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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대안 역사 교과서의 친일문제 인식과 문제점

참의부 |2013.05.09 00:57
조회 99 |추천 0

① 식민지 시기와 친일문제를 바라보는 눈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의『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이하 뉴라이트 교과서)는 일제의 한국 식민지 지배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 체제”에 입각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국내외의 한국인들의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뉴라이트 교과서, 78쪽, 이하 쪽수만 표기)”했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 자체는 타당하다. 그러나 이 표현은 자신들의 뉴라이트 교과서를 한국 검인정 교과서로 통과시키기 위한 상투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이들의 식민지 시기에 대한 역사 인식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뉴라이트 교과서 편찬 관계자들은 현행 검인정 국사 교과서가 지나치게 민족주의 관점에 서 있어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편견에 입각해 서술하고 있다고 맹비난한다. 그 결과 민족 감정에 치우쳐 일제 식민지 시기 항일독립운동을 실제보다 과장해서 서술하고 있다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항일독립운동은 과장되기는커명 실제 사실보다 훨씬 덜 밝혀져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또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의 주장대로 “민족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실 그대로” 서술하자면(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을 미화할 필요가 없다면)극렬 친일파들이 일제에 빌붙어 독립운동을 악랄하게 탄압한 사실과 해방 이후, 특히 대한민국에서 이들이 어떻게 기득권을 계속 이어왔는지 마땅히 서술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독립운동을 악랄하게 탄압한 행위에 가담한 자들의 죄행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이들을 은폐 또는 미화하고 있다.

 

사실 항일독립운동사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며, 항일독립운동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 뉴라이트 교과서의 항일독립운동사 관련 서술을 보면 사실들을 이리저리 나열하고 있으나, 기초적인 사실 오류는 물론 서술 방식이나 서술 체계, 그리고 각각의 독립운동의 성격과 의의에 대한 평가 등이 차마 ‘교과서의 대안’이라고 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독립운동사에 관한 한 고치느니 새로 쓰는 게 낫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은 현행 교과서는 일제가 식민지 민중에게 억압과 수탈을 자행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 또한 민족적 편견에 입각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한 것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일제 식민지 통치 시기가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으며, 일제 식민지 통치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와 한국인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 “근대문명을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78쪽)”였다고 새롭게 규정한다. 본문 또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매우 많은 비중을 두어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뉴라이트 교과서의 필자들은 일제가 ‘민사령(民事令)’을 통해 개인의 인격적 존엄과 자유로운 행위, 그리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활동을 조선인에게도 전면적으로 보장했다고 주장한다(84쪽). 일제 식민지 통치 당국의 공권력에 기초한 폭력적 수탈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순수하게 자본주의 경제 교환 관계, 즉 시장 논리에 입각한 교환을 통해 부의 이동이 있었을 뿐이라고 역설한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식민지에 막대한 투자(개발 또는 근대화)를 했지만, 식민지 통치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오히려 일제가 이익 대신 손해를 보았다는 놀라운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한편 조선인들은 이러한 일제의 근대화 시책에 힘입어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으며, 일제의 정책에 잘 적응해 훗날 대한민국 발전의 역사적 기초(근대화 역량 축적)를 이 시기에 이루었다고 주장한다(98쪽). 한마디로 식민지 시기를 대한민국이라는 우량아가 일제 식민지라는 뱃속에서 영양 공급을 잘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나던 ‘대한민국의 임신 기간’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결국 뉴라이트 교과서는 일제의 민족 차별과 폭력적 억압의 실상 대신 일제 식민지 통치의 근대적 효과와 그 성과에 주목하면서, 사실상 ‘식민지근대화론(植民地近代化論)’이나 ‘제국주의시혜론(帝國主義施惠論)’에 입각해 식민지 시기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통치마저 미화하는 마당에 일제의 하수인인 친일파에 대해 이 책이 비판적 시각에서 타당한 서술을 하기란 난망하다 하겠다. 오히려 이 책은 친일파들을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 잘 적응해 근대적 능력을 배양하고,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놓은 ‘근대화의 선구자’로 둔갑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해, 친일행위를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의 실천 활동으로 해석할 길을 만들어주고 있다(78쪽). 특히 지식인·관료·자본가 계층의 친일행위를 근대화 역량의 축적과 건국 후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마련한 행위로 정당화하고, 심지어 이들이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우량아의 DNA 핵심이 바로 이들이라는 양 말이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식민지 시기에 ‘항일은 독립 쟁취, 친일은 건국 역량 준비’라는 기괴한 도식이 성립한다. 서로 적대 개념인 항일과 친일이 둘 다 국가 건설을 위한 ‘애국 활동’이 되는 것이다. 아니, 사실 이들은 근본적으로 ‘근대화·경제 성장=문명화’라는 시각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해석하기 때문에 항일보다는 친일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도저히 지울 수 없다.

 

일제 식민지 시기를 경제가 성장하고 조선인의 생활이 향상된 시기라고 보는 한, 이들의 입장에서 항일독립운동은 근대화의 걸림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제가 ‘문명화’에 쓸 비용을 ‘항일투쟁진영’이 괘씸하게도 소모했으니, 마땅히 이들은 독립운동을 비난해야 자신들의 입장에 충실한 것이 아닐까?

 

참고로 ‘뉴라이트 계열의 대부’라는 안병직 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몇 년 전 국내 유력 극우 일간지에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은(경제상 비용 손실만 초래하여)산업화·경제 성장의 걸림돌”이었다고 언급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논법을 일제 식민지 시기에 적용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물론 뉴라이트 교과서가 친일을 노골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다. 친일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洙)·홍난파(洪蘭坡) 등의 친일활동과 일제 말기, 이른바 ‘전시동원체제기(戰時動員體制期)’에 각계각층의 조선인들이 전쟁 협력 행위에 가담한 사실을 제법 비중 있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최남선을 소개하면서 “1927년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촉탁이 되었고(‘1928년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었고’라고 해야 맞다), 귀국 후 1943년 학도병 지원을 권유하는 강연 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의 재판에 회부되었다(110쪽)”고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한다. 홍난파가 수양동우회검거사건(修養同友會檢擧事件) 이후 “총독부의 정책에 동조(10쪽)”한 친일행적 관련 사실도 밝히고 있다.

