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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님의 계시

임근호 |2012.10.14 20:20
조회 137 |추천 2

1.

 어떤 이의 가진 것 10분의 1이 다른 어떤 이의 가진 것 100분의 1이 된다면 너흰 이로울 것과 해로울 것, 모자람과 채움을 어떤 가치와 실용성에 둘 수 있는지를, 다를 수 없는 다름으로, 지킬 수 있는 바탕의 크기를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어떤 그릇의 10분의 1 재료로는 그 그릇을 만들 수 없듯이, 충분함과 부족함을 공정하다 알맞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할 순 없을 것이다.

 

2.

 너희는 여러가지를 믿는다. 그 중 미신이 사라지고 전쟁이 사라질 때, 믿음과 행실의 발전이 문명을 윤택하게 이끌 것이다.

 

3.

 너희는 선과 악을 구별하고 선별해나가면서 선을 이끄는 구도자들을 선망해나가고 원할 것이다. 하지만 선이 원만한 너희를 바른 길로 이끌어도 쾌락을 이기지 못하면 욕망의 굴레에 이끌려 악을 찾아 다시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 너흰 힘들게 선을 구하고도 순간의 쾌락을 위해 악을 조장하고 이용하려 한다. 링 위의 긴장과 고통을 보며 더 큰 위험의 링을 찾듯이 지식은 너희 스스로의 통제 속에서 무엇이든 선이 될 수도 있고 그 안에서 악을 모르는 악으로 퍼질 수도 있다.

 

4.

 너희는 모두 선하게 태어났다. 선을 잘 알기에 욕망과 쾌락을 충실한 선으로 보려하니 선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선에 입각하여 성패를 따르는 선한 행실이 선과 악을 찾게 되고, 성공을 악으로 얻었다면 다시 선으로 만드려 하게 되는 것이 선한 너희의 본성이다.

 

5.

 너흰 나를 보고 상대를 보며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 너희보다 작은 것을 작다고 보고 큰 것은 크다고 본다. 그러면서 너흰 이곳에서 넓은 것을 보고 좁은 것을 보며 느끼고 생활한다. 우주가 작다고 흔쾌히 여길 사람은 없다. 이곳에 있으면서 큰 것은 크다고 작은 것은 작다고 말할 수 있다. 관점과 형체와 의식 속에서 너흰 속도를 내고 힘을 내며 에너지를 유지하고 보존하며 소비하고 있다. 생각은 많은 것을 너희에게 선물하였으며 이루게 해주었다. 너희가 개미의 크기가 된다면 개미의 속도가 느리고 힘이 없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차원이 다른 생각에 그칠 뿐 너흰 개미보다 훨씬 크고 더 힘이 세다. 같은 차원에서 별의 운행과 생성, 규모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별과 은하는 우주의 일부 중 극히 작은 구성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너흰 알고 있다. 생각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크기의 추측은 생각의 차원을 넘지 못하고 크기를 가늠한다. 더 넘어의 밖은 과학으로 아직 가늠할 수 없는 상상의 영역이 되어 생각을 자극하고 과학의 이정표를 제시할 뿐이다. 크기의 차원을 넘은 요소는 그 차원에 맞게 환경을 유지하고 구성해나간다. 너희는 작다고 할 수 있지만 작지 않으며 크지도 않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과 같은 부분이 있는 반면 섭렵할 수 있는 환경적 차원과 크기, 구성, 운동성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너희의 영혼을 주관하는 세계도 이와 같이 여기면 된다. 

 

6.

 사람들은 선과 악을 말하려 할 때 성선(性善)인지 성악(性惡)인지 또는 선과 악은 필요에 의해 택해지는 것인지를 갈등하고 고민한다. 이를테면 너희가 악하다면 선이 있어도 절대 행하지 않았을 것이며 악을 본보기로 삼아 문명을 이룩하고 생활하여 왔을 것이다. 성악이라면 선을 행하는 것을 피하려 했을 것이고 선을 배제하며 어떻게든 선을 물리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흰 정반대이다. 너희가 끊임없이 알고 싶어하고 행하려 하고 추구하는 것은 선이었다. 교육에 의해 길러내고 싶어하였고 변치 않으려 했으며 지금까지 무엇이 더욱 더 선에 가까운가를 꾸준히 즐겁게 배우고 익히며 살아왔다. 너흰 선을 사양하고 멀리하기를 싫어했으며 올바르지 않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오히려 악을 행하여 불합리하고 올바르지 못한 경로로 목적을 이루었을 때 달성한 일에 대하여는 일부러 선으로 포장하려 노력하였고 선이 될 수 있게 다듬고 이끌어왔다. 너흰 앞으로 무엇이 되려 하고 되어 있든 간에, 시간이 지날수록 선으로 이끌고 나아갈 것이다.

 

7.

 감성이란 무릇 심취해서 비춰지는 것보다 다름에서 같음으로 통하고 전하는 바탕에서 성장하고 심화된다.

 

8.

 철학은 생의 익숙함이자 삶의 구심점이 된다. 깨닫고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철학이다.

