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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정치와 긴급조치9호

친일반민족... |2013.01.04 00:22
조회 184 |추천 0

1. 긴급조치9호의 시대

 

1970년대 후반은 이른바 긴급조치 9호 시대였다. 한국현대사에서 ‘민주주의의 암흑기’로 기록되는 이 시기는 1975년의 베트남 패망과 함께 시작되어, 박정희가 피살되는 1979년 10월 26일에 막을 내렸다.

 

1975년 2월 12일의 국민투표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투표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 투표의 결과가 반유신운동에 쇄기를 박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가, 반유신운동은 더욱 고양되어가기만 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1975년 4월 9일 인민혁명당 관련자들을 전격적으로 사형에 처하는 극단적인 대응을 보였다. 하지만 4월 11일에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이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할복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대학가의 반유신운동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바로 그 무렵 4월 17일에 캄보디아가 공산화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4월 30일에는 베트남의 즈엉반민[楊文明] 남부 정권이 패망했다는 소식이 날라왔다. 베트남 즈엉반민 정권의 패망 소식은 곧이어 ‘북괴 남침 규탄대회’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시국 상황에 대한 위기를 느끼던 박정희 정권은 반공의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전국적으로 반공 궐기대회와 규탄대회를 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로써 이른바 ‘긴급조치 시대’라고 불리는 1970년대 후반의 유신독재정치 말기가 시작된 것이다.

 

원래 긴급조치9호는 긴급한 시기에만 적용해야 하는 권한이었지만, 1975년부터 박정희 행정부가 붕괴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긴급조치9호는 유신헌법(維新憲法)에 대한 부정·반대·왜곡·바벙·개정 및 폐기 주장·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 자체까지 일체 금지시켰다. 또한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내용을 포함해, 그동안 선포되었던 긴급조치법을 종합적으로 보완한 것이었다. 이는 곧 유신독재체제의 영구화를 기도하는 제도적인 장치였다.

 

이 법은 1979년 12월 7일에 철폐될 때까지 4년여 동안 8백여명의 구속자를 낳았다. ‘전국토의 감옥화’, ‘전국민의 죄수화’라는 유행어를 낳을 정도로 극단적인 조치였다. 그런 점에서 긴급조치9호 시대는 ‘극단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체제·헌법·대통령·국가·정부 등에 대한 정치적 논의를 원천적으로 금지했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가진 일체의 유연성을 박탈한다는 의미였다.

 

우선 박정희 정권은 저항세력의 주력인 학생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학생회를 없애고 4·19민중혁명 이후에 폐지되었던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을 부활시켜 학원을 군대식으로 재조직화하려고 햇다. 1975년 5월 21일의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9월 21일의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9월 2일에 중앙학도호국단이 출범했다. 학도호국단의 편제는 정확히 학원을 사단 편제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1971년에 박정희 정권이 도입한 교련을 의무적으로 이수하는 수준을 넘어서, 학생회 자체를 군대식 편제로 개편했다.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1년에 1주일씩 경주에 있는 화랑수련원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았는데, 일정 속에 매일 한두 시간씩 대통령 박정희의 어록을 들으면서 명상하는 시간이 있을 정도였다.

 

7월 9일에는 좀 더 확실한 통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이른바 4대전시입법(四代戰時入法)을 통과시켰다. 사회안전법(社會安全法)·민방위법(民防衛法)·방위세법(防衛稅)·교육관계법(敎育關係法) 개정안 등이었다.

 

사회안전법은 형식상 일반 형사범을 포괄하면서 반사회적인 재범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한다는 취지를 갖고 있었으나, 대체로 저항운동가와 반공법(反共法) 위반자를 격리시키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민방위법은 17세~50세까지 예비군 훈련을 마친 성인 남성에게 정기적으로 준군사적인 민방위대를 조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교육관계법 개정안은 교수 재임용제의 신설을 담은 것으로, 체제에 비판적인 교수의 재임용을 차단하는 것이 목표얐다. 대학 교수 재임용제는 1976년 2월 28일에 처음 실시되엇는데, 그 당시 전체 교수의 4.7%인 460명이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학원에 대한 감시도 엄청나게 강화되었다. 백골단(白骨團)이라고 불렸던 사복형사·전투경찰·경찰기동대·중앙정보부 기관요원들이 대학 내에 상주하면서, 심지어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학생 수까지 경비일보(警備日報)에 작성해서 치안당국에 보고할 정도였다. 또 학교 직원 중 일부를 정보기관의 망원(網員) 즉, 정보수집책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유신체제에서 최대의 시위 영역이었던 대학에 대한 현장감시를 강화함으로써 대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을 사전에 막으려고 한 것이다.

 

그 무렵에는 시위가 발생한 지 5분이면 경찰대가 달려왔기 때문에, 시위를 주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는 것 자체도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경찰대가 학생들의 시위를 알아채고 쫓아오는 시간을 벌기 위해, 도서관 난간 등 매우 위험한 장소를 골라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를 주도할 때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생겨서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사망하기도 했다.

 

긴급조치의 처벌 대상은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우발적인 언행을 하는 경우도 해당되었다. 술을 마시다가 무심코 내뱉은 체제 비판적인 이야기가 빌미가 되어 일반인들이 구속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이른바 ‘막걸리 긴급조치’ 또는 ‘막걸리 반공법’이라고 표현된 사례들이다. 1968년 무렵 파출소에 연행된 한 사람이 “선량한 국민을 왜 못살게 구느냐? 공화당이 공산당보다 못하다”라고 말했다가 ‘찬양고무죄’로 2년형을 선고받았고, 1970년에는 어떤 시민이 철거반원에게 “김일성보다 못한 놈들아!”라고 소리쳤다가 구속되기도 햇다. 1970년대 후반에는 한국방송의 한 엔지니어가 술에 취한 채 귀가하다가 택시 안에서 객기로 한 말을 택시 운전수가 신고하는 바람에 반공법으로 조사를 받고 직장에서 쫓겨난 일도 벌어졌다.

 

박정희는 1976년 5월 31일에 전국에서 일제히 반상회를 열도록 했다. 일제강점기의 국민반(國民班)을 본뜬 것이었다. 반상회는 주민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마을의 공동 문제를 토론하고 나아가 근황도 이야기하면서 친목을 도모하는 공동체적 모임이라기보다는, 한달에 한번씩 반별로 주민이 모여서 정부가 시달하는 사항을 듣고 또 수상한 사항이 있으면 신고도 하는 ‘위로부터의 동원과 감시를 위한 행정 모임’이었다. 그 모임에서는 주로 국민행동지침을 전달받고, 간첩이나 수상한 사람을 신고하는 요령을 배우며, 유언비어를 들었을 때 의무적으로 신고하는 자세들을 상기시켰다. 국가가 어떻게 사회를 통제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긴급조치9호 시대의 반상회였다.