 

이광수에 대해서도 본문에서 “그리하여 과거 민족주의 활동으로 이름 높던 많은 지도적 인사가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협력자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이광수(李光洙)는 한국인이 일본인이 되어 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길만이 살길이라는 신념에서 신문과 잡지에 글을 쓰고, 국방헌금과 학도출병을 권유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본문 옆에 이광수를 독자적으로 설명하는 박스에 “1905년 일진회(一進會)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유학(…)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939년에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의 재판에 회부되었다(132쪽)”고 서술하고 있다.

 

전시동원체제를 설명하면서 일제에 대한 조선인 지도층과 일반 민중, 그리고 각 분야의 일제에 대한 협력 행위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현행 검인정 교과서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132쪽).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의 친일행위를 서술하고 있다고 해서 이 책이 친일문제를 역사적으로 제대로 해명하고 있느냐는 별개의 사안이다. 특정한 몇몇 사람들의 친일행적만 언급했을 뿐 일제강점기 전반에 걸쳐 친일문제를 구조적 또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뉴라이트 교과서의 필자는 해방 후 이광수가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는 변명을 소개하면서, 이를 ‘친일 내셔널리즘의 역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45쪽). ‘친일(親日)’과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라는 정반대의 용어를 자의로 결합시켜서 친일문제의 본질마저 흐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기업인들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하거나 심지어 미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친일문제에 대한 뉴라이트 교과서 필자들의 인식이 대단히 편향되어 있거나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기업인들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하거나 심지어 미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친일문제에 대한 뉴라이트 교과서 필자들의 인식이 대단히 편향되어 있거나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동원체제 아래 있던 조선인들의 각종 전쟁 협력 행위에 대한 기술도 자세히 살펴보면,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의도가 역력히 드러난다. 일제 말 조선인 지도자나 민중 대다수가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론에 입각해 ‘친일불가피론’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제에 적극 협력하고 전쟁 동원에 앞장선 친일파들과, 일제의 물자 수탈과 인력 수탈의 대상이 된 일반 조선인들 모두 일제의 침략 전쟁에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협력’했다는 식으로 서술해, 과거 친일파들의 단골 변명인 ‘전민족친일공범론’을 답습하고 있다. 이는 가해자인 친일파와 피해자인 조선 민중을 모두 일제에 협력했다는 식으로 한데 묶음으로써 사실상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

 

더구나 일제 식민지 통치와 침략 전쟁에 앞장선 이들을 대한민국 발전의 주역이라 보고 있기 때문에 ‘친일미화론=친일파 건국기 여론’마저 그 속에 품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최근 이들이 주창하고 있는 ‘건국절 제정’ 주장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면 뉴라이트 교과서의 친일문제 인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② 기업인의 친일행위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가?

 

뉴라이트 교과서는 기업인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하고 있다. 오히려 이들의 친일행위조차 “조선인 기업의 성장” 또는 “한국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미화하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조선인 기업이었던 경성방직과 화신(和信)에 대한 다음 서술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식민지의 경제 발전은 일본인과 일본 자본이 주도하였지만, 한국인과 한국인 자본이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 상인과 기업인 중에는 경제환경의 변화에 잘 대응한 자도 많았다.

 

한국인 공장은 대체로 종업원 10명 미만의 영세한 규모였다. 법인으로 등록된 회사 자본 가운데 한국인 자본 비중은 10% 정도에 불과하였다. 일본인 공장과 기업은 그 규모가 월등하였다. 그러나 불리한 여건에도 한국인 상공업자들은 공장을 건설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경성방직과 화신은 면방직업과 백화점 부문에서 일본인 기업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평양 일대에서는 한국인 자본이 주도하는 양말·메리야스 공업과 고무신·신발 공업이 발달하였다(99쪽~100쪽).˝

 

˝경성방직주식회사

 

전시기에는 원료의 조달에서 제품의 판매에 이르기까지 통제가 심해졌으나, 공장가격이 업체에 유리하게 책정되어 고수익을 올렸다. 전시통제로 사업 확장의 기회가 막히자 이전부터 제품의 중요 수출시장이던 만주로 진출하였다. 1939년 말 남만주방적주식회사를 100% 지분의 자회사로 설립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자본 수출이었다. 경성방직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공업이자, 지주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대표적 사례를 이루었다. 그를 통해 양성된 인력은 해방 후 한국 면방직 공업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뉴라이트 교과서의 주장대로 경성방직의 사장 김연수(金秊洙)는 정말 “경제환경의 변화에 잘 대응한 자”로서 “불리한 여건에도 공장을 개척하는 수완”을 발휘해 조선인 경제 성장의 신화를 이루었을까? 또 김연수의 형이자 경성방직의 창립자인 김성수(金性洙)를 “1919년 경성방직회사를 창설하여 민족자본을 육성”한 인물로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1939년 말 경성방직이 남만주방적주식회사를 100% 지분의 자회사로 설립한 설립한 사실을 두고,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자본 수출”이며, 경성방직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공업이자, 지주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대표적 사례”로만 평가해도 괜찮은 것일까? 경성방직을 통해 양성된 인력은 해방 후 “한국 면방직공업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그 ‘역사적 의미’를 정리하는 것이 과연 역사 교과서 서술로 충분한 것인가?

 

역사학이란 다양한 사실들을 인과적으로, 시간적으로 종합 서술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문과학적 가치 개념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란 서로 다른 가치관과 욕망과 이익 추구가 충돌하는 공간이다. 누군가의 사소한 이익이 다른 사람에게는 치명적 피해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역사가는 이러한 사회 현상을 자신의 역사관(인간과 사회에 대한 가치관)의 기초 위에서 재구성한다. 그것은 당시 역사적 상황과 엄밀한 사실의 기초 위에서, 그리고 인과의 사슬 위에서 인간이 추구할 길을 모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성방직이 경제 성장에 일조하고 그 인력이 해방 후 대한민국 면방직공업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성방직이 어떻게 해서 일제강점기에 “눈부신 성장”을 했는지, 그리고 “그 눈부신 성장”의 성격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밝혀야 할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경제 성장사란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매우 부분적이며, 그 역사적 평가도 매우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1920년대를 지나 1930년대 중반, 특히 중일전쟁으로 나아가면서 경성방직의 성장은 ‘민족기업으로서의 고난 어린 발전’이라기보다는 그 사주(社主)인 김성수와 김연수 형제의 열성적인 친일행위에 크게 힘입었다.

