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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교> 리뷰, "동일한 존재의 서로 다른 의미"

윤광은 |2012.06.07 21:45
조회 392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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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존재의 서로 다른 의미

  

영화 "은교"에 관한 어떤 해석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고통은 종종 관계의 비정합성에 기인하곤 한다. 세계는 타자와 타자로 얽혀있고, 그 타자가 조우하는 관계의 맥락 속에 서로의 위치는 정해진다. 서로가 있어야 할 자리에, 관계 속에 놓여진 서로의 역할에 만족하고 충실 할 때, 세계는 표피적 안정을 획득한다. 하지만 이 관계의 맥락은 결코 일의적이지 않다. 일방에겐 상대방이 소중한 존재지만, 그 상대방에게 일방은 그저 무심하고 짐스러운 경우가 있다. 반대로, 누군가에겐 하잘 것 없는 흔한 대상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그것이 소중한 존재인 경우도 있다. 또한 관계란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의 맥락을 움직이는 힘은 개별의 욕망이다. 그 욕망과 존재의 의미 역시 단일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영화의 대사를 빌리자면, "별이 모두 같은 별이 아닌"것 처럼.

 

 은교가 무엇에 관한 영화인지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누군가는 "늙음"에 관한 영화라 했고, 누군가는 "결핍"에 관한 영화, 다른 누군가는 "욕망"에 관한 서사라 했다. 영화를 구성하는 세 인물은 모두 어떤 "결핍"에 지배 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핍의 이면은 욕망이란 표찰을 달고 있다. 그렇기에 은교는 "결핍"에 관한 영화이기도, "욕망"의 관찰이기도, 영화의 중심 결핍인 "늙음"을 얘기하는 서사이기도 하다. 이 셋은 모두 같은 뜻을 가진 다른 말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 은교를 해석하는 핵심 고리는 단순한 욕망과 결핍 자체가 아니다. 은교는 존재와 존재의 욕망과 결핍이, 관계의 맥락 속에 어떤 상대성과 다층성을 가지는지에 관해 묻는 영화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선, 우선 영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얼굴을 한 관계와 욕망의 혼재

 