 

이 시기에 군인 출신이 좀 더 본격적으로 중요한 행정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가 만들어졌다. 5·16쿠데타 이후 군인 출신 인사들이 국가기구의 최상층에 포진하던 것과는 별개로, 이제는 국가기구의 중간관리자 계층까지 광범위하게 진출하게 된 것이다. 1976년 3월 26일에는 박정희의 지시로 사관학교 출신 장교가 소정의 특채 시험을 거쳐 국가공무원 사무관으로 임용되는 제도를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이른바 유신사무관(維新事務官)이었다. 1977년~1987년 사이에 총 784명의 사무관이 특채로 뽑혀 국가행정기구의 중간관리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유신헌법이 생긴 뒤부터 언론 통제는 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긴급조치9호는 정부에 대한 언론과 의회의 비판적인 기능을 원천적으로 박탈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차적인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이 정부를 비판하는 보도에 대해서 곧바로 ‘실정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었다. 보도 지침을 내리고 중앙정보부 요원이 상주하는 일 따위는 이제 기본적인 조건이 되어 있었다. 1975년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방송정화 실천요강을 제정해서 통보했다. 금지사항으로 제시된 것은 ① 국론 분열 및 공공질서를 문란케 하는 내용 ② 민족 주체성을 저해하는 내용 ③ 경제 질서를 해치거나 노사분규를 조장하는 내용 ④ 불건전한 남녀관계를 묘사하거나 미풍양속을 해치는 퇴폐풍조를 조장하는 내용 ⑤ 과다한 장발 노출 등 저속감을 주는 내용 등이었다.

 

이에 따라 언론사주와 정권의 유착관계가 더욱 확대되었고, 독재정권에 자발적으로 유착하는 친정부적인 언론인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정권의 외적 통제를 받아들인 언론들이 기득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신문시장이 확대되면서 발행부수도 늘어났기 때문에 신문사 간의 경쟁이 매우 심했다. 그 무렵부터 언론사들은 ‘독재’라는 당시의 핵심적인 정치 쟁점에 주목하기보다는 부수확장과 신문사 간의 상업적 경쟁에 중점을 두고서 보도와 경영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2. 권력 엘리트의 도덕적 균열

 

긴급조치 아래에서 권력 엘리트들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면서 지도자 숭배의 문화는 더 강해졌다. ‘제왕’적 지도자에 대한 절대복종과 숭배를 우선시하는 문화가 고착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 후반에 공권력이 보여준 광신의 모습을 보면, 체제의 심복들에게 박정희는 거의 ‘교주’나 마찬가지였다.

 

1974년의 박정희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박종규 대신에 차지철이 경호실장에 임명되었다. 차지철은 박종규가 해오던 경호 방식을 더욱 보강해서 보위(保衛) 차원으로 경호 행위를 끌어올렸다. 이것은 대통령에 대한 경호가 그 어떤 국가적 절차보다 상위에 위치한다는 것을 뜻했다. 또한 그에 따라 경호를 책임진 경호실의 힘도 더 커지고, 그것을 향유하고 남용하는 현상이 동반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차지철은 경호실 차장 밑에 행정차장보와 작전차장보를 만들어서 현역 장성을 앉혔다. 경호실 자체가 엄청나게 격상된 것이었다. 또한 청와대 내외를 경호하던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과 제33경비단도 대대급에서 연대급으로 강화시켰다. 심지어는 ‘경호 목적상 필요한 경우에는 수도경비사령부를 지휘할 수도 있다’라고 명문화하기까지 했다.

 

중앙정보부의 역할은 정치 공작 및 대통령에게 제공되는 중요한 정보를 획득하고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위 경호’라는 이름을 내걸자 이제는 경호실이 모든 정보의 일차적인 검색자가 되었고, 심지어 중앙정보부장까지도 경호실장의 통솔과 규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부터 경호실과 중앙정보부 사이에 서서히 갈등이 쌓였고, 결국 그것이 1979년에 벌어지는 박정희 피살 사건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문제는 당시의 권력 엘리트들이 상호 간에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박정희가 제왕적 존재가 되자, 권력 엘리트 간에는 도덕적 결속보다 ‘마피아’적 결속이 더 중요해졌다. 한번은 박정희가 휴가 중 진해에 있는 해군 함정 위에서 장관에게 철봉을 가리키며 턱걸이를 하라고 시키고, 수석비서관에게는 물구나무를 시킨 일이 있었다. 명색이 장관과 수석비서관인 고위관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턱걸이를 하고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모습은, 바로 권력 엘리트들 간의 결집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이를 옆에서 지켜본 언론인 손광식은 “암흑가의 단면을 보는 듯했다”라고 전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비공식적으로 거둔 엄청난 정치자금은 이런 마피아적 결속을 강화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마치 제왕적 군주가 호의를 베풀듯이, 권력 엘리트들에게 하사금을 내렸다.

 

경호실을 비롯한 박정희의 측근 기구들은 그의 엽색 행각을 지원하는 역할도 했다. 의전실은 그 대표적인 창구엿다. 정권 말기에 박정희가 보여준 비상식적인 행동들은 1974년 육영수 피살 이후에 ‘광기처럼’ 나타났다는 증언도 있다. 하지만 1970년대 말기에 와서는 그의 엽색 행각이 국민들 사이에 가십으로 회자될 정도였다. 권력층의 엽색 행각은 박정희 피살 사건의 현장에서도 드러났다. 술판에서 한 여대생이 시중을 들고 한쪽에서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당시의 관행적인 풍경이었다. 박정희 피살 수사 과정에서 박정희와 관련된 여자관계가 너무 복잡하고 방대해서 수사를 중단했을 정도였다.

 

초기의 혁명적 기풍이 퇴색되면서, 정권의 고위층에서는 요정 문화가 퍼졌다. 고위층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요정에 모여서 논의를 하면서 문란한 성 접대를 받는 일은 그야말로 다반사였다. 1970년대 초반에 불거진 정인숙 총살 사건은 고위층에게 일반화된 문란한 성문화의 단면이 노출된 것이었다. 도를 넘는 이런 행태들이 결국 정권 말기에 내부의 균열을 생기게 한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정권의 붕괴 조짐은 단순히 반유신저항운동으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즉, 권력 엘리트 내부의 도덕적 결속 약화, 몰이성적 행태, 권력 중독적인 현상 등이 정권 자체를 내부로부터 균열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 것이다.

