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3·1운동 이후 만주에서 결성된 독립군 무장 부대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승리 ⑤

참의부 |2013.03.26 15:18
조회 182 |추천 0

Ⅵ. 독립군단의 국내진공작전

 

1. 독립군단의 전력정비

 

3·1운동 이후 창설된 항일독립군단들은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면서 전투역량의 강화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독립군은 대체로 연해주에 출병했던 체코 군대가 철수하면서 암암리에 매각했던 무기를 구입했다. 비용은 주로 이곳 한인사회(韓人社會)와 국내에서 군자금으로 헌납된 자금이었다.

 

독립군의 무기는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일반 군총(軍銃)으로는 러시아제 5연발총과 단발총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미국제나 독일제 혹은 일본제 30식 혹은 38식 장총(長銃)이 섞여 있었다. 권총류는 루거식 권총(拳銃)이 가장 흔했으며, 그밖에 7연발식과 남부식(南部式) 등이 있었다. 중무기는 기관총(機關銃) 및 수류탄(手榴彈)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기의 가격은 일정치 않았는데 소총(小銃) 1정당 탄환(彈丸) 1백발을 포함하여 1백원 내외였다.

 

독립군단의 결성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독립군단들은 자체의 무장력을 강화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20년 5월 무렵까지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서는 17만원을 비롯하여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가 13만원,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가 13만원,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이 3만원,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이 4만원 등을 확보하여 총 50만원의 군자금을 모집했다. 이 자금은 대부분 독립전쟁에 사용될 무기구입과 군수품 등에 충당되었다.

 

무기의 구입과 운반은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위험한 작업이었다. 때문에 대개의 경우 수십명에서 수백명에 이르는 건장한 독립군 병사가 투입되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무기운반은 보통 1명이 2~3정의 무기와 탄약을 분담하고 대열을 형성하여 이동하였다. 운반 도중 중국관헌의 눈을 피해 먼 길을 우회하기는 다반사였다. 상황에 따라 중국관헌을 매수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정기적으로 공급과 조달이 이루어질 수 있돍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군 측에게는 중·소 국경지대를 충돌없이 통과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독립군단은 부대원들에 대한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北路軍政署士官練成所)를 통해서 보면, 독립군은 매일 5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집총훈련을 실시하였고, 흙과 모래 6관이 든 무거운 배낭을 메고 군총으로 무장한 채 야산을 오르내리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매일 밤낮으로 2회의 정신교육을 받는 등 강도 높은 훈련이 있었다.

 

2. 국내진공작전의 전개

 

만주와 연해주지역을 중심으로 각 독립군단이 결성되고 전체적으로 독립군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어 갔다. 항일독립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상해의 임시정부도 독립전쟁 의지를 천명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한 다방면에 걸친 민족역량 결집에 나섰다. 우선 임시정부에서는 군사상 경험이 있는 인물에 대해 조사하고 군사회의를 개최하여 군사계획을 수립할 것과 중국 및 러시아 지역에서 10만명 이상의 의용군지원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킨다는 계획을 발표하여 독립운동진영의 항일의지를 고양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0년 1월 8일자『독립신문(獨立新聞)』에서는 ‘우리의 당면 문제는 우리의 독립운동을 평화적으로 계속하라는 방계(放計)를 고쳐 전쟁하려 함이요’, ‘독립전쟁에 반대하는 자는 곧 독립에 반대하는 자’라는 취지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연설을 게재하여 재차 독립전쟁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1920년대 초부터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일제(日帝)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국경지역의 경찰병력을 대폭 강화하였다. 보통은 1개 군에 1개의 경찰서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국경 3도에는 함경북도 11개 군에 경찰서 19개, 6개, 주재소 130개, 출장소 42개소를 두었다. 함경남도에는 16개군에 경찰서 20개, 파출소 6개, 주재소 195개, 출장소 84개를 설치했다. 특히 압록강 연안에는 10리마다 주재소 또는 파출소를 하나씩 설치하여 4~10인의 경비경찰관을 배치하였다. 당시 경비경찰관의 수는 1925년 현재 5천 8백 82명이었다.