 영화는 낡고 메마른 이적요의 일상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흐트러진 매무새, 빈곤한 찬과 쓸쓸히 마주한 식탁. 그는 이미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제대로 일상을 영위하기 버거운 존재다. 우울한 표정으로 탈의하며, 늙은 나신을 망연히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깊은 상실을 응시한다. 카메라는 굳이 이적요(박해일)의 성기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모험을 한다. 그것은 이적요의 상실과 결핍이 정확히 무엇을 향하는지 지시하는 장치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 흘러간 세월과 젊음. 이미 제 기능을 잃어버린 채 축 늘어진 남성은 그 자체로 죄의식과 수치심을 상징한다. 그것은 남에게 내비칠 수 없는, 거울 앞에서 남 몰래 쓸쓸히 확인 할 수 밖에 없는 망실이다. 평생을 시상 속에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온 노시인에게. 추한 노구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모멸과 결핍이다. 그가 살고 있는 저택의 담장은 그를 자신의 고독과 침잠속에 스스로 가두고 있는 감옥이다. 그의 결핍은 스스로 현시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는 그 감옥의 문을 열고 나설 수 없다. 그래서 저택의 담장 한 쪽에 올라탄 계단의 모순된 구도는, 역설적이면서도 묘한 당위성을 내포한다. 떳떳이 대문으로 맞이 할 수도, 그 스스로 문을 열고 찾아 나설 수도 없는 어떤 것이 담장을 넘어 찾아와 주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은교는 바로 그 담장에 놓인 계단을 타고 적요에게 찾아온다. 이 기묘한 통로에서 세상에 용인될 수 없는 그들의 관계와 적요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은교가 적요의 곁에서 머무를 계기를 만드는 것은 적요의 제자 서지우다. 그는 늙고 어려운 스승의 수발을 들며 일상을 소진해 왔다. 간을 잘 못 맞춘 국을 한숟갈 뜨자마자 박차버리는 까다로운 노인을 젊은 남자가 모신다는 건 힘들고 궂은 일이다. 그래서 그는 우연히 스승의 저택을 찾아온 소녀에게 그 역할을 넘겨버린다. 하지만 그 선택은 이후의 모든 갈등과 고통을 초래하는 단초가 된다. 지우가 안고 있는 결핍은 바로 그의 스승, 이적요다. 국민적 존경을 받는 노시인의 재능을 흠모해 그의 곁에 머물지만, 정작 지우에겐 그 재능이 없다. 그는 이적요와 같은 재능을 희구하지만, 그에겐 결코 주어지지 않은 것이기에, 불가피한 열등감과 억눌림이 발생한다. 그 열등감은 이적요에 대한 존경과 공존하는 것이다. 사제의 관계와 적요에 대한 지우의 감정은 양가적이고 복잡한 형상을 띤다. 서지우는 이적요에게 종속된 존재다. 적요에 대한 강한 존경과 애착의 뒷면은 곧 강한 결핍이다. 그 결핍은 결코 자신이 채울 수가 없지만, 그는 문학적 재능에 대한 욕망을 포기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이적요의 그림자를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끝없이 그의 곁을 맴도는 것이다. 도입부의 적요와 지우의 어색한 러브샷은, 사제 간의 기이한 유착과 애증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은교가 두 사람의 영역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며 물살을 탄다. 은교는 다양한 단면을 가진 인물이다. 적요의 집에 무단으로 넘어왔다 들키는 첫 만남에선, 커다란 저택이 아니라, 자신이 잠들었던 의자에만 관심을 갖는 순진함을 보여준다. ("이 의자 할아버지 거에요?") 반면 그녀는 적요와 지우가 안고 있는 결핍의 본질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채는 영악함 역시 가지고 있다. 은교는 적요와 지우의 결핍을 자극하고, 두 사람의 욕망과 관계를 움직이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은교 역시 결핍을 안고 있는데, 그것은 타인의 관심과 애정이다. 은교는 내면과 자아가 없는 캐릭터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본 적이 없기에, 그만큼 사랑에 굶주려 있다. 그래서 애정과 내면의 결핍을 채워 줄 수 있는 누군가를 갈구하고 기대려한다. 은교가 안고 있는 결핍의 정체는 자신이 타인에게 사랑을 받을만한 존재인지 확인 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타인의 애정과 관심을 통해 자신을 확인받으려 하는 것이다. 은교에겐 내면이 없고, 자기가 없다. 자신 안에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채워야만 설 수 있는 존재다. 다른 두 명의 인물 역시 공히 결핍을 안고 있지만, 그 결핍의 양상은 서로 다르다. 적요와 지우는 결핍에 휘둘리면서도, 넘어설 수 없는 선을 자각하고 움츠러들어 있지만, 은교에겐 아무런 저지선이 없다. 은교는 결핍을 채우기 위한 거침없는 맹목성을 보여준다. 은교에겐 충동과 억압의 대립을 중재할 자아(ego)가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의 충동이 억압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은교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의 욕망과 결핍에만 충실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얽혀있는 관계와 각자의 욕망에 균열을 가하고 사건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은교와 적요, 지우의 욕망은 뒤섞인 채 혼재해 있다. 하지만 기실 서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서로의 존재가 아닌, 자신의 욕망이다. 은교와 적요, 지우는 각자가 서로에게 욕망을 투영하는 대리표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적요의 욕망의 실체는 돌이킬 수 없는 젊음이지만, 그 욕망은 여고생 은교란 표상에게 투영된다. 지우의 욕망은 재능과 영혼이지만, 그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그것을 적요에게 투사한다. 은교가 원하는건, 근본적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다. 하지만, 그녀는 텅빈 공허함을 안은 채,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을 찾아 부유한다. 그리고 그 표상은 처음엔 적요였고, 나중엔 지우로 바뀐다.