 

9.

 신학은 내가 있음을 논하려고 배운다기보다 내게서 너희가 멀리 있지 않음을 배움 속에서 깨닫기 위해 배운다. 너희가 없으면 너희를 대신할 나의 뜻 조차 없어지는 것이다. 너희가 성선(性善)인 사실이 나로써 너희가 함께 있다는 의미이다.

 

10.

 음악에 음계가 있는 것은 이루기 위한 조화를 뜻한다. 단순한 음악이라도 한 음계의 반복에 의해서는 이뤄지지 않는다. 조화가 없으면 너희는 흔쾌한 삶을 무엇도 이루지 못한다.

 

11.

 희생이란 사랑에서 나온다. 희생의 바탕은 이해이며 근원은 사랑이다. 받아들이는 모든 것이 희생이며 이에 대해 숭고한 정신을 이끌어내는 것은 사랑이다.

 

12.

 사람의 마음은 나의 눈이 된다. 너희 마음에서 느끼고 원하는 것이 내가 보는 것처럼 너희에게 마음에서 이루어지고 보여진다.

 

13.

 너희의 이성을 보다 차갑고 예리하게 하는 건 유혹을 잊는 것이다. 이성은 사랑을 식게 하며 사랑을 유혹이라 착각하게 한다.

 

14.
 너희에겐 욕심보다 뜨거운 희망이 있어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15.
 너희에게 열심히 해서 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의 자만이다. 자만은 과해질수록 남보다 부족한 자신을 만든다.

 

16.

 너희에게 편안함은 스스로를 시끄럽고 어지럽게 할 언행이 없을 때 자리할 수 있고 지켜질 수 있을 것이다.

 

17.

 너희에게 가깝고 멀다 할 수 있는 건 간격보다 다가갈 수 있는 거리일 것이다.

 

18.

 지키는 것, 가지는 것, 베푸는 것. 이는 사랑이란 한가지에서 나오며 사랑이 커질수록 가지가 무성하듯 뻗어나가게 한다.

 

19.

 너희에게 관심은 어려운 곳에는 멀리 있고 즐거운 곳에는 가까이 있다.

 

20.

 채우고 나서 더하였을 때 모자람은 서투른 만족감이 서운하지 않게 하지만, 부족하여 더하고 더함은 채워야 함을 알게 되는 속에서 충만하다.

 

21.

 너흰 앎을 통해 새롭게 나아가고 고쳐나가며 모름을 통해 앎을 의식한다.

 

22.

 태생적인 두려움이란 무지에서 나오며 후천적인 두려움이란 앎의 기억에서 나온다.

 

23.

 너희들 중 누군가는 너희의 천부적인 권리를 의심한다. 하지만 너흰 지금까지 이 권리를 통하여 이룩해 왔으며 앞으로도 발전할 것이다. 이 권리의 자격여부는 너희가 박탈하느냐 혹은 너희가 신장하느냐에 달려있다.

 

24.

 너흰 태어나면서부터 하느님을 모른다고 원망하고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너흰 그러기에 삶에 충실하고 도리를 따르며 선을 지키고 덕을 베풀고 존중하고 얻는 것이다. 너흰 부모님조차 모르며 태어난다. 이는 삶 속에서 사랑으로 키워지고 덕을 누리며 선을 체험하기 위해서 처음엔 몰라야 베풀어지는 지혜와 미덕일 것이다. 원망과 의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너희 삶의 자유를 위해 허락하여 주신 너희의 선택일 것이다.

 

25.

 지혜의 가치는 선(善)에 있으며 이(利)는 그 다음이다.

 

26.

 수레바퀴가 굴러가듯, 생의 시작은 땅에 닿는 것과 같으며, 생의 끝은 땅에서 떨어져 공중을 감아도는 시작과 같고, 생을 맞이하는 것은 다시 땅에 닿는 추진력과 같다.

 

27.

 너흰 같은 땅을 밟으며 같은 하늘을 보며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여기엔 차이도 없으며 평등하지 않은 것도 없으며 배제된 것도 없다. 너희 안에 잘못과 잘함이 있으며 덕과 죄가 있으며 앎과 깨달음이 있다. 이렇기에 잉태한 모든 것과 새생명에겐 차이와 죄의 정도를 적용하지 않으며, 원하는 의지로 비롯된 희망의 물결엔 어떤 것도 잣대를 대지 않는다. 씨앗이 봄이 될 때를 기다려 피어나고, 자리했던 곳에 여의치 않은 이변이 있을 땐 자리를 옮기듯이, 바로 창조되지 않는 임하는 기간동안 새생명과 함께할 것인지 함께하지 않을 것인지를 잘 심사숙려하고 굳건하게 다짐하여 책임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28.