 

긴급조치 아래에서 박정희 정권의 폭력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은 장준하 타살 의혹 사건이었다. 장준하(張俊河)는 1975년 8월 17일에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약사봉에 등산을 하다가 의문의 추락사를 당했다. 유신헌법 철폐 시국성명을 발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장준하가 갑자기 산봉우리에 추락해서 죽은 것이엇다. 장준하의 시신을 직접 메고 내려온 백기완(白基琓)은 공업용 기구에 찍힌 것 같은 후두부 함몰상과 시신 검안 때 발견된 두 군데의 주사자국을 결정적인 의문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문을 하러온 많은 민주화 인사들도 타살의 의혹을 느끼긴 햇지만 감히 발설하지는 못했다.『동아일보』기자 성락오가 “장준하 사인에 의문 있다”라고 보도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협박받았다.『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기자 로이 황 역시「야당 지도자의 괴사」라는 기사를 쓰고서 추방 명령을 받았다.

 

이 사건은 그 이후 30년이 넘게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다루어지면서 유족과 사회단체들에 의해 그 진상규명 요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2002년에 대통령 직속 제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 불능’ 판정을 내렸고, 2004년 6월 15일 제2기 진상규명위원회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사망원인이 추락사가 아닐 가능성이 제기되기는 했지만 국가정보원의 자료협조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박정희 독재시대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3. 경제적 집중과 중복투자의 한계

 

긴급조치9호 시대는 한편으로 일정한 경제적 성과가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면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것이 효과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뉴스위크』는 1977년 6월에「한국인이 몰려온다」라는 표지 기사를 싣기도 했다. 유신독재의 명분이기도 했던 100억 달러의 수출 목표 달성을 1980년으로 잡았던 박정희 정권은 1977년에 그 목표를 조기에 달성했다. 12월 22일에는 각계 인사 7천여명이 참석한 ‘수출의 날’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1인당 GNP는 1975년에 594불, 1976년에 802불, 그리고 1977년에는 마침내 1011불이 되었다. 1000불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계획의 성공적 추진에는 그때그때 구세주 같은 계기들이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철혈 통치체제로 치달아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 특수에 이은 ‘중동 특수’가 그 시기에 생겼다. 1973년 6월에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카이바·알울라 간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한 것을 비롯해서 토목·건축 분야를 중심으로 중동 진출이 시작되었다. 특히 현대건설의 중동 진출은 괄목할 만했다. 현대건설은 1975년에 바레인의 아랍수리조선소 건설 수주를 시작으로, 1976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9억 3만달러에 수주하는 개가를 올렷다. 현대건설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중동에서 51억 달러가 넘는 외화를 벌어들였는데, 현대의 총매출 이익누계에서 해외건설이 60%를 차지햇다.

 

또한 국가적 지원 속에서 중동 건설의 총 수주액은 1974년의 8900만 달러에서 1975년에는 7억 5100만 달러로 급격히 증가했고, 19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는 1975년에는 전체 건설 수출액의 93%, 1977년애는 96%를 차지하는 규모였다. 1975년~1979년 사이에 중동 건설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 수입은 총 205억 700만 달러였는데, 이는 총 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삼아 그동안 외화 보유에 어려움을 겪던 한국경제는 상당한 힘이 생기게 되었다.

 

정부는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동시에, 수출 증대를 위해 1975년에 종합무역상사 제도를 도입했다. 종합무역상사는 말 그대로 종합적으로 무역업을 하는 회사로, 국내 제품을 외국에 수출하고 반대로 외국 제품을 수입하는 포괄적인 회사였다. 일반적으로 대기업 차원에서 무역업을 전담한 종합무역상사는 1970년대 말에 재벌그룹이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대기업에게 있어 종합상사 제도는 1960년대와는 또 다른, 새로운 수출 금융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계기였다. 일단 종합상사로 인정을 받게 되면 수출 금융 혜택을 비롯한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었고, 시중 금리의 1/2에 불과한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한국의 재벌들은 종합상사 제도를 이용해서 점차 복합적 기업으로 성장해나갔다.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는 결과적으로 보면 1980년대 중·후반 이후에 ‘효자 노릇’을 했지만, 1970년대 말에는 두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경제가 대기업 중심으로 집중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과잉투자 혹은 중복투자 문제였다.

 

1970년대 말기가 되었을 때, 이미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재벌의 비중은 매우 높았다. 국내총생산에 대한 46대 재벌의 비중이 1973년에는 9.8%였으나 1978년에는 17.1%로 증가했다. 특히 상위 5대 재벌의 성장률이 30.1%에 이르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규모가 큰 재벌일수록 1970년대를 거치면서 하위 기업과 큰 격차를 벌리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중화학공업화는 경제적 집중을 불가피하게 수반했다.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은 대규모 자본이 드는 만큼 이에 참여하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이 뚜렷하게 나뉘었다. 처음에는 중화학공헙화의 참여에 대기업이 소극적이었다. 거대한 자본이 드는 만큼 실패할 경우에는 기업의 운명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1960년대의 수출기업에 버금가는 각종 세제와 대출혜택 등의 유인 정책을 통해 중화학공업을 지원했던 것이다.

 

이처럼 위험 부담을 줄여주고 그에 따른 재정·금융·세제상의 대규모 특혜를 지원해주자, 6대 전략 산업에 대기업이 앞 다투어 진출하게 되었다. 큰 규모의 설비와 투자가 요구되는 중화학공업은 결국 대기업 중심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단 중화학공업 영역에 진출한 대기업은 그때부터 하위 기업과 엄청난 격차를 만들면서 재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금알을 낳는 시장을 향해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중화학공업 영역에 진출함으로써, 재벌의 중복 과잉투자가 초래되었다. 중복과잉투자는 일단 중화학공업의 가동률을 현저하게 떨어뜨렸다. 당시에 제조업의 평균가동률이 80%대였던 데 비해, 중화학공업은 겨우 50~60%대에 머물렀다. 게다가 중화학공업 분야의 적자기업 비율이 급기야 40%를 넘게 되었다. 특히 1970년대 말에는 외채가 누적되어 많은 부담을 주었고, 더 이상 수출시장을 개척하기 힘든 한계에 부딪혔다. 거기에 2차 석유위기가 중첩되자 총체적 위기를 맞이했다.

