발가벗겨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그래도 그 여자가 “나는 조선 사람이다. 너희들에게 날마다 강간을 당할 바에는 죽는 게 낫겠다.”고 하자 장교는 칼로 그 애의 팔과 다리를 잘라 토막 냈다. 그리고 가마니로 둘둘 말아 “물고기 밥이나 되라.”며 강에 흘려보냈다. 열여섯 되던 해에 불행히도 임신을 하고 말았다. 장교는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지 못하는 조선인의 아이는 필요 없다고 하면서 내배를 째고 태아를 꺼내 죽이고 말았다.(이경생할머니)

[출처] 정신대(일본군 위안부) 학습용 자료|작성자 두루미

 

 

 

 

 

 

 

 

 

 

저희는 이러한 사실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할머니들을 응원하며 도와주실 분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판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톡커님들의 많은 도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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