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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만주에서 결성된 독립군 무장 부대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승리 ②

참의부 |2013.03.26 15:08
조회 151 |추천 0

☞ 황민호(黃敏湖) 숭실대학교 교수

 

Ⅲ. 독립군단 편성과정

 

1.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결성

 

1919년 3월 1일 거족적 항일투쟁인 3·1운동이 발발하고, 이 시위가 만주와 연해주·미주 등지로 확대되면서 해외 한인(韓人)들의 독립운동이 고조되었다. 간도·연해주에서는 무장투쟁의 기세가 높아지고 있었다. 만주는 국내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세력에게 국내 정세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3·1운동 이후 만주지역에서는 본격적인 독립군단의 편성이 활성화되었다. 우선 국내에서 이동한 의병부대의 활동은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였다. 의병항쟁 지도자 유인석(柳麟錫)은 일찍부터 ‘북천지계(北遷之計)’를 세워 만주의 통화현(通化縣)·집안현(輯安縣)에서 항일투쟁의 터전을 닦았다. 황해도 의병대장 이진룡(李鎭龍)·조맹선(趙孟善)·박장호(朴長浩) 등도 만주로 이동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1919년 4월 15일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하였다.

 

˝만주에 본부를 두고 경성에 중앙 기관과 각도에 총지단, 각군과 면에 지단을 두고 조선 전도에 군대조직으로 기관을 설치, 의용대에서 암살단과 방화단을 꾸며서 관리와 친일파를 죽이고 각처를 불질러 소방하는 틈에 경관의 무기를 약탈하여 만주에서 독립군이 건너올 때 호응하여 대병을 출동하여 중앙에서 전투를 개시, 석전일(釋奠日)에 진행할 계획이 평양(平壤)에서 발각, 각처에서 계속 검거, 대한독립단원 다수히 피착, 근일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각지에서 경찰과 또는 면장을 암살하는 사건이 끝을 이어 일어났는데 최근 평안남도 제삼부에서는 대한딕롭단 평남소집전권위원을 체포하고 증거품인 과격문서를 압수하는 동시에 중대사건의 단서를 발견하여 각 지방에 연루자를 계속 검거하여 엄중히 취조 중인데 그 단체의 규칙을 보건데 아래와 같더라.

 

대한독립단 통칙

 

一. 목적하는 바는 남북만주와 조선 내지에 기맥 상통하여 조선독립의 완전한 성취를 도모할 일.

一. 조직 대한독립단의 본부를 중국 유하현 삼원포에 두어서 이를 총재소(總裁所)라 하도 도총재로 박장호·백삼규, 총단장으로 조맹선을 임명하고 경성에 전국 중앙기관을 두고 각도에는 총지단(總支團), 각군 각면에는 군면 지단을 설치할 일.

一. 방법 각도에 소집전권위원을 특파하여 일동의 전권을 급속히 위임할 일.

一. 전권위원의 사무는 아래와 같다.

 

㈎ 독립운동 의무금을 징수할 일.

㈏ 만주에 있는 본단에서 동병하여 압록강을 건널 때에는 일제히 내응할 일.

㈐ 독립단이 개전할 때에는 군인 군속과 군수품을 징발하여 운수해 보낼 일.

㈑ 기타 적병(敵兵) 일본군과 적국의 경찰관 배치한 상황과 전국의 간첩과 친일하는 관리의 조사표를 꾸밀 일.

㈒ 지방청년으로 의용단을 조직하여 군(郡)에는 2백명으로 조직한 중대를 두고 도에는 4백명으로 조직한 대대를 두고 중앙에는 8백명으로 조직한 연대를 설치할 일.

㈓ 의용단 중에서 용감한 사람을 선발하여 암살단과 방화대(防火隊)를 조직하여, 암살대는 중앙기관의 명령을 받아서 관리와 친일하는 사람들을 암살하고 방화대는 일이 일어날 때에 경관이 소방하러 나간 틈을 타서 무기를 탕취하고 경관과 싸움하는 동시에 중앙으로부터 대병을 출동시키어 전투를 개시하고, 또 각소에 있는 감옥을 파괴하여 각처에 있는 죄수를 행방 일일 군용품은 물론 철도와 전신을 파괴 절단할 기구를 준비하여 줄일 등이요, 그들은 넓은 만주와 조선 각지에 연락을 통하여 숙천·영유·순안(順安) 등지에 사단을 설치하기로 준비 중인데 지난 16일 석전제에 각도 유생이 도 대회로 모이는 것을 기회로 하여 연락을 하려 함인데, 목하 조선 삼도 제삼부에서는 일제히 동단의 연루자를 체포하는 중이더라.˝

 

앞의 내용은 1920년『동아일보(東亞日報)』에 게재된 대한독립단의 활동에 관한 보도기사이다. 이를 통해 대한독립단은 국내에 전국적인 연결망을 갖춘 의용단을 조직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암살단과 방화대를 결성하여 일시에 전국적 규모의 항일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들은 이를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전국적 봉기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만주에서 독립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를 대비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국내와 연결하는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고자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동아일보』에서는 대한독립단의 수령 하찬린(河燦隣)이 친일관리를 처단하기 위해 평안북도로 들어와 활동 중에 삭주군(朔州郡) 구곡동(舊曲洞)과 연풍동(延豊洞) 일대에서 경찰대와 교전 중 피살되었다. 이 과정에서 추격하던 경찰관 1명도 죽었다고 보도하였다.