 

뉴라이트 대안 역사 교과서가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자본 수출”로 높이 평가하는 경성방직의 자회사 남만주방적주식회사는 1939년에 설립되었다. 만주를 무대로 경성방직이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남만주방적회사의 설립과 비약적인 발전은, 이 시기 김연수의 적극적인 친일행적과 이력을 같이 대비하면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김연수는 1937년 국방헌금 1만 5천원 및 북중국 주둔 일본군에 5천원을 헌납하고 경기도 애국기 헌납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이듬해에는 조선총독부 물가위원과 시국대책조사회 위원,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각각 역임하고 육해군 국방헌금 10만원을 헌납했으며, 경성군사후원연맹에 후원금 3천원을 헌납했다. 1939년에는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이사, 조선총독부 조선중앙방공위원회의 임시위원, 조선산금협의회 위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경성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한성은행 취체역, 배영동지회 상담역, 조선총독부 조선중앙임금위원, 남만방적주식회사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1940년에는 조선총독부 국토계획위원을 지내고 일본 도쿄에서 열린 기원 2600년 기념축전에 참석했으며, 조선방적 이사장과 기원 2600년 축전기념장을 지냈다. 이어 1941년에는 국민총력운동금 3만원을 헌납하고 동아경제간담회조선위원과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와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및 상임위원을 역임하였다. 민규식(閔奎植)·박흥식(朴興植) 등과 함께 임전보국단비 20만원을 공동헌납하고, 임전보국단 발기인 겸 상무이사를 지냈으며, 경성상의(京城商議) 의원과 조선방송협회 상무이사, 조선사회사업협회 이사를 지냈다. 1942년에는 일본군용기 구입비 10만원을 헌납하고 매일신보사 상임취체역, 경성부사회사업협회 이사, 국민총력연맹 후생부장을 지내고 도쿄 메이지대학에서 학병 권고 강연을 펼쳤으며 동광생사주식회사 취체역, 조선방적공업조합장을 지냈다. 1943년에는 민규식·박흥식 등과 함께 반도청년의 연성(鍊成)을 위한 기관설치비를 위해 청소년 연성비로 각각 5만원씩 국민총력연맹에 헌납하기도 했으며, 1944년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고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발기인 및 대표, 경기도상공경제회설립위원과 선배격려단 간부를 역임했다. 1945년에 조선국민의용대에 참여하고 매일신보에〈감격의 징용제 실시〉란 글을 발표했다.

 

요컨대 경성방직 또는 남만주방적회사의 눈부신 성장은 전시체제기 특급 친일파의 하나로 꼽기에 주저할 필요가 없는 김연수의 친일·반민족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 사장인 김연수가 남만주방적회사 설립 전후에 만주국명예총영사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었고, 1941년에 친일파의 ‘전국구 대표 조직’이라 할 중추원의 참의가 된 것도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일제의 침략 전쟁과 조선인 강제 동원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경성방직은 성장했고, 남만주방적회사를 만주에 설립할 수 있었다. 경성방적의 입장에서 일제의 침략 전쟁과 영토 확장은 시장 확대였고, 일제의 패망은 시장 상실을 뜻했다. 만주를 시장으로 한 남만주방적회사의 운명 또한 일제와 공동 운명에 있었다. 일제와 공동운명체, 그것이 남만주방적회사의 본질이었다.

 

이것이 뉴라이트가 말하는 사주 김연수가 “불리한 여건에도 공장을 개척하는 수완”이었고, “민족자본”으로 불리던 경성방직의 실상이었다.

 

뉴라이트 교과서가 경성방직과 함께 자랑하고 있는 화신기업의 사주 박흥식의 친일행적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책은 화신이 “일본인 기업과의 치열한 경쟁”으로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 ‘치열한 경쟁’의 실상은 무엇이었을까? 박흥식의 행적을 살펴보면 자연 드러난다.

 

1937년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에 임명되어 국방헌금 5천원을 종로경찰서에 헌납하고, 조선 신궁을 중심으로 일본인의 정신을 발양하여 국운의 융창을 도모하는 한편, 국가안태무운장구(國家安泰武運長久)의 기원제를 거행하고자 조선인 유지 26명이 발기하여 조직한 기원거행준비회 발기인으로서 경기도애국기헌납발기회에 참석하고 애국경기호 헌납기성회 집행위원을 지냈다. 1938년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겸 이사를 지내고 조선총독부 물가위원과 시국대책조사회 위원,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이듬해에는 경성부지원병후원회 이사와 배영동지회연맹 상담역, 조선중앙임금위원을 지내고 1940년에는 경성경제통제협력회 상임이사, 기계화국방협회지부 이사를 역임했다. 충남 부여에서 신궁이 건설되자 신궁조영근로봉사단으로 참여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와 흥아보국단 삼임위원 및 경기도위원을 역임했으며, 임전대책협의회 위원으로서 삼천리사 주최 임전대책협의회 대좌담회에 참석했다. 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상무이사로서 일본의 태평양전쟁 개전에 맞추어 ‘실업계는 오로지 일본 정부의 정책에 전적 신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필승불패의 신념하에 모든 것을 국가제일주의로 매진할 일대 각오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1942년에는 조선사법보호위원회 산하 경성사법보호위원을 지내고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의 초청으로 도쿄에서 개최된 전일본산업경제간담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해 일본 황제를 알현했다. 1944년에는 국민동원총진회 감사, 경성사법보호위원, 제단법인 기계회국방협회 조선본부 이사를 지내고 1945년 4월에는 매일신보에〈대조를 받자옵고-광영을 빛내오리, 발분정려 성은에 봉부〉라는 제하의 담화를 발표했다.