 

오일 쇼크 등으로 국제적 조건이 열악해지고 중화학공업화 자체의 내재적인 어려움으로, 박정희 정권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점차 좁아져갔다. 1979년에 터진 제2차 석유파동과 그것이 국내에 끼친 충격은 가뜩이나 어렵게 꾸려가고 있던 ‘개발동원체제’의 갈등을 더욱 부채질했다. 국민들도 1970년대 후반의 침체 상황 속에서 그동안 박정희 정권이 내걸었던 ‘성장을 통해 모두가 잘 산다’라는 슬로건의 허구성을 점차 체감하게 되었다. 모두가 잘 사는 것은 고사하고, 살기가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1978년 6월에 출간된 조세희의 소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 후반에 가난한 서민들이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었는가를 웅변해주고 있다. 

 

이미 중화학공업화를 투자하는 데 엄청난 돈이 ‘잠겨’ 있었고, 그것이 예상처럼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노동집약적 공업이나 서민경제를 지원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적었다. 오히려 부가가치세가 도입되면서 서민들은 더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고 있었다. 부산 지역의 경우 1979년의 세금은 약 3천 880억원으로, 한 해 전인 1978년보다 무려 32%가 늘어났다. 거기에다 오일 쇼크 등으로 경기 침체가 가속화되면서 경제 위기는 계급·계층 간에 첨예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런 악조건들이 부마민중항쟁(釜馬民衆抗爭)이라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초기 산업화 단계의 리더십이 주로 정치적·사회적 저항을 무릅쓰고 근대화와 개발을 위해 돌진하는 추진력이었다면, 본격적인 산업화 단계의 리더십은 그런 불도저식의 단순 리더십 이상의 복합적인 자질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부 구성원의 불만을 적절히 수용하면서 경제적 성과를 공유하는 경제적 포섭의 리더십, 또는 다양한 계급·계층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는 정치적 조정의 리더십 같은 것이어야 했다.

 

1970년대 말기가 되면서 박정희도 이런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는 1979년 2월에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뒤, 창원공단에 들러 중화학공업의 중복투자의 문제점을 점검했다. 곧이어 4·17경제안정화 시책을 발표했지만, 한 측근에게 토로하기를 “이제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한다.

 

4. 긴급조치9호와 저항운동

 

1975년 베트남이 패망한 뒤부터 전국적인 규모로 안보 궐기대회 등이 이루어졌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반유신저항운동(反維新抵抗運動)은 점차 거세졌다. 1976년 3월 1일에는 3·1민주구국선언사건이 나왔다. 함석헌·정일형·김대중·윤반웅·안병무·이문영·서남동·문동환·이우정 등이 서명한 이 선언은 긴급조치의 철폐, 투옥된 인사와 학생의 석방, 의회정치의 복원, 사법권의 독립 등을 촉구하고 있었다. 물론 이 사건은 긴급조치9호에 의해 당시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서울지검은 이를 ‘정부 전복 선동 사건’이라고 발표하면서, 3월 26일에 김대중·문익환·함세웅·문동환·안병무·문정현 등 11명을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기소했다. 수사 과정에서 몇몇 인사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 사건은 국내에서는 보도조차 되지 않았지만, 해외에서는 서명자의 비중이 워낙 큰 데다 유신체제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재야 인사 성명이었던 만큼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또한 1976년에 연세대에서 벌어진 ‘백지 팸플릿’ 사건은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과 희화화된 탄압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4·19혁명 기념일을 맞아 연세대학에서 백지 성명서가 배부되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을 굳이 글로 쓰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백지로 성명서를 낸 것이다. 정부는 이 사건에 ‘이심전심 유언비어 유포죄’라는 기막힌 이름을 붙여 김철기 등을 구속했다.

 

1977년 3월 1일에는 3·1민주구국선언 1주년을 맞아, 재야 인사 10인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철폐를 주장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후 7월 7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7·7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 성직자들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1977년 5월에 강희남 목사, 7월에 조용술 목사, 8월에 오충일 목사와 청주도시산업선교회의 정진동 목사, 11월에는 고영근 목사 등이 잇달아 구속되었다. 1978년 4월에는 농민집회에서의 발언 내용을 문제 삼아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의 인명진 목사가 구속되었다. 이로 인해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의 서류 및 장부 일체를 압수한 뒤 실무자에게 세금과 벌금을 부과했고, 정치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라벤다 선교사를 추방했다. 12월에는 동일방직 사태에 대해 강연을 했다는 이유로 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의 조화순 목사가 구속되었고, YH 신민당사 농성 사건으로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의 인명진과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문동환·서경석 목사 등이 구속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지식인 운동이 분야별로 조직화되는 경향도 나타났다. 1977년 12월 2일에는 해직교수협의회가 만들어져 민주교육선언이 발표되었고, 12월 29일에는 인권운동협의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이 당시의 인권운동은 독립적이기보다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한 부분으로 전개되었다. 자유주의 인권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인신 구속자의 석방 요구가 인권운동보다는 반독재운동이라는 총체적인 맥락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1978년에 들어서자 학생시위는 점점 더 대규모화되면서 학내투쟁을 넘어서 가두투쟁으로 발전했다. 6월 12일에는 3천여명의 서울대학생들이 박정희 정권 퇴진을 외치며 캠퍼스를 뒤흔들었고, 일부는 대학 주변의 시가지로 진출해 시위를 감행했다. 이 시위는 이전의 시위에 비해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즉 시위대가 국민들이 참여하는 시내 반독재투쟁을 6월 26일에 광화문에서 벌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6월 26일 당일에 이우재·성욱 등의 주모자는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긴급조치 이후 최초로 시내에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시위를 전개하고 여기에 시민이 가세한 대중적인 투쟁이었던 것이다. 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에서 펴낸『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보면, 1977년 이후에 펼쳐진 학생운동의 특징으로 “다양한 전략·전술의 개발, 주의·주장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표현, 시위 양태의 극렬화, 대규모 연합 가두시위”를 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구속자를 비롯해 긴급조치로 불이익을 받는 사람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긴급조치9호 시대에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학생이나 노동자, 재야인사 등을 거의 무차별적으로 구속했다. 또한 1979년 한 해 동안 국가보안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긴급조치 등의 법률 위반으로 구속된 양심수는 무려 1239명에 달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1978년 7월 6일에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임기 6년의 대통령을 뽑았다. 박정희는 2583명의 대의원 가운데 2578명이 참석하여 99.99%에 달하는 2577명의 찬성을 얻어(무효 1표), 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전 기간 중에서 한미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던 시기도 바로 1970년대 후반이었다. ‘코리아게이트’라고도 불리는 박동선 사건은 악화된 한미관계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76년 10월 24일에『워싱턴 포스트』가 “한국 정부의 기관요원 박동선이 1970년대에 연간 50만 내지는 100만 달러 상당의 뇌물로 90여명의 의원과 공직자를 매수했다”라고 폭로함으로써 촉발되었고, 그때부터 2년 동안 미국 의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물론 한국 정부는 당시에 그런 사실을 부정했다. 그런데『워싱턴 포스트』가 코리아게이트의 단서를 잡은 것이 청와대를 도청했기 때문이었다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한미간의 긴장을 야기했다. 폭로 이후에 미국 의회 청문화에서 박동선과 김한조라는 재미사업가가 뉴스의 초점으로 부상했다. 특히 박동선은 한국 정부의 협조 아래 비밀리에 조성된 비자금으로 한국주둔 미국군 철수를 반대하거나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미국 의회의 여론을 약화시키기 위해 다각도로 뇌물을 제공했다.

