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맑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꺼낸 쪽은
채연이다.
그러나 경림으로부터는
어떠한 대답도 들을 수 없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네요?”
“네.”
경림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채연은 계속해서 말을 건넨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하다.
당황한 쪽은 오히려 경림인 듯
짧게 대답하고는 그대로
그녀들의 옆을 지나쳐 나간다.
엘리베이터는 오층에 머문 그대로.
따라서 순식간에 경림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안녕하세요?”
“아...어서 오세요.”
경림의 행동이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았던 모양.
내게도 그 미소 그대로 유지한 채
인사를 한다.
볼륨녀와 수정이 뒤따라 들어온다.
언제나 그렇듯이 볼륨녀는 말이 없다.
무표정한 얼굴도 그대로며.
무언가 어색한 쪽은 수정이다.
그녀가 말이 많았다거나
쾌활한 모습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나
지금까지 보여준 무표정과는 조금 다르다.
웬지 모를 어둠이 얼굴에 그득하다.
고작 며칠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느껴지는 어색함은 아니다.
“정액 세 자리...어? 뭐예요 그건?”
“네? 뭐가요?”
여전히 밝은 쪽은 채연뿐.
활달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온다.
“마스크는 왜 썼어요? 감기 걸렸어요?”
“아...그게...네.”
“그냥 한번 써보고 싶어서요.”
라고
채연에게도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면 그건 미친놈이다.
경림이 나를 미친놈으로 보는 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래선 안된다.
특히 이 여자들에게는 더더욱.
“벗어 보 ㅏ 요”
“네?”
“마스크 한 번만 벗어보 ㅏ 요”
“아...왜 왜요?”
별안간 황당한 요구를 해 온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어제 그 사건을 옆에서 지켜봤으니.
마스크 속의 모습은 어느 정도 짐작은 할 터.
조카 괴물일 거라는 생각은 못하겠지만.
그나저나
“벗어보 ㅏ요”는 어감이 좀 그렇다.
“정액 싸요.” 만큼이나.
......
그건 아닌가;
“아 안돼요.”
“왜요?”
“감기...심해요...오 옮아요.”
“일초만 벗으면 되잖아요.”
“일초만에 옮아요.”
“......”
이 얼굴을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원래 어디 가서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는 얼굴도 아닌데다
더욱이 지금 모습은
아직 인간이 진화하기 이전의 모습인데.
“안 옮아요. 뽀뽀 안할테니까 벗어보 ㅏ요”
“아 아니...;”
뽀뽀해도 되는데...
아니 * 그게 아니라;
이 여자도 굉장히 집요한 성격이란 걸
깜빡하고 있었다.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줄 것 같지 않다.
남에게 이겨본 기억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말 것임이 예상된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마스크에 손을 갖다 댄다.
“풉”
“킥...”
“...흑.”
“......”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내려는 노력들이 가상하다.
내 꼴이 이렇게 된 게 그렇게 우습냐.
“푸하하하하핫.”
“아하핫.”
“......”
결국 채연이 참지 못하고
먼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곧이어 수정도 웃음을 뱉어 낸다.
볼륨녀만이 여전히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불과 몇십 초 전까지만 해도
수정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역시
여자들은 웃는 모습이 제일 예쁘다.
특히나 귀여운 그녀에게는
어둠은 어울리지 않는다.
웃어줘서 조카 감사합니다 *.
“아하하, 미안해요. 아 아파요? 큭큭.”
“안 아파요.”
“풉, 정액 세 자리...쿡쿡...주세요.”
“네.”
만원짜리 두 장을 건네주기에
다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오천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내민다.
놀라운 것은 수정의 표정이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밝게 웃더니
순식간에 다시 어둠이 밀ㄹ ㅕ와있다.
역시나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그머니 마스크를 벗어 본다.
“아하핫.”
“......”
신기하게도
마스크를 벗으면 웃고
다시 착용하는 순간 어둠이 드리워진다.
이거 뭐 이런 경우가;
그 사이에
볼륨녀는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듯하다.
애초에 크게 웃은 적도 없긴 하지만.
거스름돈을 돌려주자
곧바로 몸을 돌려 자리로 향한다.
그리고 수정이 그 뒤를 따른다.
내쪽에서 완전히 몸을 돌리는 순간
둘 다 몸이 진동하는 것이 보인다.
저런 동작은
웃고 있거나 울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인데
울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대놓고 웃기가 미안하기는 한가 보군;
“약 안 발랐어요?”
“발랐는데...”
채연은
그녀들과 함께 이동하지 않고
여전히 카운터 앞에 선 채로 묻는다.
“근데 더 심해졌네?”
“아...그러게요.”
“언제 발랐는데요?”
“새벽에...”
“......”
아차,
그러고보니
약을 바르고 자라는 경고를 했었구나.
너무 피곤했던 탓에 씻지도 않고 자버렸는데
그 대가를 치르는 건가.
“약 바르고 자랬잖아요.”
“아...깜박...”
“이래서 어제까지 다 낫겠어요?”
“네? 어제요?”
“다음주 어제요.”
“아...네...”
그녀의 충고를 무시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고.
그러나
그녀의 잔소리는 밉지 않다.
마치 가족에게 듣는 잔소리처럼
따스한 정감이 느껴진다.