 

시설면에서 보면 주재소 주변에는 반드시 참호와 철조망을 설치하였다. 1923년부터는 2척(尺) 높이의 석벽을 설치하는 등 자체 방어시설을 강화시켰다. 이밖에 압록강 강안(江岸)에는 기관총을 탑재한 발동선 3척을 배치하였으며, 두만강 강안에는 경비선 1척을 배치할 정도로 독립군 경계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강안 곳곳에는 참호를 설치하는 등 강을 따라 월경하는 독립군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경비전화 가설을 크게 늘려 독립군의 기습에 신속하게 대응하도록 하였다. 경찰관들에게는 38식 또는 44식의 최신식 총기류를 지급하는 등 공포분위기 조성을 통한 국내와 독립군 사이의 연계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강화에도 일본 경찰대는 수시로 반복되는 국내진공작전으로 ‘촌각도 안심할 수 없었으며, 불시에 대비하기 위해 총기를 목침으로 가면(假眠)’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1920년대 전반기의 경우 독립군의 국내진격활동은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독립군은 이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일깨우고자 했다.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이 있었던 1920년의 경우에만 연인원 4천 6백여명의 독립군이 1천 6백여회에 달하는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경찰서와 관공서 서른 일곱 곳을 공격했다.

 

3. 국내언론의 보도경향

 

1920년대에 들어서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본격화되자 이와 관련한 기사가 국내 언론을 통해 속속 보도되었다. 1921년『동아일보(東亞日報)』에 나타나는 독립군과 일본 경찰대 간의 교전(交戰) 관련 기사를 정리해 보면,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일제의 국경치안을 얼마나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그 실상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동아일보』에 나타난 1921년 독립군의 국내진격 현황을 살펴보면, 5월 19일자 보도에 14일 함경남도 삼수군 남면 창동리에서 함경남도 중평장 경찰서원으로 조직된 수색대가 독립군 유격대와 총격전을 벌였다는 기사가 있고, 17일 의주군 내면 어석동에는 일본군 헌병대에서 복무중이던 하성진이 배일적 조선인들에게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6월 6일자 보도에는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진에서 권총을 가진 독립단원 14명이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돌아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한 성진경찰서가 관내 주재소와 연합하여 엄중하게 수색중이라 하였으며, 11일자 보도에는 평안북도 압록강 연안에서 독립단원들이 출몰하여 부호들의 집을 습격해서 금전을 빼앗았다는 기사가 있다. 16일자 보도에는 11일 벽동군 송서면에서 면장을 지냈던 최석인의 집에 독립단원 5명이 침입하여 최석인의 처를 살해하고 그 집을 방화하는 한편 송서면 주재소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는 기사가 있다. 28일자 보도에는 24일 의주군 주내면에서 독립단원 3명이 압록강변을 순찰하던 주재소 순사를 습격하여 총상을 입혔다는 기사가 있고, 30일자 보도에는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26일 광복군총영 소속의 독립군 유격대가 나타나 경찰·헌병대와 교전하고 오북면에서도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하였다. 7월 21일자 보도에는 3일 오전 2시에 7명~8명의 배일조선인이 정동 파출소의 경찰대와 총격전을 벌였는데 4명이 체포되고 1명이 교전 중에 총살되었으며, 24일자 보도에는 자성면 고령동에서 상평 임시경찰관 출장소를 습격하려던 독립단원들이 일제 경찰의 기습을 받아 서로군정서 재무부원 윤상기가 총살되고 군자금 영수증과 권총이 압수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29일과 30일, 그리고 8월 6일자 보도에는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에서 일본 경찰대와 독립군 유격대 간의 총격전이 무려 다섯 차례나 벌어진 기사가 있다. 23일자 보도에는 18일에 강계경찰서에서 독립군이 나타났다는 급보에 병력을 출동시켜 세 차례의 교전으로 7명의 독립군을 사살했다고 하며, 9일과 14일자 보도에도 함경북도 갑산군에서 역시 세 차례의 총격전 기사가 실려 있다.

 