 

 같은 욕망의 표상이지만, 은교와 적요, 은교와 지우의 관계는 그 성질에 차이가 있다. 적요에게 은교는 명백히 이성적 감정의 대상이다. 하지만, 은교가 적요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 우정 혹은 기대고 싶은 친근함에 가깝다. 영화에는 은교가 적요의 집에서 일하기 시작한 얼마 후, 교복을 짧고 붙게 수선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의 성적 코드로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것과 무관한 장면이다. 은교는 적요를 접하면서 은연중에 적요가 품고 있는 욕망과 결핍이 무엇인지 눈치챈다. 그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교복의 단을 줄인 것은 유혹이라기 보다, 자신을 아껴주는 적요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그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주려한 선의였을 것이다. 거기엔 자신의 성적 대상화가 아닌, 서로 원하는 것을 챙겨주고 가까워지는 우정이란 코드가 깔려있다. 이것은 적요와의 관계에서 은교 자신은 성에 대한 내밀한 자각이 없는 순호한 상태라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에 대한 방증은 은교가 적요에게 헤나를 해주려 잡아끌며 "저는 할아버지가 자기도 이걸 하고 싶어한단 걸 눈치챘어요."라고 한 대사다. 은교가 적요의 결핍을 눈치 채고 있었고,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결핍을 충족 시켜주려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반면, 은교가 지우에게 가지는 감정은 온전히 사랑은 아닐지라도, 이성적 감정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은교는 적요가 자신을 주제로 쓴 "은교"란 소설을 지우가 쓴 것으로 오해하고,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한다. 또한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지우에게서 좀 더 쉽게 이성의 감정을 발견했을 것이다. 영화에는 그걸 암시하는 복선이 여러 곳에 배치돼 있다. (지우가 은교를 자기 집으로 부르는 장면, 적요의 집에서 지우가 은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장면, 적요의 서랍장을 옮기려다 지우와 몸을 부대끼며 실랑이 하는 장면, 은교가 “심장”에 관심을 보이는 장면) 은교는 지우와 성관계를 갖지만, 그 역시 어디까지나 지우의 애정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욕구가 중심에 놓여있다. (관계 중 은교의 대사, "내가 얼마나 좋아요?", "여고생이 왜 남자하고 자는 줄 알아요? 외로워서..")

 



 

 두 권의 소설책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건과 서사의 중심에 놓인 두 권의 소설책이다. "심장"과 "은교". "심장"은 적요가 대필해 지우의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이다. "심장"은 큰 호응을 얻지만, 그만큼 대중성에 편향돼 적요의 깊은 문학성과는 별 관련이 없는 책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지우에게 모종의 컴플렉스다. 그를 젊은 문인으로 주목받게 해준 책이지만, 그 안에 그가 원한 문학적 재능의 진수는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심장"이란 제목은 매우 역설적이다. 적요에게도, 지우에게도 "심장"이란 소설은 영혼의 박동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적요는 왜 굳이 창작의 금기를 넘어서며, 지우에게 "심장"을 써준 것일까. 적요는 지우에게 "세경"을 준 셈이라 한다. 하지만 어쩌면 적요에게도 지우란 존재가 어떻게든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는 늙고 외로운 처지고, 자신을 수발해 줄 지우마저 없다면, 그의 일상은 한층 더 황량해 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지우를 자신의 껍데기로 묶어두려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실제 소설 "심장"에는 자신의 재능(심장)이 아닌, 대중성이란 껍데기 밖에 없다. 지우는 이 부정한 비밀에 전전긍긍하며 속박돼 왔다.("내가 이적요 껍데기인지 서지우인지도 모르겠다구요") 그런 점에서 "심장"은 두 사람 관계의 기이하고 공허한 유착을 상징하는 소도구다. 동시에 “심장”은 영화의 주제의식의 단면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적요와 은교, 지우 세 사람은 공히 결핍과 그로 인한 욕망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심장이 없기에 심장을 갈구하는 인물들이다. "심장"은 결국, 슬픈 영화적 역설이다.