“다 안 나아도 그날은 술 마셔야 돼요.”
“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술이었던가?
오늘 밤도 이렇게 흐른다.
단지 오늘은 여느 때보다 조금 바쁘다.
토요일이니까...
라고 생각하기에도
다른 주말보다 손님이 북적인다.
신기한 것은
그런 와중에도
그녀들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는 것.
학생들이 채 나가지 않은 이른 시간에
그녀들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곰곰이 되짚어 보면
꼭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만은 없다.
우선 그녀들이 항상 앉는 자리는
우리 가게 컴퓨터들 중
가장 사양이 딸리는 컴퓨터들이 모인 자리.
그리고 학생들이 즐겨하는
넥슨게임들이 깔려있지 않은 자리라는 것.
물론 카트라이더는 예외.
뭐 그런 이유로
다른 자리에 손님이 가득 차지 않은 이상
일부러 그곳을 골라 앉는 손님이 극히 드물다.
그녀들의 경우는 컴맹인데다
특별히 게임을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항상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듯.
손님이 많았던 탓에
오늘 밤은 유난히 빨리 지나간다.
바쁘게 가게 안을 뛰어다니다 보니
시간은 벌써 새벽 두시.
꽤나 많은 손님들을 내보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가게 안은 북적인다.
그로부터 두 시간이 더 지나서야
게임 효과음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때까지 그녀들을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오늘은 무엇을 하고 놀았을까.
그제서야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그녀들이 앉은 곳을 바라보니
채연과 수정만 자리에 앉아 있다.
볼륨녀는 잠시 어딘가 -아마도 딸기- 를 갔거나
화장실이라도 간 듯.
두 여자는 조용히 모니터만 쳐다보며
때때로 마우스클릭질을 해줄 뿐이다.
오늘 카트라이더를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행히도
네 시 이후에도 형님들은 오시지 않는다.
아마 그쪽도 꽤나 바쁠 듯.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아니,
일요일인가.
오랜만의 여유를 즐기며
티비를 켠다.
이 시간에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은
스타크래프트 중계밖에 없다.
한때는 나도
길드도 들고 마스터랑 일대일 깔 정도로
실력이 있었는데.
군대를 가면서
스타는 잊은 지 오래.
아직도 인기있는 것을 보니 꽤나 신기하다.
유닛들의 현란한 움직임에
한참 정신이 팔려 있을 즈음
조용히 문이 열리며 볼륨녀가 들어온다.
아래층에 다녀온 것이 맞는 듯.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머리를 살짝 숙여 목례를 한다.
다른 여자들과도 아주 친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볼륨녀와는 아직도 많이 어색한 사이.
제대로 대화해본 적도 거의 없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조용한 성격인 듯.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말재주가 없어 말을 못하는 거고
그녀는 그냥 말을 아낀다는 느낌.
볼륨녀가 자리로 돌아가자
수정이 일어난다.
핸드폰을 확인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그냥 화장실에 가려는 건가?
조용히 일어선 그녀는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나가려는 것이 맞구나.
벌써부터 자리를 정리하는 것을 봐선
지금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모양.
“띵동.”
그녀가 컴퓨터를 종료시키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는 낌새에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돌려보니
어라,
저새끼?
제동인가 뭔가하는 그 새끼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
뭐야,
또 때리러 왔나;
다행히도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은 모양.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다.
언제 또 주먹이 날아올지 모르므로.
녀석이 모르게
조용히 주먹을 움켜쥔다.
내 비록 싸움은 못하지만
오늘은 참지 않겠다.
너 때문에 피났다 십새야.
녀석은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그대로 출입문 앞에 서서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고 있지 않다.
다만
어제와 같이 내쪽을 쳐다보기만 할 뿐.
저러다가 또 빈대떡을 만들려나?
무언가 한껏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내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선다.
또 때리지는 않겠지? 또 때리지는 않겠지?
속으로 무진장 긴장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별안간
조그만 그림자 하나가 시야를 가린다.
수정이 카운터 앞에 선다.
“......”
“......”
바로 문을 열지 않고
카운터 앞에 선 걸로 봐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
그러나 제동과 마찬가지로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다.
“벗어보 ㅏ요”
“헉; 네?”
“마스크 한 번만 더 벗어보 ㅏ요”
“아...왜 왜요?”
갑자기 그러면 어떡하냐.
깜짝 놀랐잖아;
이거 은근슬쩍 굉장히 야한 말이구나.
“한 번 보게요. 잠깐만 벗어보 ㅏ요”
“우 웃을 거잖아요.”
“안 웃을게요.”
다시 말하지만
나는 승부근성이 없다.
따라서 고집에 센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더욱 약해질 때는 바로
귀엽거나 예쁜 여자와 승부할 때.
이미 한 번 보여준 뒤이므로
또 다시 보여줘도
그다지 쪽팔리지는 않겠다 싶어
조용히 마스크를 벗는다.
“푸힛.”
“......”
안 웃는다며 *;
살짝 기분이 상했다.
조용히 마스크를 다시 착용한다.
“왜 그래요?”
“네?”
“왜 그렇게 다쳤어요?”
저 새끼가 때려서요.
[출처] [펌]안마시술소 여자들 22.벗어보 ㅏ 요|작성자 극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