 

이 시건은 지미 카터가 인권 외교를 내세우며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더 큰 쟁점으로 부상했다. 1977년 2월부터는 한미관계 조사권을 위임받은 프레이저위원회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 카터 행정부는 3월 10일에 한국주둔 미국군 철수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한미간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1976년 11월에는 중앙정보부 워싱턴 실무책임자였던 참사관 김상근이 프레이저위원회에 나가서 증언했다. 김상근은 위원회에서 한 번에 30만달러씩 총 60만달러를 김한조에게 전달했고, 김한조는 그 돈으로 미국 의원을 상대로 로비했다고 진술햇다. 그럼으로써 코리아게이트는 명실공히 국제적 부패 사건으로 깊이 각인되었다.『조선일보』는 ‘미국은 추악한 한국인의 놀이터인가?’라는 사설을 통해, 이 문제를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악덕함, 일부 인사들의 반민족적 행태 등 일부 개인의 문제로 부각시켜 보도했다. 긴급조치의 통제 아래 있었던 다른 신문들도 대체로 비숫한 민족주의적 논조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그러나 코리아게이트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적인 여론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박정희 유신체제의 위기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권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강화되면서, 그것이 한·미 정부 간의 상호관계에 긴장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민중의 역량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미국도 박정희 정권이 국내에서 대중의 저항을 받으면서 점점 더 파시즘 체제로 경직되어가는 것에 대해 이중적 시각을 갖게 되었는데, 이런 미국의 태도 때문에 한미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역으로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반대를 상쇄하기 위해서라도 국내 지지기반을 강화해야만 했다. 결국 이런 정치적 위기감으로 억압의 작위성과 폭력성은 더욱 노정되었고, 반면에 정권의 기반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을 붕괴로 이르게 했던 직접적인 계기는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점거와 이를 문제 삼아서 김영삼 총재를 제명시킨 사건이었다. 1979년 8월 9일에 YH무역 여성노동자 187명은 회사의 위장 폐업에 항의하며 신민당사 4층을 점거한 뒤 농성에 들어갔다. 이틀 후인 8월 11일 경찰은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며 진압 작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신민당원과 국회의원 그리고 취재기자 등이 무수히 폭행당했을뿐만 아니라,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이 옥상에서 추락해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신민당은「말기적 발악:신민당사 피습 사건과 YH사건의 진상」이라는 소책자를 발행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신민당이 비이성적인 태도를 취했다며 매도했고, 동시에 여성노동자들의 배후에 ‘빨갱이도시산업선교회’가 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정부는 YH사건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씌워 문동환·인명진·서경석·이문영·고은 등을 구속했다.

 

YH사건 이후 중앙정보부는 신민당 원외지구당의 위원장 3인을 사주해서, 이전 5월 30일에 열렸던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원과 대의원 자격이 없는 22명이 투표햇으므로 김영삼의 총재 당선은 무효라고 주장하게 만들어 직무정지 가처분 소송을 법원에 제출하게 했다. 그리고 9월 8일 민사지법에서 이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김영삼은 총재직을 박탈당했다. 김영삼은 이에 항의하면서 9월 10일에 ‘박정희 정권 타도를 위한 범국민적 항쟁’을 선언했고, 9월 15일『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미국의 카터 행정부를 향해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의 회견을 사대주의 반국가적 언동으로 규정하면서 의원직 제명 결의안을 낸 다음, 10월 4일에는 경호권을 발동한 가운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항해 10월 13일에는 신민당 소속 의원 66명 전원이 국회의원 사퇴서를 제출했다. 김영삼에 대한 제명은 야당의 공세에 재갈을 물리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역으로 박정희 정권의 붕괴로 가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미국 정부도 ‘개탄’ 성명을 냈고, 카터 대통령이 친서를 전달하면서 경고했을 정도였다. 결국 김영삼 제명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과 미국의 관계는 또 다시 악화되고 말았다.

 

김영삼 제명 사건이 발생한 3일 뒤인 10월 16일, 7만여명의 부산시민이 시청 앞과 광복동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부마민중항쟁(釜馬民衆抗爭)이 시작된 것이었다. 정부는 18일 부산 일대에 계엄을 선포했다. 18일 밤부터는 마산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정부는 20일에 마산·창원에도 위수령을 발동시켰다.

 

부마민중항쟁은 이전의 시위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학생뿐만 아니라 도시 하층민과 도시 자영업자들과 같이 이전에는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던 계급·계층이 합류하고 있었다. 또한 경찰서 11개소에 불을 지르고 경찰 차량 10여대를 파괴하는 등, 당시로는 상당히 전투적인 방식으로 시위가 펼쳐졌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10월 26일에 김재규는 자신이 “유신의 심장”이라고 표현했던 박정희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박정희 장기집권시대는 이렇게 종말을 고한 것이다.

 

10·26암살은 민중의 저항과 권력 엘리트의 분열이 어떤 상관성을 갖고 있는지를 잘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말기에 권력 엘리트 내에서 균열이 생겼고, 급기야는 반독재민주화운동 진영으로 이반해가는 인사들까지 생겨났다. 권력 엘리트들은 확산되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처 방안을 둘러싸고 강경론과 온건론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박정희나 차지철의 강경론이 지배적이었다. 문제는 극단적인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반독재민주화운동이 수그러들지 않고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민중의 저항 일부라도 수용하자는 온건론을 가졌던 김재규가 준비되지 않은 반란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온건론의 주장에 따라 민중의 요구를 반영해 자기를 혁신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는 일이, 정말로 유신체제에서는 불가능했던 것일까? 결과적으로 볼 때, 1970년대 후반의 긴급조치시대는 체제 혁신을 위한 유연성조차 발휘할 수 없을 만큼 모든 조직이 극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특히 유신체제에서는 온건파적 대안이 현실성을 가질 수 없었다. 만일 자유화 조치를 취하게 될 경우 박정희의 진퇴를 포함한 수습방안을 공론화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전제로 하는 유신체제의 본질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정희 장기집권체제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예방적 체제 혁신은 불가능했는가’라는 질문은 그 당시로서는 우문(愚問)이었다. 비록 유신체제가 1979년 초반에 ‘4·17경제안정화시책’ 같은 부분적인 혁신 노력을 했었지만, 이미 체제를 총체적으로 전환시킬 동력과 주체, 그리고 공간이 없었다.