 

화신은 사주인 박흥식이 총독부 지배 권력에 철저하게 협력하고 그 시책에 앞장섬으로써 자본 축적과 기업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도를 넘는 친일행위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그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4조 7항 ‘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장을 경영한’ 죄로 첫번째로 연행, 구속되기도 했다.

 

물론 뉴라이트처럼 민족적 관점을 버리고 인간의 합리적 이기심만 따르자면, 박흥식의 행위는 적절하게 시의(時宜)에 부합한 것으로만 쓸 수도 있겠다. 기실 뉴라이트가 민족주의 관점을 비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근대화 또는 경제 성장의 역사라고, 근대화 역량이 축적된 시기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민족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틀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 시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현상에서의 변화를 식민지라는 특성을 외면하고 ‘자본주의화=근대화’라는 등식으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그 안에는 지배 민족인 일본 민족이 있었고, 피지배 민족인 조선 민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민족차별정책은 최후에는 민족 말살로까지 나아갔다. 적어도 식민지에서 민족차별문제는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알 수 있는 핵심 요소이다.

 

자기 국가가 없다는 것은 자본가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사주인 안희제(安熙濟)는 평생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다 기업은 망하고 그 자신도 투옥되어 고문을 받다가 순국했다(1942년 임오교변(壬午敎變);옮긴이 註). 반면, 일제에 협력한 김연수나 박흥식은 출세하고 그 기업은 성장했다. 이것이 식민지의 조선인 자본가가 대면한 현실이었다.

 

뉴라이트 계열은 일제 식민지 지배 아래서도 조선총독부는 한국인들에게 경제 활동의 자유를 배제하지 않았으며, 한국인 자본가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0% 이상 존재했다는 사실을 들어 한국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조선을 강제로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다면, 조선인 자본가 비율은 10%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높았을 것이라는 상식을 외면하고 있다. 조선이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경성방직과 화신은 친일·반민족행위나 불필요한 국방 헌납을 하지 않고 기업의 자기 성장만 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산상회와 안희제 선생이 겪어야 했던 ‘식민지 비극’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상적인 ‘대안 교과서’라면 화신이나 경성방직의 성장만을 높이 칭송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이러한 경제 성장이 이들 사주(社主)의 도를 넘은 친일행위와 이로 인한 조선 민중의 희생의 대가였음을 같이 서술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교과서포럼은 이러한 역사의 진실은 외면하고 오로지 자본의 성장을 위해서는 어떠한 공공의 책임성도 필요없는, 오로지 자본의 증식만이 목적인 “영혼 없는 자본가”가 교과서에서 가르쳐야 할 기업인의 상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경성방직이나 화신은 민족자본이라기보다 정경유착(政經癒着)(그것도 제국주의 권력과)과 모럴 해저드를 기축으로 한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의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정경유착과 불법 운영으로 물의를 빚는 한국의 재벌들이 왜 뉴라이트 교과서를 적극 응원하는지 해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③ 일제 말 친일문제에 대한 인식

 

뉴라이트 교과서는 ‘국내의 전쟁 협력과 저항’이라는 항목을 통해 일제 말(전시총동원체제기)의 친일(‘친일’ 대신 ‘전쟁협력’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글쓴이 註)양상을 서술하고 있다. 집필진도 친일문제를 의식하고 서술하려고 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다음 글을 살펴보자.

 

˝국내에서 총독부의 폭압적인 전시동원정책에 대해 한국인이 정면으로 대항하기는 어려웠다. 1937년 총독부는 안창호 계열의 온건한 민족인사 180여명을 검거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재판에 회부하였다(동우회 사건). 총독부는 약간의 민족적 색채를 띤 단체나 활동도 여지없이 탄압했으며, 이에 한국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일제의 폭력에 굴종하였다. 다른 한편, 만주사변 이래 일제가 계속 전쟁에 승리하자 많은 한국인은 점차 독립의 희망을 잃어갔다. 나아가 그들은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하면 이제까지의 차별을 벗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하여 과거 민족주의 활동으로 이름 높던 많은 지도적 인사가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협력자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이광수는 한국인이 일본인이 되어 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길만이 살길이라는 신념에서 신문과 잡지에 글을 쓰고, 국방헌금과 학도출병을 권유하였다. 그 뒤를 이어 대부분의 유명한 교육자, 기업인, 문학인, 음악인, 미술가, 무용가들이 같은 활동을 하였다. 종교계도 일제에 협력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폐교하겠다는 총독부의 협박에 대부분 기독교계 학교는 신사참배를 수용했지만 주기철·손양원 목사 등과 같은 소수의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였다.

 

보통의 한국인들도 강제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전시체제에 참여하였다. 황민화 교육이 한창이던 전시기에 수많은 한국인 학생이 각급 학교에 다투어 진학하였다. 졸업생들은 전시공업화 정책으로 늘어난 국내외 일자리에 취업하였다. 하급직의 관료와 회사원은 징집된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남긴 자리를 이어받았다.

 

상공업자들은 1943년 전반까지 계속된 전시 경제의 호황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일제의 광기 어린 전시체제에 저항하기는 어려웠다. 공공연히 협력자로 나서지 않은 애국지사들도 식민지 말기 수년간은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다.˝

 

위 글은 일제 말의 친일양상보다는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 설명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먼저 뉴라이트 교과서는 일제의 폭력 앞에서 모든 한국인들은 굴복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일제의 폭압과 지속되는 전쟁 승리에 “점차 독립의 희망을 잃어갔다”고 서술해, 어차피 항일독립운동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인식하는 한 남은 것은 체제에 대한 순응과 협력뿐일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독립불가능론’을 기초로 “과거 민족주의 활동으로 이름 높던 많은 지도적 인사”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유명한 교육자, 기업인, 문학인, 음악인, 미술가, 무용가, 종교계”는 물론 보통의 한국인들까지 모두 일제에 협력하거나 전시체제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친일’ 또는 ‘협력’을 필연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제에 협력한 동기에 대해서도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하면 이제까지의 차별에서 벗어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일제에 협력하는 대가로 차별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한 결과는(상급 학교로의)진학과 “전시공업화 정책으로 늘어난 국내외 일자리에 취업”하는 것이며, “하급직의 관료와 회사원은 징집된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남긴 자리를 이어받은(승진했다는 뜻을 살짝 고쳐 표현한 것임)것”이라고 서술하였다. 상공업자들은 “1943년 전반까지 계속된 전시 경제의 호황으로 사업을 확장”했다고 하였다. 한국인들이 일제에 협력하자 사실상 일제는 그 기대에 보답해주었다는 것이다.