이러한 기사를 정리하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한 독립군은 압록강변을 순찰하던 경찰관에게 총상을 입히거나 친일면장 등을 처단하였다. 또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거나 내륙 깊숙이 침투하여 일제의 경찰관서 등에 대한 공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 파견한 것으로 보이는 유격대원들은『독립신문』10장과 권고문 1장 등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도되었는데, 이것은 독립군의 중요활동이 선전활동도 겸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20년 4월에 창간된『동아일보』가 총독부에 의해 다양한 언론 통제를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동아일보』의 이러한 보도 경향은 당시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대단히 적극적인 군사작전의 형태를 띄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기관지인『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도 독립군과 일본경찰대 간의 교전에 대해 자주 보도하고 있었는데,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에 관련한『매일신보』의 기사내용은 기본적으로 일본경찰대의 활동을 중심으로 사건의 정황을 서술하고 있어 그 내용에 대한 전달 방식이『동아일보』와 차이가 있었다. 또한 1921년도 기사의 경우에는『동아일보』와 비교해 보면 독립군의 활동에 대한 보도 건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매일신보』의 기사에서도 독립군 부대원들은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친일면장 처단 및 경찰주재소와 영림서 등에 대한 습격을 단행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독립군의 활동은 일제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만주지역 독립군세력과 일제 간의 긴장관계는 이후 대규모의 전면전으로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4.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⑴ 승전(勝戰)의 전초(前哨),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1920년 6월 7일에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의 첫번째 대규모 충돌인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가 발발하였다. 그런데 이 전투는 화룡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 부근에서 벌어졌던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에서 시작되었다. 6월 4일 새벽 박승길(朴承吉)이 인솔하는 신민단(新民團) 소속 30명 가량의 독립군 병사들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으로 진입하여 복강(福江) 군조(軍曹) 휘하의 일본군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날이 저물자 두만강을 건너 귀환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신미(新美) 중위(中尉)의 통솔하에 1개 중대 병력과 헌병경찰 중대를 동원하여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 부대를 추격하였다. 삼둔자(三屯子)에 이르러 독립군 부대를 발견하지 못하자 일본군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에 독립군은 이들 일본군 추격대에 대해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121명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뒀으며, 교전은 마을 서북쪽에 있는 400여미터 정도의 일광산에서 전개되었다. 이 삼둔자전투는 최초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영토 내로 진입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했던 일본군이 오히려 패전함으로써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와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令部)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렇지만 일제(日帝)는 6월 19일 언론에 게재한 ‘군사령부 발표(軍司令部發表)’를 통해 삼둔자전투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왜곡하였다.

 

"그런데 최근 5월 27일 약 20명의 무장안 배일(排日)조선인이 온성(穩城) 동편으로부터 강을 건너 침범하여 회령으로부터 경원(慶源)으로 가는 길에 있는 운무령(雲霧嶺) 서편 산록에 나타나서 우편 채송인을 사격하여 헌병보에게 중상을 시키고 그의 탄 말을 쏘아 죽이고 전선을 끊어 버림으로, 일본군대는 기병(騎兵)의 일부를 출동시키어 에워싼 후에야 진정되었다는 전긔와 같은 형세임으로 두만(豆滿) 연안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는 더욱 엄밀히 하여 방비하던 중이더니, 과연 금월 4일에 무장한 조선인 단체가 강을 건너 침입함으로 드디어 삼둔자 부근에서 격렬한 싸움을 일이키었더라.

 

6월 4일 오전 5시경 화룡현 신강 삼둔자에 30명의 무장한 배일조선인 단체가 나타나서 종성군 북편 약 5리나 되는 온성군 강양동 상류에서 두만강을 건너 조선 내지에 침입하여 일본 보초를 공격함으로 동 보초장 헌병군조 복강태삼랑(福江太三郞)은 그곳에 있던 헌병 6명, 경관 2명, 수비병 5명을 지휘하여 이에 응전하여 잠시 교전한 후 조선인들이 삼둔자 근처에 있는 민가로 들어간 후 오히려 사격을 계속하였다. 남양수비대장 신미이랑(新美二郞) 보병중위는 동 오전 10시에 급보를 접하고 보병 10명, 경관 2명, 헌병 4명을 데리고 그 뒤를 쫓아 공격할 목적으로 남양 땅에서 강을 건너 동일 정오경에 전혀 배일조선인의 뒤를 딸아갔더니 조선인들은 점차 서남편으로 퇴각하기를 시작하면서 일본군을 사격함으로 이를 추적하였다. 이때에 강양동에 있던 부대도 역시 무장한 조선인을 공격하면서 강가로 나아가 신미 소대와 함께 삼둔자의 부락 안으로 돌입하여 동 부락의 수색을 행하고 그후 동대는 삼둔자 부근의 요해지를 점령하고 상황을 정탐하였다.