 

5. 노동자와 농민, 저항의 주체가 되다

 

1970년대 후반에서 학생·지식인·재야집단 등을 포함한 저항운동의 계층적 확대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민중시대’의 출현이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공돌이·공순이라는 정체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개발동원체제가 동원하는 산업역군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기화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자신이 떠나온 농촌의 삶과 비교하면서 도시의 생활에 만족하는 순응적 노동자의 시대는 가고,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의식과 권리의식을 가진 저항적 주체의 시대가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저항 진영 내부에서 ‘민중’이라는 개념을 쓰기 시작하면서, 민주화운동 혹은 재야운동도 모두 ‘민중운동’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재야운동이 단지 박정희의 독재정치와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운동만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는 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농민의 주체화는 농민운동을 지원하는 교회가 조직화되면서 발전했다. 카톨릭 농민운동은 1966년에 한국카톨릭농촌청년회에서 시작해, 1972년에는 한국카톨릭농민회로 재발족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976년에는 크리스찬아카데미에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정이 만들어졌다.

 

1976년 11월부터 1978년 5월까지 진행된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 투쟁은 농민운동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농협이 고구마 수매 약속을 어긴 것에 항의하면서 3년간의 투쟁을 통해 보상을 받아낸 대표적 농민 투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농협의 비리가 드러나 농협 간부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 투쟁은 그동안 체제의 절대적인 지지 대중이었던 농민들이 농촌의 피폐화를 직시하면서 저항적 존재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1978년 여름에는 경북 영양군에서 감자 피해보상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 투쟁이 1979년 8월에 ‘오원춘 사건’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이 사건은 영양군의 지시에 따라 심은 감자 씨에서 싹이 트지 않아 손해를 본 농민들이 피해보상 투쟁을 벌이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1년여를 끌다가 마침내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투쟁을 선도하던 카톨릭농민회장 오원춘이 그 당시 기관원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폭로하면서 양심선언을 했는데, 오히려 정부는 이 선언을 발표한 천주교 안동교구의 정호경 신부 등을 허위사실유포로 구속시켜버렸다. 나중에 오원춘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양심선언을 번복했는데, 카톨릭 측에서는 정권의 회유 공작에 의한 번복이라며 항의미사를 거행했다. 이 사건은 카톨릭이 반박정희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한 항의미사에 연인원 30만명으 참여했을 정도로 카톨릭 신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노동자의 주체화 과정은 처절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긴급조치9호 시대는 개별 산업현장의 임금인상 투쟁이나 각종 권리투쟁은 모두 반정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경찰과 중앙정보부 등 공안기관이 즉각적으로 개입해 전면적인 통제를 가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일반 작업장의 임금인상 요구조차 중앙정보부의 지휘를 받는 경찰이 직접 개입할 정도였다. 그러나 공권력의 이런 개입은 오히려 정권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공권력이 임금인상 투쟁을 국가안보 문제로 인식하고 개입했기 때문에, 모든 투쟁이 결국 반국가투쟁과 정치투쟁으로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억압의 국가화’가 ‘투쟁의 국가화’를 낳았던 것이다.

 

동일방직 사건은 긴급조치9호 상황에서 민주노조운동, 특히 여성노동자가 주체로 나선 헌신적 투쟁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또한 노동·정부·공안기관·기업이 맺고 있는 관계를 가장 상징적이고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1977년 7월 25일에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나체 저항’을 했다. 농성하고 있던 노동자들을 끌어내려는 경찰의 진입에 맞서, 여성노동자들이 여성으로서의 수치심도 포기하고 벌거벗은 전라 상태로 경찰차량을 막아섰던 것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들을 진압하고 연행했다.

 

이듬해인 1978년 2월 21일에는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한 경찰·회사·어용노조가 노조 대의원 선거에 들이닥쳐 여성노동자들에게 분뇨를 퍼붓는 믿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새벽 5시 30분경에 여성노동자들이 투표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회사 측에 매수된 남성노동자 4명이 “이 쌍년들아, 똥이나 먹어라! 개 같은 년들!” 하고 욕을 하며 분뇨가 가득 담긴 양동이 3개를 여성노동자들에게 뿌려쟀다. 심지어는 저항하는 여성노동자의 입과 옷 안에 분뇨를 집어넣기도 했고, 머리에 분뇨통을 쏟아붓기도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했던 최종선의 증언에 따르면, 이 ‘분뇨 투척 사건’에는 중앙정보부 2국(보안정보국) 경제과가 직접 개입하면서 일선 경찰과 회사가 결탁해서 자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4월 1일에 124명의 여성노동자가 해직당했고, 이들의 명부가 만들어져 전국의 사업장에 뿌려졌다. 이것이 이른바 ‘블랙리스트’이다.

 

분뇨를 뒤집어쓰고 처연하게 서 있는 여성노동자의 사진은 조국 근대화라는 화려한 외투를 입고 있는 유신독재체제가 체제의 변방에 있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었다. 또한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에 남성구사대가 투입된 데는 중앙정보부의 사주도 있었겠지만, 뿌리 깊은 여성차별주의와 남성우월주의를 이용한 측면도 있었다. 공안기관과 기업이 공모해서 노동자를 탄압했던 사례는 동일방직뿐만 아니라, 원풍모방·방림방적·남영나이론·삼원섬유 등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체제 말기에 정권과 기업에 의해 탄압받고 해고되는 노동자가 많아지면서, 오히려 노동운동은 더욱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유신체제와 긴급조치9호라는 가혹한 상황에서도 노동조합 조직률은 꾸준히 증가했다. 1970년대 초반에 12%대였던 조직률이 후반에 가서는 거의 17%에 달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단순 작업장에서의 노사분규도 긴급조치9호 시기에서는 훨씬 더 전투적인 투쟁양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1976년에 발생한 노사분규가 총 110건이었는데, 이 가운데 작업거부가 45건, 농성이 45건, 시위가 15건으로서 이전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방식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노동자·농민·도시 하층민 등이 저항적 주체가 되면서부터, 그동안 체제에 적극적인 지지층으로 남아 있던 도시 구중간층도 점차 이반하기 시작했다. 개발 후유증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위기가 닥쳐오자, 그들도 성장의 혜택보다 고통을 더 크게 받고 있었던 덧이다. 197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의 지지율이 그전에 비해 큰 폭으로 떨어진 것도(야당의 지지율 32.8%는 여당의 지지율 31.7%를 상회하는 것으로, 이는 1960년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구중간층이나 도시 하층민들이 이반한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개발동원체제에서 소외된 중소자본, 특히 지방 중소자본과 중소도시 하층민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1979년에 부산과 마산 같은 도시에 일어난 부마민중항쟁 역시 그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6. 선도하는 국가, 신세대의 출현