 

2. 군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양성

 

경술병탄(庚戌倂呑) 이전부터 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던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활동도 192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은 1911년경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독립군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우선 이들은 이곳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건립하여 1920년 8월까지 3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졸업 후 독립군의 근간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의 초대 교장에는 이동녕, 교감에는 김달(金達), 학감에는 윤기섭(尹琦燮), 교관에는 김창환(金昌煥)·이관직(李觀稙), 교사에는 이갑수(李甲洙)·장도순(張道淳)·이규룡(李圭龍) 등이 활동하였다. 명칭은 신민회(新民會)의 ‘신(新)’과 ‘흥국(興國)’의 ‘흥(興)’을 합하여 ‘신흥(新興)’이라 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초기에는 만주군벌의 주목과 탄압을 피하기 위해 ‘무관학교(武官學校)’라 하지 않고 강습소(講習所)라고 불렀다. 교육과정은 본과와 특별과로 나뉘었다. 본과는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특별과는 속성과로 사관양성교육을 실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졸업생들은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이라는 별도의 단체를 조직·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교장 여준(呂準), 교감 윤기섭 및 제1회 졸업생 김석(金石)·강일수(姜一洙)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교직원과 졸업생을 정단원으로, 재학생은 준단원으로 하여 항일투쟁에 필요한 계몽활동과 군사훈련에 역점을 두었다. 신흥학우단은 ‘혁명대열에 참가하여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광복을 위한 모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하는 것을 창립 목적으로 하였다. 이들은 군사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출판물을 통한 독립의식 고취와 노동강습소·소학교 설립을 통해 청년과 아동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무관학교는 제1군영이라고 할 수 있는 합니하 신흥무관학교에 이어 심산 밀림 고원에 제2군영을 만들어 정예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훈련대를 편성하였다. 이 특별군영이 1915년 봄 무렵에 건립된 백서농장(白西農場) 또는 유장(酉場)이라고 불리는 독립군기지였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과 학생들은 가까운 장래에 일본과 중국, 일본과 미국 간의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을 구축하고 나라의 국권회복을 열망했다. 독립국가 건설과 조국광복은 이들에게 가장 우선적인 과업이자 개인적인 소망이었다.

 

신흥학우단은 기관지『신흥학우보(新興學友報)』를 발행했으며, 졸업 후 단원들은 2년간 의무적으로 독립군에 편성되어 활동하거나 교육운동에 종사하였다. 단원들은 단체활동과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 스스로 원대한 꿈을 일구어 나가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913년 6월 13일에 창간된『신흥학우보』는 신흥학우단이 발족된 지 3개월 쯤 후에 간행되었다. 2권 제2호의 편집인이 강일수인 것으로 보아 그는 이 잡지의 편집에 초기부터 줄곧 관여해 온 것으로 보인다.『신흥학우보』는 월간으로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제2권 제2호에 매년 2·4·6·8·10·12월의 10일 이내에 투서해 줄 것을 요망하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17년경에는 격월간으로 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흥학우보』는 단원과 이주민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혁명이념을 선전하며, 학술을 연구하여 근대적인 지식을 보급하였다. 그리고 농업문제나 부인문제, 주민문제 등 이주민들의 당면한 여러가지 문제들을 다룬 다양한 논설을 게재함으로써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고 특히 창간호에는 군사·시사·문예·노동·농사에 관한 기사들이 다수 게재되어 독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이밖에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는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가 있었다. 이 학교는 1913년 이동휘(李東輝)·김립(金立)·장기영(張基永)·김하석(金夏錫)·오영선(吳永善)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였으며, 역시 신민회계열 인물들이 주도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학교는 비록 개교 1년 후인 1914년에 재정 궁핍과 주변 여건의 어려움으로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러시아지역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는 등 독립군 양성을 위한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임시정부 기관지『독립신문(獨立新聞)』에서는 동림무관학교에 대해 학교가 재정난으로 문을 닫을 형편에 이르자 40여명의 학생들이 러시아에까지 가서 공장노동자로 취업하여 임금을 헌납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젊은 장교들이 독립운동 진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것도 독립군단 창설에 자극제가 되었다. 11기인 임재덕(林在德)·김희선(金羲善)·이갑(李甲), 23기인 김경천(金擎天), 26기인 지청천(池靑天) 등이 만주와 노령지역에서 독립군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가운데 지청천·김경천과 구한국 무관출신으로 동천(東天)이란 호(號)가 유명한 신팔균(申八均)은 독립군 병사들 사이에서 동만(東滿)의 ‘삼천(三天)’이라고 불리며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의 합류는 청년들의 독립군 입대를 유도하는 커다란 자극제였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보면 1910년대 이후 독립운동 각 세력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성격의 항일조직을 결성해 가며 항일무장투쟁의 전개를 준비하고 있었다.