 너희에게 죄를 짓고 나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들에게 죄를 묻고 심판을 원할 것이다. 그리고 눈으로 그들(죄를 짓고 나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며 참회와 정의의 실현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삶이 있으며 죄를 짓고도 그 후 살아가는 동안 언젠가 선하고 참된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한참 후가 될 수도 있고 가까운 다음 날이 될 수도 있다. 너흰 성선(性善)이지만 삶 속에서 선과 악을 선택하여 죄를 짓거나 덕을 베푸는 것이기에, 삶 그 안에서 기회를 주는 것이다. 너희의 죄를 너희는 가려서 심판하며 공정한 판결로 선을 이끌어 간다. 살아가는 동안에 삶 속에서 너희가 짓고 용서하는 죄를, 너희 대신하여 내가 심판해 주시길 간구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너희가 용서할 수 없는 죄라면 너희가 용서하여도 내게로 올 것이니 하늘나라에서 용서받을 죄인가 아닌가는 하늘나라에서 판단하여라.

 

29.

 너희에게 구하기 어려운 생각은 유혹을 부르고 차츰 더해갈수록, 절박하여 이르게 된 성급한 절망과 욕망의 궁핍으로 인해 떳떳하지 못한 충동을 마음에 가까이 놓게 된다.

 

30.

 희망이란 욕망의 해결이 아니라 끝내 바라고 원하던 행실의 성취에 있다. 그 행실로써 행복을 원한 것이고 그 성취로써 다같이 이로워지길 원하는 것이다. 돈을 원하는 사람도 결국은 돈을 원한 것이 아니라 돈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행실의 성취에 있는 것이다. 이것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릇된 바람이 원하는 것은 욕망이 빚어낸 유혹의 성취에 있는 것이지 궁극적으로 희망하는 바는 아닌 것이다. 그릇된 것을 선양(扇揚)하지 않으며 공명정대(公明正大)한 것이 희망이다. 사람으로서 누구나 선한 목표를 위해 희망을 갖는다. 이것이 악한 목표가 되면 희망이 아니라 욕망에 뿌리를 둔 죄가 되는 것이다.

 

31.

 너희는 거울을 보며 생활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얼굴을 마주하고 얼굴로써 너희가 누군지를 알아본다. 너희를 나타내는 건 얼굴이며 너희가 너희를 알아보는 것 또한 얼굴이 된다. 얼굴은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을 느끼며 자신에게 자신임을 증명하는, 다른 부위보다 자신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중요한 부위이다. 누구보다 자신의 얼굴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그 때의 상태와 이유, 감정을 잘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얼굴은 감정을 나타내는 첫째가는 부위로써 희노애락 뿐만 아니라 온화, 다급, 비관, 낙담, 열정, 냉정, 부드러움 등을 담아내는 부위이기에 자신을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지를 스스로가 가장 잘 알 수 있는 부위이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자신을 알아봄에 있어 내면으로 무엇을 느끼는가 이다.

 

32.

 날마다 너희는 다섯가지를 발견한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새로움이 되며 너희를 이끄는 발전이 된다. 첫번째는 만남이며 두번째는 미소이다. 세번째는 아침과 낮과 밤이며 네번째는 마음의 움직임, 다섯째는 주고 싶은 사랑이다. 너희는 이를 통해 삶의 보람과 참된 가치를 새롭게 행복해하며 영혼을 정화시키는 발견이 된다.

 

33.

 너희 자신에게 기대하는 만큼 남에게서 구하려 한다면, 자신의 어려움은 남에게 어려움이 되거나 남에게 실망이 되는 기대가 될 것이다. 남에게 기대하는 만큼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자신이 기대하는 것이지 남에게서 찾을 만족은 아닐 것이다.

 

34.

 너희 자신에게 듣고픈 한마디의 말이 남에게도 해주고픈 한마디의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35.

 너흰 같은 때를 함께한다. 이로 인해 먹었을 때가 같으면 배고파지는 때가 같아지고 힘들어지는 때가 같으면 쉬고 싶은 때도 같아진다. 직업의 귀천은 일의 정도와 가치가 아니라 함께한다는 너희라는 시간의 울타리에서 흘리는 땀과 고심과 응당한 교환이 서로에게 베풀어지는 것에 있기에 일에서 귀하다 천하다 정하여 하는 것은 너희의 고정된 안목이 정해놓은 가치의 편견이다.

 

36.

 편한 일을 하려함은 귀한 일로 연결된다 여기겠지만 귀한 일은 결코 편하지 않다. 이러기에 어떤 것으로든 귀천(貴賤)을 논하려 한다해도, 자본주의에선 완벽하진 않지만 이를 교환하고 대우하는 얼마간의 조건이 있었기에 함께 발전하고 살기 좋은 문명을 낳는 기반이 될 수 있었다.

 

37.

 매춘과 범죄는 일이 아니다. 이는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않으려 하는 쾌락과 악의 밑바탕에서 악마에게 양심마저 사고 파는 죄의 유혹일 뿐이다.

 

38.

 너희는 인간이다. 어찌 신이라고 자부하고 싶어하는가? 사후세계가 없다고 믿는 자에겐 그에 맞게 가르침이 주어질 것이고 신을 모독하는 자에겐 그에 맞는 시험의 기회를 줄 것이다. 이는 속일 수 없는 마음의 결과물이며 그리 묻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39.