 

1960년대~70년대라는 20년 세월 동안 국가의 주도로 압축적인 개발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적 계급이 분화되었고, 훈육국가로서의 사회상이 제시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기존의 기성세대와 긴장관계를 갖는 새로운 감성세대가 등장했다.

 

먼저 단기간에 이루어진 국가 주도형 개발이 낳은 자본주의적 계급분화를 살펴보자. 개발이 본격화되는 과정 속에 자본주의로의 변화가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압축적 개발의 수혜계층이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새로운 지지기반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자본가 계급을 비롯한 경제적 상층 계급과 신중간층이었다.

 

한국의 경제적 상층 계급은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급속하게 성장한 재벌 등 대자본가 계급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개발에 따른 산업적 축적을 통해 부를 축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동산 투기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1970년대 중·후반에 중동 특수로 들어온 외화와 수출금융과 중화학 지원자금 등으로 시중에 많은 돈이 뿌려져 있었는데, 이것을 아파트 투기에 이용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 복부인 등이 가세하면서 투기 열풍이 일었다. 부동산 투기를 통해, 새로운 상층으로서 졸부(猝富) 집단이 출현하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1970년대 후반에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를 유지하는 기반 가운데 하나인 신중간층이 있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도시 산업 분야의 관리직, 대졸 출신의 사무직 노동자들 등 신중간층이 3.4%였으나, 1975년에는 4.3%, 1980년에는 6.3%로 증가했다.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은 성장의 수혜계층이었던만큼 박정희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다. 대다수의 도시 자영업자로 구성된 구중간층과 달리 이들은 산업화의 직접적 수혜를 받는 입장이었기에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반대로 상층의 투기적 축적에 참여하지 못하고 하락하거나 몰락한 다수의 계급·계층이 존재했고 이들은 점차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로부터 이반해갔다. 지가변동률이 급등했다는 사실 자체가 빈부의 간극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당시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전국의 지가변동률이 1976년에는 26%, 1977년에 34%, 1978년에는 49%였다. 그런데 서울의 1978년 지가변동률은 무려 135.7%를 기록하고 있다. 이 수치는 땅 없는 대다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박탈감을 느꼈을지 잘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 당시는 노동자의 임금도 어느 정도 인상되었지만, 전반적인 생필품 가격이 살인적으로 올라 서민층의 경제적 불만이 증폭되고 있었다.

 

개발의 결과로 모든 국민이 잘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격적으로 계급적 불평등과 분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국민’이 해체되고 계급·계층적으로 분화되는 바로 그 시점에, 어쩌면 그것에 대응하여,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개인과 전체를 동일시하고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국가주의적 통합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국가는 개인이 복무해야 하는 절대적인 존재였고, 국가와 국가지도자를 일체화했으며, 더 나아가 아예 국가지도자와 국민을 일체화시켰다. 특히 한·미 간의 갈등과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1970년대 후반에는 군사적 측면까지 강화되어 군국주의적인 경향마저 띠었다.

 

그러한 군국주의적 훈육국가의 면모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첫째,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기 하강식이 도입되었다. 1976년 10월 4일부터 국기 하강식을 거행하면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애국가 제창 후에 암송하게 했다. 어떤 학자는 이런 모습을 “오후 다섯 시만 되면 3천만 한국 사람이 일시에 태극기를 바라보는 석고상으로 변했다. 한 사람만 빼고. 3천만 국민 전체 차렷! 인류 최대 규모의 행동 통일! 조선(북한)의 10만 집단체조와 1백만 군중대회는 여기 비하면 초보 수준이다. 3천만이 부동자세로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태극기를 우러러보아야 했다”라고 표현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개인과 국가·사회·민족을 동일시하면서 혼연일체가 될 것을 맹세하는 의식이었다.

 

애국심은 영화 관람 같은 여가나 취미를 즐기는 시간에도 강요되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국가시책을 홍보하는〈대한뉴스〉가 방영되었다. 또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하다가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둘째,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양축으로 하는 충효사상이 널리 고무되었고 정책적으로도 강조되었다. 1977년 2월 4일에 문화교육부 연두순시에서 박정희는 충효사상을 교육하라고 지시했다. 박정희의 언급이 곧 칙령이었던 구조에서 이런 지시는 그대로 각급 학교에 강요되었고, 4월에는 ‘충효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도의 교육의 강화 방안’이라는 문건이 모든 학교에 전달되었다.

 

셋째,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는 도덕주의를 표방했다. 물론 모든 독재가 반드시 도덕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도덕적 목표를 국민에게 강요하고 권면하는 주체로서 자신을 표상하고자 했다. 개발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 국민을 선도해온 국가가 경제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삶까지도 선도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도덕주의적 경향은 문화공보부의 방송에 대한 간섭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문화공보부는 국민을 선도하기 위해 저질 코미디 프로그램을 폐지한다는 지침을 세워 각 방송사에 지시하는 한편, 1976년 4월에는 ‘민족사관 정립극’을 만들어 가족시간대에 편성하라는 지시도 내보냈다.

 

넷째, 국사 교육이 크게 강조되었다. 유신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박종홍은 국가주의적 철학을 강조하면서, 국사 교육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는 ‘국적 있는 교육’을 내세우며 국사 교육과 충효 교육을 해야 한다고 박정희에게 조언했다. 그의 조언을 받아들인 박정희는 1976년 7월 21일에 ‘전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조와 계발’을 주창하면서, 이를 위한 기관으로 정신문화연구원의 설립을 지시했다.

