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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권] 끌림

 

 

「내가 걸어온 길이 아름다워 보일 때까지 난 돌아오지 않을 거야」

 

저자 : 이병률

출판사 : 달

출판일 : 2010년 07월

 

■ 가끔, 나의 청춘을 돌아볼 때마다 여전히 가슴 두근거리는 이유는 아무거나 낙서를 해도 괜찮은 도화지, 그것도 끝도 없이 펼쳐진 거대한 도화지가 떠올려져서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질러야 할지를 모르는 하얀 도화지 앞에서의 두근거림이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감정이며 동시에 인생에 있어 몇 번 안 되는 기회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청춘은 방해받는 것 투성이다. '하지 말라'는 말들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야 함으로 느낄 수도, 만날 수도, 가질 수도 없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느껴야 하는 것, 만나야 하는 것, 사력을 다해 가져야 하는 것. 그래서 반드시 행복해야 하는 것, 그것이 청춘이다. -#07

 

■ 사랑해라, 시간이 없다. 사랑을 자꾸 벽에다가 걸어두지만 말고 만지고, 입고 그리고 얼굴에 문대라. 사랑은 기다려주지 않으며, 내릴 곳을 몰라 종점까지 가게 된다 할지라도 아무 보상이 없으며 오히려 핑계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사랑해라. 정각에 도착한 그 사랑에 늦으면 안 된다. (...) 사랑해라,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잃어온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사랑해라, 사랑하고 있을 때만 당신은 비로소 당신이며, 아름다운 유일한 한 사람이다. -#19

 

■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지 말자. 가진 게 없어 불행하다고 믿거나 그러지 말자. 문밖에 길들이 다 당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주인이었던 많은 것들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던가. -#20

 

■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시간은 있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새에게도, 나무에게도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시간은 있는 법이지. 기억하고, 추억하고, 감싸 안는 일, 그래서 힘이 되고 기운이 되고 빛이 되는 일, 손에서 놓친 줄만 알았는데 잘 감췄다고 믿었는데 가슴에 다시 잡히고 마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이어서 온 몸에 레몬즙이 퍼지는 것 같은...... -#25

 

■ 발걸음을 멈춰 서서 자주 뒤를 돌아다본다. 그건 내가 앞을 향하면서 봤던 풍경들하고 전혀 다른 느낌을 풍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지나온 것이 저거였구나 하는 단순한 문제를 뛰어넘는다. 아예 멈춰 선 채로 멍해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일도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뒤돌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냥 뒤로 묻힐 뿐인 것이 돼버린다. 아예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린다. 내가 뒤척이지 않으면, 나를 뒤집어놓지 않으면 삶의 다른 국면은 나에게 찾아와주지 않는다. 어쩌면 중요한 것들 모두는 뒤에 있는지도 모른다. -#34

 

■ 역사가 길지 않은 믿음은 가볍다. 그 관계엔 부딪침만 있고 따분함만 있을 뿐이며 혼자인 채로 열등할 뿐이며 가벼울뿐더러 균형마저 잃는다. 심연은 깊은 못이나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그 한가운데 존재한다. 사람을 믿지 않으면 끝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끝이고 더 이상 아름다워질 것도 이 땅 위에는 없다. -#47

 

■ 오늘 오랜만에 밥이 먹고 싶어서 쌀 파는 곳을 겨우 찾아낸 다음 쌀을 사서 밥을 하고 계란 프라이 두 개를 해서 들고는 가을 잎들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저녁의 공원에 가서 먹었는데 나는 그 정도 행복이면 돼요. 달걀 두 개의 값과 양과 맛을 넘어서지 않는 행복. -#52

■ 여행은, 120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곳'을 찾아내는 일이며 언젠가 그곳을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밟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키우는 일이며 만에 하나,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해도 그때 그 기억만으로 눈이 매워지는 일이다. -#54

 

■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처 때문에 떠난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사람으로부터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떠나 눈발이 된다. 사는 일 또한 그랬다. 차곡차곡 쌓인 사람과 희망에 대한 환상으로 살면서, 때론 조용히 허물어지는 것까지도 바라보는 것. -epilogue

리뷰

 

이병률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최근에 나온 여행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그 책을 사면서 그의 이전 작품인 <끌림>이라는 책의 미니북을 받았었는데 너무 앙증맞고 귀여워서 소장용으로는 좋지만

글씨가 너무 작기도 하고, 실제 책에 실린 사진이나 여백에서 느껴지는 마음의 여유도 살짝 부족한 것 같아 이 책을 사게됐다.