 

이 서술대로라면 전시체제기야말로 조선인에게는 독립의 의지만 버리면 행복이 보장되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서술을 하면서 뉴라이트 교과서 필자들은 이 시기를 왜 “일제의 폭압적인 전시동원체제기”로 규정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결국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일제 강점기 가운데 가장 비참하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된 때가 전시동원체제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역사의 진실보다는 조선인들에게 ‘신분상승의 기회가 온 절호의 시기’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친일행위는 그러한 절호의 기회를 잡는 수단이었다. 자신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 행위(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인간의 이기심의 발휘)가 곧 친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 엘리트 세력이 친일을 통해 근대문명의 제반 능력을 습득해 해방 후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했다는 논법으로 이어가기 위한 교묘한 장치이기도 하다.

 

일제에 저항하기 어려운 조건 아래 지도자는 물론이요 대중들까지 굴종하는 “숨죽여 지내는 시기”라는 상황론과 독립불가능론은 당연히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식이다. 이미 1937년부터 1945년 일제 패망기까지 언론에 보도 통제되어을 뿐, 일제의 기밀문서에 따르면 수많은 항일비밀결사조직이 국내 곳곳에서 지하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또 공장의 태업과 징용·징병 거부, 입산 활동, 유언비어의 유포 등 다양한 형식으로 저항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945년 7월에는 서울 한복판인 부민관에서 친일파 박춘금을 폭살하려는 의열투쟁마저 있었다. 좌익의 경성콤그룹이나 좌우를 아우른 건국동맹과 같은 전국적 지하운동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감옥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넘쳐나고 있었다. 해외에서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있었고, 국내에서도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건국동맹의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다가올 해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시체제라는 어려운 조건 아래서도 독립을 준비하며 투쟁을 전개한 수많은 항일조직 사건과 개인들의 투쟁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순응과 타협만이 당대의 유일한 살길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현행 교과서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 시기에 활동한 애국지사들에게 참으로 모욕이 아닐 수 없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는 대세에 순응하고 힘에 굴복하는 것과 그 속에서 자신의 성공 기회를 잡으라는 처세를 교과서를 통해 가르치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뉴라이트 교과서의 독립불가능론은 상황론에 기대어 ‘친일불가피론’을 정당화한다. 결국 모든 친일행위는 사실상 시대 상황의 산물일 뿐이며 구체적 친일행위자의 역사적 책임은 사라져버린다. 그렇게 보자면 1910년 병탄 또한 상황론상 불가피하다고 말할 수 있고, 이완용의 매국 행위도 그러한 시대에 대응한 불가피한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이완용은 자신이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그리고 친일파로 변신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宜]을 따르는 것[制]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를 또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이는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이완용의 ‘수시변역(隨時變易;시대 상황에 맞춰 적응하는 것)’은 모든 친일파들의 대표적인 변명이었다. 친일파들이 언제나 “시대의 대세에 순응했을 뿐이며, 친일이 이 시대 민중들을 위한 길”이라고 주장했던 내용을 뉴라이트 교과서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특히 국제 정세에 대한 한국인의 능동적 대응에 관한 인식에서 잘 드러난다. 

 

교과서포럼 관계자들은 한국인들이 국제 정세를 잘 이용한 것을 대한민국 성공 신화의 비결로 거듭 강조하고 있다. 전근대 시대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20세기 전반에는 일본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를 통해. 그 이후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성공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6쪽). 그렇다면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이야말로 일본 주도의 질서 속에 잘 적응하면서 성공 신화의 기초를 일군 자들일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일제에 협력한 동기에 대해서도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하면 이제까지의 차별을 벗어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이 주장은 이광수 등 많은 악질 친일파들이 자신의 친일 행위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런 논리에 입각한 일제와 친일파의 전쟁 동원 정책의 희생자였다.

 

전시체제기 대다수 조선 민중들은 일제의 전쟁 동원 대상이었지 친일 주체가 아니었다. 친일은 적극적, 능동적 행위이며 행위에 대한 책임이 뒤따른다. 일제의 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떠들면서 조선인들을 전쟁으로 내몬 사람들과 징병·징용·정신대 명목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다같이 일제 협력자로 몰아붙여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을까? 일제 침략 전쟁의 소모품으로 끌려가는 대다수 조선인이 징병·징용에 자원하면 차별을 벗어날 것이라고 믿었단 말인가?

 

뉴라이트 교과서 필자들은 교묘하게도 ‘일제에 대한 (전쟁) 협력’과 ‘전시체제에 참여’이라는 용어를 통해 지도자급 인사를 포함한 지식인·종교인·문화예술인·기업인 등의 적극 친일 행위를 일반 민중들의 ‘제국주의 전쟁 희생’과 섞어버렸다.

 

결국 모든 한국인이 일제에 협력을 했다고 서술해 전 조선 민중을 일제 협력자로 몰아 모두가 죄인이거나 모두가 무죄라는 식으로 유도하고 있다. 결국 친일파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니 만큼 뉴라이트 교과서 내용 중 ‘국내의 전쟁 협력과 저항’이라는 제목은 ‘친일파를 위한 변명’이라고 바꾸어도 되지 않을까?

 

이런 친일파 옹호는 그들이 식민지 시대를 바라보는 근본 인식, 즉 식민지근대화론의 광신과 역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자본주의의 동력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개인의 이기심(욕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에 대한 몰가치한 인식이 있다.

 

물론 인간의 이기심은 개인은 물론 역사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속성이다. 특히 자본주의 인간형은 그런 측면을 적극 인정한다. 그러나 이 이기심은 공공의 가치와 긴장 관계 속에서 제한되어야 할 성질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속에 붕괴되고 말 것이다. 학교에서 도덕이나 사회윤리 또는 공공의식을 가르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뉴라이트 교과서는 친일마저 인간의 이기심 또는 욕망의 실현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 시기 만주국군 장교가 된 것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교사를 하던 박정희가 단지 “군인이 되고픈 평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40년 만주국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94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했다고 쓰고 있다.