 

다섯째, 박근혜가 주도했던 새마음운동도 국가주의적 훈육의 한 상징적 사례였다. 경제적 동원을 넘어 개인의 정신적 통합을 지향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마음’까지 통제하려고 했던 셈이다. 새마을운동이 농촌 경제를 중심으로 변화와 동원을 유도한 것이었다면, 새마음운동은 충과 효의 전통적 미덕을 부활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새마음운동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가부장으로서 박정희의 이미지를 위치시키려는 정신운동이기도 했다.

 

정권 말기에 나타난 흥미로운 현상의 하나로는 외래어 추방 캠페인이라는 것이 있었다. 방송 프로그램, 스포츠 프로그램, 연예인 이름 등을 한글화하도록 국가가 정책적으로 강요했다. 처음에는 문화방송에서 주도적으로 추진하다가 동양방송과 한국방송도 뒤를 따랐다. 1974년 2월 7일에 문화방송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외래어를 추방하겠다고 선포했다. 가요 스테이지는 ‘가요 선물’로, MBC 페스티벌은 ‘MBC 대항전’으로 바뀌었고, 해외 토픽은 ‘해외 소식’으로, 스포츠 자키는 ‘스포츠 얘기’가 되었다. 또한 1976년에는 박정희가 국무회의에서 방송에 자주 나오는 외래어를 한글화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자, 2년여의 검토한 끝에 방송윤리위원회가 1978년 10월에 스포츠 용어의 한글화를 확정했다. 야구에서 번트는 ‘살짝 대기’, 스퀴즈는 ‘짜내기’, 슬라이딩은 ‘미끄럼’으로 고쳐 부르도록 했다.

 

박정희 정권의 한글 전용 정책이나 스포츠 용어의 한글화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복합되어 있었다. 친미적 세계관이 지배적이던 한국에서 ‘전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조와 계발’이라는 시도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여지가 있다. 더 나아가 가능하다면 스포츠 용어와 방송 용어를 한글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다방이 ‘커피숍’으로 불려야 멋있게 보이는 식민주의적 시선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민족주의적 정책이 어떤 의도에서 이루어졌느냐 하는 점이다. 유신시대 말기의 민족문화 강조는 국가주의, 더 나아가 군국주의적 의미로 해석되면서 정치적으로 활용되었다. 민족주의가 국가주의와 군국주의를 등에 업고 제도적으로 강제되었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에 한미관계가 악화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민족주의적 성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것은 단지 그의 내재적 성향이라기보다는 한미 간의 갈등에서 촉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주요한 정치적 기반을 민족(국가) 내부에서 구해야 했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통한 사회구성원의 통합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현안이었던 것이다. 다만 민족의 주체성과 탈미국적 시각이 내부에서 제기되었다는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이런 국가주의의 지향에 불구하고, 기존 질서와 긴장관계를 갖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고 있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감수성을 가진 세대는, 사실상 개발의 과실을 먹고 자라난 세대였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자 젊은 세대를 이끌어가는 대학생이 수적으로 크게 늘어났다. 대학생은 1960년의 10만 6천명 수준에서, 1970년에는 14만 6천명, 1975년에는 20만 4천명, 1980년에 무려 40만 3천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이들 새로운 세대는 일단 일상생활 방식과 문화적 지향에서 이전 세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된 ‘MBC 대학가요제’의 열기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알리는 상징적 사례로 볼 수 있다. 1977년 9월 3일에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대학가요제는 2천여명의 대학생 방청객으로 열기가 뜨거웠다. 가요제를 기획한 방송사는 당시의 반독재 열기 때문에 비난만 받고 호응이 없을까봐 걱정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상외로 반응이 뜨거웠다. 이는 그토록 암울한 긴급조치9호 시대를 살면서도 문화적 감수성에서는 이전과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음을 의미했다. 그 당시 대학가에 그룹사운드가 붐처럼 일어난 현상도 젊은 세대의 새로운 문화적 취향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 아래 박정희 정권은 이 새로운 문화적 감수성을 갖는 세대의 요구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예컨대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단속에서 드러난 체제의 억압적인 모습이, 긴급조치9호 시대에는 훨씬 더 경직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가요 금지곡의 남발이었다. 이는 물론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명분과 결합되어 있었지만, 저항정신을 억압하려는 정치적 이유가 더 컸다. 1975년 한 해 동안 225곡이나 금지곡으로 묶였다. 또한 대마초 단속으로 1975년 12월 3일에 이장희·이종용·윤형주 등 27명이 구속되었고, 6일에는 신중현·김추자·권용남·손학래 등 이른바 ‘신중현 사단’이 대거 구속되었다. 특히 신중현이 만든 수십여 곡은 가요계 정화 조치라는 명목 아래 대부분 금지곡으로 묶였다.

 

그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금지곡은 김민기가 작사·작곡하고 양희은이 부른〈아침이슬〉이었다. 금지 이유는 가사의 내용에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의 ‘붉은 태양’이 김일성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는 김민기의〈아침이슬〉로 시작되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그 노래는 당시의 암울했던 상황과 그에 대한 우울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었다. 반면에 그 노래가 대중적으로 크게 회자되었다는 것 자체가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그만큼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당시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김민기의〈친구〉를 부르면서 감옥에 간 동료를 생각했고,〈아침이슬〉을 부르면서 억압된 시대의 쌓인 울분을 분출했다. 체제 말기의 폭압성과 경직성은 더 이상 신세대와 공존할 수 없는 상태로 흘러가고 있었다.

 

1970년 말에 이르러 박정희 정권의 산업개발로 인해 사회는 더욱 다원성과 자율성을 요구하게 되었지만, 국가는 점점 더 그와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극(相剋)’의 긴장이 사회적으로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균열을 불러온 원인이었다. 문화면에서도 박정희 정권의 전체주의적 폭압성과 경직성은 신세대의 자유분방함과 공존할 수 없었다. 20년간의 한국 경제성장이 낳은 새로운 세대는 ‘총력돌진’과 ‘일로매진’ 같은 기존의 직선적인 논리로는 더 이상 통제되지 않는 세대였다.

 

모든 사물은 변화하고 발전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 대립하기도 한다. 박정희가 주도한 개발동원체제는 국가에 의한 특정한 방식의 사회동원이었고, 1970년대 말 이후의 한국은 그 개발로 인하여 변화된 사회가 도리어 자신을 변화시켰던 국가와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박정희가 암살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박정희 정권은 어떤 형태로든 이러한 국가와 사회의 모순을 화해시키는 쪽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붕괴는 단지 권력엘리트의 내부 분열이 낳은 것이 아니라 경직화된 돌진적 국가와 변화된 사회의 거대한 긴장과 대립의 결과물이었다.    

 

☞ 조희연 성공회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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