 신화는 너희와 함께하고 너희를 위해 존재하는 신의 증명이다. 너희가 행하여 너희가 찬양하던 것을 이젠 너희가 반박하고 너희가 부정한다. 어떤 것도 너희 이전에 세상은 없었으며 세상은 너희만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니 믿음을 잊기 위해 세상을 저버리거나 지혜로운 변화를 얻기 위해 믿음을 악용해선 안 된다.

 

40.

 자식을 죽이려 하는 부모는 없듯이 하느님께서도 너희와 마찬가지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보살피려 하신다. 세상의 종말은 자녀들이 부모를 죽일 때 일어날 것이다.

 

41.

 너희는 모양을 보고 다른 것과 같은 것을 구분해낸다. 너희는 너희에게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며 입이 있는 것과 팔과 다리가 있는 것을 안다. 살아 숨쉬는 것에 이를 모양내지 않는다 하는 것을 봤겠지만 그에 따른 역할을 하는 기관의 보이는 모양이 다를 뿐, 너희와 바탕은 같다.

 

42.

 아끼고 보존한다는 의미는 돈이 우선이 아니라 서로 아프지 않게 환경을 가꾸는 것이다. 자꾸 서로가 서로를 못 살게 하면서 사라지게 한다면 그 의미를 되돌릴 수 있는 시기를 다시 오랜 후에야 만들어야 할 것이다.

 

43.

 하늘 아래 많은 민족들과 이에 따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믿음을 품고 있었다. 그들에겐 그들이 믿는 신화가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내게 찬미와 감사를 드렸다. 내 아래에 받들어진 것은 많은 현혹과 유혹을 주었으며 이들 중에는 사탄이 되기도 하였고 다른 세력의 무리가 되어 군림하려 하였다. 수많은 민족들의 신화에서, 나를 알아보고 깨닫는 민족을 어린 양으로 삼는다. 내 아들을 보낸 것은 내가 유대인들을 유난히 아끼어 이리 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뜻이 통하여 이를 그들이 이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깨닫고 믿음의 일치를 이루면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고 무엇이 어지럽게 하는 것이었는지를 쉽게 깨닫게 된다. 이를 실천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며 사랑으로 믿음을 이루면 내게 가까와지는 것이다.

 

44.

 너희에게 용서는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다. 쉽게 이해하고 쉽게 주는 것이 아니다. 이를 공감하여 주는 것도 아니고 어렵게 이해했다고 하여 주는 것 또한 아니다. 용서는 자비와 다르다. 누구에게나 용서는 어려운 것이며 이는 사랑의 실천이며 사랑의 참 뜻이다. 자비를 베풀면서 용서했다고 하는 착각을 해선 안 된다. 용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상대방에게 허락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 어떤 분노도 어떤 후회도 없어야 한다.

 

45.

 돌이 반석이 되고 예술이 되며 바다 속에 있든 산에 있든 흙 속에 있든 어떤 이의 쉼터가 되든, 이렇게 가능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어디에 있어도 그 가치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 어느 것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46.

 태초에 태어남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 시작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원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은 의지를 낳았고 그 움직임이 뜻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뜻은 기도가 되었으며 창조하고픈 아름다움이 되었다. 그렇게 세상 만물은 가치가 없는 것이 가치를 주게 되고 가치가 있는 것이 가치를 더하고 나눔이 되어 상생하는 공존의 장(場) , 즉 이 바탕인 세상을 이루게 되었다.

 

47.

 마음이 탄생시키고 파멸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사랑은 마음에서 나오는 부여된 힘이며 탄생시킬 수도 파멸시킬 수도 있는 힘이다. 사랑이 있기에 존재의 의미가 지금까지 가능하였고 사라질 수도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사랑을 탄생의 힘으로 더해갈지 파멸의 힘으로 더해갈지는, 너희에게 주어진 사랑의 힘을 지혜로운 선으로 키워가야 할 너희의 대답일 것이다.

 

48.

 나는 모든 것에 있지만 모든 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창조의 원동력인 그 영(靈)을 이들 스스로에게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이 생명을 낳고 사람이 사람을 낳으며 선이 선을 키우고 악이 욕망하는 악을 유혹하는 것이다. 이로써 너희는 지혜의 창조를 이루는 문명(신학, 문학, 철학, 의학, 과학, 법학, 예술 등)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지혜로운 선이 수반된 과학을 이뤄나가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되었다. 이 지혜로써 너희는 다음 세상으로 나아갈 수도 멈출 수도 있는 선택을 얻었다. 지혜는 다스릴 권능으로부터 비롯된 올바른 판단과 사고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렇기에 선한 마음이 살리고 악한 마음이 파괴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익숙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49.

 누군가가 너희에게 같은 말을 하면서 한 발음에 두가지 이상의 발음을 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속이며 감추려 왜곡하려는 뜻이 없다면 다른 발음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신이 한 말을 회피하기 위해 또는 누군가에게 전가하기 위해, 숨기기 위해서 대화를 할 때 이러한 방법을 쓰는 것이다. 이는 진실하지 못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정당함을 부정하기 위해 거짓을 마음에 두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50.