 

 소설 "은교"를 얘기하기 전에, 한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적요는 시인이다. 하지만 적요가 쓴 "심장"과 "은교"는 모두 소설이다. 영화는 왜 "시인"이 만든 "소설"을 제재와 상징으로 삼은 것일까. 지우는 스승처럼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재능의 한계에 부딪혀 소설작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적요의 말처럼 그에겐 "별이 다 같은 별이 아니란 걸" 감지하는 직관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미 소설이란 장르 자체가 지우의 결핍을 상징한다. 반면 적요는 시인의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다. 그의 넘치는 재능은 시가 아닌 소설을 통해서도 쉽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가 지우에게 써준 "심장"은 그의 재능의 본질(시)이 아닌 껍데기(소설)인 셈이다. 그렇기에 지우의 삶은 적요의 껍데기에 갇혀 있다. 반면 소설 "은교"는 타인에게 준 껍질이 아닌, 적요가 자신을 위해 창작한 영혼의 산물이다. "은교"에는 은교와의 사랑과 관계에 대한 열망이 담겨있다. 그것은 허락되지 않은 금지된 욕망이다. 적요는 이 욕망이 밖으로 드러나서는 결코 안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욕망은 자신도 직면하기 버거운 금제된 것이다. 그래서 적요는 자신에게 친숙한 것(시)이 아닌, 거리감을 둔 모조(소설)로 그 욕망을 표현하고 담아둔다. 그리고 그것은 지우가 그토록 원하던 적요의 "심장"인 동시에,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구체로 주조된(소설) 것이다. 하나의 욕망은 맥락과 의미를 달리하며 다른 이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소설 "은교"를 둘러싸고 거대하고 본격적인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스승에게 열등감과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지우는 홀로 설 수가 없는 존재다. 지우의 채워지지 않는 결핍은 적요가 가진 재능이다. 그는 적요의 곁에서 적요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쓸쓸히 자신의 결핍을 위무할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 그렇기에 지우는 애증과 존경, 흠모와 불편함에 범벅이 된 채 적요에게 예속된 주체다. 그런 지우와 적요의 관계에 끼어든 은교는 스승의 영혼(심장)과 단번에 교신을 나누는 불가해하고 두려운 존재다. 지우가 아무리 소망해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너무나 쉽게 가져가 버린 은교는, 지우에게 질투와 열등감의 대상이다. 적요와 은교에 대한 뒤틀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은, 적요의 서재에서 소설 "은교"를 목격하며, 격렬하고 극심한 분노와 원망으로 전화한다. 지우에게 적요는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재능과 아름다움의 원형이었다. 자신이 동일시하고 동경하는 이상이 은교란 이물 의해 변질되고 더렵혀졌다 느낀 순간, 상실감과 배신감은 극단적 선택을 낳는다. 소설 "은교"를 자신의 이름으로 문단에 발표하는 것이다.

 

지우는 적요가 잉태한 욕망(은교)을 수면위로 꺼내놓는다. 그리고 대담하게도 그 욕망과 영혼의 소유자임을 자임한다.("선생님께서 읽어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가 내 안에 들어왔다 나간듯 하다고") 억눌렸던 감정의 폭발이 결국 금기와 주박을 깨뜨린 채 욕망으로 치달은 것이다. 적요는 감춰뒀던 욕망이 지우에 의해 현시되면서, 그 욕망과 현실의 괴리를 새삼 깨닫고 괴로워 한다. 지우에게 늙음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추하다는 말을 듣고, 흉하게 경련을 일으키던 얼굴은 그 괴리가 그만큼 뼈아픈 것임을 반증한다. 결국, 내부에서 외부로 부상한 욕망은 잃었던 거리감을 제공하고, 균형과 현실감을 되찾게 한다. 적요는 자신의 결핍이 채워질 수 없는 것임을, 그 욕망이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끝내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는 "은교"의 수상식에 나타나 이 욕망이 지우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임을 묵시적으로 선포하고 공개한다. 그리고 "은교"의 창작자로 수상을 위해 와 있던 지우 역시, 자신의 괴리와 미망을 깨닫고 자각한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이 선언은 일면 수용적이지만, 알 수 없는 원굴의 항변이기도 하다. 아무도 늙음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요는 자신이 늙었다는 것은 받아들임에도, 여전히 늙음이 추하고 잘못된 것이란 굴레에선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괴리를 체념하고 수인하지만, 끝내 결핍을 완전히 벗어던지진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핍의 잔여물은 관계의 불확정성이 불러온 치명적 오해와 맞닥뜨리게 된다.

