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은 이렇게 사라져 간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유령의 집│엄마!│따뜻하지 않아│도모 짱의 행복│막다른 골목의 추억」
저자 : 요시모토 바나나
역자 : 김난주
출판사 : 민음사
출판일 : 2012년 08월
■ 돌아갈 집이 있는데도, 사랑받고 있는데도 외로운 게, 그게 젊음인지도 모르지. -p.39~40
■ 뭘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내 인생에 넌더리를 낸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게 나라고 나는 몇 번이나 나 자신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도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p.58
■ 나 하나쯤, 이 세상에 있어도 그리 큰 공간은 차지하지 않는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은 언제 사라져도 모두들 마침내는 그 부재에 익숙해진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없어진 풍경을, 그 안에서 살아가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상하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란 형태를 쏙 도려냈을 뿐인 세상인데, 왜 그런지 무척이나 쓸쓸해 보인다. 가령 짧은 기간이었어도, 등장인물들이 언젠가는 시간의 저편으로 모두 사라져 버린다 해도, 그 공간은 아주 소중한 것처럼 빛나 보인다. -p.106
■ 그 나날이, 그 꿈이, 내 안의 무언가를 밖으로 드러나게해서 바꿔 놓은 것이다. 마치 새장에서 자라던 새가 어쩌다 새장을 벗어난 것처럼, 그 사건을 계기로 그때 나도 모르게 나는 내가 아는 세계 바깥쪽에 있었다. 바깥은 어둡고, 바람이 휭휭 불어 대고,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한순간이라도 밖에 나가 본 것이, 결국 언제든 이 인생이라는 새장의 새로 돌아갈 내게 좋은 일이었을까?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한다. -p.126~127
■ 도모 짱은 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이나 부모, 키우는 잉코와 스킨답서스, 러브 로망 영화 등,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수도 없이 많았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예쁜 원이 되어 주위에 존재하는 것이, 도모 짱이 생각하는 인생이었다. -p.162
■ 난 말이지...... 난, 자유로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앞으로 어딜 가든 뭘 하든 상관없지만, 기분이 아주 맑을 때. 그런 때, 몸속에서 힘이 솟으면서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실제로 어딜 가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 힘이 솟는 그 느낌이 행복이야. -p.177
■ 지금은 알 수 있다. 설정은 최악이었지만, 그때 나는 최고의 행복 속에 있었다는 것을. 그날의 그 시간을 상자에 담아 평생의 보물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그때의 설정이나 상황과는 전혀 무관하게, 무자비할 정도로 무관하게, 행복은 불쑥 찾아온다. 어떤 상황에 있든, 누구와 있든. 다만 예측은 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다음 순간에 찾아올지도 모르고, 줄곧 기다려도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마치 파도와 날씨의 변화처럼 아무도 그것은 알 수 없다. 기적은 누구에게나 고루,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 나는 그 사실만을 몰랐던 것이다. -p.177~178
■ 아 좋다. 이 사람과 같이 있기만 해도, 딱히 내 것이 아니어도 괜찮다. 공원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있고, 모두가 그 아래에서 휴식을 얻지만, 그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렇게 그란 존재를 기리자. 나는 그런 기분이었다. -p.204
■ 그날들은,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던 내게 신이 덮어 준 포근한 담요처럼, 어쩌다 우연히 찾아온 것이었다. 카레를 만들다, 먹다 남은 요구르트와 스파이스, 사과같은 것까지 넣다 보니, 그리고 양파의 양을 평소보다 좀 많게 했더니, 정말 백만 분의 일이라는 확률로 기가 막히게 맛있는 카레로 완성된 경우처럼, 두 번 다시 재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의 행복이었다. 그렇다는 걸 알기에 애달프고 고마움도 한결 더했다. "정말 고마웠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정말 즐거웠고. 고마워. 평생 감사할게. 평생 잊지 않을게." -p.225
■ 아마도 그것은 내 마음속 보물 상자 같은 곳에 간직되어 어떤 상황에서 보았는지, 어떤 기분으로 보았는지, 까맣게 잊힌 후에도 내가 죽을 때 행복의 상징으로 반짝반짝 빛나며 나를 데리러 와 줄 광경의 하나가 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p.226
리뷰
오랜만에 만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라 따끈따끈한 신간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었는데
와우, 책 나오자마자 바로 구입! 책을 펼쳐보기도 전에 일단 파란 가을하늘을 닮은 하늘색 표지부터가 마음에 들었고,
'가을' 이라는 이 계절과 딱 어울릴만한 제목에서 느껴지는 애틋함과 그리움, 거기다 작가가 지금까지 본인의 작품들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하니 읽기 전부터 기대감 충만. 한 장 한 장 제대로 음미하면서 읽고 싶은 이 기분. 속독은 금물! :)
거기다 이번에 저 책 사면서 독서쿠션까지 함께 구입해서 테이블 위에서도, 침대 위에서도, 그냥 방바닥에서도
저 폭신폭신한 쿠션 받치고 책 읽을 수 있어서 너무 편하고 좋았다.