 너희에겐 작위적인 죄의 교사가 있고 이를 더해 악위적인 죄의 교사가 있다. 이를 비롯되게 하는 교사자가 피의자에게 요구와 수용을 통한 거래 또는 다른 충동으로 합당한 충족을 거치면서 얻으려는 댓가를 피해자에게 저지르는 죄의 가치를 통해 그만큼의 값어치가 유형으로든 무형으로든 분배의 과정과 합리화의 과정을 거쳐가며 죄의 무게를 경감하려는 방향으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죄를 시킨 자와 행한 자, 이는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다수일 수도 있고 소수일 수도 있다. 행하는 자의 행하였을 때의 마음과 악에 목표를 두고 있는 자의 마음은 분명 다르다. 두 부류 다 행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죄는 죄이며 무엇도 그 사실을 변화시킬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죄의 가치는 마음에 있으며 그 마음 안에서 얼마만큼의 악을 저지르고 있었는지가 죄의 무게를 결정한다.

 

51.

 너희의 마음은 내게 전달되며 너희가 반성하고 있는지, 독기를 품고 있는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싶을 정도로 악에 물들어서 이를 합리화시키고 있는지, 죄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지를 마음에서 판가름 할 수 있다. 악을 저지르면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악한 마음과 행실에서 가능한 악한 것뿐이다. 악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악뿐이며 죄의 정화를 위해, 마음 안에서의 악의 정화를 위해, 살아서 반성하지 못하면 영혼이 머물며 안식하는 곳에서 결국 깨닫게 된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소멸되고 만다. 정화되지 않으면 진정한 정화를 위해 소멸의 단계를 거쳐 새롭게 된다.

 

52.

 너희는 선의의 거짓말로 선한 관심을 드러내는 것은 죄라고 여기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가? 이를 결과에 치중하였는지 과정에 치중하였는지에 관점을 두어야 하는가? 결과가 좋았고 과정이 좋지 않았다면 이것은 선을 행한 것인가 아니면 악을 행하다가 선으로 귀결된 것인가? 과정이 좋았고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이 또한 선으로 향하다가 악을 이룬 것이 되겠는가? 그렇지 않다. 선의의 거짓말이 정도가 있겠지만 그 거짓말이 거짓말을 넘어서 악과 죄를 낳고 파생시키는 것이 된다면 이는 분명 악일 것이다. 거짓말을 선의로 했다는 것은 농담과 장난, 우려를 경감시키기 위해서 또는 많은 이야기와 일상에서 일궈지는 첨가의 묘미에서 허용될 것이다. 이는 즐겁고 유쾌한 활력을 위해 웃게 해 주는 것이 된다. 지나친 선의의 거짓말이 있다면 그건 진짜로 하는 거짓말이 되고 말 것이다.

 

53.

 정화의 공간이 괴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까닭은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려 가르침으로 정화하는 것 때문이다. 악한 마음으로 물든 영혼은 이러한 깨달음까지의 과정이 고초를 겪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정화의 공간은 불구덩이로 잔인한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며 잘못된 것을 깨닫고 반성하려 하니 가르침이 불구덩이처럼 보이고 느껴지며 괴로움과 고통이 되는 것이다. 악으로 물든 영혼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선 정화라 느낄만큼 견디기 어려운 정도의 반성과 각성을 거쳐야 한다. 그 후 다시 삶의 순환을 부여받는다.

 

54.

 기도할 때는 마음에 그 대상을 어디에 두었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종교가 다르다고 박해하지 않으며 종교를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내 아들인 예수가 너희에게 친히 바른 길을 열어주었는데도 멀고 험한 이상한 방법으로 다다르는 것은 내 아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해선 안 된다. 내 아들을  모르는 사람이 나를 외면(하늘에 올리지 않고)하여 그 기도의 대상이 이치를 벗어난 다른 영으로 향할 때는 그 영을 위한 것이라 그 영적 존재에게 위안과 안식을 허락한다. 여기에서 나를 모독하는 욕된 영이라면 사람의 몸을 탐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의 영을 잠식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영은 정화의 공간에서 견디지 못한 영이 대부분이며 그 외에는 떠도는 영이 이리된다. 떠도는 영은 하늘나라로 갔다가 나를 모독하고 외면하고 부정(거부)하여 그대로 남는 영과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부정(불의)하게(잘못 알게된 종교관으로 또는 생각으로) 되어 남게된 영이 있다. 나를 부정하는 영은 하늘나라를 부정하여 신을 자처하는 믿음을 가진 숭배로 사람의 추종(믿음)을 통해 사람의 몸에 파고들어 그 사람의 영을 흡수하며 차츰 자신의 영으로 만들어 가며 지상의 삶을 지속하려 한다. 하늘나라에 들지 않길 거부하는 수양된 영은 지상에 머물면서 사람들과 똑같이 배고픔도 느끼고 고달픔도 느끼면서 채울 길을 찾게 된다. 사람의 원기를 흡수하며 지내는 영도 있고 다른 영의 밑에 들어가 허기도 덜고 안식을 취하는 영도 있다. 그래서 세상 어떤 곳에 있는 사람이든 기도를 할 때 바라보는 곳이 나의 피조물인 하늘과 땅 기타 여러 물질을 보며 나를 굳이 지칭하지 않더라도 하늘께 올리며 나를 찾으면 나에게 드리는 기도가 되지만, 그 대상을 지정하여 영을 찾으면 떠돌던 영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그 기도하는 사람을 점점 잠식해가기 시작한다. 내 아들에 대한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영의 힘은 가능해진다.