 

이 싸움에 배일조선인 편으로 죽은 자가 1명, 상한 자가 2명, 사로잡힌 자가 2명, 아라사(俄羅斯) 총기(銃器) 2정과 탄약(彈藥) 335개, 담요와 포승 각각 2개, 그외에 여러 가지 물건을 얻은 외에 그곳에 살던 조선인민에 부상한 사람이 3명, 부인 2명, 아이가 1명, 그중에 1명은 사망함인데, 이는 민가에 들어가 있는 배일조선인을 사격하는 탄환에 맞은 것이더라."   

 

위의 내용은 삼둔자전투에 대한 조선주차군사령부의 발표를『동아일보(東亞日報)』가 게재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보면 일제는 삼둔자전투가 있기 이전 5월 27일에 이미 20여명의 무장독립군이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격하여 운무령 서편 산록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헌병보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그가 탄 군마(軍馬)까지 사살했으며, 전선을 끊어버리는 등 일제의 국경치안을 위협하는 사건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으로 일본군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는 만주지역 독립군단이 1920년 3월 현재 연길현(延吉縣)·화룡현(和龍縣)·훈춘현(琿春縣)·왕청현(王淸縣) 등지에서 적극적인 배일활동을 준비하면서 특히 밀강·봉오동·걸만동 등지의 마을에는 병력을 주둔시켜 조선으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토문자·나자구·백초구·서대파 등지에서도 장정들을 모아 훈련시키는 한편 군자금·군량미를 모으는 등 전투에 대비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밖의 기사에서 뿐만 아니라 1920년 1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이 ‘조선 내지를 침입한 일이 32회에 이르렀으며, 총기를 사용해 물리친 일이 10번이나 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조선주차군사령부의 이러한 발표는 삼둔자전투가 1920년 1월 이후 계속되었던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에 대한 일제의 대응이라는 측면에 이루어지는 군사작전임을 명백히 밝혔다. 동시에 독립군의 성장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위협이 되는 수준이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이밖에 조선주차군사령부에서는 삼둔자전투에서 일본군이 독립군 1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2명을 사로잡았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독립신문(獨立新聞)』의 보도 내용은 조선주차군사령부의 발표와 달리 남양수비대장 신미 중위가 1개 중대 병력과 10여명의 헌병을 통솔하고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로 진격해 오자 독립군은 6일 오후 10시에 적을 ‘대파(大破)’하였다고 보도함으로써, 이 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하였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삼둔자전투에서 패전 소식을 접한 일본군 제19사단은 안천(安川) 소좌(少佐)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여 간도로 들어가 독립군을 섬멸하는 임무를 주어 일본군과 독립군은 재차 대규모의 전면전(全面戰)을 치르게 되었다.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는 신곡(神谷) 대위(大尉) 이하 70명의 혼성중대로 편성된 보병 제37연대 제10중대, 자산(紫山) 준위(准尉) 이하 27명의 연대 기관총소대, 삼(森) 대위(大尉) 이하 123명의 보병 제75연대 제2중대, 소원(小原) 대위(大尉) 이하 헌병대 11명, 갈성(葛城) 경시(警視) 이하 경찰대 11명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또한 월강추격대대에는 삼둔자전투에서 패배한 신미 중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대부대를 편성한 일본군은 안천 소좌의 통솔하에 두만강변의 온성군에 집결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다.

 

월강추격대대는 6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과 해란강의 합수목에서 약 10리 떨어진 하탄동에서 도강(渡江)한 후 골방령을 넘어 후안산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 시각 신민단 모연대원 14명도 마을의 최명극(崔命極)의 집에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밤 12시경 후안산에 집결한 월강추격대대는 후안산 마을에서 길 안내자를 찾기 위해 3명의 병사를 보냈다. 최명극의 집에서 이들 일본군과 독립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모연대원들은 일본군 1명을 사살하고 뒷문으로 빠져나가 고려령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불의에 습격을 받은 일본군은 즉시 추격을 시도하였으나 캄캄한 밤이어서 대규모의 교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전투에 대해 일본군은 자군 부상자 1명 이외에 독립군 1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하였다고 발표했으며, 중국의『요동신보(遼東新報)』에서는 일본군 1명, 한인(韓人) 남녀 각 1명이 사망했고 한인 부상자가 1명이라고 집계하였다.