 

중일전쟁이 한창 고조될 무렵 당시로는 조선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교사직도 스스로 팽개치고 만주국군관학교에 입교하고, 나중에 일본 육사를 졸업해 만주국 직업장교로 복무한 것을 단지 ‘군인이 되고 싶은 평소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청소년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 이 시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군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역사 교과서답지 않을까? 더구나 이런 행적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장교로 복무한다는 것은 직업군인으로 출세하겠다는 것이다. 교사직마저 내던지고 일본 관동군이 만든 만주국의 장교로 복무한다는 것은 곧 만주 지역 항일무장투쟁 세력을 ‘토벌’함으로써 전공을 세워 출세하겠다는 뜻이다. 일제에 대한 가장 자발적인 충성의 전형이라 하겠다. 이 사실마저 “군인이 되고픈 평소의 꿈을 실현”하는 것으로 쓴다는 것 자체가 이들의 도덕적 불감증을 보여준다. 친일이라는 역사적 죄과를 개인의 출세를 향한 순수한 동기로 설명하는 책은 결코 역사 교과서가 될 수 없다.

 

④ 대한민국 건국과 친일파:대한민국은 민족주의 세력이 주도해 세웠는가?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이후 대한민국사에서 마땅히 청산되어야 할 친일파 후예 세력이 오히려 건국 과정을 주도하고 대한민국의 각 분야를 장악해 일제 시기 친일로 얻은 기득권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그대로 이어왔음은 역사학계의 상식이다. 반민특위의 해체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친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세력들이 권력을 잡았던 시기에 교과서는 이 사실을 언급할 수 없었을 뿐이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한’ 나라라면 마땅히 친일파를 청산했어야 할 텐데, 왜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파가 권력을 장악했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역사의 상식 차원에서라도 마땅히 제기되어야 할 문제이다.

 

사실 해방 후 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친일파 청산 좌절이 미군정의 한반도 분할 전략과 이승만의 권력욕, 그리고 반공주의를 매개로 이루어진 친일파의 생존 전략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그런데 뉴라이트 교과서는 대한민국이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강변한다. 그 증거로 드는 것이 제헌의회 의원 당선자를 분석한 다음의 글이다.

 

˝제헌의회 위원들의 출신을 통해 본 대한민국 건국 세력의 역사적 배경

 

(1948년)5·10선거로 선출된 국회위원은 총 209명이었다(정원 200명, 보궐·재선거 9명). 이들의 경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한 중심 세력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전체 209명 가운데 민족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68명이었다. 3·1운동이 35명으로 가장 많았고, 신간회가 14명, 만주독립군과 동북항일연군이 10명, 학생운동·청년운동·노동운동이 20명이었다. 조선공산당 5명 등과 같이 좌익운동에 참여한 사람도 있으나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했던 정치 세력은 식민지 시기에 고등교육을 받고 상공업자, 지주, 하급관료, 교원, 의사,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업인으로 성장해온 사람이 대부분이며 그들의 정신세계는 민족운동 참여 경력이 이야기하듯이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었다.

 

건국 과정에서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친일파는 모두 배제되었다. 5·10선거에서 만 25세 이상의 모든 국민은 피선거권을 가졌지만,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제국의회 의원, 관리로서 판임관(判任官) 이상 직위자, 경찰관·헌병·헌병보로서 고등관 이상 직인 자(잘못 기술한 내용이다), 훈(勳) 7등 이상을 받은 자, 중추원의 부의장·고문·참의 등에게는 피선거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건국 세력은 크게 보아 개화기 이래 구래의 중간 신분으로서 개화사상을 체득하고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면서 전문적 직업 능력을 키워온 민족주의자들이었다(143쪽).˝

 

뉴라이트 교과서는 제헌의회 당선자들을 분석한 것을 기초로 건국과정에서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친일파는 모두 배제되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먼저, 미군정 시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제정한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선거권 제한 조항과 제헌국회의 국회의원 ‘선거권’ 제한 규정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제정한 선거권 제한 조항에 따르면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또는 간상배(奸商輩)로 규정된 자”에게는 선거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피선거권은 “1. 중추원 부의장, 고문, 참의 2. 부(府), 도(道)의 자문(諮問)이나 의결기관의 의원 3. 고등관으로 3급 이상, 훈4등급 이상(기술관, 교육자는 제외) 4. 판임관 이상의 경찰관, 헌병·헌병보, 고등경찰 또는 밀정행위를 한 자” 등이었다.

 

제헌의회의 국회의원 피선거권은 입법의원과 동일했다. 그러나 과도입법의원과 제헌의회의 피선거권 규정 자체가 “(친일)민족반역자를 선거에서 배제하는 것이 지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먼저 명시해야 할 것이다. 또 제헌의회의 선거권 제한 규정이 입법의원의 그것보다도 크게 후퇴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제헌의회의 국회의원 선거권은 “1. 일본 정부로부터 작(爵)을 받은 자 2. 일본제국의회 의원이었던 자”에만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과도입법의원보다 그 적용 범위가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제헌의회 선거는 해방 후 3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친일파에 대한 대중의 적개심이 매우 높은 시기였다. 피선거권이 있는 친일파라고 해도 친일행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경우에는 출마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미군정의 친일파 중용 정책에 의해 피선거권이 제한된 경찰관, 헌병·헌병보, 고등경찰 등은 이미 경찰 또는 군의 요직,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굳이 민중의 지탄을 받으면서 선거에 출마해 자신의 친일이력을 알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온 기득권을 해방 후에도 유지하면서 환호작약하였다.

 

교과서포럼이 제헌의회 당선자의 직업과 경력을 분석하면서 “대한민국의 건국 세력”을 “크게 보아 개화기 이래 구래의 중간 신분으로서 개화사상을 체득하고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면서 전문적 직업 능력을 키워온 민족주의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수긍하기 어렵다.