 

55.

 사람들은 저마다 말을 할 때에 생각없이 하진 않는다. 어떤 말을 하는 것은 그 의미가 담아서 전달하고 싶기에 하는 것이다. 아무렇게 그냥 하는 말이었다고 해도 무심코 나온 말이라 해도 그건 생각의 작용이 입을 연 것이고 말을 하고자 하는 의지로 인해 소리가 된 것이다. 누구든 좋은 것을 주고자 함에 있어선 좋은 말을 실천할 것이고 나쁜 것을 주고자 함에 있어선 나쁜 말을 입으로라도 실천할 것이다.

 

56.

 사랑은 그 나은 것과 덜한 것이 나뉘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분류에 있어 그 갈래가 제시하는 방향이 이를 나뉘어 바라보게 한다. 그 갈래의 뿌리는 본받을 사랑이다. 사랑은 가치에 있어 본받지 못할 사랑이 없지만 어긋난 마음과 질투, 증오, 이기심, 소유욕, 보호받고 보호하려는 애정으로 그러한 마음의 작용마다 사랑의 무게중심이 다르게 실린다. 사랑을 대하고 마주함에 있어 누구나 따르고 싶고 본받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사랑은 바로 사랑 안에 있다. 사랑은 함께하는 공정한 마음의 베품과 은혜로운 덕이며 아끼고 잘 되게 하려는 작용이다. 사랑이 있어야 앞서 말한 무게의 쏠림에 치우쳤다 하더라도 감동을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의 감동이 전해진다는 것은 본받고 싶은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 갈래가 사랑의 정도(程度)를 달리하여 그 높이를 그리고 방향을 다르게 하며 무게를 결정한다. 희생, 봉사, 헌신, 베품, 나눔, 진심, 믿음, 신뢰, 정직(사랑해서 거짓말을 했더라도 사랑을 위해 한 것이고 악의로 하는 사람은 없기에, 사랑한다면 그릇된 것을 깨달을 만큼 사랑 앞에서는 정직할 수 밖에 없다), 협동, 절개, 성실, 약속, 정성 등 그 뿌리는 사랑으로 같지만 그 제각기 맺힐 방향과 열매는 각자의 마음에 감동의 무게로 맺어진다.

 

57.

 인생은 많은 질문과 답을 너희에게 제시하고 물으며 연속된다. 선(善)하지 않으면 많은 질문이 허무할 것이고 악(惡)하면 모든 대답이 허무할 것이다. 몰라서 묻지만 대부분은 알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 묻는다. 대답을 듣더라도 받아들이는 이는 적으며 대답을 묻더라도 일관된 대답을 듣기 어렵다. 삶은 질문을 하기 위해 사는 것처럼 대답없는 메아리를 되뇌이는 것 같지만 모두가 매순간 대답을 알고 있으며 그 답을 알고 있다. 질문을 대답하면 거기에 더하는 질문으로만 듣고 대답을 어느 정도는 마음에 두고 있다. 너무 어린아이가 묻는다면 대답을 모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어린아이 나름대로 대답을 가지고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묻고 듣고 싶어 묻는다. 삶은 선하지 않으면 선이 대답이 되고 악하지 않으면 선을 찾고 지키는 대답을 얻는다.

 

58.

 너희에게 번거롭고 잡다한 일이 단순한 일로 또는 복잡한 일로 어떻게 자리하는가에 따라 소중한 일이 되거나 귀찮은 일이 된다.

 

59.

 신교는 구교를 따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들기에 적정한 무엇이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구교 또한 신교의 바람직한 모습을 무조건 나쁘다 다르다 비꼴 수가 없다. 같은 가르침을 얻고자 하느님을 따르고 찾고(바라는) 기도하는 같음 속에서 비판하고자 다름을 바란다면 그 또한 달라질 수 없는 바람이기에 다름은 얻어지지 않는다. 신교가 사회에서 행하는 부분은 구교에서 고민하여 따를 수 없는 부분을 행하고 있고 그것과 마찬가지로 신교는 구교에서 추구하고 기원하는 부분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가 비판하고 폄하할 것이 아니라 서로가 보완하고 덜어줄 수 있는 부분을 같은 믿음 속에서 일치시켜야 한다. 신교가 갈리고 구교가 신교를 따로 보는 것보다 하나로 합하여 일치된 믿음을 보여야 할 것이다. 너희는 인간이기에 부족하고 필요하고 얻어야만 하는 것이 모두 다르다. 사람들이 다 같다면 이런 가르침과 종교 또한 필요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본성은 같지만 그 생각과 마음의 선택은 다르며 부조화가 조화되고 깨달음을 통해 바른 것을 찾게 하는 것이 서로가 인정하고 거부할 수 없는 본성의 길을 찾는 것이다. 합하지 못하면 계속 갈릴 것이고 계속 갈리면 올바름이 혼동될 것이다. 사리사욕 때문에 갈렸는지, 나를 위해, 나를 따라서 갈렸는지를 변하지 않는 믿음을 향해 자문해 볼 일이다.