 

 3.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조직과 활동

 

독립운동을 위한 한인사회(韓人社會)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독립운동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되었는데, 이중 철혈광복단이 주도한 ‘간도 15만원 탈취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은 1910년대 북간도에서 조직된 비밀결사단체인 광복단(光復團)과 러시아의 연해주에서 조직된 철혈단(鐵血團)이 통합되어 1918년경에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철혈광복단은 약칭 ‘철광단(鐵光團)’으로도 널리 불리고 있었는데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그 조직의 활동이나 결성과정에 대해서 명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광복단의 경우는 1911년초 이동휘(李東輝)가 성진에 본부를 둔 장로교 선교회에서 선교 차 파견되어 북간도지역을 순방했을 때, 북간도 항일그룹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고 항일투쟁의 비밀 핵심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할 광복단을 조직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광복단은 노령(露領)의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비롯하여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와 북간도 국민회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단체의 핵심간부를 배출하여 1910년대와 1920년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편 철혈단은 1914년 연해주(沿海州) 수청(水淸)에서 전투적 비밀조직으로 결성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철혈광복단으로 통합되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철혈광복단은 1919년 2월 ‘조선독립의 사회’를 건립하고 노령지역과 ‘독립선언문’을 공동발표하는 등 진일보한 것으로 나타난다. 연변지역에서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나면 일제의 무력간섭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이에 대응하기 위해 많은 비밀대원들이 필요했다. 이는 단원 보호와 장기적인 독립항쟁을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2월 18일 박동원(朴東源)의 집에서는 철혈광복단 가입의식이 있었다. 이때 혈서를 쓰고 철혈광복단에 가입한 청년들은 국자가(局子街)의 이홍준·이성근·박동원·김영학, 용정의 김정, 개산둔(介山屯)의 배규정, 팔도구(八道溝)의 유예근, 평강지방의 고동환 등이었다. 이외에도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앞장서왔던 김순문·강룡헌·구춘선(具春先)·이성호(李晟鎬)·고평·최봉렬(崔鳳烈)·박정훈·이동식 등이 참여하였다. 실제로 철혈광복단의 단원수가 2만여명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조직은 통일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혈광복단은 항일무장투쟁의 전개를 위한 활동을 추진하였다. 특히 철혈단의 근거지였던 수청에서는 1918년말 철혈광복단의 박춘성(朴春成)·한창걸(韓昌杰)·정재관(鄭在寬)·강백우·김광건·김창섭·황석태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인부(韓人府)’에서는 독립군 부대 조직에 착수하여 니콜라예프카 등 2개 촌에 부대를 창설한 후 러시아 빨치산과 합세하여 백위파(白衛派) 군대와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밖에 1919년 5월에는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장이면서 철혈광복단의 단원이었던 김하석(金河錫)의 주선으로 6백여명의 한인청년들을 러시아 백위파 호르바트 휘하의 제2조선인국민대대에 보내어 군사훈련을 습득케 하였는데 철혈광복단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러시아 백위파가 조선인국민대대에 편입되었던 청년들에게 군사 지식의 습득이나 훈련 대신, 철도수비 같은 단순 작업에 종사시키자 청년들이 불만을 품고 이탈함으로써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김하석과 김규면(金圭冕)은 무장투쟁을 위해 러시아제 소총(小銃) 2천자루와 다량의 탄약(彈藥)을 구입하고자 했으나 운송 도중에 무기를 실은 배가 풍랑으로 침몰되어 큰 손실을 입었다. 이에 철혈광복단은 일거에 다량의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간도 15만원 탈취사건’을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도 15만원 탈취사건’은 1919년 9월 김하석이 와룡동(臥龍洞)의 철혈광복단원 최봉설(崔鳳卨)에게 빠른 시간 안에 거액의 군자금을 모집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최봉설은 용정 영신학교(永信學校) 교원이며, 철광단원이었던 윤준희(尹俊熙)를 비롯하여 임국정 등에게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다. 이들은 짧은 기일 내에 거액의 군자금을 모으려면 일본은행을 습격하여 현금을 탈취하는 것이 좋겠다는 계획에 의견을 같이하였다. 이들은 조선은행(朝鮮銀行) 용정출장소 서기로 근무하는 전홍섭(全洪燮)을 설득하여 용정출장소의 내부 상정을 탐지하기 시작했다. 전홍섭은 용정출장소의 현금을 탈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출장소로 현금을 수송해오는 호송대를 습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하였다. 1920년 1월 4일 회령에서 약 14만~15만원의 현금이 수송되어 올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받았다. 이후 윤준희·임국정·한상호·김준·박웅세 등은 1월 3일 김하석의 집에 모여 거사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권총(拳銃)·포승(捕繩)·철봉(鐵棒) 등을 휴대하고 2개조로 나뉘어 용정에서 15리 떨어진 동량어구(東良於口)에 매복하였다가 현금수송차량 급습에 성공하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우선 ‘간도 15만원 탈취사건’에 대한 중·일 공동수사와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중국당국의 엄중한 취체(取締)를 요구하였다. 또한 전홍섭을 회령에서 검거한 일제는 사건의 전개과정에 최봉설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의 부친 최병국(崔炳國)과 동생 최봉준(崔鳳俊)을 투옥하였다. 한편 용정일본총영사는 하얼빈영사관과 블라디보스토크영사관에 사건의 개요를 통보하고 엄중한 경계를 요구하였다. 연길도윤공서에도 ‘포고 제2호’를 반포하여 ‘15만원 사건’ 혐의자를 신고하는 사람에게는 포상한다는 현상문(顯賞文)과 함께 조선은행권 5원짜리와 10원짜리 지폐를 사용하는 자에 대해 즉시 관공서에 신고할 것을 명령했다.