 

그들이 예로 든 대부분의 인사들은 민족주의자라기보다 자본주의근대화론에 입각한 중·상류 엘리트층을 일컫는다. 반공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민족주의라고 규정할 논리 근거는 없다. 실제로 좌익만이 아니라 민족주의 주류는 분단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제헌의회 선거에 대부분 불참했다. 그러나 뉴라이트 교과서는 항일의 상징이자 정통성이 가장 강했던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비롯한 임정 계열이나 안재홍(安在鴻) 혹은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과 같은 중도우파는 물론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등의 중도좌파와 박헌영(朴憲永)과 같은 좌익 지도자 대부분이 제헌의회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거론하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절대 다수가 분단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이른바 건국 과정에 참가하지 않았던 사실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더 역사 교과서다울 것이다.

 

전체 제헌의원 당선자 209명 가운데 한 번이라도 민족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고작 68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서글픈 것 아니겠는가! 제헌의원 당선자 가운데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벌였던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었다.

 

더구나 제헌의회 의원의 성향과 일제 시기 행적 분석을 하자면 친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도 있다. 제헌의원 가운데 한국민주당의 핵심 간부인 윤치영(尹致暎)이나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張勉), 천도교 지도자인 이종린, 사회주의 전향자 이항발, 제헌의회 초대 부의장 김동원, 국회 부의장을 지낸 이재학(李在鶴), 친일승려 허영호 등은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에 포함되어 있다.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제헌의회를 구성했으므로 대한민국 정통성을 뒷받침한다는 주장은 논리나 사실 면에서 틀리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대한민국의 민족주의 정통성을 얘기하면서 ‘건국’ 이후 대한민국 행정부·입법부·사법부의 고급 간부들 가운데 상당수가 친일파 출신이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에서 제3공화국 시기 역대 대통령, 주요 장관, 국회의장, 대법원장, 검찰총장, 군과 경찰 수뇌부를 점한 친일파들의 비중은 대한민국이 과연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한 나라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이다.

 

2006년 민족문제연구소와 세계일보사가 공동 기획, 조사한 특집 기사〈1~3공 파워엘리트 해방 전 이력 대해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3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친일파 또는 이에 상당하는 부일협력자가 대한민국 권력의 요소요소를 얼마나 장악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조사표에 따르면, 대한민국 제1공화국에서 제3공화국 시기 법무부 장관 13명 가운데 9명이 일제 시기 판·검사 출신이었다. 대법원장 4명 가운데 3명이, 검찰총장 8명 가운데 7명이 조선총독부 판·검사 출신이었다. 검찰 총수(치안국장) 4명 가운데 3명이 조선총독부 검사나 경찰 간부 출신이었다. 국방부 장관은 10명 가운데 8명이 일본군 혹은 만주국군 장교 출신이거나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였다. 교육부 장관의 경우 7명 가운데 6명이 고급 친일 협력자 출신이었다.

 

이 부분을 슬쩍 빼고 제헌의회만을 논하는 것은 대단히 자의적이며 그 동기가 의심스럽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친일파와 손을 잡았고, 군·경찰 계통 친일파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독재 권력의 앞잡이로 변신했다.

 

미군정 시기 친일파 청산은 실패했지만, 제헌의회가 반민특별법을 제정해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특위가 출범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청산을 시종 반대하였고, 결국 1949년 6월 6일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 사무소를 포위하고 특위 소속 특경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에 반민특위 조사위원들이 1949년 7월 7일 총사직하는 등 진통을 겪다가 8월 13일 공소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반민족행위자 처벌은 무산되고 말았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반민특위가 경찰의 습격을 받고 이후 해체되었다고만 했지, 왜 경찰의 습격을 받았는지와 누가 지시했는지 등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 반민특위 해체 결과 친일파 청산이 좌절된 것도, 친일파들이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제거하려고 한 사실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 결과 이 책은 친일세력이 얼마나, 어떻게 대한민국 권부(權府)를 장악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건너뛰고 있다(145쪽).

 

이런 점을 지적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는가? 또 이런 사실에 대한 문제 제기를 종북 좌파의 음해로 몰고 갈 작정인가?

 

⑤ 건국절 논란과 친일문제

 

최근 뉴라이트 교과서포럼 관련자들은 8·15해방 기념일을 광복절 대신 건국절로 기념하자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2006년 7월 31일자《동아일보》에 실린〈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글은 그러한 논리가 어떤 역사관에서 출발햇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광복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광복은 일제가 무리하게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다가 미국과 충돌하여 미국에 의해 제국이 깨어지는 통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광복을 맞았다고 하나 어떠한 모양새의 근대국가를 세울지, 그에 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빛은 1948년 8월 15일의 건국 그날에 찾아왔다. 우리도 그날에 국민 모두가 춤추고 노래하는 건국절을 만들자.˝

 

이 논리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한 민족해방운동의 역사와 관계가 없고, 당연히 임시정부의 역사나 기타 항일투쟁의 의미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놀랍게도’ 이 글은 일본의 극우 인사,『산케이신문』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의 다음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한국 정부의 역사관은 ‘잘 싸웠다 역사관’이다. ‘잘 싸웠다 역사관’이란 한국 정부가 국정 교과서의 기본으로 채택하는 사관으로서, 한국 민족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 결과 독립을 쟁취하였다고 주장하는 사솬을 일컫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동아 전쟁에서 한국은 일본과 전쟁을 벌인 상대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1945년의 독립은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패배로 저절로 주어진 것이지 한국이 스스로 쟁취한 것은 아니다.”

 

결국 뉴라이트 계열의 주장대로라면 우리의 독립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전후 청산(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등)에서 우리가 아무런 발언권을 가질 수 없음을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다. 교과서포럼 관계자들은 현행 검인정 교과서가 대한민국을 폄하하는 자학사관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지만, 자신들이야말로 일본과 미국에 자지러지는 ‘자학사관’과 ‘패배주의 사관’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하겠다.