 

60.

 진실은 거짓의 경험을 낳고 진실이 있었기에 거짓이 있었음을 증명하게 된다. 시작도 되지 않은 것을 거짓이 앞설 수는 없고 시작된 것을 거짓이 마무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진실이 시작하여 진행되고 있거나 마무리 되고난 후에야 거짓이 경험을 얻기가 가능해진다. 이것은 선(善)과 악(惡)의 차이와 같다.

 

 

 아래 글(0)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부분이십니다.

 

0.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많은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또는 향응을 위해 우린 맛있게 요리하여 양식을 먹습니다. 우린 식물에서 모든 영양분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식물을 죽이는 것은 괜찮은가? 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식물 중에 나물과 풀을 우선 말하겠습니다. 나물과 풀은 자라고 피어나고 다시 겨울이 되면 우리가 뽑지 않아도 시들며 제철이 지나면 잎과 줄기를 잃었다가 다시 제철을 기다려 피고 지고 합니다. 뿌리가 성하면 다시 피는 것이 있고 제철이 되면 무성하게 곳곳에서 싹을 틔우는 것이 있습니다. 나물과 풀이 이처럼 풍부하게 피우고 틔우는 것은 우리가 먹고 동물이 먹으며 번식을 위해 자라나도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뽑아 먹어주지 않고 동물이 먹지 않으면 식물은 씨앗을 옮길 방법을 잃고 스스로 무성함을 막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그 식물을 먹으며 식물을 돕는 역할을 하지 않으면 식물 또한 번성할 방법을 잃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조화롭게 맺어주신 섭리입니다. 

 

 이삭을 맺는 식물을 말하겠습니다. 알곡 또한 그 열매가 씨앗이며 씨앗 속에 양분이 충분한 것은 그것이 열매이자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식물보다 이삭과 알곡에는 영양분이 풍부합니다. 저장성도 씨앗이기에 오래 보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줄기에서 많이 열리는 이유는 3분의 1은 우리가 바로 먹고 3분의 1은 다음 해에도 틔울 수 있도록 보관하기 위해서 이고 3분의 1은 사람이나 동물들이 굶주리고 있다면 용이하게 먹일 수 있도록 보관하기 위함입니다.

 

 열매를 맺는 식물은 그 열매 안에 씨앗이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열매가 금방 부패하고 보관이 어렵기 때문에 열매는 가공을 거쳐 다양하게 향과 조미를 가미할 수 있는 형태로 쓰기 위함입니다. 열매를 먹더라도 씨앗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틔울 수 있기 때문에 장소만 충분하면 철이 지날수록 어느 식물보다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는 식물입니다. 제철에 나는 열매는 우리를 탄력있게 살찌우고 맑게 해주어 그 철에 잃기 쉬운 영양분을 채울 수 있게 해줍니다. 장소가 충분치 못했고 씨앗이 부족하였다면 그 철에만 먹을 수 있는 식물일 것입니다. 하지만 씨앗이 많이 준비되어 있고 장소가 충분하여 많이 열린 열매는 그 철에 먹고도 남겠죠. 남은 열매는 버리지 않고 철이 지나도 먹을 수 있게 가공하여 양식으로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이제 포자로 번식하여 피어나는 식물을 말하겠습니다. 곰팡이와 버섯, 고사리가 있는데 이 중에서 버섯은 다른 식물에서 얻을 수 없는 추가적인 양분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포자로 피어나는 식물들은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양분을 지녔기에 그 성분들을 우리가 가진 다스릴 권능(과학지식)으로 충분히 검토하여 가려 먹어야 합니다. 

 