하얀색 표지에 때라도 묻을까봐서 가방 속에 넣을 때도 비닐팩에 한 번 싸서 얼마나 고이고이 아껴가며 읽었던지. :)

이 작가의 책들은 '가을' 이라는 계절과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여행이 주는 자유로움과 한 박자 쉬어갈 수 있는 여유.

 

지난 책과 마찬가지로 목차도 페이지도 없이 그냥 자유롭고 편안하게 써내려간 글들이라서 약간의 텀을 두고 읽는 경우에도

다른 책들에 비해 앞부분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앞으로 넘어가는 일 없이 그냥 아무페이지부터 펴서봐도 너무 좋다. :)

왠지 이 작가의 책들은 나와 코드가 맞는 듯한 느낌이고 책이 마음에 들다보니 자연스럽게 작가에게도 점점 관심이 간다.

이병률 작가는 무엇에 끌려 그토록 여행을 하고 무엇에 끌려 그토록 사랑을 하는 것일까.

 

이번 책에서도 작가가 여행길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손님이 선택한 향비누로 머리를 감겨주던 멕시코의 이발사 곤잘레스 할아버지 이야기.

다음에 머물게 될 여행객을 위해 작은 선물을 두고 떠나는 베니스에서의 아름다운 풍속 이야기. 

돈도 받지 않고 찐 옥수수 두 개를 봉지에 담아 건네던 페루의 순수한 옥수수 청년 이야기.

칠레 시골 마을의 한 포도농장에서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한 청년과 여인의 이야기.

사람과, 사랑과,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야기들을 보며 정말 여행의 매력을 한 번 더 느껴본다.

 

글, 사진, 그리고 여행.

이 세가지가 한데 어우러져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감동이 되기도 하고, 뭔가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그렇게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가 또 아려오기도 하고, 지난 추억들이 떠오르면서 행복하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고.

작가처럼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되는 끌림의 순간들을 나도 하나하나 '트래블 노트'에 기록하고 또 직접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다.

예순 일곱개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내용도 좋았지만, 맨 뒷부분에 수록된 '카메라 노트'에 실린 글들도 너무 좋았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과 그 사진에 어울리는 문구들, 짧은 문장이지만 맘에 드는 구절이 너무 많아서 탐이 날 정도. :)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누군가를 마중하는 길이다.

─ 조금은 멀리 있어도 돼. 내가 조금 걸으면 되니까.

─ 세상에는 혼자 볼 풍경이 있고, 둘이 봐야 할 풍경이 있지.

─ 우리는 서로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서로 맡아지지 않는 향기로 묶여 있다.

─ 갔던 길을 다시 가고 싶을 때가 있어. 그 길은 누가 봐도 영 아닌 길인데 다시 가보고 싶은 길.

─ 힘든 날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지나간다. 내 머리를 지나, 내 가슴을 지나 한 사람이 지나간다.

─ 그때보다 지금이 괜찮은 건 그때는 몰랐던 걸 지금은 조금 알기 때문이다. 그건 그때의 조금 못난 내 자신을 지금의 내가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내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은 바로 이거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아서 가을이다. 나를 지나간 세상 모든 것들에게 '잘 지내느냐'고 묻고 싶어서 가을이다."

어쩜 이리도 가슴에 들어와 마음을 울리는지, 점점 짙어지는 가을, 이병률 작가의 감수성 풍만한 책이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줄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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