 

⑵ 봉오동전투의 전개

 

일본군이 봉오동을 향해 진격해 오는 상황을 보고받은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총사령관 최진동(崔振東)과 참모부장 홍범도(洪範圖)는 일본군의 추격에 응전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마을 주민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대피명령을 내린 후 구체적인 작전에 돌입했다. 일본군의 진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홍범도 장군은 부대를 나누어 이천오(李千五)의 제1중대는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매복하게 했으며, 강상모(姜尙模)의 제2중대는 동산(東山)에, 강시범(姜時範)의 제3중대는 북산에, 조권식(曺權植)의 제4중대는 서산 남단에 각각 매복하도록 하였다. 이어 홍범도는 2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서북 북단에 매복하였으며, 군무국장 이원(李園)에게는 본부 병력 및 잔여중대를 인솔하고 탄약 등을 공급하면서 만일의 경우 퇴로를 확보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제2중대 제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李化日)로 하여금 휘하 병력을 이끌고 고려령 북쪽 고지와 마을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나타나면 교전하는 척하면서 후퇴하여 일본군을 포위망 안으로 유인해 오도록 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 본대가 봉오동에 매복해 있는 독립군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면 일시에 총공격하여 적군을 격퇴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6월 7일 오전 6시 30분 봉오동에 도착한 일본군 월강추격대대장 안천 소좌는 봉오동 골짜기 입구에서 전위중대를 내보냈으나 이화일 분대의 공격을 받고 피해를 입었다. 이후 10시 30분경에 다시 부대를 진격시켜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봉오동 하촌을 수색하던 일본군은 독립군이 도주한 것으로 착각하고 일단 집결한 다음 중촌과 상촌을 거쳐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는 지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후 1시경 일본군은 척후병을 선두로 독립군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왔으며, 홍범도 장군이 적진에 장총(長銃)을 격발하여 공격신호를 알리자 매복해 있던 독립군 병사들은 사방에서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일본군도 기관총(機關銃)으로 응사하며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독립군의 분전에 밀려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진행 중이던 4시 40분경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와 폭풍이 거세져 서로 상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상이 악화되자 홍범도 장군은 부대원들에게 퇴각명령을 내렸으며, 이 틈에 일본군도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봉오동에 남아있던 어린이와 부녀자 16명을 살해하고 6월 7일 함경북도 온성군 유원진(柔遠鎭) 건너편의 두만강변으로 퇴각하였으며, 사령부로부터 철수명령을 받고 황급히 본대로 돌아갔다. 이로써 독립군을 일거에 소탕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일본군은 봉오동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 이 전투는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으로 이어지는 전초전(前哨戰)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봉오동전투에서 뜻밖에 일격을 당한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令部)는 국내언론을 통해 일본군의 패전을 숨기고 전투상황을 왜곡하기에 급급하였다.

 

˝이 싸움에 소원(小原) 헌병대위 이하 약 10인과 갈성(葛城) 경시 이하 약 10인은 일본군대와 그 행동을 같이 하였으며, 이 싸움에 참예한 조선사람의 수효는 약 250명이 있엇다. 그리하여 이번 싸움에 일본인 측에는 전사자 한 사람, 부상자 한 사람이었으며, 조선사람 측에는 내어버리고 간 사체가 근 30구에 달하였으며, 사로잡힌 사람이 6명이었고 소총 7정, 탄약 1495발, 육혈포 2개, 망원경 1개, 한국국기 1개, 기타 잡품을 빼앗았고 기타 부상한 조선 사람은 부인 4명, 아동 1명이 있엇는데 이 다섯사람은 자기의 남편과 부형이 집 속에서 일본인을 쏠 적에 일본군의 탄환에 맞은 모양이더라. 일본인 추격대는 6월 초8일 사단장의 명령에 의하여 초9일 오전 8시경에 철퇴키를 시작하여 당일 내에 조선으로 돌아왔다더라.˝

 