 뿌리 식물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뿌리에 양분을 가진 식물은 땅과 가까운 양분으로 맺어지기 때문에 열매와는 다른 양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매는 잘 아시다시피 건강을 위한 탄력성분이 풍부합니다. 뿌리 식물에도 이 같은 탄력성분(비타민 등)이 있지만 열매보다 월등한 탄력성분을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뿌리 식물은 땅과 가까운 힘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체력을 굳건히 해주며 몸의 내실(무가 위에 좋고 감자가 소장에 좋으며 고구마가 대장에 좋습니다. 식이섬유는 장의 운동성을 키워주는 것이지 장에 필요한 양분을 제공하진 않죠.)을 다져줍니다. 인삼과 산삼, 더덕, 마 등의 뿌리 식물이 우리 몸에 탁월하게 좋은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뿌리식물은 어떤 것이든 우리 몸의 내실을 다져줍니다. 식물만 골고루 먹어도 양분의 부족함을 느낄 수 없고 오히려 과다할까를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됩니다. 이러한 섭식을 통해 정신과 몸이 맑아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식을 하면서 육식을 해야 하니까 살생(동물들은 우리가 내버려 두어도 서로가 섭리를 통하여 유지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우리와 달리 죄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려할 점은 우리가 멸종시키고 남획하여 교란시킨 생태계는 우리가 그에 맞게 복원해 주어야 합니다. 지구는 동물과 우리가 공존하여도 남을 만큼 넓고 풍족합니다.)을 하여 사는 것이 죄짓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과도하게 기름진 양식으로 인해([지방이 과해져 몸을 잠들게 합니다. 정신적인 마음의 작용보다 따라주지 않는 몸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과 우려, 의심, 조급함, 답답함, 강박증, 고혈압, 이기심(걱정과 우려가 많아지면 의심이 커져가고 자신만을 우선적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배타성 등 버려야 할 양분을 얻고 축적하게 됩니다.]) 자신을 잃어가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죄를 짓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마귀가 사라지고(마귀가 사라지면 우린 전쟁을 하지 않으며 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전쟁뿐만 아니라 남에게 때리는 것조차 하려 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사리지면 미신도 사라집니다.) 몸과 마음이 맑아지는 때가 되면(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트여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이후엔 과학의 범주를 넘어선 권능을 누리게 됩니다.) 그 신세계가 하늘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우리의 수명이 500년을 넘어서며 선(善)에서 이룩할 수 있는 선(善)의 최상을 누리게 됩니다. 그 때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리고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권능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에덴을 넘어설 것입니다. 이 때엔 우리가 전 우주를 다닐 수 있으며 하느님의 권능을 다른 곳에서도 이룩하고 실천하는 시대가 됩니다.

 

 

 

 아래 두 글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알리라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저를 부르셨을 때 제게 이해시켜주신 가르침(말씀)이십니다. 그 때 대답할 때 하나님을 만나뵈온지 오래되지 않아 그 말씀(이해시켜주신, 가르쳐주신)을 기억하고 그 때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다가 만나뵈온 기억을 되살려 그대로 적게된 말씀이십니다.

 

 괄호가 많은 이유는 이 가르침이 이해로 불어넣어주신 가르침(이해)이시기에 그리 적은 것입니다. 이해와 동시에 가르침을 주셨기에 이렇게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직접적인 말씀은 그대로 적는 것이라 이해로써 적어내기보다는 직접적인 말씀을 적어내면 되었습니다. 위에 올린 직접적인 말씀은 이해하였거나 이해를 적어내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명시해주신 말씀을 적어내면 되었기에 직접적인 말씀에는 그 뜻이 분명한 일부분만 괄호해서 적어내었고 이해받지 않았기에 일일이 괄호로 보충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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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명하고 따르던 그 사람들이 목숨과 바꾸면서까지 증언한 진실을 시간(이틀, 하느님께서는 천년 만년이 하루 같으십니다.)이 지나니 이젠 그 믿음을 따르던 사람들(계승한 수많은 신자들과 성직자들)은 온데간데 없고(정신이 없고 외면하고 파는) 오히려 모독하고 부정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차 나(하느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믿음을 믿음이라 속여가며 믿음을 이어나가려 한다. 이는 믿음이 믿음으로써 부정되며 증명되지 못하는 죄를 부추기고 있으며 정신을 악마에게 줘놓고 믿음을 찾고 계승하려 하니, 나(하느님)를 섬긴다 하여도 나(하느님)를 못 볼(직접 보는 것뿐만 아니라 깨달음) 뿐더러 보려고도 않는 것이며 자신을 속이게 되니 더더욱 볼(하느님, 깨달음, 신비, 은총, 성령) 수가 없다."

 

+1.

 너희가 나(하느님)를 보려 함은 나(하느님)를 속이려 하기 위해 보려 하는 것이니 믿지 못하는 것을 듣고도 읽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나(하느님)에게 간구하는 것은 그 진심(정신)이 나(하느님)에게 올 수 있을 때 깨달을(볼) 것이다. 믿지 않고도 보려함을 원하는 것은 심판 때에 말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글(신약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님 부분= 복음부분)은 큰 믿음으로 쓰여진 것이며 너희들의 희생과 사랑과 믿음이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을 대신할 것을 나(하느님)에게서 간구한다면 너희들이 들여다보는 한 가지의 신비로 나(하느님)를 모독하는 것이며 훼손하려 하고 가두려 하는 것이다. (살아있을 때)믿음(예수 그리스도님을 통하여) 없이는 어떤 것으로 나(하느님)를 찾든 나(하느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죽으면 우리는 모두(종교를 믿든 안 믿든) 하느님께로 갑니다. 모든 종교가 향하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 계시 60장(계시 前서)과 경고와 계시 後서와 요한 계시록 풀이는 한날 한시에 계시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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