 

거사에 성공한 윤준희·임국정·한상호·최봉설 등 4명은 10일 오전 김하석과 함께 무기구입을 위해 러시아로 출발하였는데 자금의 사용처에 대해서는 첫째 수청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군사인재를 배양할 것, 둘째 무기를 구입하여 라자구에서 군대를 편성할 것, 셋째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학교를 세우고 군사학과 기타문헌을 출판할 것, 넷째 무기구입과 운반은 김하석·윤준희·임국정·최봉설·한상호에게 위임할 것, 다섯째 윤준희를 재무책임자로 정하고 군자금을 관리할 것 등을 결정하엿다.

 

그러나 연해주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도중 이들의 활동이 일제에게 탐지되어 1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헌병대가 윤준희·임국정·최봉설·한상호 등의 숙소를 급습·혼란 중에 탈출한 최봉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체포되어 철혈광복단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만주지역 독립운동세력의 대담한 전술 투쟁의 하나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만주지역 항일무장세력이 일제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해 가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연해주지역에서도 일제의 이른바 ‘시베리아출병’ 이후 한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이 활발해 지고 있었다. 1918년 1월 일제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의 권리와 생명을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하려는 염원에서 출병’을 단행한다는 명분하에 4월 5일 블라디보스토크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8월에는 약 2만 8천에 달하는 전투병력으로 연해주지역을 점령하였고 이어 치타 이서(以西)지역으로 진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재소(在蘇) 한인들에게 의료시설을 제공하거나 한인자제들에게 무료로 교과서를 배포하였으며, 군마(軍馬) 중 폐마(廢馬)가 된 것이나 남는 것을 싼값에 불하한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또한 니콜리스트의 아가라하 부근에서는 ‘이전에는 조선인이 외국인이었으나 지금은 일본거민(日本居民)으로 대우받고 있으며, 일본인보다는 교육상태가 다소 저열(低劣)하기는 하나 조선인에 대해 동정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일본군 상관(上官)의 명령이 있은 후 ‘규율이 엄한 일본군대와 한인상인들간 사이에는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선전하는 등 러시아지역 한인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제의 연해주지역에 대한 침공이 본격화되자 한인 민족지도자들은 소련의 후원하에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소련 당국에서도 연해주에 거주하고 있는 20만 한인들을 이용하여 제2의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볼셰비키혁명운동에 가담하는 것이 한국의 해방을 원호하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19년에는 소련이 35세의 귀화한인들에 대하여 전면적인 징집령(徵集令)을 발동하자 한인들은 볼셰비키혁명세력에 가담해 러시아의 백위군(白衛軍)과 싸우는 것보다 한인 독립군부에 직접 참여하여 투쟁하는 것이 독립을 위한 보다 나은 길이라고 판단하기도 하였다.

 

이후 1920년대에 들어 노령지방에서는 의군부(義軍府)와 혈성단(血誠團) 및 김규면의 신민단(新民團), 황병길의 신한민회(新韓民會) 등이 주로 이만 이남에 집결하여 국내진입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연해주 중부 이북지방에는 박일리야의 니항군(泥港軍)이나 이르쿠츠크 공산당 소속의 적위군(赤衛軍)과 함께 러시아 백위군이나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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