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저자 : 김연수
출판사 : 자음과모음
출판일 : 2012년 08월
■ 나 역시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어느 날, 자다가 깨어서 뭔가를 쓰기 전까지는 말이야. 시인이든 작가든 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뭔가 쓰는 순간, 되는 거지. -p.28~29
■ 흔들리는 뱃전에 서서 시내 쪽을 바라보는데, 그 불빛들이 점점 멀어지면서 정말 아름답게 반짝였다. 흩뿌린 보석 같기도 하고 은하수 같기도 했다. 불빛이 참 예뻐요, 라고 좋아했더니 아빠는 아름다운 것들은 좀 떨어져서 봐야지 보인다고 말했다. 그 말은 전적으로 맞다. 그때가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으니까. -p.126
■ 네게서 연락이 끊어지고 나서, 그리고 더 이상 내게 연락하지 않은 뒤로, 내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너의 부재나 침묵이 아니라 너에게 그런 위로의 말을, 너를 위로하는 행동을, 그렇다고 말하고 또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껴안고 입 맞추는 그 모든 인간적인 위로들을 해줄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어. 마음속으로 누군가의 안녕을 비는 일 따위는 추모비 앞에 선 정치가들에게나 어울리지, 이별을 당한 남자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걸 이젠 알겠네. 어느 틈엔가 나는 너를 위로하는 사람이 아니라 너를 증오하는 사람이 됐지. 그게 내게는 고통스러웠어. 하지만 증오는 물론, 그런 고통마저도 다 지나간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야. 지나가면, 우리는 조금 달라지겠지. 하지만 그 조금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겠지. -p.146
■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너 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리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 자체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p.201~202
■ 그렇긴 해도 서른이 되면서 뜨겁고 환하던 낮의 인생은 끝이 난 듯한 기분은 들었다. 그다음에는 어둡고 서늘한, 말하자면 밤의 인생이 시작됐다. 낮과 밤은 이토록 다른데 왜 이 둘을 한데 묶어서 하루라고 말하는지. 마찬가지로 서른 이전과 서른 이후는 너무나 다른데도 우리는 그걸 하나의 인생이라고 부른다. 낮의 인생과 밤의 인생, 그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저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기로 예정된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이라는 걸 한다. 그중에서 누군가와는 영영 이별하고, 또 누군가와는 평생 같이 살기도 한다. -p.250~251
■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테니까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없었을 테지요. -p.274~275
■ 그런데 왜 인생은 이다지도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건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 제대로 산다면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단번에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그게 제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결정적이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수없이 저지른다는 걸 이제는 잘 알겠다. 그러니 한 번의 삶은 너무나 부족하다. 세 번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p.285
■ 그 말을 생각하면 우리라는 존재는 한없이 하찮아진다. 한 소녀가 최선을 다하기 위해 어둠 속을 달리던 그 새벽에 우리는 숙면에 빠져 있었으니까. 깨어난 뒤에야 우리는 거기에 붉은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불길은 우리를 태우지 못했고 그 연기는 우리를 질식시키지 못했다. 거기 고통과 슬픔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 아이의 고통과 슬픔이었다.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은 고통스럽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우리와 그 아이의 사이에는 심연이 있고, 고통과 슬픔은 온전하게 그 심연을 건너오지 못했다. 심연을 건너와 우리에게 닿는 건 불편한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불편한 감정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그럴 수밖에. 그때 우리는 고작 열여덟 살, 혹은 열아홉 살이었으니까. 우리는 저마다 최고의 인생을 꿈꾸고 있었으니까. -p.286~287
리뷰
김연수 작가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단편소설을 접하고나서 이 작가에 대해서 더 알고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최근에 발간된 그의 장편소설이 있어서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이 책을 사게 됐다.
그리고 책 표지에 있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이 문구도 너무 마음에 들었고. :)
확실히 장편소설이라 그런지 조금 더 술술 읽히는 느낌이었고, 지난 책을 읽을 때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가며 읽었던 탓인지 이번 책은 큰 어려움 없이 내용자체에 빠져들며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갓난 아기 때 미국으로 입양된 '카밀라 포트만' 이 한국을 방문해 친부모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책인데
우리말로 동백꽃을 뜻하는 '카밀라(camellia)' 라는 이름을 들으면서 이 꽃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는데
책을 읽다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불현듯.. 언젠가 창경궁 온실에서 빨갛게 핀 동백꽃을 본 것 같은 기억이 났다.
추운 겨울에 눈부시게 붉은 빛깔을 뽐내는 듯한 동백꽃의 모습은 언뜻 보면 주인공 카밀라의 모습과 꼭 닮아있다.
'진남' 이란 곳에서 태어나 오로지 동백꽃 나무 아래에서 어머니로 추정되는 한 여인과 찍은 유일한 단서만 가지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진실을 숨기려고만 하는 사람들 때문에 출생의 비밀은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생모인 '정지은' 과 이어진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이 아는 것만이 전부라고 여기며 불편하고 아픈 것들을 숨기려고 애쓰지만
진실이라는 것은 숨긴다고해서 다 숨겨지고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야기한다.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우리가 두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것,
혹은 당신이 내 소설을 읽는 것, 심연 속으로 떨어진 내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p.327
그래, 결국 뭔가 확실한 결론을 던져주지않고 여운을 남김으로써 작가는 나름대로 우리에게 추리를 맡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넘지 못할 '심연' 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어쩌면 이 세상은 이해받을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지만,
바다가 파도를 일으키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고 서로의 사이에 자리잡은 틈을 매워 닿고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그 간절함이 바로 사랑이 되고 희망이 된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넘을 수 없는 심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혼자가 아닌 함께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아나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