 

 은교에게, 소설 "은교"는 자신의 텅빈 공허함을 채워주는 내면이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고, 그래서 타인의 애정에 굶주려 있다. 그녀가 "은교"를 지우가 썼다고 오해하고, 지우가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착각한 순간, 그녀의 결핍은 적요에서 지우란 대상을 향해 이동한다. 그리하여 소설 "은교"가 부상하고, 모두가 자신의 결핍과 욕망의 한계를 받아들여,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에도 그녀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는 것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추스리던 적요는 지우와 은교의 정사를 목격한 순간, 극도의 배신감과 자괴감, 분노로 인해 무너져 내린다. 자신의 껍질이라 생각했던 지우가 실은 은교의 고갱이였고, 오히려 자신이 껍질이었단걸 깨달은 것이다.(비록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오해로 인한 것이라 해도) 해소되지 않은 결핍의 잔여물은 점화되어 폭발하고, 그 분노는 지우와 자신을 절멸로 끌고 간다.

  



 

별이 모두 같은 별이 아닌 것처럼

 

 영화 내에서 지배적 상징과 메타포를 점유하는 대사가 있다. "별이 모두 같은 별이 아니다." 이 대사는 곧 존재와 대상, 욕망과 관계의 다층성과 상대성, 균질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소설 "은교"는 모두의 결핍인 동시에, 모두의 욕망이다. 하지만 그 욕망과 결핍의 양상과 맥락은 서로에게 동일하지 않다. 적요에게 "은교"는 젊음과 순수에 대한 욕망을 상징한다. 지우에게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재능과 깊이, 영혼이다. 은교에게 소설 "은교"는 타인의 애정과 관심에 목마른 공허한 내면이 추동하는 욕망이다. 소설 "은교"란 단일한 매개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욕망이 뒤엉키고 부딪힌다. 그리고 그 욕망을 담아내는 관계와 맥락 역시 동일하지 않기에, 어긋남과 뒤틀림이 발생하는 것이다.

 

적요는 지우와 은교의 관계가 오해와 착각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없다. 은교에겐 내면의 결핍을 채워줄 대상이 필요한 것일 뿐,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큰 상관이 없다. 그렇기에 충분히 그 오해를 인지할 수 있는 중요한 암시가 있었음에도 너무나 쉽게 적요에게서 지우에게 옮아간다. 지우는 적요,은교와 달리 "별이 같은 별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는 영혼이 없다. 은교의 손거울이 왜 특별한 의미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은교가 적요에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은교와 정사를 나누며 정복욕과 스승에 대한 역전된 우월감에 도취된다. 하지만 그 행위의 동기나 이면을 좀 더 따져보면, 지우에게 은교는 그 순간 술에 취해 몸을 섞을 수 있는 많은 여자들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은교에게 그 정사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여고생이 왜 남자랑 자는 줄 알아요?”, “몰라”) 적요에 대한 죄책감이나, 미안함의 감정도 희미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우는 적요가 자신을 죽이려 했단 걸 알고 배신감에 광분하지만, 그 이유에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욕망과 관계의 상대성과 불균질함은, 관계를 파괴하고 지우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결국 이야기의 끝에서 지우는 죽고, 적요는 절망과 회한 속에 침잠한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을 꼭 파국이나 비극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은교가 소설 "은교"를 지우가 아닌, 적요가 썼다는 걸 뒤늦게 깨닫기 때문이다. 은교는 썩은 나무둥치처럼 굳어있는 적요를 찾아가 말한다. "엄마의 발뒤꿈치가 다시 말랐어요. 이전까지 그리 애잔하던 뒤꿈치를 다시 칼로 긁어 내는거에요. 더럽게." 별이 다 같은 별이 아니듯, 은교에겐 엄마란 존재의 의미도 단일하지 않다. 그래서 결국 깨닫는다. "별이 같은 별이 아니란 것도 모르는 공대생이 그런 걸 썼을리가 없는데" 관계가 모두 무너진 후에야, 어긋났던 기표와 기의는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덕분에 제가 얼마나 예쁜지 알게 됐어요."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안의 결핍을 돌 볼수 있게 된다. 그 결핍은 타인과의 관계와 애정이 아닌, 자신의 부재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엉클어진 관계의 매듭을 풀면서, 결국 그녀의 내면은 타인이 아닌 자신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렇기에 서사의 종착지는 서로에게 다른 맥락과 의미로 점지하는 것이다. 지우와 적요에겐 이 이야기의 끝이 비극이겠지만, 은교는 적요를 통해 삶을 지탱하는 뿌리를 얻었고, 성장하게 됐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파국이나 비극이라고 일의적으로 정의 되지 않는다. 욕망도, 관계도, 존재도, 서로의 의미도 모두 각자에 의해 달라진다. 우리는 서로가 동일한 세계를 살고 있지만, 그 세계의 의미는 서로에게 결코 단일하지 않은 것이다.

