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단원 김홍도에 대해서 공부하던 중에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김홍도는 풍속화를 그린 조선의 후기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의 영광스러웠던 삶의 이면에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서민들의 삶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김홍도가 도화서의 화원이었고 당시 왕이었던 정조에게 총애를 받았던 사실은 모 방송국 드라마를 통해 많은 분들이 이미 잘 알고 있으실 거예요. 정조는 학문뿐만 아니라 그림을 지극히 애호하였던 왕인데요, 선대왕인 영조시대에 임시로 운영되었던 제도인 자비대령화원제도를 상설기구로 만들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조선시대의 화원제도를 살펴봐야 합니다.
조선시대 화원은 하위 기술직 관료로서 관직 체계상 예조의 도화서에 소속되었습니다. 도화서의 최고 책임자인 제조는 예조판서가 겸하는 등 운영은 전적으로 예조의 문신관료가 관장하는 시스템이었어요. 또한 도화서의 관아도 대궐 밖의 태평방(현 을지로 입구 수하동 일대 옛 청계초등학교 자리의 코리아헤럴드 외국어학원 부근)에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국왕은 승정원과 예조의 문신 관료들을 통해서 궁중 밖의 화원들을 부려야 했고, 국왕과 화원사이에는 그만큼 적지 않은 간극과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후기 숙종이 인현왕후의 영정을 그리려고 시도했다가 관료들의 반대로 포기해야 했던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궐 밖에 있고 문신 관료의 통제를 받는 도화서를 정조는 1783년 자비대령화원들을 왕 직속의 규장각에 편입시켜 궁궐내로 들이고 직접 관리하게 됩니다.
정조의 그림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림을 단순한 취미가 아닌 국가의 통치 도구로 활용하려 했다는 정황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는 정조 생존기간에는 일정 기간마다 시험을 치러야 하는 자비령대비화원에 속하지 않은 상태로 정조의 최 측근으로서 일했었습니다. 일종의 특별 채용이었던 것이지요.
궁중화원제도를 정착시킨 정조는 자신의 회화관을 화원들의 창작 활동에 적극적으로 반영토록 합니다. 사실적 묘사를 추구했던 미의식을 가졌던 정조는 화원 기예 시험을 봐서 옅은 먹으로 휘갈기고 번지게 하여 그리는 화원을 가려서 쫓아내라고까지 명하기도 합니다.이 궁중화원 제도를 통해 정조는 대신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화원을 선발 관리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자신의 입맛에 맞는 그림들을 제작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현재의 시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겠습니다. 코드가 맞지 않으면 아래 사람을 마구 내치는 경우 없는 상사가 떠오르기도 하는 군요.
그런데 정조대왕의 이러한 예술 창작활동에 대한 ‘간섭’을 무지한 행위로 치부해 버릴 수 만은 없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국가 기관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측면 뿐만 아니라 그의 미의식은 시대를 이끌기에 충분히 선진적이었으니까요. 정조는 화원들이 보는 시험 중에는 중국의 시문에서 뽑은 짧은 문구로 화제를 내는 것 외에도 조선의 당대 현실을 그린 ‘속화’를 냅니다. 이것을 우리는 ‘풍속화’로 알고 있는데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는 정조의 후원 없이는 탄생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정조의 취향이 반영된 그림은 비단 풍속화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김홍도로 하여금 조선 화단에 새로운 경향을 불어 넣게 될 금강산도를 제작하게 합니다. 정선이래로 이렇다 할 진경산수화 화가가 나오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정선보다 사실성을 극대화한 진경산수화를 선보였습니다. 금강산의 같은 장면을 그린 아래 두 폭의 작품 보시면 두 화가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선이 문인화가로서 감상자가 실제 경물을 볼 때의 감흥을 느낄 수 있도록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면, 김홍도는 훨씬 원거리에서 세필로 마치 사진처럼 정확하게 묘사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정선 <옹천>
김홍도 <옹천>
그런데 김홍도의 다른 금강산도 작품을 살펴보면 전혀 다른 화풍으로 그려진 것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해산첩>>이 궁중화풍으로서 세밀한 묘사가 특징인 원체풍으로 그려져 있고, <<을묘년화첩>>은 ‘닮게 그리기’보다는 신(자연의 근원적 본체이며 생명의 본질)을 그림의 요체로 보고 생략과 강조를 어느 정도 용인하는 문인화풍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김홍도 <총석정>, <<을묘년화첩>>
김홍도, <총석정>,<<해산첩>>
한 화가의 그림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화풍에 극명한 대비가 보이는 대요, 두 작품의 제작 배경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갈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아래 그림은 정조의 어명으로 김홍도의 나이 44세때 관동지방과 금강산을 유람하고서 그린 그림입니다. 반면에 위의 <<을묘년화첩>>의 <총석정>은 당대 한양의 첫째가는 거부이자 역관이었던 김한태에게 준 그림입니다. 즉 화원화가가 아닌 개인적으로 그린 그림이었던 것이지요.
단원은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화가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문인화가로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단원은 40세 이후에 안기찰방과 연풍현감의 두 차례 지방관을 역임하고 많은 사대부들과 교유하면서 내적으로 사대부적 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사용하는 단원이라는 호도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로서 중인인 김홍도의 내적인 의식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단원은 일터에서는 직업화가 화풍의 그림을 그리고 일터를 벗어나서는 자신이 지향하는 문인화풍의 산수화를 그렸던 것입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현감으로 관료생활까지 경험했던 김홍도였지만 정조 사후에는 힘든 말년을 보내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김홍도는 6개월 동안의 녹봉이 보장되는 자비대령화원으로 녹취재라는 그림 시험에 응시해서 어린 화원들과 경쟁해 훨씬 낮은 점수를 받는 수모를 겪기도 합니다.
천재 화가가 상사(정조)의 취향에 맞추어 자신의 그림에 변화를 주어왔고 상사가 바뀌자 끈이 떨어져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정황은 우리네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 예요. 연말 조직개편으로 뒤숭숭한 맘으로 출근해서 오늘도 상사님의 취향에 따라 보고서를 이리저리 고치며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 직딩님들께 심심한 위로와 함께 윗글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