 

한편 이들은 1948년 8월 15일 성립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에서 건국절을 주장하는 근거를 찾고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은 20세기 세계사에서 “원식민지 국가 중에서 비견할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큰 성공”, 즉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고도성장(산업화)과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한 ‘모범국가’이며, 북한은 실패한 불법국가라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의 60년 건국사는 지난 3세기 동안 한반도에서 전개된 인류 보편의 문명 요소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역사이며, 바로 이 점에서 모든 국민은 역사적 정통성을 자각하고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저력을 확인하고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과 그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국민적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서, 1945년 8월 15일 ‘광복절’보다는 1948년 8월 15일 ‘건국절’을 더욱 중요하게 기념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항일투쟁을 통해 성립한 자주독립국가로 상정하기보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3년간의 좌우투쟁 속에서 한반도의 반쪽이라도 지켜낸 반공국가이자 자본주의 국가의 탄생이라는 점에 대한민국 건국의 근본 의의를 두고 있다. 반공과 시장경제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야말로(사실 이승만 정권 등 1980년대까지 역대 정권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대한민국의 정통성이라는 것이다. 건국절은 이러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자랑하고 정통성 수호 의지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부를 것이냐 정부 수립일로 부를 것이냐는 논리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이들이 건국절을 기념하는 논리는 ‘색깔론에 입각한 국시 제기’와 ‘친일파 미화’라는 매우 위험한 요소를 안고 있다.

 

교과서포럼의 건국절 제기는 한국의 극우 세력에게 커다란 힘을 주고 있다. 건국절 제정에 대한 우익 인사 양영태 자유언론인협회장의 칼럼이 이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60주년 건국절, 이명박 정권 도약기로 승화시켜야! 건국절, 반(反)대한민국 요소를 척결하는 애국심 함양과 국정 쇄신의 계기로 삼자!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건국되었고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였다. 따라서 금년인 200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탄생 60주년이다. 60주년 건국절을 맞이하여 친북좌파들은 그들의 존재가 멸망하게 될 위기에 처하자 대한민국 건국절을 없애기 위하여 갖은 위선과 선동선전술 및 역사 왜곡으로 대한민국을 파괴하기 위한 반(反)대한민국 총공세를 펴고 있다.

 

소련의 꼭두각시이자 침략자인 김일성을 종주로 삼고 있는 친북좌파들에게는 역사적인 8·15건국절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설 땅이 없기 때문에, 좌익들의 특성이자 주 무기인 역사 왜곡, 선동, 허위 사실을 유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려고 포퓰리즘을 극대화시켜 최후 발악을 하고 있다. (…)

 

이들이 그들 스스로 생존 전략의 방편으로 대한민국 건국절에 대해서 갖은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은, (…) ‘대한민국은 민족 분단을 위해 미국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들이 세운 국가’라는 반역사적인 흉측한 공산주의좌파식 선동선전술로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대한민국을 파괴시키기에 혈안이 되기 시작했고, 건국 6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친북좌익세력의 광기는 아마도 최고조에 달할 것이라는 말 그대로 최후 발악을 기획하고 있는 것이다. (…)

 

친북좌익들이 미국의 앞잡이로 왜곡 매도하고 있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오히려 미국에 의하여 정치 공작과 강한 견제 속에서도 대한민국을 꿋꿋하게 지켜온 건국 영웅임은 역사가 이를 이미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는 8월 15일 건국 60주년 ‘건국절’을 대대적인 국정 쇄신의 계기로 삼아 새로운 각오로 대한민국을 혼란지경으로 내몰고 있는 친북좌익들을 철저하게 척결하고 그들과 연계되어 있는 부패 세력 및 반국가 인사들을 대한민국 국법에 따라 엄중히 처리하기를 이명박 행정부에 권고하고 싶다.

 

오는 8월 15일 건국절을 계기로 우리의 대한민국이 강력한 민주 법치국가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60주년 건국절을, 반(反)대한민국 요소를 척결하는 애국심 함양의 지렛대로 삼아야 할 것이다. 60주년 건국절을 이명박 행정부의 도약기로 승화시켜야 한다.˝

 

요컨대 건국절 제정을 통해 반공과 자본주의 시장경제 옹호를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또는 정통성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고, 이를 수호하는 날로 삼자는 것이다. 나아가 대한민국 건국 세력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친북좌익들을 척결하는 애국심 함양의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대한민국 건국절이란 한마디로 ‘빨갱이 소탕일’을 만드는 것이다.

 

반공과 자본주의가 대한민국 정통성의 요체인 한, 대한민국은 항일투쟁의 역사 속에서 정통성을 구할 수 없다. 과거 극력하게 친일행위를 했더라도 해방 후 ‘빨갱이’만 때려잡으면 반공애국투사이자 건국 공로자가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항일독립운동에서 구하지 않고 반공건국투쟁에서 찾는 한, 친일파는 여전히 애국자 또는 건국 공로자로 대한민국에서 길이 영광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친일파에게 반공은 이데올로기 이전에 절실한 생존 수단이었다. 오늘날 친일세력과 그 후계들이 친일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빨갱이’ 즉 김정일 추종자들로 몰고, 극단적 반공주의와 냉전 구도를 유지하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하에 있다.

 

뉴라이트 특유의 식민지근대화론은 대한민국을 일제 식민통치의 근대화 성과를 계승(조선총독부의 법통성을 승계)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들의 대한민국 정통성론에 입각한 건국절 제기는 친일세력과 그 후예들에게 ‘친일행위의 면죄부’를 줄 뿐 아니라 애국자이자 건국 공로자로 만들어주고 있으니, 뉴라이트 교과서야말로 친일세력과 그 후계들에게는 가뭄 끝에 단비가 아닐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우파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이자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백범 김구조차 대한민국 건국(분단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건국 공로자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반국가사범이 되고 만다.

 

결국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의 건국절 주장은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줄 뿐 아니라 이들을 대한민국 역사 발전의 주체로 선양함으로써 “쥐구멍에 홍살문을 세우는” 격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조선총독부로부터 대한민국이 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위험한 논리를 제공할 수 있으며, 반공과 자본주의 수호라는 명목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또 다시 낡은 시대의 색깔론과 국시론(國是論)으로 후퇴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정도면 ‘대안 교과서’가 아니라 대안 없는 ‘위험한 교과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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