마치 "별이 모두 같은 별이 아닌 것" 처럼



 

- 추신 -

 

 1. "은교"는 꽤 만듦새가 괜찮은 영화다. 보통 소설을 각색한 영화가 원작에 미치지 못하는건, 긴 호흡의 서사를 어쩔 수 없이 축약하고 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교"는 분절된 서사의 공백을 여러가지 영화적 은유와 상징들로 세밀하게 세공해냈다.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과 성찰의 여지를 던지는, 어떻게 보면 철학적이고, 다르게 말하면 시적인 내포가 깊은 영화다. 장면 하나 하나에 의미가 꾹꾹 눌려 담겨 있고, 그 기의는 영상의 기표를 통해 짙은 여운을 남긴다. 일견, 인물과 동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뵐 수 있지만, 영화 내 곳곳에 당위가 숨겨져 있어 오히려 감상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물론 여기에 대해선, 관점에 따라 호불호나 평가가 갈릴 수도 있을 것이다.) 원작 소설과는 별개로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잘 구축한 각색의 모범 사례다. 나로선 영화를 보는 내내 박해일의 캐스팅 외엔 그다지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다. 특히 김고은은 "은교"란 쉽지않은 캐릭터를 과장없이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2. 은교란 캐릭터에 대해선 한가지 해석이 더 가능하다. 영화 내에 실재하는 개별의 존재가 아닌, 외부적인 은유와 상징이란 해석이다. 여러모로 은교는 영화내에서 이질적인 캐릭터다. 은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침없이 자신의 욕망을 쫒는다. 그래서 은교는 매우 이기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너무도 쉽게 적요와 지우 사이를 오가지만, 그에 대한 죄책감은 느끼지 않는다. 엔딩에서 적요에게 미안함을 표하지만, 그건 자신을 찾게 해 준 고마움의 다른 표현이다. 자신 때문에 죽음에 이른 지우에 대해선 일말의 가책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별이 같은 별이 아니란 것도 모르는 공대생이 그런걸 썼을리가 없잖아" 원망을 담아 야멸차게 내뱉기까지 한다. 더구나 그녀는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욕망을 해소한 인물이다. 원래 욕망이란 욕구와 요구사이의 간극이라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과적 법칙을 거스른 그녀는 영화 내의 개인이 아닌, 초월적 상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그녀는 한 인간에게 공존하기 힘든 너무도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순진함과 영악함, 따뜻한 연민과 냉정한 이기심. 영화 내에서 순수와 젊음의 원형으로 기능하지만, 심지어 적요의 이마에 애틋하게 입 맞추고선, 돌아서서 지우와 정사를 나누는 섬득한 이중성까지 지니고 있다. 영화의 서사 역시 그녀에 의해 발동되고 진행된다. 그녀는 영화에 등장함으로서 세계에 균열을 가하고, 결정적 고비에서 사건의 방향을 정한다. 또한 마지막엔 적요를 찾아가면서 비로소 이야기의 마침표를 허락하는 전능한 권능을 소유한 존재다. 그렇기에 은교란 인물에 대해선, 결코 닿을 수 없는 젊음과 순수에 대한 은유라는 상투적 해석부터, 영화의 주제 의식인 욕망과 관계의 초월적 기표란 독법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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