역시나 이번 책도 김난주님의 번역이다.
원서는 접해보지 못해서(물론 있어도 일본어는 도저히 해석이 안되겠지만) 원래 문장이 어땠는지 확인해볼 순 없지만,
김난주님의 번역에는 유난히 의성어와 의태어를 비롯해 단어의 반복이 두드러진다.
'토닥토닥, 휭, 오물오물, 휘익, 덜컹덜컹, 흐늘흐늘, 터벅터벅, 쭈글쭈글, 느릿느릿, 빠릿빠릿, 부글부글, 빙글빙글, 살랑살랑,
아삭아삭, 송송, 돌돌, 좍좍, 성큼성큼, 가물가물, 질질, 몽글몽글, 매끌매끌, 따끈따끈, 꾸벅꾸벅, 반짝반짝, 바스락바스락.'
아무렇지 않은 아주 사소한 단어들 같지만 이런 작은 표현들 하나하나가 바나나의 글들을 더 그림처럼 그려내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이런 단어들이 나올 때마다 형관펜으로 색칠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 재미도 솔솔하다. :)
이번 책에 실린 다섯개의 작품들은 모두 가슴을 아리게 하는 이야기들이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잔잔한 감동이 전해진다.
대학교 캠퍼스에서 만난 '이와쿠라' 에게 호감을 가지지만 차마 그 마음을 표현해보기도 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버린 그를 그리워하는 '셋 짱'.
사내 식당에서 독극물(감기약을 잔뜩 넣은 카레) 테러를 당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몸과 마음으로 모든 일이 어긋나 버리는 '마쓰오카'.
어린 시절 동네 친구였던 '마코토' 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추억의 조각에 마음 아파하는 '미쓰요'.
같은 건물에 근무하는 '미사와' 씨를 5년간 짝사랑하면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의 가능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도모 짱'.
결혼을 앞둔 약혼자의 배신으로 갑작스런 이별을 맞이하고 그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미미'.
각각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작은 상처에서부터 평생 잊지못할 깊은 상처까지 모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다.
작가는 이들이 그 상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는데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 서있는 그들에게 따뜻한 힘이 되어준 건 바로 친구, 가족, 동료들이었다.
아픈 마음을 함께 어루만져주고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면서, 당시에는 죽을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픔은 천천히 사라지고 이제는 그 일들이 모두 추억이 되었음을 깨달아가고 있다.
이 가을, 가슴을 적셔주는 감성을 만끽하고싶다면 바나나가 주는 이 잔잔한 위로를 받아보길!
이렇게 따뜻한 위로의 글들은 내 인생을 조금더 사랑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것 같다.
마음속에 아픔이 있다면, 그래서 힘겨워하고 있다면, 모두들 책으로 힐링 받으세요. :)
p.s. 세번 째 이야기 '따뜻하지 않아' 에 등장하는 '마코토'의 이름이 무려 3번이나 '마토코'로 잘못나와있다.
무심히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호주 살 때 내가 참 좋아했던 같은반 일본인 친구이름이 '마코토' 여서 기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