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티나 맥북프로’, 지금 사도 후회없는 이유 by 최호섭 | 2012. 07. 18
레티나 맥북프로는 나쁜 노트북이다. 모든 문제는 이 노트북을 열면서 시작됐다. 기본형이 289만원, 욕심같아서는 SSD를 512GB로 올린 369만원짜리를 갖고 싶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회사에서 업무용으로 구입해주기 전에 개인이 구입하기에는 기본형만으로도 매우 벅차다. 그럼에도 머릿속에서는 온갖 합리화가 이뤄진다. ‘이게 있으면 일이 더 효율적으로 잘 될 것 같아’, ‘가족과 찍은 사진을 더 감동적으로 볼 수 있어’, ‘15인치지만 그리 무겁지도 않네’ 등 하루에도 몇 가지씩 떠오르는 생각들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한 번 버린 눈을 어찌하리오’다. 신용카드 할부라도 써서 이 녀석의 노예가 되고 싶게 만드는 것이 레티나 맥북프로를 바라보는 솔직한 심정이다. 주변에서 레티나 디스플레이가 어떠냐는 질문이 나오면 ‘그 동안 모니터에 속고 살았다’라는 답이 절로 나온다. 내 디지털 카메라는 내 생각보다 더 훌륭한 사진을 찍었고 화면에서 보이는 또렷하고 매끈한 글꼴들이 이렇게까지 예뻤나 싶다.
레티나 LCD, 콘텐츠 가치 높이다
레티나 맥북프로의 가치, 그리고 고민의 시작은 당연하게도 디스플레이에서 시작된다. 디스플레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가 아깝지 않다. 단순히 더 넓게, 많이 보여주기 위한 고해상도 디스플레이가 아니라 더 세밀하게 보여주려는 디스플레이 시대가 열렸다. 레티나 디스플레이가 처음 들어간 아이폰이 스마트폰 시장에 고해상도 시장을 열었지만 이 정도 세밀한 화면을 다른 장치에도 맛보게 해 줄 생각을 제조사들은 왜 안했을까. 아이패드야 대적할 상대가 없는 상태라 쳐도, 적어도 노트북에는 누군가 먼저 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결과적으로 애플은 아무도 하지 않은, 아니 어쩌면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을 만들어냈다. 15인치 디스플레이에 2880×1800개의 픽셀을 우겨 넣은 것이다.
이 화면은 아무리 고민을 해도 글과 웹에 올라오는 사진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어떤 디스플레이도 레티나 디스플레이의 품질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레티나 맥북 프로의 화면이 어떠냐’는 질문에 제품을 직접 보라는 답 밖에는 할 수 없다.
맥북 프로를 쓰며 노트북 앞에 앉는 것이 언제 이렇게 즐거웠었나 싶다. 이것보다 더 큰 화면? 더 가벼운 노트북? 다 무슨 소용인가? PC의 모니터에서 어떤 화면을 만들어야 할 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시기다. 눈이 시원해지고, 작업이 즐거워진다. 하루 종일 쳐다봐야 하는 모니터에 이 정도 투자,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찍은 디지털 사진, 키노트, 문서 등 작업 결과물이 더 돋보이고 가치를 더한다. 지금으로서는 레티나 맥북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정말 그렇게 말도 안되게 비쌀까
제품의 가치가 디스플레이에서 시작되는 반면, 고민은 가격 문제로 귀결된다. 이 가격에 대해 합리화를 해보자. 나는 1997년 봄, 내 돈으로 노트북을 처음 샀다. 당시 IBM 씽크패드 560을 340만원 주고 구입했다. 당시 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이 160~170만원 수준으로 기억된다. 국민차로 불렸던 티코는 400만원대였고, 소나타 고급형이 1500만원을 넘지 않았다. 노트북 구입 자체가 엄청나게 큰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건이었다는 것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15년이 지난 오늘, 289만원짜리 노트북은 당시 노트북보다 어림잡아 100배는 더 좋아졌을 게다. 값은 더 싸졌다. 대학 등록금은 500만원을 바라보고, 티코의 피를 물려받은 스파크는 1천만원이 훌쩍 넘었다. 절대적으로 가치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맥북프로는 3세대 코어 i7 프로세서는 물론 1초에 500MB를 넘나드는 빠른 SSD, 무엇보다 눈이 시원해지는 레티나 디스플레이까지 노트북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스러운 경험과 가치를 만들어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디스플레이를 빼고라도 비슷한 플랫폼과 SSD를 쓴 노트북이 200만원을 넘기는 것과 비교해 보라. 제품 가치에 대해 지금의 가격이 그렇게 터무니 없이 비싼 건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다시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 현재 필요한 역할로는 70만원짜리 노트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결과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는다. 그동안도 잘 살아 오지 않았나. 심통맞은 주문을 외워본다. ‘100만원대 맥북에어 라인에 약간의 옵션을 더하는 정도 가격에 레티나 맥북에어가 나와준다면….’ 맥북 프로 화면의 가치를 더 가볍고 더 싸게 내놓아주길 바라는 게 지갑 사정 뻔한 소비자의 솔직한 바람이지만, 분명한 건 지금도 289만원의 값어치는 충분하다. 매달 용돈을 극단적으로 줄여서라도 손에 넣어야겠다는 마음 속 울림이 이를 뒷받침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