위의 내용은 봉오동전투와 관련하여 조선주차군사령부가 발표한 내용이다. 봉오동전투에 참가했던 독립군의 수는 약 250명~300명이었으며, 일본군은 전사자 1명, 부상자 1명의 피해를 입었다고 하여 일본군 측의 피해를 크게 축소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주차군사령부는 독립군에서 버리고 산 시체가 약 30명에 달하였으며, 포로가 6명이었고, 소총 7정, 탄약 1495발, 육혈포 2개, 망원경 1개, 한국국기 1개, 기타 잡품을 노획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부상당한 조선사람은 부인 4명과 아동 1명이었는데, 이들은 남편과 부형이 집안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에 총탄에 맞은 것이라고 보도하는 등 전체적으로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처럼 과장했다. 이밖에『동아일보(東亞日報)』·『매일신보(每日申報)』등의 기사에서는 6월 4일 이후의 전투에서 독립군은 시체를 버리고 간 것만도 34명이며, 그 외에 다수의 부상자가 있었다고 보도하였다. 사로잡힌 사람은 8명인데, 독립군은 교전 당시에 사망힌 시체를 쌓아놓고 사진을 찍어 ‘상해가정부(上海假政府)’에 보냈다는 등의 허황된 설명을 덧붙이었다.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나타난다. 중국신문인『상해시보(上海時報)』는 일본군이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하여 150명의 전사자와 2백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독립군은 160정의 소총과 3정의 기관총을 노획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전투 이후 일본군은 화룡현 흡강(洽江)의 도구(渡口) 통행을 금지하는 등 독립군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기사도 게재하였다.

 

임시정부 군무부는『독립신문(獨立新聞)』을 통해 봉오동전투의 전황에 대해 ‘적의 전사자 157명, 중상자 2백여명, 경상자 1백여명이요, 하군의 사망자 장교 1인 병졸 3인, 중상자 2인이며, 적의 유기물이 다유(多有)’하다고 보도하여 독립군 부대의 승전을 확인하였다.

 

이밖에 6월 10일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산하 제일남지방회(第一南地方會) 회장 남용하(南龍河)가 관할 각 지회장 앞으로 ‘독립전쟁 개시의 건’이라는 공문을 발송하여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본부 통신에 의하면 6월 7일 8시경 아군 주둔지 봉오동에서 대일전투가 개시되어 적군의 전진부대 150명을 몰살시켰고 아군의 전사자는 겨우 3명뿐임. 목하 전투 계속 중 아군 참전부대는 북로독군부 신민단 30명으로서 아군의 대승으로 돌아감."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봉오동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을 중심으로 연합편성된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주차군사령부가『동아일보』를 통해 왜곡된 기사 내용을 발표했다는 것은 봉오동전투에서의 패배가 일본군에게 준 충격이 상당히 큰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봉오동전투를 치른 일본군은 독립군의 전투력이 예상보다 강력했으며,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의 수립이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안천 소좌의 월강추격대대는 독립군에 대해 ‘전부 러시아식 소총을 갖고 탄약도 상당히 휴대하였으며, 사격훈련도 상당히 받았으며, 방어전투를 치를 때 용감히 싸운다’고 하여 독립군의 막강한 전투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조선주차군사령관 우도궁태랑(宇都宮太郎) 중장(中將)은 봉오동전투 패배 직후 독립군이 정식의 군비를 착용하고 사령(辭令)에도 일정한 예식이 있는 등 통일된 군대조직을 갖고 있음을 본국에 보고하면서 봉오동전투에서의 패전이 일본군에게 심각한 ‘악영향의 결과’를 초래했음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은 부대의 정비에 착수하였다. 그는 정일(征日)제1군사령관장의 명의로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회장 구춘선(具春先)에게 의사를 보내주도록 요청하여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했다. 6월 말경 대한북로독군부 산하의 직속부대원들을 거느리고 연길현 의란구에 주둔하여 다시 일본영사관 경찰대를 긴장시켰다.

 

봉오동전투 이후에도 홍범도 부대의 전투활동은 계속되었다. 8월 7일 국자가와 두도구의 일본영사관 군관 소속 경찰대와 함경북도 각 경찰서 소속의 경찰관 64명이 광곡종조(光谷宗助) 경부(警部)의 인솔하에 독립군에 대한 수색작업을 전개하였다. 이에 130여명의 홍범도 부대는 연길현 노두구 탄산리(炭山里)를 지나다가 일본 경찰대가 오는 것을 발견하고 총격전에 돌입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는 일본 경찰대를 섬멸하였는데, 서전(西田) 순사부장(巡査部長)도 중상을 입었으며, 용정의 영사관 분관에서는 42명의 경찰관을 증파하였다.

 

당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 활동하던 이정(李楨)은 그의『진중일지(陳中日誌)』7월 23일자 기록에서 “홍범도 장군은 부하 1개 중대를 거느리고 노두구 방면에서 일본 영사관원 28명과 조우하여 22명을 사살하였는데, 독립군 측에서는 사상자가 전혀 없었다”고 적었다. 이상의 내용에서 홍범도 부대는 봉오동전투 이후에도 일련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계속}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